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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의 생각

2013 성서한국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2013 성서한국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과연 성경은 이렇게 다니엘을 가르치는가?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바빌론 제국 같은 시대, 환관 아닌 다니엘처럼
성서한국 전국 대회 "같이 하나님나라와 청년 공동체"…교회 청년부‧개인 등 940여 명 참석

데스크 승인 2013.08.08  18:10:32 이규혁 (goodron)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답답해서 왔습니다." 성서한국 전국 대회 참가 이유를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학생 오 모 씨(22)가 답했다. 오 씨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여러 교회 모임을 나갔지만, 갈증이 난다고 했다. 사회문제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교회서는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고 했다. 대안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이 모 씨(30)는 처음 대회에 참가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제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했다. 대학원생인 이 모 씨(28)는 홀로 밤늦게 대회장을 찾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느라 늦었다 했다.
 
▲ 2013년 성서한국 전국 대회가 8월 7일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열렸다. 첫날에만 940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사진은 주 집회 현장(정의관)의 모습. ⓒ뉴스앤조이 임안섭 그리스도인의 사회 책임을 말하는 2013 성서한국 대회가 8월 7일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열렸다. 주제는 "같이, 하나님나라와 청년 공동체"다. 대회장은 둘째 날에도 현장 접수를 위한 발길이 이어졌다. 8월 8일 오전까지 940명이 모였다. 성황을 이루자 조직위는 당황하면서도 반겼다. 2005년 성서한국 대회가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가 될 전망이다. 나들목교회, 서울영동교회, 일산은혜교회 등 18개 교회의 청년부는 자체 수련회를 대체해 왔다. 개인 참가자들은 604명(스텝 참가자 포함)이 찾았다.
대한민국은 바빌론 제국
 
▲ 주강사 김회권 교수는 바빌론 제국 같은 시대, 환관이 아닌 다니엘처럼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임안섭 집회 첫날, 주강사로 김회권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가 나섰다. 바빌론 제국에 맞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주제였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이 바빌론 제국과 다를 게 없다며,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제국을 거부하고 하나님나라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 없는 'ㅅ' 회사는 바빌론 제국과 같다. 임금을 2.7배 더 줄 테니 노조 같은 거 만들지 말고 고분고분 말 잘 들으라고 한다. 사회 각계각층에 뇌물을 준다. 역시 말 잘 들으라고 한다. 느브갓네살의 산해진미와 술을 받아먹으면 바빌론의 폭력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노조 없으면 어때', '사람 좀 죽으면 어때', '어차피 세상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등 바빌론의 환관이 되고, 노예가 된다. 영적 거세를 당하게 된다."

비정규직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김 교수는 "비정규직 시대는 인간을 비굴함 속에 살게 만든다"며, 회사는 노동자에게 비정규직이라는 나락에 빠지기 싫으면 고분고분 제국의 규칙을 따르고 노예로 살라고 요구한다고 했다. 대학에서 근무한다는 조 모 씨는(28)는 비정규직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는 자신을 100만 원 남짓 받는 '을' 중의 1인이라 표현했다. 강의 내용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함께 있던 지인은 "아마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마음 쓰릴 것"이라 했다.

환관이 아닌 다니엘이 되어라

김회권 교수는 참석자들에게 제국의 환관이 아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뜻을 정하고 세계 질서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그 뜻은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기 위해 제국이 주는 불편과 핍박을 이겨 내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압도적인 제국의 질서는 유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제국의 질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친일 인사, 히틀러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제국의 환관 같은 사람들이라 했다. 또한 지배자의 질서에 무너지고 좌절했던 자들이라고 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제국 질서와 호의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쫓아야 한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제국을 넘어 하나님나라로

김 교수는 제국을 넘어 하나님나라가 이뤄지길 희망했다. 그러나 제국의 방식으로 대항해서는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며, 예수의 방식으로 이겨야 한다고 했다. 예수는 로마보다 강한 군대로 제국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몸소 보여 주는 것으로 승리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기독교와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나님나라를 이뤄야 할 교회들이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고 김 교수는 비판했다. 그는 "신학교 3년이 지나면 신학생들이 온순해지고 환관이 된다"고 했다. 교인들도 불의한 교회의 방침을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는 "여러분도 환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경고했다.

김회권 교수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연대할 것을 주문했다. "제국과 일대일로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제국을 향한 가장 큰 저항은 제국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자생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 줄 때 진정으로 제국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 2013년 성서한국 전국 대회 참가자들이 강의 후 기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임안섭
집회 후엔 캠퍼스 곳곳에서 자발적 모임이 있었다. 김회권 교수의 숙소에는 알음알음해서 청년들이 찾아왔다. 그는 "안타깝게도 여러분에게 보여 줄 기독교가 없다"며 삶으로 보여 주겠다 했다. 또한 청년들이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했다. 늦은 밤, 어린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던 여성 참가자를 만났다. 매년 성서한국 대회를 찾는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우리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서한국 대회는 8월 10일까지 이어진다. 성서한국 대회 조직위는 대회 기간 동안 대회 생중계 사이트를 통해 저녁 7시 30분부터 주 집회를 생중계한다.
(자료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819)


 


<복음과상황>,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복음과상황> 창간 17주년 감사예배 및 후원의 밤을 마치고 나서
[0호] 2008년 12월 19일 (금) 11:25:15 복음과상황  goscon@newsnjoy.co.kr
지난 9일(화) 저녁 서울영동교회 교육관 5층에서 이사회와 감사예배 및 후원의 밤이 연이어 열렸습니다. 코끝이 시린 추위 속에도 100여 명이 찾아 주셨고 모임은 예정된 시간을 넘긴 9시 50분까지 이어졌습니다.

  ▲ 100여 명의 참석자들로 예배실이 가득 찼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선식  
 이날 감사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복음과상황> 이사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신임 이사장 겸 발행인으로 김회권 목사(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를 선출했고, 상임이사로 유명종 목사를 선임했습니다. 새로운 발행인 김회권 목사는 <복음과상황>의 지난 역사와 함께 성장해 온 분입니다. 1986년에 결성된 최초의 복음주의 청년 운동단체인 '복음주의 청년연합'(복청학련)의 통일분과 위원장을 역임하며 복청학련 선언문과 강령 기초위원으로 섬겼으며 1991년에 창간된 <복음과 상황>의 창간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습니다.

  ▲ 신임 <복음과상황> 발행인 김회권 목사님 ⓒ뉴스앤조이 김선식  
 상임이사로 <복음과상황>의 경영 실무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 유명종 목사는 연세대 캠퍼스 새벽이슬 담당 목사입니다. 대학시절 연세대 부총학생회장으로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청년 사회선교단체인 새벽이슬을 창립해서 현재 연세대 캠퍼스 담당 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날 새롭게 확대 개편한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한 분들은 이른바 '복상세대'라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복상세대'라 함은 대학시절 복상을 읽고 성장했고, 복상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3·40대를 말합니다. 이사회에서는 월 10만 원 이상 회비를 내는 일반이사를 50명까지 모집하려고 합니다. 현재까지 약 30여 분이 이사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 방인성 목사님(<뉴스앤조이> 대표) ⓒ뉴스앤조이 김선식  
 이날 감사예배는 방인성 목사님(뉴스앤조이 대표)의 인사말로 시작되었습니다. 방 목사님께서는 "뉴스앤조이와 복음과상황을 분리하는 것이 재정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일이지만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하셨고, 서로 분립한 후에도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는 언론으로 서로 연대하면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 가자고 당부하셨습니다.
 
  ▲ 이대귀 간사님(<복음과상황> 편집위원)이 3집 앨범에 실린 '생명'이라는 곡으로 찬양했고, 황병구(<복음과상황>편집위원장) 개사곡 '당신은 고난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다함께 불렀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선식  
 감사예배에서 찬양으로 섬긴 이대귀 간사님(본지 편집위원, 나들목교회 간사)은 3집 앨범에 실린 생명이라는 곡으로 찬양했습니다. '당신은 고난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개사곡(황병구)을 다함께 부르며 진심으로(?) 서로를 축복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를 되새기면서 하나되는 유쾌함을 맛보았습니다.
 
