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용수_쉐마인성교육_"탈무드의 탄생 비화 제1편"에 대하여
현용수_쉐마인성교육_"탈무드의 탄생 비화 제1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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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탈무드의 탄생 비화 제1편
이 글은 '바보들의 탈무드(저자 랍비 아론 페리)' 제2장 In the Beginning편(pp. 15~23)을 번역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대주의는 그 중심부에 핵심가치들 또는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자손대대로 전수했다. 유대주의의 신앙체계는 크게 두 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하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는 오직 한 분이며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세는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유대의 역사는 물론, 모세 이전에 이미 시작하고 있다. 모세는 BC 13세기에서 12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탈무드의 역사는 모세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장에서는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신적 지도를 받았는지, 또한 시내산에서 시작된 장로의 유전이 발전하여 어떻게 탈무드가 되었는지를 알아보자.
모세
모세는 위대한 입법자이며 현자였다. 그는 고대의 불편한 시대에 태어났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자기 나라에 들어온 다른 민족들과 달리 동화를 거부하는 유대민족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생각했다.
이런 강박관념은 야곱의 후손들이 너무 많아지고 힘이 강대해져서 적들과 합세하여 나라를 뒤집을지 모른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변질됐다. 그래서 파라오는 포고령을 내려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 아이는 태어나면 바로 죽이라고 명했다.
모세는 암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난 세 번째 아이이고 두 번째 아들이었다. 부모들은 모두 레위족속이었다. 암람과 요게벳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붙였다. 하지만 모세를 숨긴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결국 누군가 아이를 발견하여 동정심을 베풀 것을 기대하며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띄워 보냈다. 운명의 장난일까? 아이를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파라오의 딸이었다. 모세는 파라오의 딸의 양자로서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유모로 들어온 그의 친모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다. 혈육이 가까이 있음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민족과 계속해서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히브리인들에 대한 핍박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러 차례 히브리인들을 대신해서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한 유대인을 때리는 이집트 관원을 죽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온 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양치는 목자가 된 그는 장인의 양들을 보살폈다.
그가 하나님을 처음 대면한 것은 양을 돌볼 때였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한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요청해서 히브리 배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도록 하셨다.
애초에 모세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는 히브리 백성이 그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확신시키기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해 수많은 히브리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셨다. 힘을 얻은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히브리 백성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내 민족을 떠나게 하라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은 파라오에게 히브리인들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파라오는 거절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렸다. 각각의 재앙은 앞엣 것 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다.
파라오는 성경이 언급한 대로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각 재앙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막 열 번째 장자 재앙에 가서야 파라오 자신의 첫 아들을 잃은 후 히브리 백성들이 떠나도록 허락했다. 그렇지만 파라오는 마음을 바꾸어 군대를 뒤따라 보냈다. 홍해의 갈라짐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살았으나 그가 보낸 군대는 수장되고 말았다.
시내산 계시
두 달간 광야을 여행한 끝에 모세와 그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했다. 시내산에서 그는 계속해서 그의 백성들과 하나님 간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산에 올랐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만약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특별한 은혜를 베풀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시내산에 내려온 모세는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고 백성들은 환영하면서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백성들의 마음을 고했다. 하나님과 모세는 40일 동안 함께 머물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에 하나님은 장로의 유전을 구성하는 613개의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는 모세가 돌판에 새긴 십계명(성경에는 두 세트의 십계명이 존재한다)은 장로의 유전의 간판이며 성문법(토라와 히브리 성경의 다른 부분)의 일부이다. 이 정보는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했던 39년간 걸쳐 쓰여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것들을 받아 적게 하셨다. 이 기간에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율법들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쳤다.
모세는 그의 핵심 가르침을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했다. 이 책들은 히브리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기독교 성경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장로의 유전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 영원히 유대인들만의 고유한 재산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했다. 그 땅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여러 번의 고별사를 남겼다. 그는 그 고별사에서 율법과 의로운 삶에 대해 다시 가르쳤다. 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에게 율법을 보호할 방도를 세우라고 일렀다. 그런 뒤 그는 가까운 산 정상에 올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았다.
