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당한 바울의 행복을 위한 이혼관
2013년 10월 21일 (월) 17:05:51 박경은 0117669763@nate.com
유대인 남자들은 성년기에 이르면 반드시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사 예외 없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생기는가 하면 당시의 폐쇄적인 팔레스틴 농촌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딸을 둔 아버지들이 딸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결혼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팔레스틴에 살던 상황이었지만 역사적 예수의 사회적 여건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예수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혼을 했어야만 하는 바울
한편 바울은 어땠을까요? 바울 자신에 따르면 그는 세상에 태어난 지 팔일 만에 율법이 정한 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빌3:5). 그가 만일 결혼하지 못할 육체적 결격 사유를 갖고 있었다면 할례 받을 당시에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므로 일단,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그는 결혼하지 못할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또 그는 자신이 스스로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조인 야곱의 후손이며 하나님께 선택받은 열두 지파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고후11:22; 롬11:1). 최초로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만이 아니라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후손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나아가 그가 자신을 가리켜 베냐민 지파라고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 초대 왕을 지냈던 사울 왕의 후손임을 밝힌 겁니다. 왕손이라고 주장하는 셈이지요. 거기에 더하여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한 것은 출애굽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인들 중에서도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종족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종족들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정통성을 지닌 유대인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가리켜 바리새인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내의 여러 다른 종파들과의 구별성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하고 율법을 가장 잘 해석하며 유대인들과 가장 밀접하게 얽혀 생활하면서 유대인들의 앞날을 인도하는 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전면에 내세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가리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면에는 율법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흠 잡힐 데가 없다는 일종의 우월감과 아울러 ‘율법에 관한 한 조금의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통주의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심리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그의 주장에 근거하여 볼 때 그는 마땅히 결혼을 했어야 합니다. 육신으로 볼 때나 혈통으로 볼 때 그는 정상적인 유대인 남자였으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결혼을 했어야만 합니다. 더구나 주변 여타의 민족들에 비해 인구수가 적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결혼은 종족의 인구수 번성에도 기여하는 일이므로(창1:28) 바울은 당연히 결혼을 했어야 했다고 보아야 타당합니다.
(특별한 이유없이 20세 이른 유대인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평생의 날들을 죄 가운데서 보내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랍비문헌이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결혼을 했어야 했다고 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바울이 결혼을 했어야 했다는 시각은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에서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울은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8)’고도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현재 처지가 ‘아내가 없는 독신상태’라는 인상을 아주 강하게 받습니다.
바울이 독신이었던 이유로 사별의 가능성은 없나?
그러면 바울은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사회-문화-종교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바울의 이 말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고린도전서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바울의 나이가 50세 정도가 된 때였다고 보게 됩니다. 유대인 남자들이 결혼을 하는 연령대는 보통 18세~20세였음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이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했던 대목은 나이가 50세에 이르렀거나 그 연령대에서 한 말이므로 바울은 적어도 30여 년 전에 결혼을 했어야만 했다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던 당시에 바울은 독신 상태였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독신상태였던 이유에 대해 그의 아내와 사별했기 때문이라는 보는 시각은 어떨까요? 그런 시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내와 사별해서 독신상태에 있는 중이라고 보기보다는 그의 유연한 이혼관, 그리고 믿는 배우자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이혼문제에 관해 말할 때, 믿지 않는 배우자로부터 이혼제기를 받을 경우에는 흔쾌히 이혼해 주라는, 어쩌면 그런 경우의 이혼에 관해서는 단호한 듯한 입장을 보인 것 같은 표현을 볼 때(고전7:15), 또 고전9:5의 내용을 볼 때, 그는 분명 결혼을 했었으나 부활의 예수를 만난 이후 이방선교 활동과 연관하여 아내를 위해 이혼을 해 주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아내를 위해 이혼을 해주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
바울은 이방선교 활동과 관련하여 아내와 함께 했으면 좋았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그는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아내된 믿음의 자매들과 함께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틴에서도 예루살렘에 국한된 유대교내 그리스도파 사람들로 동족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예수의 복음을 전했으나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보는 것으로만 해도 엄청난 선교여정을 감당했으며 거기에 더하여 갖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 등을 모두 당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내와 함께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다가 바울은 유대교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반유대교적, 반율법적 입장에서 할례를 목숨걸고 반대하는 것으로 비쳐졌고 바리새인들과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반대하고 나서는 방향에서 이방인을 향한 선교활동을 했으므로 아내 된 여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때는 바야흐로 여자도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넉넉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고전7:10). 더구나 아내 쪽에서 제기하는 이혼이 더 많기나 했던 것처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한 후에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남편 쪽에서의 이혼문제를 뒤에 두었습니다.
이런 남녀쌍방에서의 이혼이 가능한 시대를 살면서 바울은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면서 신앙이나 종교문제로 상대방 배우자가 이혼을 제기하고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 중에서’ 선뜻 이혼해 줄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울은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 쪽에서 이혼제기가 들어오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혼을 해주라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을 정도로 망설임 없이 이혼을 해주라는 식의 모습만이 그려집니다(고전7:15).
바울의 대단히 자유스럽고 유연한 이혼관의 배경
한편 바울의 이혼관이 상당히 유연했다는 사실은 그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주장한 대목을 통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이 정통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율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던 근거는 그가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것에 기반을 둡니다(행22:3).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율법교사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의 말은 상당히 권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행5:34,40a).
