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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철 목사와 윤호진스님 초청 관련하여

이제철 목사와 윤호진스님 초청 관련하여
김영봉 목사의 글


교회와목회 (2005년 5월호)
 
  “온전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라”
   
멸망의 가증한 것?
넷째, 예배당이 성전이 아니라면, 믿음의 공동체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물을 개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배당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불편해 하는 이유는 예배당이 그 기능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거룩한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당은 거룩한 단체(교회)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만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위해 예배당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막 13:14)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고 성전 제단에 부정한 짐승의 상징인 돼지를 제물로 삼아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린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오늘의 예배당에도 적용하여 신성모독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온 천하, 모든 존재가 성스럽고 거룩하다”는 의미에서 보면 예배당도 항상 거룩성을 담지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당이 여타 건물과 다른 특별한 거룩성을 인정받는 이유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 동안에는 예배당에 대해 특별한 거룩성을 주장할 수 없다. 이와 결부된 또 다른 문제는 “과연 기독교인의 예배 행위만이 거룩한 것이냐?”는 질문이다. 만일 기독교인의 예배 행위만이 예배당에 적합한 ‘거룩한 행위’라면 다른 단체의 다른 목적을 위해 예배당을 개방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선별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예배당을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독교인의 모임이 아니라 해도 그 모임의 성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예배당을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에 이화여대에서 벌어진 한 사건은 이 문제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해에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국내 순회강연 스케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의 강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학교에서 허락해준 강연장이 교내 채플을 드리는 곳이었다. 이로 인해 교내에 심각한 갈등이 표출되었다. 대학 내 일부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공식적으로 채플 강연에 반대를 표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불교 승려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보도에 따르면, 학교 당국은 여러 가지로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그 선교단체들에 공식적인 사과 메일을 보내는 선에서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예배를 위한 전용 공간이 아닌 학교 강당에서 불교 승려가 강연하는 것에 대해, 그것도 법문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를 두고 이야기하자는 것에 대해 이렇게 강력하게 반응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에 비하면, 주님의교회 담임 시절에 이재철 목사가 기획했던 초청강좌 시리즈는 가히 파격적이다. 당시 주님의교회는 정신여고에 강당을 지어주고 학교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강당도 이화여대 강당처럼 주로 예배를 위해 사용되었고, 주일이면 주님의교회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재철 목사는 초청강좌 시리즈에 현 동국대 교수인 윤호진 스님을 초청하여 불자로서 그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강의하도록 했다. 그의 강연에 앞서 장로 한 사람이 나와 대표기도를 했다. 그 초청강연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들으면서 나는 불교 승려를 예배드리는 강단에 세울 생각을 한 담임목사의 용기와 결단에 놀랐고, 그 결정에 동의하고 지지해준 교인들의 태도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번 글을 쓰면서 혹시 의미 있는 후일담이라도 있는가 싶어 이재철 목사께 문의했는데, “그로 인한 어떤 잡음도 없었다”는 회답과 함께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해왔다.

저는 불교 승려를 예배당 강단에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 교회 구성원간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신뢰의 토대 위에서는 어떤 시도도 선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신뢰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엔 어떤 일이든 후유증을 낳게 마련이지요. 서로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면 ‘성소’가 되는 것조차 어렵겠지요.