탈무드는 모세가 정확무오한 토라 두루마리 13개를 작성했다고 말한다. 12개는 각각 12지파를 위해서, 나머지 하나는 언약궤에 넣어 두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성막 안에 소재했다. 움직일 수 있는 예배처였던 성막은 BC 1450년 경 모세의 감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언약궤 안의 토라 두루마리는 후에 작성된 토라의 표준이 되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완전한 율법이 뒤에 남았다. 모세의 가르침에 어떤 것도 빼거나 더할 수 없었다.
바통 물려주기: 초기의 선지자들과 서기관들
모세 사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선지자와 교사들을 배출했다. 4장에서 수많은 리더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탈무드는 모세로부터 AD 70년 이스라엘이 패망할 때까지 줄잡아 적어도 100만 명의 선지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누구도 백성들에게 새로운 율법을 소개한 적이 없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율법을 떠나 사는 백성들을 꾸짖어서 다시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
선지자들은 모세로부터 얻은 기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왕국의 고난과 궁극적인 구원 그리고 그 땅에서 평화와 화합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그 주제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개념이 살아서 움직이는가 하는 데 대한 생생한 실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모세가 받은 율법에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백성들이 모세의 율법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모세가 스스로 세운 논리적 논쟁을 사용하여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확한 가르침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성문화 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선생이 제자에게 전수했다. 어떤 현자가 어떤 법률적 의견을 내면 그것은 명백하게 반대가 아닌 한 그의 선생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맨 처음 만든 사람을 따라 교훈과 전통은 반복되었다. 후세인은 선배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시편 39편 7절에는 "그들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이 걸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이 시스템은 유대인들이 지도자들과 함께 가나안에서 거주할 때는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땅에서 오랫동안 평화롭고 고요하게 살 운명은 아니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가나안 남쪽에는 블레셋이 자리를 잡고 유대인들을 지배해 버렸다. 잠시동안 유대인들은 다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블레셋의 확장을 막았다.
로마의 통치
블레셋만이 이스라엘인들이 조심해야 했던 민족은 아니었다. 중동의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이 그들의 땅으로 진출하려 했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많은 민족 중 로마는 가장 어려운 적수였다. 로마는 BC 63년에 가나안을 맨처음 점령했다. 로마는 토라를 가르치면 처형과 추방을 서슴지 않았다. 많은 현자들이 몸을 낮추고 흩어져서 비밀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두 번에 걸쳐 다시 모였다. 한 번은 AC 122년 웃싸에서, 또 한 번은 AD 158년 야브네에서 모인 유대인 현자들은 토라연구와 보급을 보전할 법률 제정을 결정하였다.
로마의 압제가 더욱 심해지자 장로의 유전을 보호할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은 뛰어난 전세대 지도자급 학자들이 로마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많은 전통들이 그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는 수 없이 유대인 현자들은 장로의 유전의 성문화를 추진했다.
장로의 유전의 편집
AD 170년 ~ 200년 경 왕자 또는 단순히 랍비라고도 불린 랍비 예후다 하나시는 몹시 힘든 장로의 유전 성문화 작업을 시작했다. 다윗 왕의 자손이기도 한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리더였다. 그들의 수장으로써 그는 로마 황제 마르코스 아우렐리우스와 가깝게 지내다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들의 우정의 결과로 로마와 이스라엘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유대인 현자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모든 현자들의 머릿 속에 담긴 가르침들을 기록했다.
랍비는 기본적인 장로의 유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체계화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를 서로 다른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하는 토라와 달리, 미쉬나는 주제별로 정리하고 여섯 개 섹션으로 나누었다.
-Zera'im (Seeds): 농법과 기도. 이 섹션은 AD 70년 성전이 훼파된 뒤 예배의 형식이 되었다.
