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교수_예수님은 소크라테스와 다르다?
강영안교수_예수님은 소크라테스와 다르다?
예수님은 소크라테스와는 다릅니다. 당연히 다릅니다.
그런데 강연안 교수님께서 이런 비교를 하시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비교가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댜.
나아가 강연안 교수님의 이런 전개는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보지 않고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자료와 첨언한 말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소크라테스와 다르다.강영안 교수, 합신 목회대학원에서 “소크라테스와 예수” 주제로 특강 승인 2013.07.29 10:10:02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은 흔히 인류의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은 질문을 잘 던지는 분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6월 24일부터 7월 5일 2주간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있었던 하계 목회대학원에서 강영안 교수(서강대학교 철학과)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특강을 했다. 2일 있었던 이 특강에서 강 교수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철학이 신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강의하였다. 강 교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영안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다.소크라테스와 예수철학은 헬라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한다. 이 말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소크라테스(Socrates)이지만 문헌상으로 가장 먼저 쓴 사람은 피타고라스(Pytagoras)다. 피타고라스는 본인의 직업을 ‘필로소포스’(philosophos), 즉 ‘소피아’(sophia, 지혜)를 찾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누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열심히 뛰는 사람, 둘째, 뛰는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 셋째,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장사하는 사람. 즉 열심히 활동하는 삶, 구경하고 관찰하는 삶,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이 중 첫째, 둘째 내용을 ‘비타 악티바’(vita activa)와 ‘비타 컨템플라티바’(vita conpemplativa)로 구별지을 수 있다. 비타 악티바는 분주하게 활동하는 삶, 비타 컨템플라티바는 관조하는 삶을 의미한다.서양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 교부들의 삶은 비타 컨템플라티바였다. 수도사들은 비타 컨템플라티바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좋은 삶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인식은 종교개혁 시기까지 이어져 왔다. 개신교의 삶은 상대적으로 비타 악티바의 삶을 강조한다. 세속적으로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면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비타 악티바가 현대 사회의 실적주의와 연관되어 “피로사회”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비타 악티바와 비타 컨템플라티바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사막의 교부들이 말하는 "비타 컨템플라티바"는 신비주의 관상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요??그것은 균형을 이루어야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할 것입니다.결국 강영안 교수가 말하는 철학의 이 두 가지 관점은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로 출발점을 삼지 않고,철학이 무엇을 말하는가?로 출발점을 삼기 때문에 '균형'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버려야 할 것'과 '취하여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그것이 곧 혼합주의로 가게 됩니다.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필생의 과제로 삼고 살아갔다. 물론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대개 플라톤(Plato)을 통한 것이다. 원래 플라톤은 글을 혐오한 사람이었다. 글에는 독자가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학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록을 남기기 위해 플라톤은 글을 썼고, 이 때 사용한 방식이 대화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말을 중요시했다. 말을 통해 다시 회상(anamnesis)하도록 하여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도록 돕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깨우침을 낳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자신을 “길, 진리, 생명”으로 보았다.아래에 나오는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문학적인 것만이 아닙니다.그것은 종교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깨우침을 낳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단순히 철학적인 접근만이 아니라 종교적 접근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그것은 이전의 주술적인 '말'이 이제는 이성적인 변증의 성격을 띄었기 때문입니다.소크라테스의 죽음의 과정은 플라톤의 『변론』과 『크리톤』에 나타나 있다. 죽음의 과정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아주 의연하다. 재판을 받을 때도 저자세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놀리기도 했으며, 여유 있게 약을 먹고 “자신들의 영혼을 잘 돌보게.” 하고 유언을 하기도 하였다. 초연한 태도였다. 초기 기독교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랐다. 죽음과 철저하게 싸우셨다. 여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막 14:34). 예수님께서는 피땀 흘려 기도하시면서 죽음과 씨름하셨다.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혼을 몸에서 풀어 주는 것, 코리스모스(korismos), 즉 분리를 말한다. 전형적인 희랍적 이원론이다. 육신은 무덤인데 이 무덤에서 해방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엘류테리아(eleuteria; 해방), 세 번째로는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의 죽음이다. 소크라테스의 희망은 하데스(hades), 즉 죽은 사람들의 공간으로 가서 육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프시케(psyche), 즉 영혼이 갖고 있는 가장 탁월한 능력(noesis; 노에시스)을 가지고 참된 인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오감 때문에 알지 못하고 있던 순수지성을 가지고 참된 지성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았던 죽음을 이와 다르다. 바울이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죽음은 인간이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무찔러야 할 원수로 본 것이다.소크라테스는 왜 죽었을까요? 그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합니다.
