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용수_쉐마인성교육_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성격과 형성의 배경
현용수_쉐마인성교육_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성격과 형성의 배경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성격과 형성의 배경이 글에서는 탈무드의 내용, 논리전개방식, 형식보다는 탈무드가 형성되게된 역사적 배경들과, 그로 인해 얻어졌다고 볼 수 있는 탈무드의 성격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창 12:1-4>야붸는 아브람을 불렀다. 그리고 명령했다. 아브람은 무조건 그 부르심에 따랐다. 히브리 민족, 유대인의 출발점은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다. 족장 시대에는 하느님이 직접 족장들에게 행해야할 바를 명했고 족장들은 가족들과 함께 그 명령에 따라 살았다.출애굽 당시 히브리인들은 큰 민족을 이루고 있었다. 하느님은 시내산에서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여정에서,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킬 계명을 내려준다. 아주 자세히, 삶의 작은 부분 부분까지 규정하면서·····.유대민족의 역사를 개괄할 때, 그들 역사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의 주관자인 하느님, 유대 민족의 삶에 관여하는 하느님과 그의 율법,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는, 때로는 불순종하는 유대인의 삶, 그리고 불순종의 죄를 물으시는 하느님, 그리고 다시 회복(구원)하는 하느님이다. 한 마디로 유대인의 삶은 “하느님의 율법에의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역사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리고 민족의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때마다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쇄신해나갔다.모세는 자신의 죽음과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다시금 강조하며 그 율법을, 즉 하느님과의 약속을 떠나지 말 것을 간곡히 청했다(신 5장 이후). 여호수아도 가나안을 평정한 후, 본격적인 가나안 생활을 시작하게 될 유대민족을 앞에 두고 율법(언약)을 새롭게 했다(수 23장 이후).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약속(율법)을 더욱 잘 지킬 것을 다짐했다. 베냐민 지파의 만행을 응징한 후에도 그러했고(삿 19-21장), 사무엘 代에 성궤를 회복하고 블레셋을 물리친 후에도 그러했으며(삼상 7장), 사울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그러했다(삼상 12장). 그리고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에도 그러했다(왕하 23장).이 모든 율법의 쇄신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모세5경;토라)에 대한 쇄신이었다. 그리고 유대 땅에서의 쇄신이었다. 이전의 그들의 삶의 방식을 유지한 채, 외부로부터 독립된 공동체를 유지한 채, 즉 신앙의 자유를 가진 채 행했던 쇄신이었다. 그래서 그 쇄신은 기존의 율법을 재확인하고 그것의 준수를 다시금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이 내려준 율법은 매우 자세한 것이었다.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까지도 종류를 들어가며 세세히 규정해 준 것이었다. 개개의 특수한 경우까지 고려해가며 그에 따르는 정결의식도 규정해 준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을 때 씨앗은 어떻게 뿌리고 언제 거두며 그 얼마를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 세밀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었다. 제사를 지낼 때의 차례와 준수해야 할 것들도 마치 오늘날의 전자제품 사용설명서 이상으로 자세하게 정해놓은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삶의 아주 작은 부분에까지도 모두 참여하시는 분이었다.하지만 유대인들의 이러한 “율법을 따라 사는 삶”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오게 되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 상당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삶의 터전이 바뀌었고, 삶의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바뀐 그들의 삶은 포로의 삶이었다. 아무리 바벨론이 종교적으로 그다지 심하게 억압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삶(유대인에게는 삶 자체가 종교이다)은 필연적으로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청동기 문화를 넘어 철기 문화가 정착되었다. 삶의 형태가 달라지게 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작용하게 된 것이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파사)에게 멸망 당한 후,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고레스王의 호의를 입어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일부는 바빌로니아에서 종교적 공동체를 유지하며 계속 살게 되었다. 이 때에 이미 바빌로니아 탈무드 생성의 모태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상황은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이나 바빌로니아에 남은 유대인들이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율법의 준수에 장애가 생긴 것이었다. 예루살렘에는 다른 이민족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며 팔레스타인 전역에 헬레니즘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이전의 예루살렘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들은 그 난관을 극복하고자 율법을 새롭게 한다. 더욱 더 율법에 따라 사는 삶을 강화함으로서 변화를 극복하려 했다. 그들은 율법을 쇄신하며 율법 중심적인 공동체를 다시 세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시리아의 침입을 받는다. 시리아는 유대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삶은 더욱 더 율법을 지키기 위해 굳어졌다. 강하게 억압당하면 당할수록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율법 준수를 더욱 더 강화해갔다. 더욱 더 원칙적이 되어갔다. 시리아 왕조를 몰아내고 세운 하스몬 왕조도 상당 기간동안은 매우 율법의 준수를 강조했었다. 하지만 로마가 침략하여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만듦으로서 유대인들의 삶은 다시금 위협받게 되었다.바빌로니아의 사정은 팔레스타인과 달랐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이 통치에 저항하지 않고 세금을 잘 내는 한, 상당한 자유를 허락했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지배적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와의 공통점 때문인지 유대교에 대한 왕조의 입장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왕들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민족과 그들의 종교에 관대했다. 