-Mo'ed (Time or Season): 안식일과 다른 종교적 절기에 관련된 율법.
-Nashim (Woman): 결혼 계약, 재정적 의무, 여자의 지위, 혼인무효, 이혼 등을 포함한 가족법.
-Nezikin (Damages): 법원 절차, 불법행위, 개인적 책임, 벌금과 처벌 등을 포함한 시민법.
-Kodshim (Sacred Things): 희생제물을 포함한 성전에서의 제사의식.
-Taharot (Purity): 제사적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칙.
여기서부터 랍비는 각 섹션을 평론이라는 하부 섹션으로 더 자세히 나눴다. 각 평론은 또 여러 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정보를 편집하면서 랍비는 주요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편입시키거나 단순히 그것을 익명으로 기록했다. 그는 반대 의견을 포함하여 후세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는 비난을 피하려 했다. 이런 의견들은 또한 대단히 길고 메마른 법적 토론을 한층 생동감 있게 만든다.
미쉬나에 참여한 랍비들을 Tanna'im이라 부른다. 아람어로 선생들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랍비 그룹은 장로의 유전에 그들의 통찰력을 첨가했다.
미쉬나와 더불어, 다른 가르침들도 성문화된 탈무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The Tosefta (부록): 랍비가 수제자였던 랍비 오샤야(Oshaya)와 랍비 히야(Chiya)에게 직접 가르쳤던 미쉬나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The Mechilta: 출애굽기에 대한 해설.
-The Sifra: 레위기에 대한 법적 판결.
-The Sifri: 민수기와 신명기에 대한 법적 판결.
-The Zorah(빛): 유대주의의 신비적인 가르침에 관한 책. 대개 zorah의 글을 토대로 한 카발라(Kabbalah) 또는 유대인의 신비주의를 말함.
미쉬나에 포함되지 못한 글들 중에서 미쉬나 내용에 대한 논쟁인 Tosefta는 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랍비는 미쉬나를 가능하면 짧고 간단하게 만들고 미쉬나의 바깥에 그 tosefta를 따로 수집된 형태로 보존하고 싶어 했다. 거의 모든 탈무드 편집본은 Tosefta를 바로 뒷 페이지에 포함했다. 다른 글들은 총체적으로 Baraitot라 불린다. 이 글들은 랍비 학교 밖에서 온 것들이다. 때로는 미쉬나에 논쟁이 되거나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많은 경우, 탈무드는 이들의 관점을 보여주고 그것들과 관련된 미쉬나의 부분적 내용에 대하여 반박하기도 한다. 만약 반박이 여전하다면 Baraitot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묵살된다.
율법 감추기
장로의 유전은 비밀 코드와 같이 극히 암호화된 형태로 기록되었다. 이에 현자들조차도 좀 이해하기 힘든 면이 없지 않았다. 글은 모음, 마침표 그리고 문단 나누기 등이 잘 안돼 있어서 앞뒤를 분간하기 힘들고 종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어려운지 예를 들어보자. 아랫글은 MSN의 엔카르타에 나온 것이다. 탈무드 스타일로 쓰면 이렇다:
The Great Wall of China(중국의 만리장성)
Walls comprising Great Wall of China, the mountainous contours, Chinas northern frontier, stretching gulf of Bo Hai in e. to Gansu Province in w. Stretches, walls' builders watchtowers alarm signals passed in case of attack. Top of the walls, builders space soldiers march.
정상적으로 쓰인 글을 보면,
The Great Wall of China
The Walls comprising the Great Wall of China follow the mountainous contours of China's northern frontier, stretching from the gulf of Bo Hai in the east to Gansu Privince on the west. In some stretches, the walls' builders placed watch towers between which alarm signals could be passed in case of attack. Along the top of the walls the builders created space for soldiers to march.
