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조광제] 후설과 현상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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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조광제] 후설과 현상학 1
<강의 자료>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
조광제
에드문트 후설 (1859~1938)
1. 현상학은 의미의 현상에 대한 철학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갖는 공통된 특징을 잡아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낱말이 적당할까요? 가장 적합한 것으로 떠오르는 것은 의미(意味)인 것 같습니다. ‘의미’라고 하면 흔히 언어적인 개념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언어적인 개념으로서의 의미는 광의(廣義)의 의미 중 특수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미리 말하자면,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은 언어적 개념으로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Bedeutung’ 즉 ‘어의’(語義)라 말하고, 사건적 의미 혹은 사태적(事態的) 의미에 대해서는 ‘Sinn’ 즉 ‘의미’라 달리 구분해 부릅니다.
부정적인 방향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긍정적인 방향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암시적으로 숨어드는 의미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타인들과 공유하는 의미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현실적으로 힘을 갖는 의미도 있을 수 있고, 가능적으로만 힘을 갖는 의미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말이 씨 된다.”라는 속담은 가능적이면서 암시적이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던 의미가 현실화되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되어 힘을 발휘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겠습니다.
뭇 의미들은 마치 언어 이전의 힘을 갖고서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뭇 의미는 우리를 치고 들어와 우리의 삶 내지는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건 규정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삶 내지는 존재는 바로 의미의 이합집산이요, 의미의 충돌과 조정이요, 의미의 들고 낢이요, 의미의 모자람이고 넘침이요, 의미의 빛과 그림자요, 의미의 주인이자 노예이고, 의미의 삶과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존재론적인 탐문은 알고 보면 “아! 이 모든 의미들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의미존재론적인 탐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의미존재론적인 탐문이 바로 현상학적인 탐문입니다. 양적으로 보면 거대하기 짝이 없고 질적으로 보면 복잡하기 그지없는, 곳에 따라 촘촘하여 밀집되고 곳에 따라 성겨 희박해지는 의미의 그물망을 느낍니다. 때로는 빠르게 흘러 지극히 유동적이고 때로는 서서히 흐르다 못해 지극히 고정된 의미의 그물망을 느낍니다. 또 그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마저 그 그물망을 형성하는 그물코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때 비로소 의미의 현상을 근원적으로 탐문하려는 현상학의 세계에 들어갈 자세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2. 의미의 근원을 찾기 위한 현상학적 환원
1) 현상학의 이념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현상학을 ‘엄밀학’(嚴密學 die strenge Wissenschaft) 또는 ‘제1철학’(die erste Philosophie)이라 부릅니다. 말이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우리로서는 이를 제시하는 후설의 정신을 얻으면 그뿐입니다. 그 정신이란 ‘네가 선 위치 그대로에서 너 스스로의 탐문을 통해 철학을 하라’는 것입니다: “……미리 주어진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어떠한 것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대가라도 그 명성에 의해 현혹되지 않고……”('엄밀학' 340) 일단 보기에 무서운 정신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선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시타르타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했다고 하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를 찢어발겨 개에게 먹이로 주었으리라.” 혹은 “부처는 똥 닦는 막대기다.”라고 하면서 일체의 선 수행에서 일체의 권위를 없이하려 한 것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현상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하는데, 후설의 권위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메를로-퐁티는 그의 『지각현상학』 서문에서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후설의 최초의 저작이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나고도 여전히 뭐라 말할 수 없으니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상학이란 것이 후설의 권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싶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해탈한 시타르타가 없이 불교를 생각할 수 없고, 본래의 예수가 없이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듯이, 후설이 없이는 현상학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위에서 인용한 후설의 말이 지시하고 있는 철학 정신을 현상학이라 한다면, 약간 이야기기는 달라집니다. 후설을 통해, 그러다보니 후설을 넘어서서 후설이 지향하고자 한 철학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법이기에 여전히 우리는 후설의 현상학적인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진리가 말을 벗어나 있지만, 말에 의존해 진리에 다가간다.”라고 원효 선사가 말한 것처럼.
각설하고. 위 후설의 말로 돌아가 봅니다. ‘미리 주어진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미리 주어진 것’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주어지다’니 어디에 주어졌다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비하면, 그 뒤의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나 ‘제아무리 위대한 대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이해하기 쉬운 편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미리 주어진 것 하나를 지목해 봅시다. ‘여기에 있는 칠판’, ‘여기에 있는 이 인간 조광제’, ‘창 밖의 도시 건물들에 연관해서 떠오르는 사회’, ‘여기 있는 이 허공의 공간’, ‘지금도 무지막지하게 흘러가고 있는 이 시간’, ‘우리의 마음속에서 들끓어 오르고 있는 막연한 불안’ 등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것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받아들인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 ‘그렇다’라고 긍정하지 말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긍정한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재한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의 문이 막힙니다. 물론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에 있는 분필처럼 ‘지금 여기에 우리의 눈앞에 분명히 주어져 있다’라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진리의 기준 혹은 존재함의 기준으로 명석 판명함을 내세우면서 ‘현전하는 의식에 분명하게 다른 것과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주어져 있음’이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시 돌아온 셈입니다. ‘미리 주어진’이라는 말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말은 ‘미리 존재하는’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됩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보면 이렇게 됩니다. ‘미리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라고 됩니다. 아무래도 말이 이상하니 알기 쉽게 바꾸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미리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것도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인정하지 말라.’