  ▲ 박철수 목사님(분당두레교회·전 <복음과상황> 발행인) ⓒ뉴스앤조이 김선식  
 설교자로 나선 발철수 목사님(분당두레교회, 전 발행인)은 "예수님의 좌파다"는 제목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헤르만 헤셀의 「데미안」을 인용하면서 설교는 시작되었습니다. 좌파는 역사의 진보를 이끈 세력을 일컫는 말로 당대의 종교와 사회 부정·부패에 항거한 예언자들은 그 시대의 좌파들이며, 예수님은 그런 예언자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급진적·혁명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어렵다. 우리가 이런 저런 핑계로 예수님의 말씀을 변개하지 말고 예수님의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자"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감사예배에 이어 2부 희망나눔 시간에는 강경민 목사님께서 <뉴스앤조이>와 <복음과상황> 어제와 오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상 창간 당시 치열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복상이 감당했던 사명을 기억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복음과상황>을 축하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격려사를 맡은 이문식 목사님(산울교회, 이사)께서는 "<복음과상황>이 담론공동체를 형성해서 우리 시대에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강빛나래 자매는 <복음과상황>이 자라날 세대에게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선식  
 이날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던 순서는 독자들의 진솔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준배 목사님은 "복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묵상글도 담아서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좀 더 마음 편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잡지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이어서 독자 소감을 발표한 강빛나래 자매는 복상을 읽는 부모님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복상과 함께 자란 청년이었습니다. 강빛나래 자매는 가장 인상 깊은 기사로 '복상이 주목하는 100인' 중, 박찬주 전 편집장이 기도하면서 사명을 발견하고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하게 된 이야기를 꼽았습니다. 그리고 <복음과상황>이 자라날 세대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각각의 상황에서 각각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많이 발굴하고 알리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 후원이사로 울타리가 되어 주신 복상 1세대 이사님들. 왼쪽부터 이문식 목사님(산울교회), 정현구 목사님(서울영동교회), 강경민 목사님(일산은혜교회) ⓒ뉴스앤조이 김선식  
 듣는 이들의 속을 유쾌하게 해 주는 이야기도 있었고, 애정 어린 따끔한 충고도 있었고,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기도가 끝나는 시각까지 누구 하나 먼저 자리를 뜨는 이 없이 경청했고 축하해 주셨습니다. 추운 날씨에 끝까지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광하 / <복음과상황> 편집장
(자료출처 http://www.goscon.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6559)


참고자료입니다.

예언자적 시사 읽기
 
김회권 목사
2012년 6월 5일 목회자멘토링 컨퍼런스
 
 
 