아래 자료에서 나오듯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리스의 전통적 신을 버리고"다이모니온"이라는 외국에서 들어온 일신교와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먼저 말해 주지 않고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소크라테스는 단순히 희랍적 이원론에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외국의 새로운 종교를 펼쳤습니다.주술의 영역 다시 말해서 접신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전생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그러니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는가?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근본적인 구조이고 틀입니다.이런 것을 말해 주지 않고 예수님과 비교한다는 것은 기독교와 세상의 종교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앎은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서의 앎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하는 방식은 정확한 정의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에우티프론』의 주제는 ‘경건’이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에우티프론을 계속 추궁한다. 에우티프론은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도망간다. 예수님의 앎은 이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 앎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보여 주는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소크라테스의 앎의 방식이 계속 파고들어 한 면을 자세히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예수님의 방식은 이야기를 통해 여러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한 면만 보아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아주 냉정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논리가 있고 정확히 정의하려는 열정은 있었지만, 사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다.또한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의 또 하나의 차이로 ‘소명’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소명은 ‘잘 사는 삶’이었다. 이것은 근거를 제시하는 책임지는 삶이다. 신이 우리에게 준 고유한 기능(arete; 덕. 여기서의 덕은 ‘탁월함’을 말한다)을 마땅히 수행하는 것이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이 네 가지를 발휘하는 것에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달랐다. 이는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통치해 주시기를 바라는, 즉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고 이루시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네 가지와 전혀 분리된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특강이 진행되고 있는 강의실철학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 버려야소크라테스와 예수님에 대하여 강의하면서 강 교수는 “철학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은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강 교수는 “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좋은 철학과 나쁜 철학을 구별할 수 있다고 본다. 나쁜 철학은 근본적인 세계관이 반신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이천 년 역사가 보여 주는 것은 철학이 신학을 드러내고 변증한다는 것이다. 철학을 주의했던 루터(Martin Luther)나 칼빈(John Calvin)도, 19세기의 카이퍼(Abraham Kuyper)나 20세기의 도이어베르트(Herman Dooyeweerd)나 여러 기독교 철학자들을 보아도 철학을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는 도구로 받아들였다. 철학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삼기보다는 생각을 하는 창구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며 철학의 바른 사용이 신학에 유용함을 강조하였다.또한 강 교수는 자전거를 타는 것을 비유로 들며 철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철학을 공부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지식이 필요하다. 개념, 논리, 역사, 즉 철학개론, 논리학개론,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차근차근 기본을 닦아 가며 공부하면 철학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철학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 체인이 연결된 바퀴를 굴리고 핸들로 방향을 조절하면서 타는 것이라고 아는 것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실제로 타고 넘어지기도 해야 한다. 즉 둘째, 철학책을 읽으며 직접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어려우면 함께 고민할 수도 있다. 셋째, 즐기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전거를 타고 누리는 것이다. 정리하면, 인포메이션(information)의 단계,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의 단계, 그리고 누리는(enjoy) 단계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이 세 번째 단계라고 본다. 지식이 지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찌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강 교수가 강조하는 철학의 방법은 ‘삶으로 나타나면서 생각하는 철학’이었다. 이것은 신학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목회는 신학이 삶으로 나타나는 현장인 만큼 강 교수의 특강은 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학의 내용을 습득하고, 습득한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고 삶 속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이것이 체화되어 하나님을 즐기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자료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84)강연안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종교와 관련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이전에는 주술적이었다면 이제는 이성적 회상을 통하여 접근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입니다.그것은 다이모니안이라는 종교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이것을 말해주지 않으면 이런 강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자료를 읽어 보면 더욱 이해가 잘 됩니다.