2) 현상학의 원리
후설은 이런 철학적인 태도를 후설은 이런 ‘무전제의 원리’(Prinzip der Voraussetzungslosigkeit) 혹은 ‘철저한 무편견성’(radikale Vorurteilslosigkeit)로 규정합니다.(『논리연구 II/1, 19; '엄밀학?'341)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길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붙들고 철학을 출발하라는 것이냐? 무를 붙들고 출발하라는 것이냐? 무는 도대체 무엇이냐? 무란 것이 도대체 채소도 아니고 붙들 수 있기나 한 것이냐? 그게 아니겠지. ‘미리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과 ‘진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은 다른 것이겠지. 그러니 ‘진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향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후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후설은 ‘진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향해 열려 있는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원리 중의 원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원리 중의 원리: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모든 직관이 인식의 권리원천이다. 우리의 <직각>에 원본적으로(말하자면 그 생생한 현실성에서) 제시되어 있는 모든 것을 주어져 있는 바로 그대로 ㅡ 더구나 오로지 그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는 한계 내에서만 ㅡ 받아들여야 한다.”
이게 어찌된 것입니까? ‘미리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생생한 현실성에서 제시되어 있는, 주어져 있는 바로 그대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것이 바로 ‘진실로 존재하는 어떤 것’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생생한 현실성에서 제시되어 있는, 주어져 있는 바로 그대로의 모든 것’과 ‘미리 주어진 어떤 것’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혹시 후설의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버리면 아주 시시해지기도 하고요. 게다가 ‘미리 주어진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말라’라고 하는 '엄밀학'에서 또 “말의 공허한 분석을 그만두고 사태 자체를 우리는 심문해야 한다. 경험으로, 직관으로 돌아가라. 이것만이 우리의 말에 의미와 합당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305이하)라고 말하고 있는 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후설이 말하는 철학 정신에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얻을 것 같습니다. ‘말의 공허한 분석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영미의 언어분석철학자들은 후설에 대해, 말의 ‘공허한’ 분석을 그만두라고 했지, 말의 ‘의미 있고 정치하고 논리적인’ 분석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으니 후설이 ‘나쁜 놈’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상학의 길을 따르려는 자로서는 부처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을 때 오로지 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하고, 흔히 ‘염화시중의 미소’라 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선불교의 구호인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습니다.
일단 후설의 이 말에 이은 “사태 자체를 심문해야 한다.”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사태 자체’란 ‘언어를 벗어나 있는 상태’ 즉 현실적으로 주어진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해 모든 이름들을 빼버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빼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에 의해 규정되는 모든 내용들을 빼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 ‘분필’이 있는데, ‘이것’에서 ‘분필’이라는 이름을 빼버립니다. 이름을 뺀다고 해놓고서는 마음속으로 ‘분필’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분필’이라는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함께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석고’가 남는다고요? 그 이름도 빼버립시다. 일체의 이름들과 그 이름들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들을 빼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존재한다’라는 말까지 빼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어떻습니까? 우리는 또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문을 여는 것 같았는데, 어느 새 문이 확 닫히면서 거대한 벽으로 됩니다. “문을 열고 길을 나서니 길이 일어선다.”라는 시인 강은교의 시구처럼 말입니다. 제아무리 이름들을 다 빼버린다고 해도 뭔가 ‘있긴 있는 것 아니냐’라고 해야 할 판입니다. ‘있긴 있다’니! ‘있음’이라는 이름마저 빼버립시다. 잘 없애지지 않는다고요. 물론입니다. ‘있음’ 내지는 ‘존재’라는 말조차 빼버리고 그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마저 빼버린다니 어디 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러나 현상학의 근본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혹은 후설이 권유하는 철학 정신 즉 현상학적인 정신을 갖추기 위해서는 ‘있음’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들어있는 내용들을 빼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고, 이를 쫓아가야 한다고 할 때 심지어 공포가 엄습해 옵니다. 왜냐 하면 이름과 그 내용을 뺀다고 하는 것은 기실 쓰레기통에 가득 차 있는 쓰레기를 버리듯 나의 모든 의식을 텅 비어버리는 일일 뿐더러, 심지어 그 쓰레기통마저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색즉시공’에 걸려들지 않는 색 즉 사물이란 그 어떤 것도 없을 것이며, 개개의 사물이 크든 작든 혹은 낱낱이 분리되어 있든 전체로 뭉뚱그려져 있든 일정한 구획을 가진 것이고, ‘나의 의식’ 역시 일정한 구획을 가진 것이라면 사물임에 분명하고, 따라서 공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3) 자연적 태도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
그러고 보면, 여태껏 우리는 언어를 통한 길을 ‘나도 모르게’ 집요하게 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말하는 ‘자연적 태도’(naturliche Einstellung)입니다. 이에 대해 후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결코 깨어지지 않고 함께 붙어 있는 경험 속에 깨어 있는 자아다. 이 나는 ‘현실성’이 현존하는 것임을 미리 발견하고 그 스스로 나에게 주어져 있을 뿐더러 현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적인 세계의 대상들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모든 일들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Generalthesis der naturlichen Einstellung)에 대해 아무 것도 변경시키지 않는다. ‘그’ 세계는 현실로서 항상 거기에 있다. 기껏해야 여기 혹은 저기에 내가 떠올리는 것과 ‘다르게’ 있을 뿐이다. 그것 혹은 저것은 ‘가상’, ‘환상’ 등의 이름으로 소위 그 세계에서 제거될 뿐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ㅡ 일반정립이라는 의미에서 ㅡ 항상 현존하는(immer daseinde) 세계다.”
