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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의 생각

이효상 원장 정약전의 ‘자산어보’, 영화로 만나다

오늘 오후에 기독교보를 보니 
"정약전의 ‘자산어보’, 영화로 만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영화로 만나다.
기자명 기독교보   입력 2021.04.10 23:58  조회수 34 

글쓴이: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서지학자, 근대문화진흥원)
영화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정약전(배우 설경구)

영화 '자산어보' 시사회에서 근대문화진흥원 이효상 원장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정약용 초상

최근 화제가 되는 영화가 개봉됐다. 볼만하다.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다. 배우 설경구가 주인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역(役)으로, 그의 형제 다산 정약용(丁若鏞)역(役)에 류승룡이, 그리고 변요한이 흑산도 청년 장창대(張昌大) 역(役)으로 나온다. 이들이 받아들인 서학(西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약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영화 ‘동주(東柱)’를 예전에 찍은 이준익 감독이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사람 냄새와 바닷냄새가 물씬 나는 볼수록 진한 여운이 묻어나는 영화다. 색상 시대를 넘어 3D/4D 시대에 다시 흑백영화를 본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흑백 사진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感性)을 되살린 참 좋은 영화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정약전의 책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주자의 성리학을 더럽히고 백성을 현혹하는 서학(西學)을 했다는 이유로, 신앙의 배교자가 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흑산도로 유배 간 약전과 약용, 그리고 그와 함께 훗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실용서를 쓴 창대와의 우정이 영화 ‘자산어보’의 주요 골격이다.

정약전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차남으로,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의 형이다.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성호 이익(李瀷)에게 지도를 받으며 서양의 신(新)학문을 익혔고, 이 집안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일명 서학으로 불리는 기독교(天主敎)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 집안과 관련된 인사들은 이승훈, 이벽, 황사영 등이 모두 매형, 처남, 사위 등으로 연결된다. 정조 7년(1783) 생원시, 정조 14년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종 9품)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정약전의 직급이 먼저 급제한 동생보다 낮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위 21년 정약용을 곡산부사에 제수하면서 정약전을 특진시켜 사관(정6품)에 제수했다. 약전‧약용 형제의 인품과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정조의 애정 어린 배려였다.

그러나 재위 24년(1800) 정조가 독살당하면서 약전‧약용 형제의 관운도, 조선의 명운도 함께 끝났다. 1800년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해였다. 순조(純祖) 원년(1801)에 일어난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 백서사건 등이 터지자 수많은 명신과 함께 약전‧약용 형제도 서학과 신앙을 받아들인 죄목으로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이때 전라도까지 함께 내려간 형제는 나주에서 길이 엇갈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이곳 주민 문순득(文淳得)이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와 중국을 거쳐서, 만 3년만인 순조(純祖) 5년(1805)에 조선으로 돌아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갔다. 문순득에게서 표류의 전말을 듣고 조선시대 홍어장수표류기인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著述)했는데 이는 조선시대판 ‘하멜표류기’다. 순조(純祖) 원년(1801) 제주도(濟州島)에 낯선 배 한 척이 표류했다. 배에는 외국인 5명이 타고 있었는데, 나라 이름을 쓰라 하니 막가외(莫可外)라만 하여 몰라서 중국 요녕성 성경으로 보냈다.

1802년(임술년, 순조 2년) 10월. 중국 성경의 예부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 알 길이 없다며 조선으로 다시 보냈다. 그 와중에 5명 중 1명 병사했다. 관청의 건물과 먹거리를 내주고 조선의 풍토와 언어를 익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4명 중 1명 또 사망하게 된다.