 
사회자
요새 시중에 우스갯소리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 임기를 마칠 즈음에 교회 장로인데 불교로 종교를 옮겼다고 해서 찾아가는 절이 어디냐면 불법사찰이라고 합니다. 불법사찰을 찾아가는데 거기 그 사찰의 주지가 최시중이라고 하대요. 또 이명박 대통령이 그 사찰을 갈 때마다 꽃을 하나 들고 가는데 미녀화라는 꽃을 갖고 가고, 종종 가끔 가다 타고 다니는 타가 에리카라는 차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럴수도’를 믿는 게 아니냐, 이런 들려오는 저잣거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김회권 목사님께서 예언자적 시사읽기라고 하는 주제로 강연을 해주실 텐데 목사님 소개를 안 해드려도 다 아시죠? 요즘 무림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는데 목사님이 휘두르시는 권법이 회오리 권법입니다. 그래서 회권이에요. 회권. 회오리 권법. 오늘 목사님께서 아무튼 성서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개인적인 실존 속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민하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그러한 내용들을 풀어주시겠습니다. 나오실 때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회권: 
깊은 산속까지 오셔서 멘토링 대회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주제는 제가 많은 강연을 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항상 관심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주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설교 강단에서 시사문제들이 신학적 반성과 숙고 없이 성경말씀을 지지하거나 성경말씀을 정당화할 때 쉽게 동원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동시대의 설교자와 예언자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 하에서 해석해보는 것이 시사해석입니다. 이 시사해석은 전공이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고대 근동의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하나님 뜻이 천재지변과 역사적 정치적 격변들을 통하여 바로 왕들과 지주들과 제후들 지배계급들에게 압박한다고 봤습니다. 하나님 뜻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제후들을 경고하고 왕과 지배층들을 압박한다고 봤기 때문에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동시대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동선을 포착하는 것이 매우 낯익은 일입니다. 그런데 고대근동의 다른 종교의 예언자들에게서는 그 시대의 역사적 격변과 천재지변 등을 통해서 왕실과 지배층, 또는 그 당시의 종교적 권력층을 향해서 경고나 심판이나 위협으로 해석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예가 있긴 있습니다. 제임스 프리차드가 편집한 <안네트>란 책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는데, <ANET> 라는 책, 큰 책입니다. Ancient Near Eastern Text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라는 책입니다. 두꺼운 책인데 고대근동의 여러 종교문서들을 구약성경과 관련된 정도에 따라서 편집한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이집트 예언자들이 기근과 천재지변을 겪어서 왕실과 왕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언입니다. 많아봤자 약간의 엄중한 주의경고를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천재지변, 예를 들어 3년 동안 일어난 가뭄을 가지고 왕의 죄를 직접 단죄하고 탄핵하는 것은 구약성경에만 나옵니다. 15세기 또는 14세기에 북시리아 일대에 있었던 마리라는 작은 왕국에 마리 예언서가 발견됐습니다. 마리 예언서들 또는 마리문서라는 문서에 보면 제사장 또는 예언자적 중보자들의 신탁중계 장면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마리 예언서의 신탁중계 문서에 보면 그 시대의 천재지변, 그 시대의 정치적 격변들, 민중들의 아우성들,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지배층과 왕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독특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감동을 준 사람의 특징은 미가서 3장 8절에 나와 있듯이, 나는 야곱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야곱의 허물, 지배층의 허물을 대담하게 고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영감 받았다는 말은 모든 지식분야에서 백과사전적인 그런 무오성, 그걸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실제로 권력을 가진 왕과 지배층의 죄를 탄핵할 수 있는 도덕적 담력을 영감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영감 받았다는 말은 도덕적 담력, 신학적 패기를 가리킵니다. 백과사전적 무오성, 모든 지식과 모든 영역에서의 일점오류 없는 정보, 그런 통계 수준의 무오성을 담보하는 말이 성경 영감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특별히 지배층과 왕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규탄할 수 있는 비무장 예언자들의 영적인 패기를 영감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정말 제정신으로 하기 힘들만큼 대담한 말은 뒤에 낙인이 붙어 있습니다. 너 홈 아도나이, 라고, 이 말은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마지막에 낙관 찍듯이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너 홈 아도나이, 이 단락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는 말과 너 홈 아도나이가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문두에 나오고, 마지막 끝에 너 홈 아도나이가 붙어 있으면, 그 말은 영감 받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자기 삶의 모든 터전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입니다. 이런 겁니다. 엘리야가 비무장 혈혈단신 예언자가 아합 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3년간의 기근이 당신과 당신 마누라 때문이오, 당신 왕실이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께서 비를 거두신 것입니다, 당신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영감 받은 것입니다. 이때 코 아마르 아도나이,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너홈 아도나이, 이것이 야훼의 말씀이다, 이런 독특한 어법, 이 문장을 갈무리하는 이런 방식은 영감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특징은 그 당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일어났던 시사적 사건을 가지고 지배층과 왕실과 종교권력자들을 무섭게 다그칠 때 영감에 호소했다는 겁니다. 그 근거구절은 미가서 3장 8절,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시사해설은 영감에 가득 찬, 지배층을 두렵게 만드는, 다시 말해서 상류사회 지배층 지주들 악한 제사장들 종교권력자들이 들을 때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압박해오는 거룩한 현존을 대담하게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감 받은 예언자들의 시사해설입니다. 오늘 시사해설은 지금 우리 시대의 포스트모던 탈근대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사람들의 행동거지 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가, 이걸 발견하는 것은 너무 너무 힘든 것이고, 만일 이걸 대담하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예언자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영적대담성과 정곡을 찌르는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파토스와 그런 논리적 명분성이 같이 나와서 딱 연결될 때 이건 예언자적인 시사해석이구나, 이런 느낌이 드는 겁니다. 이건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해석이 예언자적 시사해설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언자적 시사해설을 성경의 전범위에서 찾아 연구를 많이 하다 보면 예언자적 시사해설에 순응하고 근접한 시사해설이 이런 거구나, 하고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예언자적 시사해설이라고 말하면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처럼 코 아마르 아도나이, 또는 너 홈 아도나이, 이렇게는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성경을 쓰는 겁니다. 우리가 코 아마르 아도나이 하면 신명기가 새로 생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코 아마르 아도나이는 직통계시를 받아서 쓸 만큼 하나님에 임의 되었다는 access, 하나님의 근접성,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식을 굉장히 높여야만 쓸 수 있는 말이 코 아마르 아도나이, 너 홈 아도나이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하지만 이런 시사해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특수한 시공간의 맥락 속에 서는 회중에게 전파하는 사람에게 불가피하다는 겁니다. 시사해설은 불가피하다는 겁니다. 왜? 만일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공간에서 정치사회 경제 이런 모든 공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해석할 수 없다면, 옛날 문자 속에 있는 말로만 해석한다면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 그건 성경말씀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과 설교는 다릅니다. 설교는 오늘날 역사의 격변 속에 누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지를 꼭 집어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들은 영적으로 굉장히 충만한 신적추동을 계속 받는 사람이 원래는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겁니다. 원래는, 신적인 압박을 받는 사람이 설교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 7장 10-17절에 보면 아모스가 북이스라엘 왕국의 무야 채플린(?)이었던 아마샤에 가서 설교합니다. 그 당시 잘 나가던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 이 사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에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왕입니다. 50여 년 동안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왕으로써 아주 걸출한 왕입니다. 그 걸출한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제단은 무너지고 말 것이고 당신 곧 박살납니다, 당신 끝났습니다, 엄청 잘 나가는 왕에게 아모스가 그렇게 외치니까 아마샤가 와서 하는 말이, 네 나라 네 고국 남쪽에 가서 밥 먹고 살아라, 했다고 나옵니다. 예언하고 밥 먹고 살라는 말이 같은 말로 나옵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행위는 밥 먹고 사는 행위로써 일종의 생계형 저주남발자입니다. 그 당시 생계형 저주남발자, 아무한테 가서 막 공격을 하면서 돈 좀 뜯어서 사는, 옛날에 아주 타락한 지방언론사 수준의 비리 고발하면서 사진 찍어서 통장서 떼어서 다음과 같은 구좌에 돈 500만원 넣어라, 이런 식으로 하는, 이런 지방신문 아주 타블로이드 판 신문에 공갈협박범에 준하는 예언자가 많았습니다. 그런 뜨내기 예언자가 많았기 때문에 예언하고 밥 먹고 살라고 하는 말은 돈 많은 부호나 지주에게 가서 협박 공갈 치고 나서 돈 뜯어내라, 이런 식으로 들었기 때문에 아모스가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예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사실상 동산과 부동산이 꽤 많다, 우리 집엔 땅이 많다, 그리고 나 공부 많이 했다, 이렇게 자기 실력을 막 말하면서, 내가 <타임>지도 읽었다, 내가 <르몽드>지도 읽었다, 국제정서를 쫙 말하면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닌 것을 안다, 나는 신적압박에 추동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이 먼 데까지 와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면서 자기 예언의 진정성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그때 아모스 1-2장을 보면, 아모스가 약 예닐곱 나라의 국제정서를 완벽하게 통달하고 있는 걸 봅니다. 