이민족들로 하여금 자치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 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상황이 훨씬 호의적이었던데 비해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달리 재건된 성전을 갖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의 삶은 더 이상 농경에 기초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선조들처럼 유목생활을 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예루살렘에서처럼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처럼 투쟁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공동체의 절멸을 의미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은 토라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해석해나가기 시작했다. 율법의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 정도의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교와 바빌론 문화, 그리고 헬레니즘도 무조건 배격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서 유대교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 나갔다. 이런 것들은 유대교의 종말사상과 신비주의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의 대결 사상과 종말 사상 등은 이미 바벨론 유수 당시부터 유대교에 영향을 주었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형성, 그리고 그 근간이 된 미쉬나의 유입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Avesta에 대한 주해서인 Zend-Avesta(지식의 주해)가 페르시아 사산왕조代(A.D. 220-644)에 기록되는데 그 내용의 순서가 미쉬나의 그것과 유사하다.이러한 과정에서 율법의 새로운 해석-복잡해지고 달라진 시대 상황에 맞는 변용-은 필연적이었다. 그 결과 기원 후 3-5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 탈무드였다. 탈무드는 토라에 기초한 율법과 기도문 등으로 이루어진 미쉬나(기원 후 2-3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형성)에 대한 주석서 라고 할 수 있다. 랍비들은 토라의 주석서인 미드라쉬와, 미쉬나의 보충문헌에 해당하는 토세프타, 구전되는 이야기들인 게마라, 거기에 先代 랍비들의 가르침 등을 이용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논리와 화술로서 미쉬나의 주석, 즉 탈무드를 형성해 나갔다.탈무드는 단순히 미쉬나의 해석과 적용을 위한 참고서에 그치지 않고 전통적인 유대 문화의 바탕 위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이던 바빌로니아의 모든 지식들(농경술, 건축술, 점성학, 천문학, 꿈 해석, 윤리학, 우화들, 민간전승, 지리학, 역사, 전설, 마술, 수학, 의학, 형이상학, 자연과학, 언어학, 신학 등)이 단편적이나마 담겨지게 되었다. 당시 근동 문화의 총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팔레스타인에서도 탈무드가 형성되었음에도 후대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는 예루살렘 탈무드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의 것에 비해 예루살렘 탈무드가 분량도 적고(담고 있는 내용이 적다는 것과 통한다) 내용 전개가 곳곳에서 중단되는 등의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가지고 있는 융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확산과 사용은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다른 문화권, 심지어 가장 배타적이라고 전해지는 이슬람 문화권(하지만 유대인들에게 가장 배타적이었던 문화는 그리스도교 문화였다)에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융통성을 제공하였다.“The law of the [Gentile] government is binding." 3세기 전반에 바빌로니아에서 활동하던 랍비 사무엘이 세운 원칙이다. 이 원칙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형성 전 과정을 통해 작용하였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의 이런 생각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이후 바빌로니아로 건너온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탈무드가 형성되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하에 쓰여진 탈무드에 의해 교육받은 후대의 유대인들도 유대 전통 문화와는 매우 이질적인 다른 문화 속에서도 큰 충돌없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시켜 나갔다. 즉, 탈무드는 디아스포라가 전세계로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Jacob Neusner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비록 탈무드의 성격을 직접 서술한 것은 아닐지라도,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전통을 지켜나가는, 탈무드와 유대인 공동체의 역동적인 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살아있는 전통은 내적 역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정의에 부합하는 전통의 전개를 우리가 임의로 가로막을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변화들을 비껴나가는 가운데 ‘현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그 전통’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유대인 집단이라면 1세기 전만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문화적 현상을 오늘날에는 받아들인다.”바로 이런 유연함은 바벨론 유수 이후 비빌로니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탈무드 편찬과 더불어 체계화되었으며 그 이후의 세월을 통해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주류로 자리잡으며 확장되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유연함이 탈무드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성격이 아니겠는가.참고도서1.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대한성서공회, 1984.2. Britanica Encyclopedia, “Judaism”.3. 비교종교학, 황보갑, 초판, 기독교문화사, 1996.4. 서양사 총론, 차하순, 10판, 탐구당, 1994.5. 토라의 길, Jacob Neusner, 초판, 민족사, 1992.출처: 홍순택의 숲 http://www.likeatree.net(http://www.koisramall.com/skin/board/mw.basic.utf8/mw.proc/mw.print.php?bo_table=z3_1&wr_id=267)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