1807년(순조 7년) 8월 10일. 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들이 ‘여송인(呂宋人, Luzon(현재 필리핀의 루손섬)’임을 알고, 본국 송환을 상계한다. 이들 표류인을 제주에 표류해온 ‘유구인’(琉球人, 현재 일본 오키나와)들과 만나게 하니 유구인 궁평(宮平)이 여송인임을 알아차렸다. 유구사람 통사 경필진이 궁평에게 물으니,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하며 문순득 일행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며 알려주었다. 여송국과의 외교 소통이 없고, 중국에서 이들을 송출한 예가 있어서 유구인에게 부탁하여 보내라 명하였으나, 유구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1809년(순조 9년) 6월 26일. 통역관 문순득을 만나게 하여 여송국 방언으로 문답하니 딱 들어맞았다. 비로소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켰던 이야기를 기술했다.

흑산도에 와서 무서움이 많았던 약전은 창대를 만나 어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삶을 살게 된다. 흑산도의 정약전은 생업도 외면한 채 오로지 물고기 연구에 평생을 바쳐오고 있는 장덕순(張德順) 또는 장창대(張昌大)라 불리는 사람의 “홍어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라는 말에 도전을 받아 어류에 대해 널리 알려 백성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함께 연구해 이 어류도감을 만들게 된다. 집으로 불러 함께 기거하며 물고기 공동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이 평생 관찰해온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론을 붙여 순조(純祖) 14년(1814) 그는 각종 물고기와 해조류를 포함해서 수중생물 226종(種)의 명칭, 크기, 형태, 외형의 특징, 생태, 맛, 어획 시기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한 ‘자산어보’를 펴낸다. 자산(玆山)은 흑산도의 다른 이름이고, 어보(魚譜)는 물고기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은 흑산도라고 하면 서신을 받아보는 가족들이 무섭게 여길까 싶어 섬 이름을 자산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산어보’ 서문에서 자신을 ‘박물자(博物者)’, 요즘 말로 하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창대가 ‘자산어보’보다 ‘목민심서’의 길을 택하여 진사로 공직에 나가게 된다. 창대는 권력이 있으면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약전은 유배 생활 16년 만인 순조(純祖) 16년(1816)에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이도(牛耳島)에서 자신의 생(生)을 마감한다. 그런데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라 형의 장례(葬禮)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전의 장례를 대신 치러준 사람이 바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의 주인공 문순득(文淳得)이다.

조선 후기는 실학의 영향으로 백과사전류의 책이 저술된다. 건축, 의학, 과학, 수학, 천문학, 생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9세기 조선의 지식을 집대성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출판된다. 이렇게 명작들이 나오자 그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겐 충격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자산어보’나 ‘임원경제지’처럼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내용의 책을 저술했던 것은 근대화를 위한 조선 나름의 최선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은 이후 쇠락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동생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고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그들과 함께, 순창 군수와 전라감사를 지낸 서유구도 순조(純祖) 6년(1806)부터 헌종(憲宗) 8년(1842)까지 36년에 걸쳐 일평생 집필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을 열어갔다.

약전과 약용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아니었을까? 또 그들에게 신앙과 순교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틀에 갇혀 서학을 못 받아들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 시대에 “누가 주인이냐”는 약전의 외침은 진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온다. 그에게 어보는 어떤 의미였을까? 약용에게 목민심서나 약전에게 자산어보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해야 할 일 즉 사명이 아니었을까?

상하(上下)를 따지고, 나와 다름을 거부하는 시대가 조선시대인데도 약전은 자신을 창대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창대의 스승이 아닌 ‘우리 거래하자’라고 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관계를 만들어갔다. 그 시대를 앞선 사상이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느 시대든 시대 문화발전과 성숙은 다양성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를 즐길 줄 아는 수용의 마음과 태도를 지니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창의성의 근원이자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의 차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양함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사회를 함께 이루려는 것이 건강한 시민들의 꿈이었으면 한다.