그러니까 아모스는 절대로 농부, 농투성이가 아닙니다. 아모스가 농사짓는다는 말은 지금으로 말하면 유산자계급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7% 밖에 안 되는 농민의 자리에다 아모스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농사짓는다는 말은 도시에 가지 못한 사람, 이런 뜻입니다. 내가 지금 농사짓는다는 말은 65세 이상 넘었다는 말이고 별 기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만큼 오늘날 농사짓는다는 말은 너무나 역대정권에 의해서 경멸적인 용어로 전락됐습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나 농사짓는다는 말은 나 자유농민 유산자계급 나 먹고 사는 문제 해결된 사람, 이런 뜻입니다. 내가 얼마나 농사지으면서도 할 일이 많은 줄 아느냐? 나는 두보와(?) 타임스를 완벽하게 습득했다, 하면서 아람부터 국제조약을 어기는 사태부터 시작해서 모든 식물 곡물수급현황 그다음에 저 각 나라에 있는 비리들 핵심 사건들, 그걸 쫙 말하면서 이런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왕국들에 벌어지는 모든 참담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북쪽 어느 나라로부터 세계를 보편적으로 다스리는 세계적인 심판국가를 일으킬 텐데 북 이스라엘이 그 세계 적인 심판국가에 의해서 유린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딴 나라로 잡혀간다, 이렇게 막 무섭게 다그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텍스트에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텍스트 의존적인 설교라는 것은 텍스트를 되풀이하는 설교, 제7절은 이겁니다, 제3절은 이겁니다, 소위 말해서 역사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본문만 가지고 설교할 수 있는 자기 충족적 강해설교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철두철미하게 텍스트를 가지고 현시대 동시대의 사건들과 사태의 전면에서 말씀을 적용시켜서 바로 압박하고 회개를 유발하고 통회를 유발하는 식으로 설교한 것이지, 절대로 그 죽어버린 문자를 읊조리면서, 1절과 3절은 분사구문 관계인 거 알겠죠? 4절은 전치사구입니다, 이렇게 본문만 계속 말하는 쉽게 말해서 기계적 본문강해 설교를 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동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적 현장 안에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아우성치는 농민의 피맺힌 절규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대표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그 땅을 빼앗긴 소작인들, 자유농민들 신분에서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의 아우성치는 그 소리 속에 당신의 임재를 대표하게 하시는, 역사 속에서 누군가의 역할 속에 당신을 identify 시키는, 그런 하나님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려운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문 안에만 가둬놓으면요. 하나님은 항상 초월적 중립자입니다. 부자 가난한 사람 죄 많이 지은 사람 교통범죄 어겨서 3만 2천원 짜리 벌금 내는 놈과 불법사찰 하는 놈이 똑같은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초월적 중립자의 위치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초월자 중립자, 그런 그리스 헬라적 신관을 가지고 이 세상일에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초월적 중립상태를 늘 유지하는 아파테이아적인 하나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파토스적인 하나님, 이 세상 누군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하나님, 이 세상의 국지적 현장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말했기 때문에 이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이건 자기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고, 잘못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 대한민국의 시사를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은 본문을 가지고, 즉 성경말씀 역사 속에 살아계셨던 하나님의 현존을 논할 수 있는 설교를 못하는 겁니다. 즉 죽어버린 본문을 가지고, 이 문자만 가지고 몇 장 몇 절의 관계를 계속 읊조려서는 회개가 전혀 촉구될 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당장 오늘 용산사태, 우성사태, 쌍용자동차사태 대구지하철 사태,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사태, 이런 모든 책임을 딱 적시하면서, 이건 당신 책임이라고 말하는 위험한 당파적 발언들, 이런 것들이 매우 예언자적 시사해설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예언자들은 초월적 중립자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역사의 국지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사건 속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매우 당파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 제명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된다는 말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예언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이입니다,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네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네가 구문을 구성한다, 동사의 신 텍스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닌 걸 내가 알고 있다, 네가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네가 대담하게 왕과 지배층과 지주들에게 죄를 탄핵하는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다는 말을 내가 알고 있다, 모세도 똑같은 말입니다.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모세가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모세가 문장 구성에 어려움이 있고 연합구문도 구성하지 못하고 늘 단문밖에 구성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말할 줄 모른다는 뜻은 내가 도덕적 담력을 가지고 패기 있게 무찌르는 말을 못한다, 그걸 누가 잘했습니까? 아론이 잘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 같은 무서운 사람을 만나면 전엽질적인 축소지향적인 영혼이 돼서, 너 누구냐? 이렇게 물으니까, 나... 나... 이렇게 말을 못하는데, 그때 아론이 나 모세다, 앞쪽을 쳐 준겁니다. 모세가 두 번째로, 어... 어... 내가 할 말 있는데, 우리 하나님 야훼가 내 백성을 보내래, 뭐라고? 아론이, 내 백성을 보내래! 이렇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해서 모세가 조금씩 된 겁니다. 모세가 말을 못한다는 말은 도덕적 패기, 영혼에 타전할 수 있는 강력한 퍼포먼스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말을 못한다 할 때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너에게 편만십을(?) 가르쳐줄게 구문을 가르쳐줄게, 너에게 분사구문과 전치사구를 가르쳐줄게, 라고 말하지 않고, 그래 내가 너에게 함께 하여 네 얼굴을 놋 성벽처럼 말하게 해주겠고 엄청 대담하게 만들어주고 굳센 방백처럼 만들어줄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강단에 서서 지금 죄 지은 유력자들, 알파치노 같은 대부들, 어제 사람 14명 죽이고 와서 성호를 긋는 그런 악당들의 죄를 고발할 수 있는 대담한 능력이 모자란 걸 말할 줄 모른다, 알파치노 <대부>라는 영화를 보면, 열 명 쫙 쏘고 나서 어떻게 해요? 앞줄부터 앉아서, 로스트라 빠떼라, 하면서 죄를 용서구하잖아요. 교회의 대부, 사회를 움직이는 대부급, 열네 명씩 죽이고 그다음 날 미사를 은혜롭게 드리고 가는 살인적인 대부들이 굉장히 우리 교회에도 많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대부들을 딱 세워놓고, 어제 총질한 사람 나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지어다, 총을 놓지 않으면, 이렇게 막 무섭게 다그치는 걸 보고 말한다, 또는 설교한다, 우리는 나베 동사에 히피림, 힌 나베, 힌 나베라는 말은 나베 동사에 히피림(??), 강력하게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말할 줄 모른다, 힌 나베, 나베 동사에 히피림이 힌 나베에요. 그러니까 청중들이 우리에게 알현하러 오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아무리 잘못해도 청중은 꾸역꾸역 교회로 몰려와요. 대한예수교장로교나 조계종은 아무리 타락해도 회중들은 끊임없이 와요. 왜? 우리가 타락하는 속도보다 일반 사람이 죄 짓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가 잘못 돼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에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니까 결국 종교는 불황을 영원히 몰라요. 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간격은 너무 크기 때문에, 심지어 목사님과 장로님이 싸움을 해서 10년 동안 사고 친 교회도 4천명이 늘어요. 이 말은 대한예수교 조계종이 화투를 치다가 몰래카메라에 찍혔지만 그래도 스님들이 머리 깎고 쑥색 옷 입고 왔다 갔다 하면 또 거룩하게 보여요. 또 시주 갖다 바쳐요. 사람들은 너희들이 타락했지만 내가 더 갈증이 많기 때문에 나는 교회 간다, 하는 마음으로 교회 오는 거예요. 여기 오는 사람 모두가 우리 담임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으러 가야지, 그런 사람보다는 자기 영혼의 죄가 너무 누적되어서 일종의 치사량에 거의 가까운 독을 품고, 크롬과 비소 같은 걸 품고 죽겠다고 오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죄를 탄핵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주면 참된 의사가 되는데, 그런 무고한 죄책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이 시대의 죄와 그들의 죄를 연결시켜서 해명해주지 못하면 이 시대의 죄는 하나도 처리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 암에 걸린 사람에게 마이신을 계속 주는 설교를 계속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오늘 우리가 부동산 투기를 했거나 뇌물을 했거나 이런 모든 죄를 범했던 사람들을 한 번 만 딱 치면, 아이고 나를 위한 설교네, 하고 전부 다 나자빠질 거예요. 대부분, 그래서 우리가 그런 속담 있잖습니까? 나는 당신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즉시 런던을 떠나라, 그랬더니 엄청난 사람이 런던을 떠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날 우리가 나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즉시 압구정동을 떠나라, 이렇게 하면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우리 사람들의 죄가 너무 누적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 듣고 싶어서 오는데, 그 죄를 지적하려면 시사문제를 반드시 지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시사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저 옛날 텍스트를 가지고 지적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효과는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역사의 한복판에서 죄를 단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지 못하면 여기와 있는 우리 성도들, 교회가 비록 잘못됐지만 그렇게 교회로 몰려들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의 죄를 우리가 고칠 길이 없고, 그들의 영혼에 죄사함의 복음을 선포할 길은 영원히 없어진다는 것이죠. 죄가 예언자들의 시사, 내지는 설교의 핵심이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시사읽기는 예언자의 설교핵심이었는데 이들은 고대에 그들이 전승받았던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읊조리지 않고 그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대적자이고 누가 하나님께 후원받고 있는 자인가를 판가름해서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예언자들의 시사해석의 목적은 지배층의 죄를 단죄함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왕실과 지주와 악한 종교권력자들과 거짓예언자들의 죄를 무섭게 다그치기 위해서 시사해석을 했습니다.
 