장님이 길을 이끄는 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후설의 현상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을 소개하려 하니, 정말 만만찮은 것 같습니다. 있지요. 당연히 이 세계가 있지요.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표상하고, 판단하고, 의욕하고, 느끼는 세계가 당연히 있지요. 이를 후설은 세계가 ‘항상 현존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계가 이렇게 항상 현존한다고 판단해서 설립하는 것을 후설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냐고요? 후설을 아예 내버리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후설을 따라가고 볼라치면 이거야말로 큰일 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러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일단 ‘확 버리지’ 않으면, 즉 일단 ‘중지시키고’(enthalten), ‘무력하게 하고’(außer Aktion), ‘괄호로 묶어버리고’(einklammern), ‘배제시키고’(ausschalten) 하지 않으면 현상학에 한 발짝도 들어설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립에 관련해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 본래의 에포케(εποχη)를 수행할 수 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명증적이기에 흔들림이 없는 증거와 일치하는 모종의 판단 중지(Urteilsenthaltung)다.” “그렇게 해서 나는 현상학적인 에포케를 수행하는데, 이 현상학적인 에포케는 이제부터 마땅히 ‘실재적인 것’의 시공간적인 현존에 대한 존재와 그러함과 모든 존재 양태들을 대해 내리는 모든 판단 즉 모든 술어적인 입장 표명의 수행을 폐쇄한다.”(밑줄은 필자 강조.) 지독합니다. 시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혹은 어떠하다느니 어떠하지 않다느니 하는 일체의 ‘짓거리’를 폐쇄하라고 합니다. 철학이란 본래 이렇게 힘든 것인가요? 이렇게 해서 뭐하자는 것이냐가 정말 궁금합니다.
아무튼 후설은 이러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묶어버리는 것을 현상학적 에포케라고도 하고, 선험적 환원(先驗的 還元 transzendentale Reduktion)이라고도 합니다.
4) 의미 성립의 근원지에로
애초 나는 현상학을 의미의 문제를 싸고도는 철학으로 규정하려 했습니다. 자연적 태도는 삶에 관련해서 각종 의미들이 이미 성립되어 있거나 혹은 성립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 의미들이 나의 삶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때에는 괴로워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때에는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란 그런 자연적인 삶의 태도에 일종의 인식적인 행위가 깔려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삶에 관련된 뭇 의미들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 의미들이 생겨나는 대상 세계의 뭇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후설이 세계의 현존을 말했을 때, 그 세계는 바로 시공간적인 뭇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에 의거한 의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칭합니다.