자료출처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79


이 기사의 하단에 보면, 이 기사를 실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정약용 #정약전 #신앙과 순교 #조선시대 #유배지 #강진 #흑산도 


해시태그를 잘 보면, 
"#신앙과 순교" 있다. 
정약전오후에 기독교보를 보니 
"정약전의 ‘자산어보’, 영화로 만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영화로 만나다.
기자명 기독교보 입력 2021.04.10 23:58 조회수 34 

글쓴이: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서지학자, 근대문화진흥원)
영화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정약전(배우 설경구)

영화 '자산어보' 시사회에서 근대문화진흥원 이효상 원장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정약용 초상

최근 화제가 되는 영화가 개봉됐다. 볼만하다.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다. 배우 설경구가 주인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역(役)으로, 그의 형제 다산 정약용(丁若鏞)역(役)에 류승룡이, 그리고 변요한이 흑산도 청년 장창대(張昌大) 역(役)으로 나온다. 이들이 받아들인 서학(西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약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영화 ‘동주(東柱)’를 예전에 찍은 이준익 감독이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사람 냄새와 바닷냄새가 물씬 나는 볼수록 진한 여운이 묻어나는 영화다. 색상 시대를 넘어 3D/4D 시대에 다시 흑백영화를 본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흑백 사진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感性)을 되살린 참 좋은 영화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정약전의 책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주자의 성리학을 더럽히고 백성을 현혹하는 서학(西學)을 했다는 이유로, 신앙의 배교자가 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흑산도로 유배 간 약전과 약용, 그리고 그와 함께 훗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실용서를 쓴 창대와의 우정이 영화 ‘자산어보’의 주요 골격이다.

정약전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차남으로,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의 형이다.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성호 이익(李瀷)에게 지도를 받으며 서양의 신(新)학문을 익혔고, 이 집안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일명 서학으로 불리는 기독교(天主敎)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 집안과 관련된 인사들은 이승훈, 이벽, 황사영 등이 모두 매형, 처남, 사위 등으로 연결된다. 정조 7년(1783) 생원시, 정조 14년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종 9품)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정약전의 직급이 먼저 급제한 동생보다 낮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위 21년 정약용을 곡산부사에 제수하면서 정약전을 특진시켜 사관(정6품)에 제수했다. 약전‧약용 형제의 인품과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정조의 애정 어린 배려였다.

그러나 재위 24년(1800) 정조가 독살당하면서 약전‧약용 형제의 관운도, 조선의 명운도 함께 끝났다. 1800년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해였다. 순조(純祖) 원년(1801)에 일어난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 백서사건 등이 터지자 수많은 명신과 함께 약전‧약용 형제도 서학과 신앙을 받아들인 죄목으로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이때 전라도까지 함께 내려간 형제는 나주에서 길이 엇갈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이곳 주민 문순득(文淳得)이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와 중국을 거쳐서, 만 3년만인 순조(純祖) 5년(1805)에 조선으로 돌아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갔다. 문순득에게서 표류의 전말을 듣고 조선시대 홍어장수표류기인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著述)했는데 이는 조선시대판 ‘하멜표류기’다. 순조(純祖) 원년(1801) 제주도(濟州島)에 낯선 배 한 척이 표류했다. 배에는 외국인 5명이 타고 있었는데, 나라 이름을 쓰라 하니 막가외(莫可外)라만 하여 몰라서 중국 요녕성 성경으로 보냈다.

1802년(임술년, 순조 2년) 10월. 중국 성경의 예부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 알 길이 없다며 조선으로 다시 보냈다. 그 와중에 5명 중 1명 병사했다. 관청의 건물과 먹거리를 내주고 조선의 풍토와 언어를 익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4명 중 1명 또 사망하게 된다.

1807년(순조 7년) 8월 10일. 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들이 ‘여송인(呂宋人, Luzon(현재 필리핀의 루손섬)’임을 알고, 본국 송환을 상계한다. 이들 표류인을 제주에 표류해온 ‘유구인’(琉球人, 현재 일본 오키나와)들과 만나게 하니 유구인 궁평(宮平)이 여송인임을 알아차렸다. 유구사람 통사 경필진이 궁평에게 물으니,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하며 문순득 일행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며 알려주었다. 여송국과의 외교 소통이 없고, 중국에서 이들을 송출한 예가 있어서 유구인에게 부탁하여 보내라 명하였으나, 유구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1809년(순조 9년) 6월 26일. 통역관 문순득을 만나게 하여 여송국 방언으로 문답하니 딱 들어맞았다. 비로소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켰던 이야기를 기술했다.