또 다른 게 있습니다. 또 다른 시사해석, 이런 이스라엘과 유다의 내부의 문제를 겨냥하자며 이렇게 말합니다. 두 번째로 예언자들이 국제정서에 대해서 해박한 이해를 드러내는 경우는 딱 한가지입니다. 외국동맹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즉 동맹세력에 의지하지 말라, power politics, 힘에 의존하는 동맹세력, 힘에 의존하는 국제정치에 의존하지 말라, 정의를 세우고 공평을 세운 이것이야 말로 국방의 기초단위다, 정의로운 통치, 의로운 재판,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 이것이 있는 곳은 난공불락의 시온성이다, 그런데 이사야 30장에 있는 것처럼 네게보 사막에서 짐승들이 금은보화를 싣고 이집트로 무기를 구매하러 가는 행렬을 보면서 예언자 이사야가 이집트 네게보 짐승에 관한 신탁이라는 말을 하면서 쭉 나오는 말을 볼 때, 동맹정치, 이집트의 신식 무기를 사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막아보려고 하는 유다의 끊임없는 실수를 국제정서를 쭉 예언하면서 비판하는 겁니다. 예언자들의 모든 심판의 주목적은 무엇입니까? 국제정치 변동에 춤추지 마라, 다시 말해서 동맹을 맺으면 앗수르 군대 바벨론 군대와 맞서볼 수 있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인 바벨론과 앗수르와 한판 맞짱 뜨기 위해서 작은 소왕국들의 동맹을 획책하지 말라, 또는 이집트의 감언이설을 믿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입니다. 이집트의 감언이설을 믿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의 작은 왕국들이 동맹을 믿지 말아야 한다, 왜? 앗수르와 바벨론은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몽둥이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에게 타격당하고 매를 맞고 고통속에서 새롭게 되는 것이야 말로 민족의 자존이다, 국가적 갱생의 길이다, 이런 메시지를 했을 때, 대개 국제정서에 관한 많은 발언들은 거짓된 동맹세력에 대한 경고입니다. 많은 외국에 관한 예언들은 한 마디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런 큰 틀에서 우리가 시사문제를 보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텍스트만 가지고 늘 공부해선 안 되겠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텍스트는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이고 하나의 문법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만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본문을 읽어 놓고, 지금 존재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안하면 그건 성경텍스트를 안 읽은 겁니다. reading의 반대가 unreading입니다. 분명히 악한 지배자와 통치자의 죄를 고발하는 예언서를 읽어놓고, 지금 특정신문사설을 읽으면서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용인하고 그걸 지지한다면 그건 예언서를 안 읽은 것이 되는 것이죠. 예언서를 읽는다는 말은 그 예언서의 정신과 예언서의 논법을 가지고 오늘 날 우리 시대에 악과 죄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을 우리는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사읽기는 결국 뭡니까? 성경읽기의 두 번째 단계에요. 시사읽기는 성경읽기의 두 번째 단계이므로 우리가 시사문제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 유린되고 있는 현실을 무조건 승인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성경 본문의 문자적 해설을 본문충실한 설교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현실문제를 전혀 말하지 않는 철저한 초월적 무당파성을 견지하는 것, 이걸 우리는 아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 예언자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시사문제를 잘 해석하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찾지 마시고요. 누가복음 12장 54-57절에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립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구약예언자들 시사읽기의 총완결판입니다. 예언자 시사해석의 총완결자이신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2장 54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이 외식하는 자라는 말뜻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바깥에서 식사하는 사람들, 아닙니다. 자기를 실재 아닌 사람처럼 꾸미는 것,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예언자적 시사읽기, 바로 이것이 이사야 5장 12-19절 말씀의 예수님 버전입니다. 이사야 5장 12-19절은 이겁니다. 네가 말한 하나님 하시는 그 것 좀 보여 다오, 하나님 일한다며? 하면서 계속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역사 속에서 보여 달라고 소리치니까 이사야가 그 자기의 적대적 청중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말을 다시 조롱하여 되받은 말을 이사야 5장 12-19절에 말합니다. 속히 네가 말한 하나님 그 일 좀 보여다오, 속히 네가 말한 하나님의 계획 좀 성취되게 해봐, 라고 했습니다. 시대를 분간하는 것, 이 시대가 결단할 때인지, 이 시대가 다리를 뻗고 안심하고 잘 때인지, 자기를 축소하고 응축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인지, 때를 분간하는 것, 도키마제인, 도키마조, 분간합니다. 도키마제인, 카이로스를 도키마제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있는 때는 무슨 때입니까? 분단조국이 된 채 67년 째 되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때는 분단조국 67년째이고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워진 시기, 방송기자들이 데모한 지 수개월째가 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교회 상층부가 많이 썩어서 사회의 지탄을 받은지 오래된 때입니다. 그런데 조계종마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버려서 스님들이 타락해버렸습니다. 이제는 기독교 많은 사회적 상층부들이 민중의 희망이 되기에는 지쳐버린 때입니다. 그런 때, 때를 분간하는 것입니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지금 옳고 그른 것을 지금 우리 시대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텍스트에 의존해서 내가 해야 할 주체적 판단의 몫을 옛날 텍스트를 한두번 인용함으로써 그 책임을 면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시대를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히포크리타이 토 오포로소폰, 테스케스 카이 투 우라누, 오호다티 도키마제 톤 카이론 데투톤 포스, 이겁니다. 도키마제 톤 카이론 데투톤입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여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페이파테인, 어떻게 행동할지를 우리가 분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땅을 사야할 때인지 땅을 팔아야 할 때인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종류의 결단과 순종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 석유로 유지되는 탄소연료, 매연기관, 이거 오래 못 갑니다. 지금 자동차를 만드는 이 공장은 모든 시설통제가 필요 없게 됩니다. 저 고층 아파트 타워팰리스에는 노숙자외에는 살 사람이 없게 됩니다. 왜? 엘리베이터가 가동이 안 되는 때가 옵니다. 아파트는 27-35년 사이에 반드시 부서야 합니다. 37년된 아파트에 금이 가고 철근이 다 부서지고, 특히 노태우 정부 때 지은 분당아파트는 엉터리 모래가 들어가서 철근이 한두개씩 빠져서 굉장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분당에 계신 분들은 빨리 빠져나오셔야 해요. 그 아파트 부실 아파트 소문 다 났어요. 복부인들에게 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아파트가 35년째 시효인데 34년째 아파트를 사면 감가삼각이 다 끝나서 이미 재산가치가 없는데 그걸 사면 안 되잖아요.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살 분도 없겠지만 혹시 사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분당아파트를 사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때를 분별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자기를 엄청 선전해야 할때인지, 엄청나게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 100주년 기념을 하고 다시 여의도에 모여 상암경기장에 모여 52억을 써야 할지, 아니면 스님들 화투치는 걸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지내야 할지, 스님들 화투치는 걸 보고 얼마나 목사님들이 도덕적 우월감을 그주일에 많이 가졌는지, 그래도 우리는 화투는 안 쳤다, 이런 식으로요. 우리 목사님들 한주 내내 웃게 만들어준 머리깎은 스님들의 놀랍고 귀여운 자태, 통합측에서 이번에 100주년 기념대회를 엄청나게 크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목사님들이 지금이 어느때인데 상암동에서 다시 50억쓰면서 할 거냐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 희년 815광복대회를 했습니다. 거기에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거기에 50만 명 왔다고 선전했죠? 50만명 전혀 안 왔습니다. 10만 명도 채 안 왔습니다. 제가 현장에 직접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 할머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왜 왔는지를 모르는 할머니들이 왔는데, 여기가 뭐하는 데냐고 저한테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수십억 들었습니다. 헛돈이 수십억이 들었습니다. 때 분별을 전형적으로 하지 못하는 철없는 종교권력자들의 소행입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말은 지금 우리 기독교가 자기 응축모드로 낮은 포복모드로 가야 할지, 비상하는 모드로 가야할지, 선전모드로 가야할지, 없는 모드로 가야할지, 때를 분별해야 하는 거거든요. 이 때분별이 예언자들의 전문영역이었단 말이에요. 이런 예언자적 시사인식이 고전하면(?) 그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매우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본문 앞을 잘 보세요. 35-48절을 보면 열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열처녀 비유가 이 앞의 본문이에요. 도적같은 신랑이 온다니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때를 분별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신랑이 오기 직전에 열처녀가 기름이 딱 떨어져가며 기다리는 힘이 달릴 때 예수님이 오셔서 조금 만 더 기다리라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 거예요. 이렇게 신랑이 오는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신랑의 도래를 맞이하라,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의 때를 기다리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시국인식입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너무 잠정적이고 유한적이며 종말적인 걸 깨닫고 세월을 아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똑같은 도키마제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합니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 이게 중요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의미를 redum(?),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에 적법한 행동을 할, 지금 우리가 몸을 구부릴 때 몸을 구부리고 내가 비상해야 할 때 비상하는 걸 시간을 아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몸을 구부려서 낮은 포복을 해야 할 때, 낮은 포복을 하는 걸 시간을 아낀다고 말합니다. 내가 낮은 포복을 해가지고 철조망을 뚫어야 할 때, 그 몸을 서서 라틴댄스를 추고 가면 총알이 우리 온몸을 관통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6절에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엑사고라조이 톤 카이온, 이때도 카이로스가 쓰였습니다. 엑사 라는 말은 out of 라는 말이고, 아고라조이는 아고라에서 하는 행동입니다. 아고라조이는 사다는 뜻입니다. 엑사는 되사다, 엑사고라조이, 이 말은 시간을 되사다, 낭비했던 시간, 즉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고 분별없이 지냈던, 흥청망청 지냈던 모든 시간을 종말론적인 시간의 유한성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이 접근중이기 때문에 지금은 성도가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시간을 아끼는 것이고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을 되사는 것이다, 방탕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시간을 되사는 길은 거룩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내가 중독에 빠져서 속박상태에 빠져 살았어요. 그 사람 시간을 되사는 건, redum 하는 건 자유롭게 중독상태가 아닌 주체성을 충분히 발휘해 사는 거예요. 그게 시간을 아끼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지금 2012년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동선이 어디있는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이 어디 있는가를 자세히 주목하여 그걸 추적하는 것이 시사읽기의 가장 중요한 단계 과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이 시대의 악행을 누가 하는지, 누가 아우성을 치는지, 정의의 희생자가 누구인지, 불의의 희생자가 누구인지, 누가 지금 부당한 공세로 부당한 경제적 이익으로 엄청난 천문학적 재산을 불리고 있는지, 그걸 다 보아야 합니다. 그런 걸 알고 나서 설교를 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너는 왜 복음을 말하지 않고 쓸데없는 정치를 말하느냐는 오해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시사문제를 잘못 건드리면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는 종교와 달라, 정치는 복음과 달라, 라고 양도논법을 가지고 정치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 자체를 파문의 조건으로 삼아버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큰교회 부목사님 중에서 무슨 광주사태 한 번 언급하면 그다음 날 바로, 요새는 감사장도 안 옵니다. 문자로 옵니다. 가! 이렇게 문자로 옵니다. 혹은 친북발언과 유사한 발언, 6.25전쟁 때 이제 우리가 북한을 증오하는 6.25 상기는 그만합시다, 이제 남북한 모두가 죄를 동시에 회개합시다, 우리가 같이 죄를 범한 형제들입니다, 누가 가인이고 누가 아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가인이고 우리 모두 아벨입니다, 이렇게 설교하고 나면 바로 문자가 옵니다. 친북좌파 빨갱이 났네, 하면서 바로 가야합니다. 이런 교회는 강남 S교회에서 직접 있었습니다.
 