따라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현상학적으로 에포케 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뭇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들의 존재와 의미들이 발생하는 기초라 여기는 뭇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접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사물이라고 운위되는 것조차 넓은 뜻으로 보면, 하나의 의미에 속합니다. 이는 아주 미묘하고 강력한 주장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래야만 의미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상태로 돌아가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여건들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이미 우리를 에워싸고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 근거를 캐물어 들어가는 작업의 성격을 두고서 후설은 ‘선험적’(先驗的 transzendentale)이라고 합니다. 칸트는 어떤 것, 예컨대 감성의 형식이나 지성의 형식을 선험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성격을 아 프리오리(a priori)하면서 즉 경험에 앞서 있으면서, 동시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후설처럼 사유의 작업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요. 이에 ‘선험성’이라는 철학에서의 중요한 개념이 여러 방식으로 달리 쓰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설이 현상학적인 에포케를 한편으로 선험적인 환원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태도에서 이미 열려 있는 영역에서 뭔가 전혀 성격이 다른 영역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환원이라는 것은 뭔가를 다른 뭔가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처음의 뭔가에 서 있다가 다른 뭔가에 서 있게 됩니다. 현상학적인 선험적 환원은 그러니까, 자연적 태도에서 이미 무조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영역으로부터, 그런 영역이 그저 무조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앎으로써 그 선결 조건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영역을 후설은 선험적 경험의 영역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자연적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연적 태도를 묶어버린다는 것은 모순이고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연적 태도를 단번에 묶어버리는 새로운 태도 즉 현상학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상학적인 선험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설은 ‘태도 변경’을 주장합니다. 앞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이 태도 변경은 어쩌면 길이 벽이 되어 일어설 정도로 막막한 것이어서 정말 힘든 작업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후설은 이를 종교적 회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현상학적인 에포케를 통해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후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인간들을 포함한 전체 세계가 배제되고 나면, 과연 도대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세계 전체(Weltall)란 바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모두가 아닌가? 무엇이 ‘남을’ 것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 의미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후설은 마치 자기 스스로의 요구에 스스로가 걸려 넘어지기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니, 일종의 엄살에 불과한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마저 배제해버린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후설은 뭔가가 남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것에다 ‘현상학적인 잔여’(das phanomenologische Residuum)이라는 명칭까지 붙이려고 합니다. 풀어보면 흔히 말하는 일체의 있음을 버리고 나더라도 뭔가 나머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복잡하지만 후설의 말을 들어봅니다. “우리의 탐구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통찰이 필요하다. 즉 일관된 내적인 경험에서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신 속에서 연관을 맺고 있고 끝없이 열려 있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폐쇄되어 있는 존재영역(Seinsregion)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 그때 ‘내재적인’ 시간성(immanent Zeitlichkeit)이라는 자기 고유의 형식들을 띤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앞으로 지적되겠지만, 바로 이 존재영역은 위에서 기술한 현상학적인 배제를 당하지 않는다. …… ‘현상학적인 잔여’인 순수 의식(reines Bewußtsein)의 영역과 이와 떨어질 수 없는 것(말하자면 순수 자아 reines Ich)은 원리상 고유한 종류의 존재 영역으로 잔류한다. 원리상 고유한 종류의 이 존재 영역은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ㅡ 원리상 새로운 ㅡ 의미를 지닌 의식학(Bewußtseinswissenschaft) 즉 현상학의 장으로 될 수 있다. …… 이 에포케를 통해 최초로 절대적인 존재 영역이 열린다.”
후설은 우리에게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서 길도 없어 보이는 어딘가로 데려가더니 검을 천을 떼고 여기가 어딘가 보라고 합니다. 눈을 뜨고 보니 이건 도대체 한번도 본 적도 없고 도대체 그 번지수를 알 수 없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순수 의식’이라느니 ‘순수 자아’라느니 ‘내재적인 시간성의 형식들을 띤 무한 열려 있는 자기 폐쇄적인 의식’이라느니 하는 기묘한 동네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후설은 이렇게 ‘독백’같이 여겨지는 자신만만한 득도(得道)의 경지를 내뿜습니다. “따라서 이 내재적인 존재는 존재함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원리상 지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틀림없이 절대적인 존재다. / 한편 선험적인 ‘것들’의 세계는 전적으로 의식을 향하되, 논리적으로 고안된 의식을 향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식을 향한다.” 그가 말하는 현상학이 열려나오는 순수 내재적인 의식은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대로 눈을 뜨고 보면 파악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도 없는 순수 내재의 실제적인 의식’이라니 칠흑의 밤처럼 앞이 캄캄합니다.
5) 내재적인 순수 의식은 도대체 어디인가?
이 동네가 어디인가, 그 막연한 번지수만이라도 찾으려면 이제 우리는 의식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적 태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늘 의식을 발휘합니다. 저 앞에 칠판이 있구나 하는 의식, 물이 먹고 싶다는 의식, 강의가 지겹다는 의식, 돈이 아깝다는 의식, 괴롭다는 의식 등등 말입니다. 이런 의식을 후설은 실재적인 의식(reales Bewußtsein) 또는 경험적인 의식(empirisches B.)이라 합니다. 이런 의식들은 항상 바깥 대상들을 향해 있습니다. 바깥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그 바깥은 실은 안일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지각하고 갖고 싶다고 할 때에는 (일단은) 정말 바깥에 있는 대상이지만, 괴롭다는 의식을 가질 때에는 괴로워하는 자신은 의식 속에 있는 것이면서 바깥에 있는(즉 이때에는 의식 자신이 아닌) 대상입니다. 즉 실재적이고 경험적인 의식은 내적인 것이건 외적인 것이건 간에 의식 자신이 아닌 것들을 자신의 대상으로 갖습니다. 그러면서 의식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구분되거나 분리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경계를 가집니다.