흑산도에 와서 무서움이 많았던 약전은 창대를 만나 어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삶을 살게 된다. 흑산도의 정약전은 생업도 외면한 채 오로지 물고기 연구에 평생을 바쳐오고 있는 장덕순(張德順) 또는 장창대(張昌大)라 불리는 사람의 “홍어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라는 말에 도전을 받아 어류에 대해 널리 알려 백성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함께 연구해 이 어류도감을 만들게 된다. 집으로 불러 함께 기거하며 물고기 공동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이 평생 관찰해온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론을 붙여 순조(純祖) 14년(1814) 그는 각종 물고기와 해조류를 포함해서 수중생물 226종(種)의 명칭, 크기, 형태, 외형의 특징, 생태, 맛, 어획 시기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한 ‘자산어보’를 펴낸다. 자산(玆山)은 흑산도의 다른 이름이고, 어보(魚譜)는 물고기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은 흑산도라고 하면 서신을 받아보는 가족들이 무섭게 여길까 싶어 섬 이름을 자산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산어보’ 서문에서 자신을 ‘박물자(博物者)’, 요즘 말로 하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창대가 ‘자산어보’보다 ‘목민심서’의 길을 택하여 진사로 공직에 나가게 된다. 창대는 권력이 있으면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약전은 유배 생활 16년 만인 순조(純祖) 16년(1816)에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이도(牛耳島)에서 자신의 생(生)을 마감한다. 그런데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라 형의 장례(葬禮)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전의 장례를 대신 치러준 사람이 바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의 주인공 문순득(文淳得)이다.

조선 후기는 실학의 영향으로 백과사전류의 책이 저술된다. 건축, 의학, 과학, 수학, 천문학, 생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9세기 조선의 지식을 집대성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출판된다. 이렇게 명작들이 나오자 그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겐 충격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자산어보’나 ‘임원경제지’처럼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내용의 책을 저술했던 것은 근대화를 위한 조선 나름의 최선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은 이후 쇠락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동생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고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그들과 함께, 순창 군수와 전라감사를 지낸 서유구도 순조(純祖) 6년(1806)부터 헌종(憲宗) 8년(1842)까지 36년에 걸쳐 일평생 집필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을 열어갔다.

약전과 약용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아니었을까? 또 그들에게 신앙과 순교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틀에 갇혀 서학을 못 받아들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 시대에 “누가 주인이냐”는 약전의 외침은 진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온다. 그에게 어보는 어떤 의미였을까? 약용에게 목민심서나 약전에게 자산어보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해야 할 일 즉 사명이 아니었을까?

상하(上下)를 따지고, 나와 다름을 거부하는 시대가 조선시대인데도 약전은 자신을 창대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창대의 스승이 아닌 ‘우리 거래하자’라고 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관계를 만들어갔다. 그 시대를 앞선 사상이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느 시대든 시대 문화발전과 성숙은 다양성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를 즐길 줄 아는 수용의 마음과 태도를 지니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창의성의 근원이자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의 차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양함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사회를 함께 이루려는 것이 건강한 시민들의 꿈이었으면 한다.

자료출처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79

이 기사의 하단에 보면, 이 기사를 실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정약용 #정약전 #신앙과 순교 #조선시대 #유배지 #강진 #흑산도 

해시태그를 잘 보면, 
"#신앙과 순교" 있다. 
정약전은 무슨 신앙이고 무슨 순교인가? 
우리가 잘 알듯이, 정약전은 천주교인이다. 

기독교보에 글을 쓴 이효상 원장은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 증거는 다음 기사 자료에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을 떠올리며 한국사회를 생각하다.
JTNTV
http://jtntv.kr/2609602020.02.19 09:51:34
다산(茶山) 정약용을 떠올리며 한국사회를 생각하다.