여러분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오늘날 문자로 정착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약간 장난질하듯이 매우 series 한 의미 없이, 진지함 없이 본문의 관계를 밝히는 핏기 없는 본문해설하는 것은 설교 아니에요. 지금 오늘 이 회중들, 선의 역할 악의 역할을 구별하고 분별하고 지금 어떤 사람에게 격려를 어떤 사람에게 경고를 어떤 사람에게 심판을 그걸 대변하는 걸 설교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설교가 어렵겠죠? 이렇게 해도 설교를 잘 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렇게 하는 데는 안수 받는 데는 아마 이렇게 할 겁니다. 아이고 죽었습니다, I am a baby, 하면서 나는 입술이 뻣뻣한 자입니다, 이렇게 말할 텐데 설교의 개념이 원래 이것인데도 그걸 모르고 안수 받는데 막 꽃다발 사서, 가톨릭 신부님 안수 받는 날 온 가족이 통곡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완전히 장례식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데, 우리 개신교 목사님들 특히 통합측 목사님들은 막 좋다하면서 온집안 사돈의 팔촌까지 와서 소갈비 막 뜯고, 안수 받는 날 얼마나 잘 먹어요? 이게 이해가 안 돼요. 제가 안수 받는 날 우리 온 집안이 비통에 빠졌습니다. 김회권이 드디어 형편 없는 목사의 길로 나섰다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물론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아 잘한다, 큰놈났다, 이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9급공무원을 할 걸, 저놈 어쩌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종교에 빠져서 저 짓을 하나, 이게 우리 고향 사람들의, 지금도 제가 고향에 가면 저를 봅니다. 혹시 이 사람 잘못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언자적 시사해설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으로 거기 앉아 있는 청중에게 도전하고 압박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북돋는 걸 지금 이 사람에게 한다는 걸 생각할 때 이건 성령께서 매순간 강단에 세울 때 충만한 영으로 미가서 3장 8절에 그 본문이 나에게, 이사야 50장 4-5절의 그 말씀, 나로 곤핍한 사람들을 지탱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내 귀를 깨우쳐주셔서 곤핍한 영혼을 말로 위로할 뿐만 아니라 내 수염을 뽑고 내 등을 치는 사람에게 내 등을 맡기는 이런 무섭고 위태로운 사역이 바로 예언자 사역인 걸 여러분이 알게 돼요. 이렇게 되면 기도가 엄청 많아지겠죠? 여러분 무슨 호크마 헤세데스 급하게 보고 와서 올라가서 할 수 있겠어요? 딱 보고 와서 오늘 내가 이 설교를 했을 때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고 나를 개인적으로 공격할 것인가? 그 생각이 들겠죠? 그게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예언자적 반열에 드는 설교자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내공이 안 쌓인 사람은 절대로 따라하면 안 됩니다. 안 쌓인 사람이, 특별히 목사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그냥 바로 서서, 김회권한테 들었으니 한 번 해볼까? 하면서 오늘 여기 분명히 죄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기 제 사분반에 앉은 사람은 위로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사분면 사사분면 나눠서 공격하면 바로 멱살잡혀서 화장실에 가서 코피흘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 아주 성령의 감동이 와서 정말로 가슴 아픈 설교를 했을 때, 제가 98년 99년에 미국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한 80여명의 교우들이 나왔는데 이민 온지 40년 30년 20년 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물론 전부 다 박사학위를 가졌고 대개 의사 사업가 박사과정 마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뉴욕에서 돈을 벌어서 프린스턴에 와서 국무총리 공관 같은 한 60만불짜리 집에 사는 분들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신림동 출신인 제가 80년 야성을 가지고 설교를 하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매번 성도들은 저에게 꽃다발을 보냅니다. 그 꽃다발 밑에는 돈이 들어 있습니다. 돈 먹고 조용히 하라는 뜻입니다. 3천불 씩 현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그 집안 동네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설교 더 이상 그만하게 하려고, 제가 설교를 이렇게 했습니다. 요한게시록 18장을 설교하면서 여러분 미국은 천당이 아닙니다, 여기는 999당도 아닙니다, 미국은 바벨론 음녀와 같은 곳입니다, 미국에 사는 여러분은 그 못 사는 조국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으로 한때 여러분이 구원의 안도감을 누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아닙니다, 미국은 세게에서 가장 혐오 받고 있는 나라이고, 미국은 1960년대부터 85년까지 13번 남아메리카를 침략했고, 미국은 2천만명 이상의 아메리카 인디언을 다 죽였고, 미국은 1200만 노예시장의 모태였고, 이걸 하면 아, 못 듣겠습니다, 제발, 그런데 그 중 이화여대 경기고를 나온 분이 반발합니다. 그럼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그분은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저한테 줄 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주 크게 성공한 분, 일종의 프린스턴의 터주대감 같은 분이 저에게 돈을 계속 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돈을 제 아내와 눈물로 편지를 써서 돌려줬습니다. 이렇게 성도님 하나님 말씀의 종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참 별 목사 다 보겠네, 다 받드만, 저는 별 목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3-4절 읽어볼까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하는 날이 옵니다, 그리고 나서 1년 반만에 진짜 제 설교를 조심해야겠다고, 큰 성 바베론이 무너졌습니다. 127층 빌딩이 무너져버렸어요. 제가 그 설교를 마치고 나서 1년 4개월 만에 그게 무너지는 걸 보고, 무너진다는 설교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분들이 지금도 저한테 돈을 주면서 저를 매수하려고 했던 성도님은 지금도 제 없는 사이에 아주 엉터리 목사님을 데려다 놓고 바로 장로가 됐더라고요. 노회도 물론 안 거치고, 지금도 장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미국을 공격하면 미국의 삶의 기초가 매우 비복음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미국 사람 시민들 모두는 엄청 상처를 받고, 내가 30년 동안 미국에서 일구었던 모든 행복의 기초를 당신이 뭔데 허물어뜨리느냐는 공격을 합니다. 저는 그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미국이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천국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제 진심을 언젠가 깨달을 날이 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천국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중국 러시아 아무도 천국이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어떤 나라도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천국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천국 또는 999당에 산다고 하기 때문에 저는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공격을 받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체가 여기를 천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겁니다, 이렇게 제가 설득했습니다. 물론 그 뒤 이분들의 믿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거 보십시오. 옥한흠 목사님이 생애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성도의 얼굴을 보고 정말 이렇게 설교해야 하는데, 그 얼굴이 번쩍 또 다른 텍스트가 돼서 나의 가슴을 위축시켜서 그 말을 못했다고, 은퇴하고 나서 힘도 없으실 때 막 그말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만일에 그분이 은퇴하시지 않고 사랑의 교회 강단에서 그런 말씀 한 번만 하고 옥목사님이 멱살 한 번만 잡혀도 교회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예언자적 설교를 하다가 멱살잡혀서 코뼈가 부러져서 안경테가 깨어졌다, 이건 교회사 책에 나올만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얼마나 충만해야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애매모호한 그룹이 교회 회중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그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본문을 보면 에스겔 예언자는 아무리 설교해도 에스겔 14장 보시면 절대로 회중이 마음을 열지 않는, 그런 회중에게 난민 목회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어느 날 나에게 찾아와서 이것이 야훼의 뜻인지 한 번만 물어봐주게 말했는데 내가 야훼의 뜻을 말해준들 우상을 품고 있는 그 장로들이 과연 내게서 들려온 신탁의 메시지를 듣겠는가, 에스겔 14장과 20장에서 거짓신앙 우상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 뜻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 뜻이 온전히 매개되겠는가? 중계되겠는가? 라는 탄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겔 같은 예언자는 한 번도 사실상 회중에게 영접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가시와 전갈 같다고 했습니다. 에스겔과 에스겔 회중은 끝까지 가시와 전갈 속에 있는 회중, 목회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가시와 전갈 같은 회중을 경험하기 보다는 너무나 아멘을 잘하는, 목사님들 공중에 부양시켜 버리는, 저 승천 위에다 올려버리는 그런 회중들 사이에서 목회하기 때문에 얼마나 자기가 부족하고 결핍된가를 모릅니다. 실제로, 그냥 공중에 떠 있습니다. UFO가 따로 없습니다. 목사님 자체가 UFO입니다. 붕 떠가지고 사실은 100명 교회 목사님만 봐도 어디 모르게 아우라가 잡혀 있는데, 100명 교회 목사님도 그 교구 안에서는 최고 왕이고 어떤 제후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인구가 100명밖에 안 되지만, 목사님들이 설교하고 성도들이 아멘 해주니까 결국 뭉게구름 타고 올라가다가 서서히 올라가다 비행물체처럼 돼서 현실과 분리됩니다. 결국은 목사님들이 가시와 전갈처럼 자기 메시지를 대적하고 나사렛 설교를 듣고 나사렛 지주들이 예수님 멱살을 잡고 낭떠러지까지 건너가서 그냥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려 죽여버리려고 했던 참담한 고난, 그걸 우리 목사님들이 조금이라도 경험해본다면, 한 번이라도 그런 위험한 사태의 반발을 경험해봤다면 그는 진짜 성경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고, 그는 목회자의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그 당대의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다가 오늘 이사야 61장 1-4절이 오늘 나사렛 사람 모두에게 당장 응했습니다. 무한 순종의 부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드바라 아도나이, 여호와의 말씀이 지금 여러분에게 임했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 은혜를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이 듣는 여러분에게 무한한 부담을 주면서 오늘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요셉의 아들 예수님의 경악스러운 말을 듣고 나사렛 사람이 예수님을 잡고 낭떠러지로 데려가서 예수님을 잡고 밀쳐버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 아모스 이사야 에스겔 등이 당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설교가 너무 너무 엄숙한 일이고, 성령으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은 강단에 설수가 없고, 오늘 우리 시대 민중들의 삶속에 일어난 죄와 주님의 강대상에서 만나야하기 때문에 이 싸움은 처절한 영적싸움의 현장이지, 양복입고 폼 잡을 수 있는 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너무나 우리 시대의 죄가 깊고 하나님 앞에서 이 죄가 심각하기 때문에 그 죄의 본질과 하나님의 엄숙한 진노의 정당성을 본문을 통해서 말해야 하기 때문에 비껴갈 수 없기 때문에 설교행위의 엄숙성, 그건 너무 대단하다는 겁니다. 목사님들께서 에스겔처럼 예수님처럼 특정한 본문을 가지고 오늘 이 본문이 여러분에게 임했습니다, 라고 소리치는 이런 식의 설교행위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다음날 낭떠러지까지 끌려가서 붙들려 어찌될이지 모르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올라가야 하고, 그 전에 나는 입술이 뻣뻣한 사람입니다,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라고 하나님께 진짜 거짓겸양이 아니라 약간의 위축된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야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하나님께서 과감한 말씀의 능력을 주실 수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전파하는 행위가 내가 잘 아는 분야야, 내가 노래 한 자리 부르는 것과 같아, 내 개인기 보여주는 것과 같아, 라고만 한다면 그건 제가 볼때는 성경적인 맥락의 예언적, 고전적인 의미의 설교행위가 아니죠. 제가볼대는 디모데도 아마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않게 처신하라는 말을 들은 걸 볼 때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는가 싶어요.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도 결국 바울의 편지를 가만히 분석해보면 나이가 어린 주니어 목회자로써 주니어 바울로써 상당히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을 권하고 경계하고 책망하라는 말을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에서 하거든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4장 2절까지를 보면, 말씀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경책하며 경계하며 격려하며, 이런식으로 하나님 말씀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갈때까지 말씀을 읽는 것과 경계하는 것과 경책하는 것과 격려하는 것을 계속하라는 말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해주거든요. 그런데 디모데가 말씀으로 권면하는 그 일, 회중의 죄를 고발하는 그 일은 심약한 디모데에게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디모데가 하다가 안 돼서 위궤양 같은 게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디모데더러 포도주를 아침에 꼭 먹어라, 위가 아침에 찬성함이라, 아침에 포도주를 통해 속을 데워라 하면서 그런 권면을 받습니다. 이걸 볼 때 디모데의 설교사역도 똑같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설교사역은 4세기 교구때 암브로시우스라는 사람이 가장 크리스천 로마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황제 앞에 데살로니가 사람을 학살한 죄를 물어서 성찬식을 하지 말라고 눈속에 세워놓았던 이런 기상이 교부들때까지 이어집니다. 제롬이라든지 크리소스톰 까지 쭉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황제와 제후의 국가공무원으로 성직자가 바뀌면서 이런 모든 예언자적 기상, 그시대의 지배층과 왕과 제후의 죄를 고발하면서까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후퇴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아예 그런 전통적인 교회사의 예언자적 사역과 설교사역의 중심에서 많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 날 누가 많은 사람을 모으게 하는가가 마치 성경과 설교의 전범처럼 통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예언자적 시사 읽기의 핵심은 본문주의에 빠지지 말고, 그 본문을 가지고 본문의 빛 하에서 오늘 우리시대의 하나님 말씀으로 재해석하고 분석하고 회중을 책망할 사람은 책망하고 격려할 사람은 격려하여 의로 바로 교육할 사람은 바로 교육하고, 이런 일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적 시사읽기의 전형이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또 질의응답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 앞에서 설교 선포사역의 엄숙성과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의 두려움성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우리를 응당 환영하는 회중들 앞에 말씀을 대언하지 않고 가시와 전갈 같은 회중들, 죄를 일삼으면서도 죄를 회개할 마음이 없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메시지를 전하면서 하나님 우리가 위축되기 싶고 우리가 이 과업을 회피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무한한 용기로 성령의 능력으로 회중을 진짜 살려내는 죄를 지적하고 경책하고 경계하여 영혼을 소생케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여기 온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런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사회자 
열변을 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토론시간인데요. 30분 토론하고 그리고 오늘은 강사이신 목사님만 나오셔서 질의응답하지 않고, 김영봉 목사님, 전인수(?) 목사님 박은수 목사님 이찬수 목사님 그리고 김회권 목사님 다 패널로 나오셔서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세 가지만 압축해서 이야기를 나눠주시면 좋을 듯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영감 받았다는 것이 불의한 권력에 마주서는 신앙적인 패기라는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날 이런 불의한 권력에 마주하고 종교권력을 비판하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런 부분을, 꼭 교회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폭넓게 상징적인 의미에서 같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번 나눠주셨으면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날 역사와 현실이 설교자로써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 라고 하는 그런 부분이고, 두 번째가 그렇고요. 세 번째는 사실 예언자들은 범인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역사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구라고 하는 땅덩어리에 살지만 지구는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지만 아무도 이를 체감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그 움직임의 거대한 축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축의 미묘한 움직임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존재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미묘한 변화의 축을 감지했었던 예언자들의 영성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이렇게 세 가지를 주제로 해서 같이 토론해주시고 그다음 끝나고 나서 여섯 분 모시고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오신 분들 중 교단이 합동측이 제일 많은 걸로 알고 있고요. 대부분 복음주의권의 목회자 목사님들이 오신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두란노서원에서 한 9년 있었고 <뉴스앤조이>에서 2년 <기독교사상> 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한 10년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복음주의권과 애큐매니컬 진영의 여러분을 만나고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논의하는데, 뿐만 아니라 기독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가톨릭이나 불교에 관련된 분들을 만나면 세 개의 종단에서 만나면 그래도 기독교에는 희망이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기독교 안에서 감리교 장로교 서로들 그래도 장로교는 희망이 있어, 감리교는 더 이상 구제불능이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거의 내부 안에서 자신들을 보고 들여다보면 우리 교단이 희망이 없어, 이런 식의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 멘토링 하는 컨퍼런스 같은 경우도 거의 복음주의권 목회자님들이 오셨지만 나름대로 생각하는 교회현실도 있을 것이고, 목회 현장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는 물론 김회권 목사님께서 발제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질의응답이 있겠지만 나오신 분들 모든 분들에게 주제와는 상관없어도 괜찮고 궁금한 부분들을 질문해도 되겠습니다. 토론한 것 중에 혹시 간략하게 두세 조만 발표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없으십니까? 그러면 강연이 너무 완벽했다는 증거인지, 신앙적 패기를 보여주시죠. 영감을 받으셔서, 이렇게 요약해서 얘기할 실 분 없으십니까? 마이크 좀 드시겠습니까?
 