순수 의식은 말 그대로 정말 자기 자신이기만 한 의식입니다. 즉 경계가 없이 ‘사방으로 뻥 뚫려버린’ 의식입니다. 굳이 말하면 나를 벗어나버린 의식입니다. 물론 이때 나는 자연적 태도의 경험적인 인간으로서의 나입니다. 그 대신 후설은 머뭇거리면서 순수 의식의 시선발산(Blickstrahl)으로서 순수 자아를 제시합니다. “순수 자아는 도대체 어떻게 존립하는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역시 발견되는 현상학적인 자아는 선험적인 무(einem transzendentalen Nichts)가 되는가? …… ‘나는 생각한다’는 모든 나의 표상작용들에 수반될 수 있다.” 왜 이렇게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후설이 말하는 순수 의식의 상태에 돌입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후설이 이 세계의 존재를 에포케 함으로써 송두리 채 없애버린 걸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환원이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이 세계의 존재를 순수 의식으로 환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 의식 속에는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후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적 혹은 선험적 주관성의 영역은 특수하고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실재적인 세계 전체 내지는 모든 가능한 실재적인 세계들과 넒은 의미의 모든 세계들을 ‘자신 속에 운반한다.’ ”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 존재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을 뿐이지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아직 대상으로 자리 잡지 않은 모습으로, 아직 의미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모습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배제한다고는 했으나 실상 다 감싸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수 의식은 일체의 것들이 아직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의 무한히 열려 있으면서 자신 속에 폐쇄되어 있는 거대한 흐름입니다.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3. 지각에서 순수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천신만고 끝에 제대로 후설의 말처럼 현상학적인 에포케를 해서 근원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단 들어간 것으로 생각해 봅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일정한 규정들을 일단 삭제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도저히 삭제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마치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과 같은 뭔가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비유적으로 가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알기 쉽게 제 나름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만물이 어떻든 이렇게 저렇게 변하면서 흘러갑니다. ‘흘러간다’라는 표현은 물론 당연히 시간 구속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만물이 변화해 간다는 것을 엄청나게 큰 시각으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느껴지시지요. 일단 그런 만물의 모습을 상상의 그물 속에 잡아 놓기 바랍니다.
이제 다른 상상을 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상이라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저기 창밖에 멀리 보이는 큰 건물이 있습니다. 약 20층쯤 되나요? 그걸 바라보다가 다시 여기 바로 눈앞에 있는 책상을 바라봅니다. 어느 것이 크게 보이나요? 여기에서 ‘크게 보인다’는 말은 사실 참 애매한 말입니다. 이 말은 ‘---인 것처럼 보인다’라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영화관의 스크린을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영화관의 스크린의 크기는 동일한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 스크린 속에 많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맨허튼 거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주인공이 거주하는 실내가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다가 전화벨이 울리자 전화를 접사(클로즈업)시켜 전화가 스크린 전체를 차지합니다. 그러면 앞서 맨허튼의 거대한 어느 빌딩과 지금 접사된 전화 중 어느 것이 더 크게 보입니까? 바로 이런 의미에서 위에서 ‘크게 보인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책상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물론 ‘크게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큰지 어떻게 알았지요? 실제로 더 큰지 어떤지를 알려면 일단 어떻게 해야 합니까? 봐야 합니다. 보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당연히 더 ‘크게 보이게’ 되지요. 단적으로 말합니다. 보지 않고서는 볼 수 없습니다. 보게 되면, 보이는 대상은 ‘----인 것처럼 보인다’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지각이란 그러고 보면, 항상 ‘-----인 것처럼 보인다’를 바탕으로 ‘실제로 ----하다’로 바꾸는 작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실제의 지각에서 구분하기 힘든 까닭은 워낙 이 두 가지가 하나인 것처럼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산보하는 사람을 지금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사람을 실제의 사람을 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실제의 사람은 왔다 갔다 하면서 꽃을 바라보기도 하고 오래된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면서 온갖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정작 ‘지금 여기’라는 짧디 짧은 순간순간에 내가 보는 그 사람은 이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각기 다른 그 사람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각기 다른 그 사람의 모습들을 시시각각 보면서, 그런데도 늘 동일한 실제의 그 사람을 본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죠? 실제의 그 사람과 시시각각의 그 사람의 모습들이 너무나도 딱 붙어 있는 것처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즈음에서 후설의 이야기로 들어가려 합니다. 후설은 내재적 지각(immanente Wahrnemung)과 초월적 지각(transzendente Wahrnehmung)을 구분합니다. 