오래 전, 김수환 추기경이 법정 스님을 명동성당에 초청하여 법문을 들었을 때, “천주교가 이단이라는 우리 주장이 확인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개신교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주님의교회의 이 사건은 끊임없이 관습의 장벽을 넘어서게 했던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 광림교회 김선도 감독의 초기 목회 시절 이야기 중에 주목할 만한 일담이 있다. 지금의 예배당 건물을 지은 후, 그는 지역 민방위 교육 같은 외부 모임을 위해 예배당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예배당을 성소로 여기는 한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을 한 것이다. 지역 관공서에서는 그에 대한 예우로 담임목사에게 교양강좌를 맡도록 배려했다. 그는 기독교 냄새가 전혀 없는, 하지만 인간 내면에 있는 참된 삶의 의미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 민방위 교육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온갖 쓰레기가 나뒹굴고 건물 곳곳에 담배꽁초가 날렸다. 이로 인해 중직들의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 일을 지속했다. 그 결과, 교양강좌를 듣고 난 후 감동을 받아 예배를 찾아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오늘의 광림교회를 이룬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민방위 교육 유치였으며, 그로 인해 광림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달리 남편이 먼저 결심하고 다른 가족이 따르는 식의 전도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예는 예배당 활용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준다. 때로, 거대한 예배당 건물이 주중에 ‘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비좁은 땅에서 이래도 되는가?’ 하는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임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교회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단체에게 임대하여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것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교회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비영리단체의 활동을 적극 유치하고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이 문제를 대할 때, 소유권자의 입장에서 장소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파트너로서 장소를 ‘공유하는’ 것이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교회의 기득권을 지나치게 주장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열린 자세로 다른 단체와 연대하여 사역의 범위를 넓혀간다면, 개체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에 더 깊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없이 교회 없다!
다섯째, 성전 신학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대해 면밀하게 반성해야 한다.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다. 예배당은 교회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교회는 기독교인의 공동체를 가리키며, 이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성전의 역할을 한다. “교회가 성전이다”라는 말은 기독교인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신다는 뜻인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 말과 행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 사람이 모였다 해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깨어 있고 열려 있지 않으면 교회라 할 수 없고,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해 성전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온 세상이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이지만, 그것을 특별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공동체가 없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너무도 쉽게 잊혀지고 만다. 하나님의 현존을 망각한 세상은 이미 죽음 속에 있는 셈이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교회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공동체’라는 말은 참된 삶의 나눔, 즉 헬라어의 ‘코이노니아’가 참되게 일어나는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의 본질은 감동적으로 잘 계획된 예배나 행사나 조직이나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삶의 나눔에 있다. 다른 활동들은 모두 참된 ‘코이노니아’의 표현이며 또한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참된 코이노니아가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거나 그것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열린 예배’ 바람은 매우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에너지가 ‘공연 같은 예배’를 제공하는 데 지나치게 소모될 수 있기 때문이며,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로 모이는 근본적인 목적을 오해하도록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공연 같은 예배’를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을 소그룹으로 묶어 참된 성도의 교제로 인도해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 그 교제를 통해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되고, 세상에 나가 제자답게 살며,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을 깨워 일으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돕게까지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수를 자랑한다 해도 그 목회는 이미 실패한 것이며,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최근에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셀 교회에 대한 관심, 소그룹 운동에 대한 관심, 가정 교회에 대한 관심, 밴드 목회에 대한 관심 등은 이런 점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창안한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달리 이름지어졌지만, 그 근본 정신은 하나로 요약된다. 한 개체 교회가 수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 성장하면 그 교회 전체를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만들자는 뜻이다. 이 모든 운동은 한마디로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는 교회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수치적 교회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목회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 목회 방법을 배우려 한다. 바람직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하기 위해서는 단서가 있다. 그 목회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교회 성장이 아니라 참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정체 상태에 빠진 교회 성장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이 목회 방법을 배우려 한다면, 양적인 면에서 변화를 이룰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교회 아닌 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불행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가정교회 모델을 훌륭하게 정착시킨 최영기 목사는, 참다운 공동체에 중점을 두는 목회를 하려면 목회자가 급속한 교회 성장의 꿈을 버려야 하며(『성도의 속마음』, 121쪽), “교회 성장을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어야”(149쪽) 한다고 증언한다. 이 증언이 말하듯,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워져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없이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동체성이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분명한 신학적 신념이 없이는 모든 노력이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단순히 삶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타의 공동체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굳이 애써서 달라지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라는 특별한 공동체를 세우셨을 때는 다른 공동체가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부름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부름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그것을 이루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 부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교회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약속 위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뜻이며, 그 만남을 통해 서로 회복되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그의 안에서 가지는 사귐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성서는 기독교인의 사귐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시와 규칙을 제시해준다”(『신도의 공동생활』, 28쪽)고 말했다. 바울은 몸과 머리의 관계를 비유로 하여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한다(롬 12:3-8, 고전 12:12-31, 엡 4:1-16).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기초이며 그분의 영이 교회의 정신이며 그분의 비전이 교회의 비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사귐의 근거이며 내용이며 목표이다.
이러한 사귐이 일어날 때 교회는 하나님의 현존에 깨어 있게 되고 열려 있게 된다. 사람들의 사적 목적과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교회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면 교회는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에클레시아’(헬라어로 ‘부르다’와 ‘밖으로’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하의 논의에서 ‘세상’은 세속적인 문화와 타락한 풍조를 가리킨다)으로부터 전혀 다른 세상인 교회로 불러냄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생각하고 말하고 지향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이 바깥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바깥세상을 변화시키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다름’을 통해 세상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목격할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부당하는 이 세상 한복판에 사는 교회가 만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에 따라 살아간다면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성격 때문에 교회는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로 혹은 ‘성격 있는 공동체’(community of character)로 불렸다. 때로는 ‘세상의 스캔들’로 불리기도 했고, ‘불온집단’으로 지목된 적도 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반신적(反神的)이냐에 따라 교회를 부르는 말이 이렇게 달라졌으나, 교회를 지칭하는 모든 용어의 핵심은 같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