(자료출처 http://blog.ohmynews.com/sultanyj/338243)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아든 진짜 이유는?아, 한국사회 2010/07/19 07:49 白泉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아든 진짜 이유는?[김영종의 '잡설'·25]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③기사입력 2010-07-19 오전 7:09:39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③근대적 진보의 역사적인 출발은 유대-기독교적 시간관이 르네상스기에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를 만나 물질세계까지 장악하기 위해, 즉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기 위해 거듭 태어난 '직선의 시간관'에 있다. 다시 태어난 진보는 '천국' 대신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유토피아'를 제시했다.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계승한 것이다.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유토피아는 근대가 역사 속에서 이루려는 진보의 추동력이요 도달하려는 신이었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군사독재 등 현대의 모든 정치 체제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다.체제와 정파에 따라 이념도 다르고 구호도 다르겠지만, 모두 유토피아의 건설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현대의 어떤 사회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정치 체제를 창조하고 돌보는 세계 자본주의는 유토피아를 천국으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 종교의 이름은 앞서 말한 '역사의 진보'이며, 여기에서는 유토피아(천국/성부)와 이성(성령)과 세계 자본주의(성자)가 삼위일체를 이룬다.우리의 주제인 '진보'가 영혼도 입도 다 마비시켜 잡아먹어버리는 '전자가오리' 같은 이념이라는 점을 폭로하지 않고선 현대인이 노예 상태에서 풀려날 길이 없다. '전자가오리'는 메논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할 때 상대를 호리고 현혹하여 난관에 빠뜨리는 주술사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 진보가 '전자가오리' 이념임을 보여주기 위해 '진보 이념=소크라테스 방식'이라는 사실을 '직선의 시간관'이 거듭난 것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사실 진보 이념은 재생한 '소크라테스의 상기론'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재생'은 르네상스를 통해 거듭 태어난 것을 뜻하는데, 재생-상기론은 이 '거듭난' 상기론을 말하고 원(原)-상기론은 원래의 소크라테스 상기론이다. 재생-상기론은 신비주의의 형이상학을 걷어치워버렸다.원-상기론에서 보면, 상기가 일어나는 곳인 '영혼'은 전생에서 왔다. 전생은 원형(圓形)으로 된 시간관의 소산이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에 참여하여 입문하기를 권유했고, 플라톤이 신비 의식에 입문했다는 사실로도 원-상기론에서 신비주의 형이상학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이유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다이모니온(영적인 것)을 믿은 죄 때문이다. '다이모니온'은 다분히 고대 오리엔트의 냄새를 풍긴다. 소크라테스가 권한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이 '나라의 종교'라는 점에서 모순이 일어나지만 이때(<메논>)까지만 해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종교'와 공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나는 다이모니온을 '신의 소리에 응하는'의 뜻이라고 파악한다.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박종현 옮김, 서광사 펴냄) 35쪽 역주 참고. 이렇게 보면 '응하는 자'가 중시되며, 신의 소리를 듣는 '응하는 자의 내면'이 인간의 중심 기관이 된다.이 내면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혼이다. 혼은 몸과 분리된 존재로,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혼이 혼에게 하는 것이다. 대화에 실려 나가는 말(언어)이 로고스다. 로고스는 혼이 혼에게 하는 말이지 혼이 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로고스)은 이성(의 산물)이다.소크라테스/플라톤은 오랫동안 외부의 신과 소통하던 주술적인 성격의 '말'을 내면의 혼이 소통하는 이성적(변증적)인 성격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런 변화에는 이란(조로아스터교)이나 이집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또 나는 다이모니온이 영지(그노시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에서 온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의 인용을 참고하라."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직후 페르시아로 가서 조로아스터교를 직접 연구하려고 했으나 기원전 386년에 발발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계 종교사>, 존 노스 지음, 윤이흠 옮김, 현음사, 177~178쪽)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다이모니온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보는 듯하다."플라톤은 분명히 그리스 사상가들 가운데 소수파에 속했다. (…) 그의 신념은 일반적인 그리스 사유의 문맥을 완전히 벗어나서 갑자기 나타났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그리스의 바깥, 즉 이집트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이집트는 영혼의 불멸, 일신교, 계획적으로 통제된 국가라는 개념들이 비롯된 곳이다. 철학자/왕이라는 플라톤적 개념 자체는 이집트로 거슬러 가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 68쪽.))