이효상원장 칼럼 근대문화진흥원

한문성경이 중국을 통해 조선에 처음 전해진 것은 조선후기이다. 중국에 기독교를 전한 이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소속 선교사 '마테오리치'다. 그는 중국어를 배워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고『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지도까지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를 중국에 전하기 위해 유교를 공부하여 유교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유학자들의 한계를 찾아내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하므로 기독교는 ‘서교(西敎)’,'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반대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조선후기 대표적 유학자로『성호사설』을 저술한 이익(李瀷)은『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이다”라고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기독교(천주교), 즉 서학이 유교와 불교사상이 굳건한 조선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인조 때이다. 숙종 때에는 교세를 자못 떨쳤으며 영.정조 때에는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등 각처에 성행했다. 특히 영조시대에는 전성기를 맞아 이익(李瀷)을 중심한 서학연구는 그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되어 ‘조선서학’이란 학문체계가 수립됐고, 조선후기 실학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불안 속에서 서학사상은 지식층에게 새로운 개혁의식의 확대와 봉건사회에 대한 개혁의식의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서학이 크게 번창하게 되자 '서학서(西學書)'의 반입을 금지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서구의 문물을 배운 실학파 학자들이 기독교를 공부하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사상(西學)은 조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조선 봉건사회의 개혁을 이끌려는 실학파가 생겨났고 그 대표적 실학자 이익의 사상적 후계자가 ‘정약용’이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1784년 실학파 선구자인 이승훈은 사절로 북경에 갔다가 귀국 직전 예수회 신부 그라몽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명동에 있는 김범우 집에 조선 성당을 건립하고 그의 동지 이벽, 권철신. 권일신 형제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이가환 등과 공동으로 기독교를 포교했다. 당대의 유학자들이 기독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은 성리학으로 표현되는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해답이 성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16세때 이가환 및 매형이 되는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서학에 심취했다. 정약용의 개혁사상과 과학적 지식은 이때 습득한 서학, 즉 기독교 사상이 큰 영향을 끼쳤고 1885년 기독교에 입교하며, ‘요한’이란 세례명을 갖게 된다.