공동체를 세우는 목회
어떤 공동체이든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 세상과 심각하게 다른 가치관을 견지하려면 내적으로 공동체적인 결속력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주변 세상으로부터의 공격과 위협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고, 자신의 가치관을 계속 유지하고 실천하며 전수할 수 있다. 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 세상 안에 살되 이 세상과는 다른 믿음과 사상과 가치관을 추종하는 모임이다. 때로는 적극적인 박해를 통해 또 때로는 반신/비신적(反神/非神的) 문화를 통해 공격하고 위협해오는 이 세상에서, 교회는 뚜렷한 ‘성격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연대하고 사귐을 나누지 않는 한, 머지않아 스스로 와해되고 세상 속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셨듯이, 교회가 ‘다름의 영향력’을 잃어버리면 세상은 소금에 절이지 않은 생선처럼 곧 부패하게 되고, 빛이 없는 암흑세상이 되어버린다. 교회 혹은 기독교인이 믿고 따르는 진리는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좋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 개인의 영원한 생명과 인류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진리이다. 이러한 믿음이 자주 독선과 배타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까닭에 생기는 잘못이다. 생각해보라. 누군가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는 진리를 내가 혼자 가지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가? “나 아니면 너는 죽는다. 내게 무릎 꿇어라. 내가 너를 살게 해주마”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겸손과 온유”(벧전 3:15)로 그 사람을 대하며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정성을 들여 “해산의 수고”(갈 4:19)를 다할 것인가? 내게 있는 진리만 생각하면 독선과 배타로 넘어가지만, 내게 맡겨진 책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20여 년 전,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북미의 교회가 세속문화의 대안(counterculture)이 되지 못하고 그 문화의 일부(subculture)가 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는데(Liberating the Church, 120쪽),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세속문화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던 많은 진보/자유 진영의 교회들이 급속히 쇠약해졌다. 이 교회들은 사회정의에 참여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공동체를 더 강하게 세우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대’라는 명분 아래에서 다른 운동에 흡수되어버렸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분명한 확신도 없었다. 현시대의 예언자로 존경받는 짐 월리스(Jim Wallis)는 진보/자유 진영의 교회들이 세속 문화의 풍랑에 나부끼다가 영적 뿌리까지 뽑혀버렸다고 갈파한다(The Soul of Politics, 44쪽). 반면,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를 표방한 교회들은 교리를 수호하는 동시에 강력한 교세를 유지해왔거나 성장해왔다. 그 주된 이유는 이 교회들이 끊임없이 세상을 정죄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강력하게 재천명해왔다는 데 있다. 문제는 이들이 제시하는 대안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느냐에 있다. 세상을 정죄하고 대안을 제시하되, 그 대안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편협한 교리적 신념이라면, 형체는 살아 있되 실제적인 영향력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짐 월리스는 미국의 보수적인 교회들(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도 대부분 예외가 아니다)이 종교적 언어와 교리에 너무 집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영성을 잃어버림으로써 기득권자들의 대변인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그는 오늘의 교회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창한다. 진보 교회들처럼 사회적인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응답하되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철저히 배우고 익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교회의 삶을 통해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제3의 길이다(The Soul of Politics). 제3의 길을 가려는 교회에게 뚜렷한 ‘성격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우선순위 맨 앞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에도 딱 들어맞는 비판이요 제안이다.
반복하지만, 교회는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마치 사회와 군대만큼이나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마치 민간인으로 살던 사람이 입대하는 것과 같다. 군대라는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부름에 부응하려면 그에 맞는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다. 군대 훈련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하나는 민간인으로서 몸에 밴 나쁜 습관을 벗어버리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인으로서의 새로운 정신과 생활습관을 습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일원이 된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기독교인은 거듭남으로 탄생하지만 훈련됨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고, 참된 제자들로 구성된 교회만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다. 또한, 군대는 민간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치 온 국민이 군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던 시절을 지내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마찬가지로 교회도 결국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바로 여기서 군대의 비유는 초점을 잃는다. 군대는 모든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 전부를 교회로 만들 꿈을 꾼다. 세상 전부를 기독교화하는 꿈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깨어나 참된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안에서 살아감으로 모두가 참된 생명을 얻고 이 땅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꿈을!
나는 앞의 글(‘세 번째 이야기’)에서 목회자의 시각이 교회 안에 갇힌 나머지 성도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회자는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목회를 ‘일상 속에 성소를 세우도록 돕는 목회’라고 이름지었는데, 혹시 이 목회와 지금 강조하고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목회’가 서로 모순된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자. 하나님의 다스림이 전적으로 존중되는 참된 그리스도적 공동체 안에서의 배움과 훈련과 지원이 없이 기독교인 각자가 세상에 나가 일상 속에 성소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전할 수 있겠는가? 참된 그리스도적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벽을 쌓고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낙을 누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적 공동체는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더 널리 파고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의 부름으로 믿는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8)라는 말씀 속에 그리스도적 공동체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공동체를 세우는 목회는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거룩하게(히브리어의 의미로 하면 ‘구별되게’) 하여 세상 속으로 파견하기 위한 것이다. ‘일상 속에 성소를 세우도록 돕는 목회’와 ‘공동체를 세우는 목회’는 별개가 아니다. 어느 하나가 제대로 되지 않고는 다른 하나도 제대로 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목회 관행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해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의 목회는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며 교회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데 집중되고 있는가? 과연, 우리의 교회가 세상에 대안적인 비전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런 삶의 질이 교회 안에 있는가? 우리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 각자 삶의 현장에 나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결단하며 행동하고 있는가? 만만치 않은 세상문화의 공격 앞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하며 일상 속에 성소를 세우고 모든 일을 예배드리듯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그렇게 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가? 우리의 목회는 이 일에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으며 성도들을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훈련시키고 지원하고 있는가? 1971년에 소저너스(Sojourners)라는 대안공동체를 창안하여 미국 사회에 복음적이고도 예언적인 목소리를 대변하고 또한 그 비전을 실천하고 있는 짐 월리스의 말에 다시 한 번 귀기울여보자.