니체는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서 "플라톤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 그들(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단 종교의 창립자들이며, 이들이 창립한 이단 종교들은 모두 헬레니즘 문화와 전래된 양식의 통일성에 대항하는 반대 기관들이었다"고 비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봐도 무방하다. 그의 저작이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메논> 이후다.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이모니온'은 그리스의 전통적인 '다신교의 신'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일신교의 신'과 관련돼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로고스'를 '다이모니온'과 관련해 인간 '이성'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김용철'상기'는 로고스(이성)를 사용하여 전생에 알았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성(로고스)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 역시 로고스(말)다. 나아가 말(대화)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도 로고스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원-상기론이 재생-상기론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생(前生)'의 시간관인 '원형(圓形)의 시간'을 폐기하고 '직선의 시간'만 확립하면 되었다. 재생-상기론의 핵심도 로고스, 즉 이성(그러나 전생과는 무관한)이기 때문이다.이를 달성하는 것은 두 가지 점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는 로고스가 이미 기독교(스콜라 철학)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또 하느님의 아들(성자)로 채용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때문에 사형당했을 만큼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 속에 이미 직선적 시간관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점이다.그의 '상기론'이 전생에 심어진 씨앗을 자라게 하는, 즉 배양하는 과정을 앎 자체로 여기므로-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앎은 내용이 아닌 과정이요 방식이다-최고의 가치인 덕(훌륭함)을 미래에 획득할 것으로 설계해놓은 것이었다. 덕을 탐구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대표하는 "덕은 앎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그런 각도에서 다시 음미해보면, 상기론이 재생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덕은 원어로 aretē(아레테)라고 하는데, 모든 사물의 각 종류에 따른 훌륭하거나 좋은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좋은 눈, 좋은 구두, 훌륭한 농부, 훌륭한 정치가 따위다."소크라테스가 든 예를 따라 이해해보도록 하자. 예컨대 훌륭한 제화공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훌륭함을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제화공의 '훌륭한 상태'는 구두에 대한 앎, 그리고 구두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니, 그의 '나쁜 상태'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의 것이다. 구두를 제대로 만들 줄 안다는 것은 구두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 때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제화공의 '훌륭한 상태'(aretē), 즉 제화공으로서 훌륭함은 구두의 기능에 대한 앎과 그것을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앎, 즉 기술이 있어야만 되는 일이요, 그 반대의 경우, 즉 그의 '나쁜 상태'는 구두의 기능에 대한 '무지'와 그걸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21쪽.)이처럼 오늘날의 '지식'과 별반 차이가 없는 소크라테스의 '앎'은 끝없는 기능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미래 지향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최고의 훌륭함인 덕의 경우에는 획득을 위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노력해야 한다(전생의 것을 이어받아야 하므로). 이는 로고스=이성=말(논리)을 통해 달성된다.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미 '직선의 시간'은 잉태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재생-상기론은 힘차게 거듭나는 것이다.(니체는 이 점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비교해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비극의 탄생> 등 참조. 헬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직선의 시간에 대립되는 원형의 시간, 즉 영원회귀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헤라클레이토스의 대우주년의 일 년은 1만800 태양년을 주기로 모든 사물이 영원히 회귀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신적이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격적인 정신이 아니며, 내재적인 생성의 법칙(대립 투쟁의 변증법)을 특징으로 한다. <서양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펴냄)재생-상기론의 진보 이념에 입각한 교양과 지식이 상인·장인 등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에 대항해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수단이었듯이 원-상기론의 변증법도 소크라테스의 출현과 함께 평민이 귀족에 대항해 상부로 올라서는 수단이었다. 초기에 이들 사회 계급은 모두 이윤에 밝은 거상들이 주도했다.
사막의 교부들이 말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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