한전숙 선생님에 따르면, 이는 후설의 스승 브렌타노가 내적 지각(innere W.)과 외적 지각(außere W.)이라 구분하던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브렌타노가 말한 내적 지각과 후설이 말한 내재적 지각은 그 함의가 다소 다릅니다. 브렌타노가 말한 것은 심리학에서 내성(內省)을 통해 자기의 심리 상태를 지각하는 것을 내적 지각이라 합니다. 후설이 말하는 내재적 지각은 지금 눈을 번연히 뜨고서 바깥 사물을 보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지각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을 참고해서 보자면, ‘-----인 것처럼 보인다’라고 할 때의 상황 모두를 내재적 지각이라 말합니다. ‘-----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식에 관련시켜 말해 봅시다. 그 모든 내용들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해야 합니까? 의식에 들어 있다 해야 합니까, 아니면 저기 바깥에 일컫자면 물리적인 공간 속에 들어 있다 해야 합니까? 필시 보이기는 저기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죠? 따지고 보면 의식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실제의 지각에서 ‘-----인 것처럼 보인다’라는 상황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의식에 담겨있는(혹은 담겨지는) 가장 원초적인 내용인 것을 인정하게 되면 후설이 말하는 현상학적인 에포케의 영역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주어지고 있는 이 ‘-----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사태들을 아무 생각 없이 주시해 봅시다. 일컫자면 멍하니 아무런 사유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현상학적인 잔여 중 가장 원초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가만히 ‘바보처럼’ 혹은 ‘돌처럼’ 있으니까? 의식하긴 하는데, 그래서 의식 작용이 있긴 있는데 그 의식이, 의식되는 그 무엇 즉 ‘-----인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에 거의 빨려 들어가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이를 후설은 의식 작용과 의식 대상이 무매개적으로 통일된 것이라 말합니다: “내재적으로 향해진 작용, 더 일반적으로는 내재적으로 관련된 지향적 체험이란 다음과 같은 본질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그 지향적 대상이 일반적으로 현존한다고 할 때, 이 체험 자체와 동일한 체험류에 속한다.” ㅡ “내재적 지각에서는 지각과 지각된 것은 본질상 하나의 무매개적 통일, 즉 오직 하나의 구체적인 코기타치오라는 통일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 후설의 말은 너무 일찍 들먹인 셈입니다. 왜냐 하면, 여기에서 후설이 말하는 지향적 대상이나 지각 대상이란 기실 의식 작용이 발휘되면서 나중에 설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설립되더라도 역시 의식 작용과 의식 대상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마찬가집니다만, 곧 설명하게 될 의식의 내실적 영역이야말로 무매개적인 통일을 더욱 강하게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재적 지각 속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면, 즉 바깥에 있다고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의식과 독립된 지각 대상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그저 이렇게 지각하는 의식 작용과 지각되는 의식 내용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라고 확실하게 여기게 되면 엄청난 현상학적인 작업을 한 셈입니다. 왜냐 하면, 이 의식의 영역이야말로 진짜 순수 의식의 영역이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나 사태는 바로 이 영역에서 이윽고 발생해 나오는 것으로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4. 순수 내재적 의식의 내실적(內實的) 영역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인 것처럼 보이는’ 영역, 즉 순수의식의 영역으로 완전히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순수의식의 영역은 가만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내용(내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기실 일정한 규정을 담고 있는 내용은 아님)을 달리하면서 변화하니다. 도대체 이것이 뭔가를 잘 살펴볼 수만 있다면 후설의 현상학에 확실하게 발을 들여놓는 셈입니다.
후설도 이 영역을 설명하려 하면서 그 자체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에둘러 즉 이윽고 성립된 규정들과 관련시켜 이야기합니다. 다소 길지만, 너무나도 핵심적이고, 그뿐만 아니라 후설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인용하고자 합니다. “ ‘전면적이고’ 계속해서 자신 속에서 자기를 통일적으로 유지하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경험 의식에는 본질 필연적으로 계속해서 다양하게 현출되고(Erscheinungsmannigfaltigkeiten) 다양하게 음영(陰影)지는(Abschattungensmannigfaltigkeiten) 다면성의 체계(ein vielfaltiges System)가 속한다. 이 다면적인 체계가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면, 지각에서 생생하게 자기소여 된다는 성격을 띠고서 주어지는 대상적인 모든 계기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현출하고 다양하게 음영지는 것들 속에서 (그리고) 연속적으로 규정되는 동일자들에 대한 의식 속에서, 표현되거나 음영진다. 모든 규정은 자신의 음영 체계(Abschattungenssystem)를 지닌다. 완전한 사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규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타당하다. 즉 각각의 규정은, 파악하면서 기억과 새로운 지각을 종합적으로 통일시키는 의식에 대해 현실적인 지각의 연속적인 흘러나옴(流出 Ablauf)에서 생겨나는 분리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서 현전하는 것이다. / 이제 우리는 동시에, 거기에서 사물 지각들이라 불리는 구체적이고 지향적인 체험의 내실적인 성소(成素 Bestand)에 현실적으로 확실하게 속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 사물이 지향적인 통일태라 할 때, 즉 서로에게로 넘겨지는 지각의-다양한-면모들이 연속해서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리고 현존하면서 그러그러하게 감각적으로 직관되는 징표적인 성소와 함께 사물이 지각된다고 할 때, 지각의-다양한-면모들(Wahrnehmungsmannigfaltigkeiten)은 그 자체 항상 자신의 규정되는 기술적인 성소를 가진다. 이 성소는 저 통일태에 본질적으로 정돈된다. 예컨대 각각의 모든 지각단계에는 필연적으로 색음영들(Farbenabschattungen)이나 형태음영들(Gestaltabschattungen) 등이 속한다. 