우리는 내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그 공동체를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세상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공동체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치유 받고, 그 능력으로 나아가 열방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제도에 대응하여 싸울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공급해주는 유일한 원천이며, 좀더 나은 인간적인 삶의 방법에 대한 영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바탕이다(Sojourners 9:1, 12쪽).

제도권 교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요청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이 요청이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는 제도권 교회가 공동체성을 그만큼 심각하게 상실했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읽어본 사람은 대부분 거기 묘사된 그리스도적 공동체의 비전에 흥분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꿈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주어진 비전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것인지를 말하는 동시에, 우리 교회의 현실이 얼마나 그 비전에서 멀리 있는지를 말해준다. 신앙생활의 모든 면이 그렇듯이, 우리는 이 거룩한 비전을 실현 가능한 형태로 축소하는 잘못을 범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 비전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 이상적인 비전을 마음에 품고 가능한 한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전심을 다하는 것이 옳은 자세이다. 그럴 때 진보도, 보수도 아닌 제3의 영성적-예언적 공동체 교회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북미뿐 아니라 한국의 상황에서도 이러한 교회의 출현이 아니고는 교회의 희망을 말할 수 없다.


호흡 있는 성전
여섯째, 성전 신학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면 인간 존재와 피조세계가 달리 보인다. 기독교 신학이 형성되던 시기에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독교 사상 안에는 육신과 물질과 피조세계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거나 때로는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자리를 잡았다. 신약성서 안에는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이는 표현들이 적지 않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런 의미가 아닌데, 사람들이 성서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기보다는 자기 필요에 따라 증거로만 인용하다 보니 그런 오해가 증폭되었다. 이와 함께, 역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때때로 출현한 극단적 금욕주의와 타계적 신비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기독교 주류는 항상 이러한 경향을 경계하고 배척해왔지만, 그런 경향과 싸우는 동안 정통 기독교가 그 사상에 물들게 되었다. 그 결과, 몸을 살피고 돌보는 것을 비신앙적인 것처럼 오해하고, 영적 삶이란 육적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심지어는 몸을 소홀히 하는 것 혹은 학대하는 것을 영적 삶의 한 방법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물질은 모두 ‘썩어빠질 것’이며, 이 피조세계는 악과 죄의 소굴로, 머지않아 불의 심판을 받을 대상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이 물질계, 이 피조세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오늘 같은 총체적인 파괴와 훼손에 기독교인들이 주범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해야 할, 부끄럽고 뼈아픈 죄다. 영적 세계, 하늘나라, 영생 그리고 영혼에 집중한 나머지 물적 세계, 지상나라, 육적 생명 그리고 육신을 소홀히 대하고 때로는 심하게 훼손시킨 잘못! 나는 앞에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논하면서 ‘교회’와 ‘세상’을 대립적 관계로 다루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신적(非神的)이고 반신적인(反神的)인 세상의 가치관과 생활풍조와 문화적 흐름을 가리킨다. 이것을 오해하여, 기독교인과 교회는, 마치 노아와 그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멸망해가는 세상을 그대로 방치한 채 그들만의 구원을 위해 공동체를 세워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생활풍조와 문화는 반대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피조세계와 피조물 모두는 하나님의 현존과 영광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며, 사랑하고 가꾸고 돌보아야 할 귀한 선물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 인간만을 구원하려 한다고 혹은 인간의 영혼만을 구원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참새]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분의 관심 아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을 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부를 관심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피조세계 전체를 구속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고 했다.
성전 신학 위에 바로 서게 되면, 우리 자신을 ‘육신에 갇힌 영혼’이 아니라 ‘생령’(창 2:7)으로, 곧 육적 차원과 영적 차원이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야 하는 존재로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를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보는 세속적 선전에 속지 않으며, 반대로 육신을 억압하고 학대하도록 선전하는 사이비 영성에도 속지 않는다. 스테파니 폴셀(Stephanie Paulsell)의 말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 깨어지기 쉬운 인간의 몸에 하나님께서 충만히 내주하신다는 것, 죽음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육신과 다른 모든 부분들을 모으신다는 것, 그리고 몸을 통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Honoring the Body, 9쪽)을 믿는다. 영적 차원이 중요하면 할수록 육적 차원도 중요하다. 영적 생활에 온전히 정진할수록 육적 생활도 건강해지고 건전해진다.