장성을 구성하는 벽은 중국의 북부 지방의 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동쪽으로는 보하이 만에서 서쪽으로 간수까지 뻗어 있다. 어떤 곳에서는 성벽 만드는 사람들이 경계초소를 사이사이에 세워 비상시에 경고신호가 전달되도록 했다. 성벽의 꼭대기에는 군인들이 행진할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 두었다.
오늘날까지도 아주 노련한 학자들만이 탈무드 코드를 풀 수 있다.
전통은 계속된다
약 AD 200년 경 랍비가 죽은 후 미쉬나는 설명자 또는 해석자를 뜻했던 아모라임(Amoraim)이라 불리는 각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점차 연구되고 확장되었다. 그들은 그 전통을 강화했고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데 이바지했다. 일부는 토론한 내용이나 해석을 적어두었다. 게다가 그들은 미쉬나의 어떤 부분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것과 전체적으로 권위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AD 400년 경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던 랇비들이 함께 모여 미쉬나를 토론했다. 그것을 일러 게마라라고 한다. 미쉬나는 일련의 책으로 묶였다. 그들의 작품은 팔레스타인 탈무드 또는 히브리어로 예루살렘 탈무드를 뜻하는 탈무드 예루살미(Talmud Yerushalmi)로 불렸다.
한 세기 가량 지난 후 바빌론에 있던 랍비들이 같은 문제에 부딪혀 장로의 유전을 성문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게마라를 미쉬나에 덧붙여 편집한 뒤 바빌로니언 탈무드 또는 탈무드 바빌리를 엮어냈다. 한 세기 동안 현자들의 통찰력과 의견을 모아놓은 바빌로니언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바빌로니언 탈무드는 장로의 유전의 가장 권위 있는 편집본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탈무드를 연구한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 바빌로니언 탈무드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D 499년 경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로의 유전을 잃어버리거나 변질될 우려를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된 가르침은 탈무드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Gemara(게마라)는 마치다 라는 뜻이다.
* Baraitot는 외부의 전통 또는 밖엣 것이라는 뜻이다.
http://lavisionchurch.com/public/bbsCue.asp?Call=show&id=C97596829354422911&ref=14&step=1&level=0&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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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탈무드의 탄생 비화 제1편
이 글은 '바보들의 탈무드(저자 랍비 아론 페리)' 제2장 In the Beginning편(pp. 15~23)을 번역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대주의는 그 중심부에 핵심가치들 또는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자손대대로 전수했다. 유대주의의 신앙체계는 크게 두 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하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는 오직 한 분이며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세는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유대의 역사는 물론, 모세 이전에 이미 시작하고 있다. 모세는 BC 13세기에서 12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탈무드의 역사는 모세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장에서는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신적 지도를 받았는지, 또한 시내산에서 시작된 장로의 유전이 발전하여 어떻게 탈무드가 되었는지를 알아보자.
모세
모세는 위대한 입법자이며 현자였다. 그는 고대의 불편한 시대에 태어났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자기 나라에 들어온 다른 민족들과 달리 동화를 거부하는 유대민족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생각했다.
이런 강박관념은 야곱의 후손들이 너무 많아지고 힘이 강대해져서 적들과 합세하여 나라를 뒤집을지 모른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변질됐다. 그래서 파라오는 포고령을 내려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 아이는 태어나면 바로 죽이라고 명했다.
모세는 암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난 세 번째 아이이고 두 번째 아들이었다. 부모들은 모두 레위족속이었다. 암람과 요게벳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붙였다. 하지만 모세를 숨긴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결국 누군가 아이를 발견하여 동정심을 베풀 것을 기대하며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띄워 보냈다. 운명의 장난일까? 아이를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파라오의 딸이었다. 모세는 파라오의 딸의 양자로서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유모로 들어온 그의 친모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다. 혈육이 가까이 있음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민족과 계속해서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히브리인들에 대한 핍박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러 차례 히브리인들을 대신해서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한 유대인을 때리는 이집트 관원을 죽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온 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양치는 목자가 된 그는 장인의 양들을 보살폈다.