 
조아론 
총신대 신대원 2학년 조아론입니다. 예언자적 설교를 하라는 것이 여러 함의적 뜻이 있어서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본인은 신적압박을 느껴서 시사적인 문제를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예를 들어 박원순 시장이 후보로 나오는 건 사탄을 따르는 자를 추종하는 것이다, 그게 그분에게 있어선 신적압박을 느껴서 설교강단에서 예언을 한 겁니다. 어떤 분은 용산사태는 이명박 정부가 분명히 잘못한 행동인데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느냐? 언론에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데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이건 분명히 성경에 비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적 프레임이 다르면 본인의 진정성과 다르게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강의를 들으면 각자 분들이 느끼기에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결론이 다른 예언적 설교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석적 프레임 같은 것, 그런 부분이 정치적 성향과 다르게 고정된 부분이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한 김회권 목사님께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회권 
예레미야 23장, 신명기 13장, 신명기 18장, 에스겔 14장이 거짓예언자와 참예언자를 분별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맞습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신적압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편한 묵시와 자기 마음의 상상에서 나온 거라고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동시대에서는 예레미야가 패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BC 582년에 철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갔던 망명객들에 의해서 죽었고요. 거짓 예언자들은 대부분 그 당시 다수파였기 때문에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을 바벨론의 앞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그 말을 예레미야는 신적압박을 받아 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게 저항하라, 애국시민들이여 총궐기하라는 말은 거짓 예언자들이 한 말이거든요.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예언자들을 동시대에서 바로 현장에서 분별하는 건 매우 힘들고 죽어봐야 압니다. 우리는 모르고 사실상 우리보다 100년 후 사람들이 판단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죄라는 이 말은, 박원순이라든지, 김 무슨 목사님 이런 분들이 하는 말과 제가 하는 말은 똑같이 혼선이 돼서 사실 영적공중전파가 완전히 흐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공중에 권세 잡은 자입니다. 전파를 권세 잡은 자고요. 그래서 죽어봐야 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첫째, 말씀과 예언 사이의 성취기준, fulfillment criterion 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현실에 응하면 참예언자입니다. 두 번째는 참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을 향한 충성심을 이탈시키면 그건 거짓예언자입니다. 아무리 성취가 되어도요. 그래서 허탈한 묵시가 때때로 성취가 돼서 우리를 혹세무민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에서 이탈하면 그 사람은 성취된 기준을 통과했지만 거짓 예언자입니다. 세 번째로 표절하면 거짓예언자입니다. 허탈한 묵시를 남발하는 사람들은 먼저 강력한 허탈한 묵시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표절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3장에 표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표절한 사람이 장관이 많이 되죠. 표절하면 장관 안 됩니다. 그다음 네 번째 기준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 기준은 신적압박감과 자기 마음의 상상력, 그다음 다섯 번째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말은 옳은 말도 거짓예언자입니다. 어떤 여인의 가산을 침탈하는 자, 여인과 칠계명을 어긴 자, 이 자들은 거짓예언자라고 돼 있습니다. 그 자들은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들의 예언들은 맥락 안에서 자기 복무적인 self serving 하는 오른 칼이 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 많이 씁니다. 다시 말할까요? 신명기 13장 18장, 예레미야 23장, 에스겔 14장 20절, 여기 보면 거짓예언자 있고, 제가 쓴 책에 대부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죽지 않아도 저 사람은 거의 확실히 거짓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제가 개인적인 담화에서만 말하고 공중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혹시 궁금하면 저한테 오면 제가 밥 먹다가 거짓 예언자 명단을 발표해드리겠습니다.
 