이것들은 ‘감각 자료들’(Empfindungsdaten)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즉 규정된 종류의 (각기) 고유한 영역의 자료들로 간주된다. 이것들은 각기 그러한 종류 내에서 자기 발생적인 구체적 체험들(감각의- ‘장들’)에로 결합된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 ‘여러 파악들’(Auffassungen)에 의해 지각의 구체적인 통일태에로 생동하게 되고(beseelte sind), 이러한 생동화 작업(Beseelung)에서 ‘표현하는 기능’(darstellende Funktion)을 수행한다. 내지는 이러한 생동화 작업과 함께 우리가 색, 형태 등에 ‘대한 현출됨’(Erscheinen von)이란 일컫는 것을 이룬다. 이는, 앞으로 있을 서로 짜 맞추어 질 여러 성격들과 더불어 동일한 한 사물에 대한 의식인 지각의 내실적인 성소를 이룬다. …… / 음영(Abschattung)은, 동일하게 불릴지라도 원리상 음영지는 것(Abgeschattetes)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음영은 체험이다. 그러나 체험은 단지 체험으로서만 가능적으로 존재할 뿐이지 공간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음영지는 것은 원리상 공간적인 것으로서 가능적으로 존재할 뿐, 체험으로서 가능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뭘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말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요. 하지만 후설로서는 최대한 신경을 써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합니다. 아무튼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말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습니다. ‘전면성’과 ‘다면성’, ‘동일한 통일태’, ‘다양한 현출’과 ‘다양한 음영짐’, ‘다면성의 체계’, ‘지각의 연속적인 흘러나옴’, ‘지각의-다양한-면모들’, ‘지향적인 통일태인 사물’, ‘파악’, ‘현출’, ‘생동화 작업’, ‘표현하는 기능’, ‘지각의 내실적 성소’ 등이 나옵니다.
전면성은 남김없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다면성은 어떤 놈이 주어지는가 하면 다른 놈이 숨어버리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다양한 것들이 개판으로 아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테두리 내에서 주어지는 것을 보고서 ‘다면성의 체계’라 합니다.(계속 다양하게 색이 변하는 것처럼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양이 다양하게 주어지는 것과 혼돈되지는 않습니다.) 일정하게 체계를 지닌 다양한 모습들이 결합해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계속해서 ‘저 것’이라 부를 수 있으면 동일한 통일태가 됩니다. 지각에서 실제 의식은 이 동일한 통일태를 지향하기 때문에 이 동일한 통일태는 ‘지향적 통일태’가 됩니다. 그런데 지향적 통일태가 제 스스로 형성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작용 쪽에서 보면 그것을 확 잡는 힘이 발휘됩니다. 이를 ‘파악’(Auffassung)이라 합니다.(아우프파숭이 파악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저 것’하는 식으로 사물을 지시하기 때문에 사물은 일종의 지향적 통일태이고 따라서 ‘지향적 통일태인 사물’이라는 말이 성립합니다. 그러니까 지향적 통일태들은 다 파악되는 것이고, 따라서 지향적 통일태인 사물도 파악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아직 통일성으로 이루지 못하고서 그저 흘러나오듯 다양하게 변하면서 의식에 솟아오르는 것을 ‘현출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현출하는 다양한 감각적인 면모들 내지는 음영들을 보고서 이를 자료(질료 Hyle)로 삼아 동일한 통일태를 파악하는 것이지요. 이 동일한 통일태가 바로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를 달리 의미 통일태라고도 합니다. 여러 각도로 빛이 비치는 가운데 여러 색깔로 다양하게 변모하는 장미꽃의 다양한 순간순간의 색깔들(이것들이 후설이 말하는 색음영들이지요.)을 보고서 동일한 통일태인 ‘빨강’을 파악하는 것이지요. 그때서야 장미꽃이 빨갛다는 규정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물론 이 규정을 하려면 ‘장미’ 혹은 ‘꽃’ 등에 대한 규정이 함께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하게 동일한 통일태로 규정하기 전에 이리저리 다양하게 변화하는 순간순간의 것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허망한’ 것들이기 때문에 아직 정확하게 ‘혼을 가졌다’ 할 수 없습니다. 즉 아직 생동한다 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을 정확하게 동일한 통일태로 만들 때 비로소 생동하게 되기 때문에 동일한 통일태로 만들어 파악하는 의식의 작용을 ‘혼을 불어넣다’(beseelen)라고 하고 ‘생동화 작업’이라 번역하게 됩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무지 복잡합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후설은 마지막에 음영과 음영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종류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음영지는 것은 공간적인 것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만, 음영은 체험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음영을 음영지는 것에 대한 의식 즉 지각의 내실적인 성소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는 음영에서 음영지는 것이 성립되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아주 그 구조가 복잡합니다.
그러면 그 유명한 노에마(Noema)는 무엇인가요? 아직 노에마에 관한 이야기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에서 지향적 통일태 혹은 동일한 통일태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바로 노에마입니다. 그런데 이 노에마는 무엇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던가요? 앞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음영지는 뭇 다면성의 체계’를 재료로 해서 의식의 작용이 가해졌던 것이고 그래서 노에마가 생겨난 것이지요. ‘음영지는 뭇 다면성의 체계’ 즉 순간순간 여러 다른 모습들을 연출해 보이는 이상한 영역이 있었는데 그것을 후설은 질료(Hyle)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질료를 바탕으로 노에마를 지향적인 통일태로 만들어내는 지향적인 의식을 특별히 노에시스(Noesis)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질료에 노에시스가 가해져서 노에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삼각 구도야말로 후설 현상학 특히 정적(靜的) 현상학에서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노에마가 성립되기 전의 질료와 노에시스의 영역을 순수 내재적 의식의 내실적 영역이라 후설은 말합니다.