기독교 포교활동이 표면화되면서 조정으로부터 금지령이 내려졌고, 기독교 탄압 시책들이 나오게 된 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1801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기독교(서교(西敎)를 사교(邪敎)라며 엄금·근절하라는 금령을 내렸다. 기독교인으로 밝혀진 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이가환,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등 천주교도와 진보적 개혁가 등 100여명이 처형되고 400여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수배되어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교회를 구하기 위해 흰 명주에다 교회의 박해상황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황사영이 편지를 쓴다. 당시 베이징[北京] 주교 구베아에게 서한을 작성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11월 능지처참을 당한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고 알렉산드르라는 교명으로 신자가 된 이로, 다산 선생의 조카사위였다.
다산 선생의 형제들은 신앙의 순교자가 되었다. 처형당한 정약종,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유배에서 풀릴 때까지 18년간 그는 학문에만 몰두했다. 이때 정치기구의 전면적인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했다. 유배생활 가운데서도 그의 개혁의지는 식을 줄 몰랐고, 그의 개혁사상 속에는 기독교 사상이 분출됐다.
1936년 정약용의 사망 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주도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탕 신부 그리고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 등 70여명의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철저히 기독교 신앙이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선생은『시경(詩經)』 을 통해 분명히 창조주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것이 '천「天」' 즉, '상제「上帝」'이며, 상제는 인간만사를 강림하는 능력을 가진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자라고 보았다. 만물의 근원인「천」즉, 상제는 결코 주자의 리(理)와 같은 자연만물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위격(位格)'을 갖춘 윤리적이며 신적인 존재였다. 우리를 굽어보고 재앙과 행복을 가려주는 이러한 천, 상제를 성심으로 경외하여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 선생의 이러한 사상은 국가개혁에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고,『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등에 잘 드러나 있다. 목민심서에서 ‘애민’은 기독교의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때,『마과회통(麻科會通)』으로 백성과 고통을 나눈 다산 정약용의 참 모습을 우리 공무원들이 되새겼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약용의 가장 큰 업적은 백성을 위해 살아가는 ‘애민’ 정신으로 다산 선생이 후대에 존경받는 이유이다. 수도권 동북부 거점도시 남양주시가 다산 정신을 계승하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다산 선생에게서 성경의 총리 다니엘이나, 숨겨진 신앙인 니고데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산은 올곧은 신앙적 가치관과 정신세계로 부패한 관료들의 핍박과 괴롭힘에게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다니엘처럼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신의 신앙대로 백성을 섬기는 일을 다 했다. “악당들의 유언비어가 더욱 심해졌다”라고 ‘자찬묘비명’에서 표현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18년의 세월을 원망이나 좌절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방대한 저술활동을 통해 척박한 유배지를 학문의 성지로 승화시킨 그 정신과 혜안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남긴 저서의 내용과 양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의 시(詩)와 글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자신의 절망적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을 슬퍼하고 그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인으로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다산선생의 자손인 정영진 관장이나 크로스로드를 이끄는 정성진 이사장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며 오늘의 한국을 생각해 보자. 지금 한국사회는 다산선생이 살던 조선 봉건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들의 당파 싸움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상실, 관리들의 부정부패 만연,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사회현상, 부동산과 토지문제, 중소업체의 몰락 등 사회개혁의 필요성은 그 때와 같다.
형제를 죽이고, 매형을 죽이고, 조카를 죽인 그 시대를 정약용 형제는 저주하지 않았다. 시대를 저주하는 대신 아파했다. 그러나 애통하는 자(Those who mourn)는 불의한 시대에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이들과 대면해야 한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 (근대문화진흥원/한국교회건강연구원)
http://jtntv.kr/opinion/260960


이 기사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효상 원장은 천주교를 말하면서 기독교로 말했다.  

정약용의 신앙이 무엇인가? 
위키피디아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천주교 박해 연루
(신유박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00년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 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3]과 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써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 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셋째 형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4]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사전 





정약용과 정약전은 천주교를 버렸으나 유배를 당했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버렸느냐? 안 버렸느냐?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정약용은 과연 천주교를 저버렸을까/ KBS1 '역사 스페셜' 26일밤 배교 논란 재조명
입력 2012.01.25 11:09 0  0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인 다산 정약용은 한국 초기 천주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1846년 조선에 온 5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프랑스 신부 다블뤼가 쓴 <조선 순교사>에 따르면 정약용은 처음부터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관여했으며 정약용의 두 형인 정약전과 정약종 또한 천주교도였다.

정조가 죽고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했다. 신유박해(1801년)는 벽파가 남인ㆍ시파를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천주교회 박해 사건으로 정약용과 두 형 역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의금부로 끌려간 형제 중 정약종은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됐다. 잠잠해지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은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었다. 그가 청나라에 보내려던 밀서가 발각된 것이다. 황사영의 배후로 지목된 정약용 형제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또 다시 귀양길에 오른다.

정약용은 신유박해가 있기 전 한 차례 배교한 적이 있다. 다산이 반대파의 비난 속에서도 정조의 신뢰에 힘입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 역시 신유박해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귀양을 떠난 정약용은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다산문답>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같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게다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후회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약용이 정말 신을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1874년 프랑스인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정약용이 유배 이후 천주교 신앙 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관련 서적을 썼으며 다산의 장남 정학연도 훗날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26일 밤 10시 방송하는 KBS 1TV '역사 스페셜'이 정약용의 배교 논란을 재조명한다.

자료출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201251154766017


정약용도 정약전도 기독교 신앙인이 아니었다. 
이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기독교보에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실는다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몰라서 이런 글을 실었는가? 알고도 의도적으로 실은 것인가?





정태홍목사의 유튜브채널 https://www.youtube.com/user/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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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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