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은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영적 생활이 깊어지는 만큼 육적 생활에 장애가 커진다면 혹은 육신적 활동이 영적 생활에 지장을 주고 있다면, 삼가 면밀하게 살펴볼 일이다. 영성생활이란 영적 차원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에 모두 관심을 두고 전인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몸이 성전이다’라는 말은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구별되고 거룩해져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부의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자신들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온갖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시키려는 의지 때문에 붙여졌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적합한 ‘남은 자들’이 되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율법이 정한 대로 모든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많은 바리새인들(‘모든’ 바리새인들이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이 ‘거룩’의 의미를 율법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윤리적 차원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했다. 예컨대, 부정한 음식을 분별하고 피하는 일, 부정한 물건을 분별하여 접촉을 피하는 일,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 등에는 면밀한 주의를 다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판단하고 정죄하고 격리하고 소외시키는 일에 대부분의 정력을 소모했다. 반면,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내면을 가꾸는 일, 몸 전체를 건강하게 유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일,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마 23:23, 표준새번역)을 행하는 일, 죄의식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돕는 일 등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자신들을 보호하여 거룩을 이루는 데는 철저했지만, 자신들을 희생하여 거룩을 이루는 일에는 무력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책망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거룩한 삶은 두 차원 즉 소극적/방어적 차원과 적극적/공격적 차원을 가진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의 내용과 같다.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소극적 차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적극적 차원]”(롬 12:2)고 권고한다. 야고보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적극적 차원]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소극적 차원]”(1:27). 이렇듯 소극적/방어적 차원의 거룩과 적극적/공격적 차원의 거룩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거룩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렇다면 자문해보자. 스스로 헌신되었다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바리새인들처럼 소극적인 거룩성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뿐 아니라, 거룩과 비거룩에 대한 우리의 판단기준이 얼마나 모호하며 모순적인가? 알코올 중독자를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들 가운데 별 가책 없이 세금을 속여 내고 분에 넘치게 소비하며 부정직하게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태도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일에 생명을 바칠 것 같던 바리새인들이 부정한 이(利)를 탐하는 일에 민첩했던 것과 비교하여 무엇이 다른가?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마 23:24) 잘못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온전한 거룩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정체를 명료하게 밝히고, 그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며, 그 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나 그 죄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 섬겨야 한다. 문명의 이기(利器, 실은 害器일 경우가 더 많다)로 인해 세속문화의 영향력이 가공할 정도로 커진 이 시대에, 바른 정신을 지키는 것만도 벅찬 도전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한 기도, 즉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는 기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 존재 전체가 온전한 거룩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문제는 이 거룩의 도전이 너무 벅차고,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기도에 뒤이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고 덧붙인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존재 전체를 다스릴 때 비로소 우리는 거룩함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그분의 능력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헨리 나우웬이나 유진 피터슨 같은 현대 영성가들은 이러한 삶의 방법을 ‘묵상적 삶’(contemplative life)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묵상을 많이 하는 삶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다스림이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삶을 가리킨다. 이 묵상적 삶은 기도나 예배나 말씀 묵상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음식 먹는 것, 일하는 것, 여가생활, 잠자는 것, 부부생활, 취미생활, 건강관리, 시간관리, 소비생활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집안에 있는 화분에 물 주는 사소한 일조차 묵상적 삶에 관계가 있다. 이렇게 총체적인 삶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모두 다스리게 되고, 그럴 때 두 차원의 거룩이 우리 존재 안에 이루어진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성화로의 부르심이요, 목회가 지향해야 할 초점이다.