그가 하나님을 처음 대면한 것은 양을 돌볼 때였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한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요청해서 히브리 배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도록 하셨다.
애초에 모세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는 히브리 백성이 그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확신시키기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해 수많은 히브리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셨다. 힘을 얻은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히브리 백성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내 민족을 떠나게 하라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은 파라오에게 히브리인들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파라오는 거절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렸다. 각각의 재앙은 앞엣 것 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다.
파라오는 성경이 언급한 대로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각 재앙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막 열 번째 장자 재앙에 가서야 파라오 자신의 첫 아들을 잃은 후 히브리 백성들이 떠나도록 허락했다. 그렇지만 파라오는 마음을 바꾸어 군대를 뒤따라 보냈다. 홍해의 갈라짐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살았으나 그가 보낸 군대는 수장되고 말았다.
시내산 계시
두 달간 광야을 여행한 끝에 모세와 그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했다. 시내산에서 그는 계속해서 그의 백성들과 하나님 간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산에 올랐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만약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특별한 은혜를 베풀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시내산에 내려온 모세는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고 백성들은 환영하면서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백성들의 마음을 고했다. 하나님과 모세는 40일 동안 함께 머물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에 하나님은 장로의 유전을 구성하는 613개의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는 모세가 돌판에 새긴 십계명(성경에는 두 세트의 십계명이 존재한다)은 장로의 유전의 간판이며 성문법(토라와 히브리 성경의 다른 부분)의 일부이다. 이 정보는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했던 39년간 걸쳐 쓰여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것들을 받아 적게 하셨다. 이 기간에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율법들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쳤다.
모세는 그의 핵심 가르침을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했다. 이 책들은 히브리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기독교 성경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장로의 유전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 영원히 유대인들만의 고유한 재산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했다. 그 땅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여러 번의 고별사를 남겼다. 그는 그 고별사에서 율법과 의로운 삶에 대해 다시 가르쳤다. 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에게 율법을 보호할 방도를 세우라고 일렀다. 그런 뒤 그는 가까운 산 정상에 올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았다.
탈무드는 모세가 정확무오한 토라 두루마리 13개를 작성했다고 말한다. 12개는 각각 12지파를 위해서, 나머지 하나는 언약궤에 넣어 두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성막 안에 소재했다. 움직일 수 있는 예배처였던 성막은 BC 1450년 경 모세의 감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언약궤 안의 토라 두루마리는 후에 작성된 토라의 표준이 되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완전한 율법이 뒤에 남았다. 모세의 가르침에 어떤 것도 빼거나 더할 수 없었다.
바통 물려주기: 초기의 선지자들과 서기관들
모세 사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선지자와 교사들을 배출했다. 4장에서 수많은 리더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탈무드는 모세로부터 AD 70년 이스라엘이 패망할 때까지 줄잡아 적어도 100만 명의 선지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누구도 백성들에게 새로운 율법을 소개한 적이 없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율법을 떠나 사는 백성들을 꾸짖어서 다시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
선지자들은 모세로부터 얻은 기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왕국의 고난과 궁극적인 구원 그리고 그 땅에서 평화와 화합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그 주제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개념이 살아서 움직이는가 하는 데 대한 생생한 실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모세가 받은 율법에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백성들이 모세의 율법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모세가 스스로 세운 논리적 논쟁을 사용하여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확한 가르침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성문화 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선생이 제자에게 전수했다. 어떤 현자가 어떤 법률적 의견을 내면 그것은 명백하게 반대가 아닌 한 그의 선생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맨 처음 만든 사람을 따라 교훈과 전통은 반복되었다. 후세인은 선배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시편 39편 7절에는 "그들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이 걸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이 시스템은 유대인들이 지도자들과 함께 가나안에서 거주할 때는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땅에서 오랫동안 평화롭고 고요하게 살 운명은 아니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가나안 남쪽에는 블레셋이 자리를 잡고 유대인들을 지배해 버렸다. 잠시동안 유대인들은 다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블레셋의 확장을 막았다.