바울 당시의 가말리엘은 저 유명한 힐렐의 손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힐렐은 샴마이와 더불어 율법해석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해석에 관한 한 샴마이의 엄격한 해석보다는 힐렐의 자유로운 해석을 더 많이 따랐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이 말하는 이혼에 관한 한 샴마이는 신24:1의 ‘아내에게서 발견되는 수치스런 일’을 간음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러나 힐렐은 아내의 수치스런 일과 연관하여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다 포함시켰습니다. 남편이 어떤 이유로 아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거나 일종의 수치스러움과 같은 감정을 갖게 되어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져버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이혼이 가능하다는 식의 해석을 했던 겁니다. 이에 따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 된 자들은 언제든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 있는 대단히 자유스런 이혼권력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예수와 바울의 이혼관의 차이
그에 따라 보면 예수는 샴마이학파 계열의 이혼관을 따랐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와는 달리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울은 가말리엘 계열입니다. 그것은 힐렐학파에 속한 율법해석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을 증거라도 하듯 바울은 예수에 비해 매우 유연한 이혼관을 갖고 있음을 그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바울 사이의 이혼에 대한 입장 차이를 표시한다면 아래와 같이 표기할 수 있습니다.
신24:1의 ‘수치’에 대한 해석
ㅇ 샴마이: ‘간음’에 국한시킴 →예수(간음 외에 이혼 절대 불가)→예수의 제자들 투덜거림
ㅇ 힐렐: 폭넓게 해석→가말리엘→바울(간음 이외의 다른 이유로 이혼 가능 제시)
이것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바울의 이혼관입니다. 결국 예수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와 예수자신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는 바울의 시대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서 예수의 이혼관이 바울에 의해 다시 한 번 재해석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는 바울에 대한 전기(傳記)가 역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더욱 바울은 예수의 이혼관에 머물 수는 없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혼권의 최대범위: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즈음에 ‘재해석의 기준’에 대해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본인이 말씀드리는 재해석은 ‘상황에 따라’에 중심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재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원래의 말씀을 재해석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의 말씀이 갖는 의도, 처음 사상, 원래의 신학이 오남용, 혹은 왜곡되거나 아전인수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표현하는 “재해석”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시대에 맞는 적절한 옷을 입히는 학술적 수고”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재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께서는 샴마이 해석에 따른 사실상의 “이혼 불가”,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이혼 절대불가의 입장을 ‘약자 보호, 약자 해방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남편 된 자들에게 적용시키심으로서 아내인 여자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사랑을 잘 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라고 짝 지워주셨는데 남편들이 죄의 근성을 작동시켜 아내 된 여자들에게 마귀 짓을 할 때 구원의 은총으로 나갈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바울의 이혼관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화평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위한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화평을 더욱 더 풍성하게 누리자고 하는 것이므로 부부 한 쪽이 오히려 그것을 깨고 전쟁터 같은 가정생활로 돌변한다면 화평을 위하여 이혼을 하라는 권고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면서 믿는 형제나 자매나 이혼에 구애될 것이 없이 상대방이 이혼제기를 하면 ‘하나님의 화평’ 중에서 하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다른 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화평을 위한 이혼’이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이혼관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화평과 연관되는 한’ 어떤 거침돌도 없이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견해인 것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이혼권 사용의 최종 목표점
이와 같은 바울의 입장은 그의 이혼관이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에 의하면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신앙생활을 핑계로 이혼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역시 신앙생활을 핑계로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고전7:12~13). 이혼한다고 해서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내외간에 서로 화평을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평 중에 부르심을 받은 믿는 자들의 최후 목표점은 궁극적인 구원의 행복에 있습니다. 그 구원의 기쁨은 자신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배우자가 ‘같이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도 구원의 기쁨을 나누어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가 남편을 구원할지 어찌 알며,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지 어찌 알리요?’라고 말했습니다(고전7:16).
이처럼 이혼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헤로디아처럼 남편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은 자유와 화평을 핑계로 결혼에서의 일방적인 해방을 주장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깨면서 자유와 평화, 행복을 송두리째 부셔버리는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최소한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연한 이혼에 대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곳곳에서 이혼을 하지 말라는 권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고전7:10,12,13,27). 이혼이 자신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흐름 속에서 바울은 신앙생활을 평화롭게, 자유스럽게 유지하기 위해 믿지 않는 배우자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차원에서 이혼권이 시행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시키고 그 구원의 기쁨을 같이 나누려는 방향에서 여전한 결혼생활이 이어져야 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혼당했다고 보는 관점의 근거
이렇기 때문에 바울이 독신상태였다는 것에 관하여 그는 아내의 행복을 위하여, 도무지 아내와의 사이에서 ‘화평’을 기할 수 없는 장거리 선교여행과 같은 그의 일정 등을 종합해 볼 때, 아내 쪽에서 이혼제기가 들어 온 형태로 이혼을 해 준 결과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르친 결혼생활에 대한 권면을 보면 그가 먼저 아내에게 이혼을 제기했다고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살전4:4; 고전7:3).
그러므로 결혼을 했어야만 하는 바울이 독신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수동적으로 이혼을 한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볼 경우 바울의 이혼은 바울 쪽에서 능동적으로 결행한 결과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이혼이 이루어진 상황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바울이 이혼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에 별 다른 무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 한 구원의 감격을 함께 누리는 것에 목표를 두고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세상에서 구원의 기쁨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삶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 것이 바울이 나타내 보이는 의중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고전7:35).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혼의 결단은 바울이 말씀한 대로 “사람들의 종이 되지 않는 선”에서(고전7:23b) 고려되어야 하며 결혼생활의 유지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24절) 구원의 감격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부가 서로 노력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신앙인이 보여야 하는 마땅한 모습이라는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 참다운 의미에서의 행복을 향해 가는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서본문에 근거한 건전한 이혼관을 잘 구비하셔서 혹 이혼문제로 인한 고민을 상담받게 되실 경우 성서에 기반을 둔 훌륭한 상담가의 역할을 잘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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