 
김영봉 
저 뒤에서 제가 몇 분이랑 토론하는 걸 봤는데 시사적 설교 혹은 예언적 설교라는 것이 무엇을 다루느냐 그 주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이, 이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생각해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면 예언적 설교 시사적 설교이고,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 그건 시사적 설교가 아니고 예언적 설교가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라 무엇을 보든지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승인하고 인정하고 두둔하고 위로하는 그러한 시각을 가지느냐, 아니면 그것이 진리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꿰뚫어보고 흔들어서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흔드느냐 그것에 의해서 예언적 설교와 예언적 설교가 아닌 것이 판명난다고 생각해요. 영어표현으로 설교는 comfort the afflicted, afflict the comforted,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편안한 사람들을 흔들고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흔들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두 가지 기능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 점에서 조금 혼동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시면 맞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 
이 질문에 대해서 다른 목사님 혹시 코멘트 하실 부분 있으십니까?
 
 
윤중호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일스페인교회에서 섬기는 윤중호 목사입니다. 고신입니다. 지금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유럽에서 현실적으로 몇 분들, 유럽에 있는 분들이 좀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를 직접 물어보고, 저에게도 물어보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서 북한의 탈북자 소환문제라든지, 또 김정은 체제 하에서 고통당하는 북한 인권, 이런 부분을 우리 설교자들이 어떤 pushing으로 해석을 하고 또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알려주는 것이 좋은가, 그런 부분들이 궁금하기도 해서 질문 드립니다.
 
 
사회자 
질문 중에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 있어서 덧붙여서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괄호 열고 북한 괄호 닫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실 때 선지자의 입에 어떤 말을 주실 것 같습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잘못하면 요새 종북논란에 휩싸일 수 있고, 임수경 씨의 설화 때문에도 지금 불을 붙였는데, 아무튼.
 
 
김회권 
혹시 정목사님 해주실 수 있습니까? 답변.
 
 
정용섭 
제가 종북좌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런 입장이죠. 북한은 체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탕자와 비슷해요. 현재거든요. 문제는 있는데 이걸 어떻게 풀 것인가가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그 돌아왔을 때, 북한은 현재 돌아오진 않았어요. 그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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