로마의 통치
블레셋만이 이스라엘인들이 조심해야 했던 민족은 아니었다. 중동의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이 그들의 땅으로 진출하려 했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많은 민족 중 로마는 가장 어려운 적수였다. 로마는 BC 63년에 가나안을 맨처음 점령했다. 로마는 토라를 가르치면 처형과 추방을 서슴지 않았다. 많은 현자들이 몸을 낮추고 흩어져서 비밀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두 번에 걸쳐 다시 모였다. 한 번은 AC 122년 웃싸에서, 또 한 번은 AD 158년 야브네에서 모인 유대인 현자들은 토라연구와 보급을 보전할 법률 제정을 결정하였다.
로마의 압제가 더욱 심해지자 장로의 유전을 보호할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은 뛰어난 전세대 지도자급 학자들이 로마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많은 전통들이 그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는 수 없이 유대인 현자들은 장로의 유전의 성문화를 추진했다.
장로의 유전의 편집
AD 170년 ~ 200년 경 왕자 또는 단순히 랍비라고도 불린 랍비 예후다 하나시는 몹시 힘든 장로의 유전 성문화 작업을 시작했다. 다윗 왕의 자손이기도 한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리더였다. 그들의 수장으로써 그는 로마 황제 마르코스 아우렐리우스와 가깝게 지내다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들의 우정의 결과로 로마와 이스라엘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유대인 현자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모든 현자들의 머릿 속에 담긴 가르침들을 기록했다.
랍비는 기본적인 장로의 유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체계화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를 서로 다른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하는 토라와 달리, 미쉬나는 주제별로 정리하고 여섯 개 섹션으로 나누었다.
-Zera'im (Seeds): 농법과 기도. 이 섹션은 AD 70년 성전이 훼파된 뒤 예배의 형식이 되었다.
-Mo'ed (Time or Season): 안식일과 다른 종교적 절기에 관련된 율법.
-Nashim (Woman): 결혼 계약, 재정적 의무, 여자의 지위, 혼인무효, 이혼 등을 포함한 가족법.
-Nezikin (Damages): 법원 절차, 불법행위, 개인적 책임, 벌금과 처벌 등을 포함한 시민법.
-Kodshim (Sacred Things): 희생제물을 포함한 성전에서의 제사의식.
-Taharot (Purity): 제사적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칙.
여기서부터 랍비는 각 섹션을 평론이라는 하부 섹션으로 더 자세히 나눴다. 각 평론은 또 여러 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정보를 편집하면서 랍비는 주요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편입시키거나 단순히 그것을 익명으로 기록했다. 그는 반대 의견을 포함하여 후세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는 비난을 피하려 했다. 이런 의견들은 또한 대단히 길고 메마른 법적 토론을 한층 생동감 있게 만든다.
미쉬나에 참여한 랍비들을 Tanna'im이라 부른다. 아람어로 선생들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랍비 그룹은 장로의 유전에 그들의 통찰력을 첨가했다.
미쉬나와 더불어, 다른 가르침들도 성문화된 탈무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The Tosefta (부록): 랍비가 수제자였던 랍비 오샤야(Oshaya)와 랍비 히야(Chiya)에게 직접 가르쳤던 미쉬나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The Mechilta: 출애굽기에 대한 해설.
-The Sifra: 레위기에 대한 법적 판결.
-The Sifri: 민수기와 신명기에 대한 법적 판결.
-The Zorah(빛): 유대주의의 신비적인 가르침에 관한 책. 대개 zorah의 글을 토대로 한 카발라(Kabbalah) 또는 유대인의 신비주의를 말함.
