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정목사의 생각

현용수_쉐마인성교육_"탈무드식 대화법의 달인 예수님"에 대하여

현용수_쉐마인성교육_"탈무드식 대화법의 달인 예수님"에 대하여

--------------------- 퍼온 자료 시작 ---------------------------------
제목 : 탈무드식 대화법의 달인 예수님
 
탈무드식 대화법의 달인 예수님
요한복음 4장 5절로 30절은 예수님의 탈무드식 대화의 결정판이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탈무드식 대화법의 달인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온전히 보여주셨다. 그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었다. 선문답 같은 것이었으나 여자로 하여금 깨달음을 넘어 행위로 옮기게 하는 전 우주적 대화였다. 그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이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이 그 여인을 만나신 것이다. 그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이셨고 그 예배의 주인이셨다.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는 탈무드식으로 진행됐다. 유대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은 탈무드식 대화법을 어렸을 때부터 익히고 단련하셨다. 그는 12세 무렵에 성전에 올라가 율법학자들과 변론을 즐기시기도 했다. 여기서 변론은 탈무드식 논쟁을 의미한다. 탈무드식 논쟁은 이미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대화법이었고 진리를 찾아가는 학습법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과 뜻은 어디 있는지, 그 말씀을 어떻게 변화무쌍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상황에 적용할 것인지 찾아가는 것이 탈무드 논쟁학습법이다.
그 절묘한 탈무드식 대화의 현장에 다가가 보자.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했다. 그는 요단강 서안을 따라 사마리아를 우회하는 길을 가지 않고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하셨다. 사마리아는 옛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있던 땅으로 앗수르에 멸망을 당한 뒤 앗수르의 동화정책에 따라 이방인들과 피가 섞이면서 순수 유대 혈통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는 남쪽 유대인들의 외면을 불렀다. 남유다인들은 심지어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우회하고 상종조차 않으며 경멸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있던 수가성 여인에게 다가가 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햇볕이 작열하는 정오의 사마리아. 그 시각에 보통 사람들은 오수를 즐길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 홀로 앉아 물을 긷던 여인. 그녀는 왜 홀로 물을 길으러 온 것일까? 그에겐 수치심이 있었다. 야곱의 우물을 바라 보며 옛 선조였던 야곱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 그러나 남 유다 남자였던 예수님께는 민족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예수님의 요청에 가시 돋친 첫 마디를 꺼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이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으로 여인을 일순간 혼란에 빠뜨린다. 예수님은 분명히 물을 여인에게 청하셨는데 갑자기 생수를 주겠다니 여인에게 줄 만큼 생수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는 말인가?
여인이 말한 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을 의미하고 예수님이 언급한 생수는 영적인 생수 즉 성령을 의미한다. 형이하학적 물과 형이상학적 생수가 대립하고 있는 국면이다.
말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여인은 다시 묻는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여인은 이어 이 우물이 어떤 우물인지 아느냐는 투로 재차 따져 묻는다.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이 말 속에 여인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 우물로 따질 것 같으면… 으로 시작하는 자기 민족에 대한 공치사를 듣는 듯하다. 남유다 남자인 예수님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여인이 드디어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남 유다 당신들은 우리를 너무 깔봐선 안돼 하며 목소리에 자못 힘이 실렸을 듯하다.
이에 예수님은 여인의 반문을 충분히 예상하셨던 듯 자신이 언급한 생수의 의미를 가르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차 먹는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말귀에 어두운 자신을 책망했을지도 모른다.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라면… 만약 그런 샘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인은 마침내 내면 속에 가라앉아 있던 수치심에 도달한다. 그것은 영생에 이르는 샘물을 마시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하는 다음 말을 통해 그가 수치심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게 해서 다시 여기에 물을 길으러 오는 수고와 사람들의 눈총으로 인해 휘몰아치는 수치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여인의 속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수치심의 정곡을 찌른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여인이 대답한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대답을 예상하셨다. 그리고 여인의 마음에 공감을 표시한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얼마나 고마웠을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다 있구나. 이 순간 여인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높이 평가했다.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신통력이 있는 분으로 생각해서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선생님에서 선지자 또는 예언자로 바뀌었다. 또한 대화의 화제가 예배 문제로 전환된다.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예배문제를 여자가 꺼냈을까? 아마도 여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들의 오랜 고민이었던 이 문제에 대한 신통한 해답을 예수님으로부터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잠시 동안 나눈 대화 속에서 예수님의 대화 수준이 보통이 아님을 간파한 여자가 민족적 고민을 드러내어 해결을 보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정체성 문제와도 연결되어지는 부분이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유대의 전통 속에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에 다음과 같은 제법 긴 호흡의 답을 주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예수님은 지적하신다. 이는 예배의 본질에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나 다 벗어나 있으므로 진정한 예배로 양쪽 모두 회귀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 예배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 과연 예배자의 마음 자세를 이야기하는 뜻으로만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나는 예수님이 말씀한 이 조건에 합당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한다. 인류 역사상 이 조건에 가장 합당한 예배를 드린 이는 누구일까? 인간 가운데는 없다. 단 예수님은 스스로 산 제물이 되심을 통해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신 유일하신 분이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누가 그것을 맞출 수 있는가? 어디까지 신령이고 어디까지가 진정인가? 신령과 진정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예배자의 마음이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자가 누구냐 하는 물음이다.
그런데 놀라운 답이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여인의 대답에 주목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이 바로 쇄기를 박으신다. 나는 이 부분이 대화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한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그 여자의 반응을 보라.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가 바로 눈 앞에 계시다니… 그 여자의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여자는 깜짝 놀라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이에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서, 예수께로 갔다.
예수님의 대화법은 탁월하다. 답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게끔 대화의 차원을 달리하신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치유하고 예배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만나 회복의 감격을 맛봤다. 예수님은 그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여인에게 감동과 함께 행동의 강한 동기를 부여한다. 그 여인 때문에 전도가 일어나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은 기막힌 화술가셨다. 대화의 소재를 제대로 고르실 줄 알았고 물질적인 대화를 영적인 대화로, 형이하학적 대화를 형이상학적 대화로 차원을 달리하며 대화를 리드하셨다. 여인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수치심의 본질을 아시고 그것을 드러내도록 대화를 이끌었으며 사마리아인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시면서 동시에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잡으셨다.
이것은 신약의 4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이 행하신 가장 탈무드적이고 가장 탁월한 대화법의 모범을 보여 주신 본문이다. 나는 탈무드식 대화법을 이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예수님은 진정한 탈무드식 대화의 달인이셨다.
http://lavisionchurch.com/public/bbsCue.asp?Call=show&id=C97596829354422911&ref=20&step=1&level=0&page=1
--------------------- 퍼온 자료 끝 ---------------------------------
 
작성예정입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