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으로 가는 아름다운 시작
영광으로 가는 아름다운 시작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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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으로 가는 아릅다운 시작을 위하여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마음을 두고 그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을 기뻐하며 살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고백한 교회에 세운 디모데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나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시대는 항상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빠지게 한다. 진리를 옳게 분별하여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의 싸움을 싸워가야 한다. 그러기에 신자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삶이어야 한다. 어찌 보면 누구에게나 참 쉬운 말처럼 들릴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도 사는 이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세상 이치라는 것이 사람을 끌어 갈 수 있는 한계는 뻔한 것이다. 세월 지나면 늙어가는 것이 서러워서 안타까울 뿐이다. 더 나이 들면 얼굴도 몸도 먹는 것도 다 평준화가 된다. 아무도 거기에 차별이 없다. 어르신들은 입만 열면 하시는 말씀이, “늙으면 죽어야 돼” 그러신다. 왜 그러시나? 세상 것으로는 만족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에 한 숨만 깊다. 그래서 나이 드신 어르신의 한 숨에는 역사가 깊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정, 교육, 사회, 정치 그 무엇으로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없다. 그 흔해 빠진 질문, “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도 답을 못한다. 흔해 빠진 질문이라고 해서 그 깊은 고뇌를 가벼이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노인이 된 하이데거가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존재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결국 신비주의로 돌아가 버린다. 세상은 답을 주지 못하고 인간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한다. 전도자의 말이 딱 맞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세상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왜 교회는 세상 것이 된다고 할까? 그렇게 세상 것이 된다면 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일까? 왜 신자가 되었고, 왜 목회자가 되었을까? 이제 막 예수를 믿어 믿음 생활을 하게 된 분이 원하는 것은, “목사님 지금까지 내가 배워왔던 것 말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가르쳐 주십시오.”였다. 세상 것 말고 다른 것,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경건은 시작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 시작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이다. 그러나 오직 성경만으로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많은 과정을 포함된 시작이다.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몸부림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덩달아 따라가는 자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처음 시작은 여느 사람과 방불하게 엉뚱한 길로 가기도 하고, 이상한 길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이 있어서 방향이 새롭게 정해진다. 말 그대로 산고의 고통을 치른 후에야 제대로 된 길을 가게 된다.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들 중에 하나가 생각을 안 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모두가 생각은 안한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는 목사 한 사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사는 일이 바쁘고 힘들어도 믿는바 그 길에 대해서 진수로 나아가야 한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비판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믿으며 앞으로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그것을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무작정 따라가지 말고, 내 앞에 일어난 일이 아무리 다급해도 앞뒤 가리지 않고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런 이유들이 교회가 영성을 앞세워 지성을 짓눌려 버린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목회자나 성도들이나,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가 되어야 한다. 왜 그들이 성경을 상고했을까? 지금까지 알아왔고 배워 왔던 것과는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주는 것이 성경에는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세상 것으로 안 된다고 하는데, 왜 교회는 된다고 가르칠까? 세상의 것과 성경을 섞어서 가르치면서도 성경을 가르친다고 우기고 있다.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독교 상담학이라고 한다. 심리학을 가르치면서도 기독교 교육학이라고 한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 ‘치유’, ‘영성’, ‘상담’이라는 이름하에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독교치유, 기독교영성이라고 가르친다.
칼빈 500주년을 기념하면서 많은 분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논하고 칼빈의 신학을 재평가 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말했던 분들 중에는 심리학을 아주 강하게 내세우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랬다. 아주 태연하게 전혀 이상한 분위기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인가?’하는 의아심이 들게 했다. 그 아래서 배우고 그 아래서 영향을 받은 분들이 목회 현장에서는 어떻게 가르칠까는 뻔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족하지 않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성경은 분명히 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부족하다고 가르치고, 왜 세상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성도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지, 눈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근래 와서 그런 음성듣기 하는 분들이 많이 늘어난 것은 성경만으로 가르치지 않고 세상 것을 섞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옛날에는 저랬는데 오늘날에는 이런 것이다 하는 진리가 아니다. 전에 누가 말할 때는 그 말이 참인 것 같아서 사람들이 추종하다가 이제 그 이론을 뒤집어서 새롭게 말하는 누가 나타나서 전에 것은 틀렸고 이것이 맞습니다. 이런 식이 아니다. 이전 세대에는 이런 무슨 주의가 나타나고 지금은 또 새로운 무슨 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가 계속 진보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도 변해야 된다고 말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너만 옳다고 말하지 말고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해야 한다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나만 옳다고 하면 문제시 되는 흐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라도 아무도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로 자기 안에 허함을 채우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하는 길은 결국 신비주의다. 왜냐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진리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 진리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답이 아니요 자기가 만들어 낸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단기간의 자산이 될지는 몰라도 영원한 자산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8).
심리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물론 인간이 만들었다고 아무 쓸데가 없다고 모든 인간의 작품을 도매금으로 폐기처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만든 작품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심리학은 다르다. 심리학은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의 문제가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이 없다. 오로지 그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학문일 뿐이다.
오늘도 전문가가 아니면 따라갈 수 없는 수많은 심리요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방법이 많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은 것 같다. 이 사람 기준이 다르고 저 사람 기준이 다르다. 그러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삶에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거기에는 모두가 정신병자들이다. 오직 한 사람만 정상이다. 그 말을 하는 그 사람만 정상이다. 나머지는 다 문제 있고 다 상태가 이상한 사람들이다.
짐승들도 주인을 알아보고 산다. 그 주인이 하라는 것을 하지 지나가는 객이 하라는 것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심히 짖기만 하고 제 밥값만 제대로 할 뿐이다. 짐승들도 제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하는데, 우리는 왜 하나님만으로 만족이 안 되고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 자유가 없다고 할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이렇게 애타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과연 우리의 마음에 들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영광으로 가는 아름다운 시작을 위하여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마음을 두고 그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을 기뻐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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