미쉬나에 포함되지 못한 글들 중에서 미쉬나 내용에 대한 논쟁인 Tosefta는 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랍비는 미쉬나를 가능하면 짧고 간단하게 만들고 미쉬나의 바깥에 그 tosefta를 따로 수집된 형태로 보존하고 싶어 했다. 거의 모든 탈무드 편집본은 Tosefta를 바로 뒷 페이지에 포함했다. 다른 글들은 총체적으로 Baraitot라 불린다. 이 글들은 랍비 학교 밖에서 온 것들이다. 때로는 미쉬나에 논쟁이 되거나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많은 경우, 탈무드는 이들의 관점을 보여주고 그것들과 관련된 미쉬나의 부분적 내용에 대하여 반박하기도 한다. 만약 반박이 여전하다면 Baraitot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묵살된다.
율법 감추기
장로의 유전은 비밀 코드와 같이 극히 암호화된 형태로 기록되었다. 이에 현자들조차도 좀 이해하기 힘든 면이 없지 않았다. 글은 모음, 마침표 그리고 문단 나누기 등이 잘 안돼 있어서 앞뒤를 분간하기 힘들고 종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어려운지 예를 들어보자. 아랫글은 MSN의 엔카르타에 나온 것이다. 탈무드 스타일로 쓰면 이렇다:
The Great Wall of China(중국의 만리장성)
Walls comprising Great Wall of China, the mountainous contours, Chinas northern frontier, stretching gulf of Bo Hai in e. to Gansu Province in w. Stretches, walls' builders watchtowers alarm signals passed in case of attack. Top of the walls, builders space soldiers march.
정상적으로 쓰인 글을 보면,
The Great Wall of China
The Walls comprising the Great Wall of China follow the mountainous contours of China's northern frontier, stretching from the gulf of Bo Hai in the east to Gansu Privince on the west. In some stretches, the walls' builders placed watch towers between which alarm signals could be passed in case of attack. Along the top of the walls the builders created space for soldiers to march.
장성을 구성하는 벽은 중국의 북부 지방의 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동쪽으로는 보하이 만에서 서쪽으로 간수까지 뻗어 있다. 어떤 곳에서는 성벽 만드는 사람들이 경계초소를 사이사이에 세워 비상시에 경고신호가 전달되도록 했다. 성벽의 꼭대기에는 군인들이 행진할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 두었다.
오늘날까지도 아주 노련한 학자들만이 탈무드 코드를 풀 수 있다.
전통은 계속된다
약 AD 200년 경 랍비가 죽은 후 미쉬나는 설명자 또는 해석자를 뜻했던 아모라임(Amoraim)이라 불리는 각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점차 연구되고 확장되었다. 그들은 그 전통을 강화했고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데 이바지했다. 일부는 토론한 내용이나 해석을 적어두었다. 게다가 그들은 미쉬나의 어떤 부분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것과 전체적으로 권위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AD 400년 경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던 랇비들이 함께 모여 미쉬나를 토론했다. 그것을 일러 게마라라고 한다. 미쉬나는 일련의 책으로 묶였다. 그들의 작품은 팔레스타인 탈무드 또는 히브리어로 예루살렘 탈무드를 뜻하는 탈무드 예루살미(Talmud Yerushalmi)로 불렸다.
한 세기 가량 지난 후 바빌론에 있던 랍비들이 같은 문제에 부딪혀 장로의 유전을 성문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게마라를 미쉬나에 덧붙여 편집한 뒤 바빌로니언 탈무드 또는 탈무드 바빌리를 엮어냈다. 한 세기 동안 현자들의 통찰력과 의견을 모아놓은 바빌로니언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바빌로니언 탈무드는 장로의 유전의 가장 권위 있는 편집본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탈무드를 연구한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 바빌로니언 탈무드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D 499년 경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로의 유전을 잃어버리거나 변질될 우려를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된 가르침은 탈무드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Gemara(게마라)는 마치다 라는 뜻이다.
* Baraitot는 외부의 전통 또는 밖엣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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