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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의 생각

현용수_쉐마인성교육_탈무드의 형성과정(5)

현용수_쉐마인성교육_탈무드의 형성과정(5) 


탈무드의 형성과정(5) – 학당들
 
학당 (‘베트 미드라쉬’ בית מדרש 혹은 ‘예쉬바’ ישיבה)
탈무드는 학자(랍비)들의 토론장으로 여겨질 정도로 학자들의 의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는 어느 한 날 한 장소에 랍비들이 모여 주고 받은 토론 내용들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수백년 간)을 달리한 토론 내용을 최종적으로 편집한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고, 토론하고, 외우는 장소가 학당이다. 학당을 히브리어로 ‘베트 미드라쉬’(בית מדרש) 혹은 ‘예쉬바’(ישיבה)라고 한다. 전자는 ‘해석’ 혹은 ‘연구’의 집이란 뜻이며, 후자는 ‘앉음’(sitting)이란 뜻이다. 학당의 앉는 자리 배열 때문에, ‘앉음’이란 뜻의 ‘예쉬바’가 랍비 학교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용어가 되었다. ‘예쉬바’란 표현이 가장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주전 2세기초의 문헌인 ‘벤 시라(집회서)’(51:16, 23,29)이며, 이는 미쉬나 ‘아보트’(2:7)에서 ‘베트 미드라쉬’와 동일시되고 있다. 

랍비들은 이러한 학당들이 이미 ‘주곳’ 시대 (막카비 혁명이 일어나기 전, 즉 주전 167년 이전에서, 힐렐이전 즉, 주후 약 30년 이전까지)에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주곳’이란 히브리어로 ‘쌍’이란 뜻이며, 한 사람은 학당의 의장으로, 다른 한 사람은 랍비 재판소장을 맡는 체제를 말한다. 원래 성전산에서 열리는 71명 회원의 ‘산헤드린’은 최고 재판소였을 뿐 아니라, 랍비들의 연구와 토론장 즉, ‘예쉬바’ 혹은 ‘베트 미드라쉬’였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의 학당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예루살렘외에 공식적인 랍비 학교가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 성을 빠져 나온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을 ‘황제’라고 부르며 “야브네와 그 현인들을 남겨 달라”고 했다는 탈무드의 ‘아가다’(‘기틴’ 56b)만 놓고 보면, 주후 70년 이전에 야브네에 학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마군에 포로로 잡힌 요세푸스 역시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유대 전쟁사 3.8.9: “오 베스파스안 장군이시여, 당신은 요세푸스를 포로로 잡은 것 밖에는 생각지 않으시는군요; 하지만 나는 좋은 소식들을 갖고 온 전령으로 당신에게 왔습니다…오 베스파시안 장군이시여, 당신은 케이사르요 황제입니다…만일 제가 경솔하게 하나님에 관한 것을 확언한다면, 정녕 저는 지금보다 더욱 확실하게 구금되어 처벌받음이 마땅할 것입니다”). 바벨론 탈무드의 편집 시기가 요세푸스보다 무려 400년 가량 후대이므로 베스파시안에 대한 황제 예언의 원조는 요세푸스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점에서 “야브네와 그 현인들을 남겨달라”는 요하난 벤 자카이의 간청은 그 역사적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예언은 반란 초기 갈릴리 요트바타에서 있었던 일이며, 요하난 벤 자카이의 예언은 예루살렘 함락직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임을 생각하면 ‘베스파시안에 대한 황제 예언’이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각각 다른 두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하간에 탈무드의 아가다는 역설적으로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 야브네 학당을 이스라엘 땅에부터 바벨론의 니시비스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랍비 학당의 최초요 가장 중심적인 회당으로 키운 인물이 요하난 벤 자카이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야브네 학당은 구조와 기능 양면에서 예루살렘의 대 산헤드린을 모본으로 삼았다. 다른 학당들이 요하난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서 퍼져 나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엘리아자르 벤 힐카누스에 의한 룻다 학당, 요슈아 벤 하나니야에 의한 페킨 학당이 있고, 그 후로 랍비 아키비에 의한 브네이 바락 학당, 하나니야 벤 테라디욘에 의한 시크닌 학당,  요세 벤 할라프타에 의한 세포리 학당, 유다 하-나시에 의한 벧 쉐아림 학당 등이 있다. 브네이 바락에 위치한 랍비 아키바 학당에는 수 천명의 제자들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제2차 유대 항거 곧 바르 코크바 반란(주후 132-135)이 실패로 끝나고 이스라엘 땅 중남부 지역이 초토화되면서 많은 학자들이 흩어지게 되는 데, 일부는 바벨론으로 도망을 하게 된다. 주후 약 140년경 야브네의 학당은 갈릴리의 우샤로 옮겨 갔다가, 주후 200년경 다시 세포리로 옮겨 지는 데, 여기서 유다 하-나시의 주도에 의해 미쉬나가 편집이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학당은 주후 235년경 티베리야에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
티베리야 시대 이후는 탈무드를 낳은 아모라임 학자들의 시대이다. 티베리야는 예루살렘 (혹은 팔레스틴) 탈무드의 산실이다. 티베리야 학당은 아랍이 성지를 점령한 주후 7세기 이후에도 약 100년간 존속했으나, 남아 있던 나머지 학당들 (룻다, 가이샤라, 세포리)은 주후 4세기 말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탈무드 시대에 학당의 기능과 권위는 다양하였다. 야브네와 그 뒤를 잇는 이스라엘 학당의 최고 의장은 다른 고위 동료들과 함께 율법 최고 재판소를 구성하였다. 의장은 때때로 이스라엘 땅과 바벨론에 있는 유대 공동체에 전령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과 해석들을 전달하고 학당들과 학생들을 위해 기부금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받는 액수로는 랍비들이 거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하여 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은 장인이나 농부로 생계비를 벌어야 했고, 따라서 학당은 주로 저녁에 열렸다. 
 
이스라엘 학당의 최고 의장에게는 랍비직 안수(‘쓰미카’ סמיכה)와 현존하는 구전 율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법령(‘타나카’) 제정권이 있었다. 
주후 3세기부터 이스라엘의 학자들(랍비들)이 바벨론으로 “내려 가서”, 이스라엘의 랍비들의 가르침들을 바벨론의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전수하게 된다. 이런 학자들을 통칭하여 ‘네후테이’(נחותי: 문자적으로 “내려 가는 자들”이란 뜻)라고 부른다. 이는 비잔틴 기독교 통치자들로 인해 성지에서의 유대인의 삶과 문화가 점 점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 유대인 정책이 이민과 학당 폐쇄 그리고 주후 425년에 의장직 철폐를 불러 왔다. 
바벨론에서 마르 주트라가 오면서 티베리야 학당이 주후 520년에 다시 문을 열어 740년까지 존속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의 성지 점령(1099년)과 더불어 예루살렘 학당이 폐쇄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 땅에서의 학당은 바벨론 학당의 그늘에 가리워진 상태였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mylovegalilee/79zr/162?docid=1vzg79zr16220081213080816)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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