영안이 열리면
그뿐 아니라, 성전 신학은 우리에게 물질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모든 피조물, 심지어 생명이 없어 보이는 물질에서조차 하나님의 현존과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영안’(靈眼)이다. 물질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영적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영안! 그는 “영적 생활의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조차 물질계의 바다에 침윤되지 않고는 결코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Heart of Matter, 22쪽)고 고백한다. 그에게 물질과 영혼은 별개의 두 실체가 아니라 한 존재가 품고 있는 두 측면(two aspects) 혹은 두 차원(two stages)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각각의 물질이 별개로 분리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만유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인식에 따르면, 하나의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세 가지 차원을 인식해야 한다. 첫째, 그 사물의 물질적 차원, 둘째, 영적 차원, 그리고 셋째,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성! 이렇게 보면, 하나의 사물에서 우주 전체를 보고, 우주 전체를 알아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개체 사물을 더 온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물질계를 통해 영적 세계를 보고, 영적 세계의 경험을 통해 물질계를 더 온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죽어 있는 것 같은 물질까지도 경외감으로 대했고, 피조세계를 유기체적인 몸으로 인식했다. 우주라는 유기체적 몸을 창조하고 운행하고 이끄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눈을 가졌기에 샤르댕은 누구 앞에서건 혹은 어느 장소에서건 경외감을 마음 가득 품고 신발을 벗어들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피조세계를 대하는 바른 자세이다. 이렇게 대할 때 우리는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눈을 뜨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다석 유영모는 “하늘 땅 사이에 벌여놓은 물건이나 벌어지는 일들도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반가운 일이나 싫은 일이나 다 내게 온 편지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당신 생각을 좀 해보라는 것이다”(『다석 유영모 어록』, 91쪽)라고 말했다. 이런 마음으로 피조세계를 대할 때, 우리는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으며, 동시에 현대 문명과 인간의 욕심이 초래한 엄청난 오염과 훼손과 파괴에 대해 치를 떨며 아파하게 된다. 그 훼손이 다름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몸을 훼손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훼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모든 생명이 함께 공존하며 서로 도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기도하며 꿈꾸고 실험한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다급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헌신한다. 물질계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그 안에서 살도록 허락하신 우리의 삶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동시에, 인간의 과도한 욕심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물질계의 고통에 동참하며 피조세계 전체의 구속을 위해 회개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이 영안이 열린 기독교인의 삶이요 기독교인 공동체의 삶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전인 이 피조세계에서 ‘호흡 있는 성전’으로 부름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받은바 ‘거룩한 부르심’이다(‘일상 속의 성전’ 끝).

김영봉 l 목사는 미국 뉴저지의 벨마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협성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으며,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등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다. 홈페이지(www.bibletimes.pe.kr)를 통해 그의 다른 글들을 볼 수 있다.

자료출처 
기독교사상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theologry&wr_id=280&main_visual_page=g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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