후설 현상학에서 정적 현상학 말고 발생적(發生的) 현상학이란 것이 있습니다. 발생적 현상학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체험들이 시간 계기에 따라 서로 겹치고 영향을 미치는 과정입니다. 이를 송두리 채 표현한 것이 절대적 체험류(das absolute Erlebnis)입니다.
5. 절대적 체험류: 이 모든 것은?
어제는 전혀 능력도 없는데 소설이 쓰고 싶었습니다. 현상학적인 세계 속으로 너무나 깊게 끌려들어간 나머지 묘한 환상 속에서 삶을 사는 한 인간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교대 역에서 3호선을 벗어나 2호선을 갈아타야 했습니다. 수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들. 그 틈 사이로 내 몸이 빠져나가고 있지만, 나의 시각장에는 예의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 속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장면들이 겹쳐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들은 강의를 통해 늘 떠들었습니다만, 말 그대로 무한한 모습으로 연속해서 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 몸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의 몸도 움직이고 또 다른 사물들의 몸(몸체)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대 역 환승로를 지나가면서 이들 모든 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뭇 몸들이 서로에게 감각적인 정보를 내뿜고 나는 그 감각적인 정보들을 그렇게 쉬임 없이 내가 보고 느끼는 장면들로 바꾸어 내고 있었습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훑어보듯 하는 어느 한 인간의 눈빛도 장면을 장식하고, 스넥 코너의 메뉴들이 방향이 바뀜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면서 한 그릇 먹고 갈까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필름 집도 지나가고, 어느덧 계단이 나타나면서 ‘에구 힘들고 지겨워’ 하면서 올라서니 강남역 가는 지하철 열차가 떠나갑니다. ‘내일이면, 이 모든 장면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 어렴풋하게만 떠오르지 않겠지. 경험론의 대가 데이비드 흄의 말처럼, 지금 내가 이렇게 뚜렷이 보고 있는 장면들(인상들)은 순간순간 모습을 달리 하면서 어렴풋한 장면들(관념들)로 바뀌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내 몸이 언제 어디로 가는가에 따라, 혹은 언제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뚜렷이 보고 느끼는 장면들이 달라지면서, 이미 뚜렷이 보고 느꼈던 다른 장면들은 기억에 의한 어렴풋한 장면들로 바뀌고 맙니다. 뚜렷함과 어렴풋함, 명시적인 지각과 암시적인 기억, 한번 지나간 명시적인 지각은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고(그래서 영화의 기록이 대단하고), 어쨌거나 새로운 장면들이 뚜렷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찰나적인 시공간의 수수께끼 속에서 인간은 삶을 영위하는 모양입니다.
1) 사물들의 몸체와 체험의 관계
지금 나는 현상학 강의를 준비하느라 예의 컴퓨터의 모니터와 자판에 매달려 있습니다. 몇 시간 후면 강의가 시작될 테고, 선생이랍시고 나를 쳐다보고 신경을 쓰면서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애 쓸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론 이렇게 떠오르는 모습은 그동안 강의한 장면을 기억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시간에 대한 후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이런 미래에 대한 기대(Erwartung)는 과거에 대한 재상기(Wiedererinnerung)에 의해 가능한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이런 까닭에 기억의 창고를 중시하게 되고, 그 기억의 창고에 쟁여져 있는 뭇 체험들을 중시하게 되기도 합니다. 뭇 체험들 자체를 들여다보게 되면, 그것들이 명시적인 지각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뭇 사물의 몸체(몸)는 온 데 간 데 없고, 그것들이 나의 체험을 이루는 나의 의식에 미친 영향만이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들이 사물이라는 이른바 체험과는 완전히 존재의 성질을 달리하는 몸체(몸)이라는 사실조차 일종의 인식적인 체험의 그물 속에서 성립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더 심하게 밀고 나가면, 명시적으로 지각하는 체험에서조차 그 사물들이 몸체(몸)을 지녔다는 사실이 일종의 인식적인 체험의 그물 속에서 성립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 사물에 대한 지각 체험에서 사물의 몸체(몸)는 과연 지각 체험을 벗어나는가?
체험의 종류가 어떠하냐에 따라, 체험에서 주어지는 대상들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예컨대 1, 2, 3 등의 수를 계산하면서 체험할 때에 그 수들이 사물들이 지닌 것과 같은 몸체(몸)를 가졌다는 느낌이 전혀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인반마를 상상할 때에, 그 상상의 체험은 나의 상상 속에서만 반인반마가 ‘몸체(몸)’를 가졌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이때 반인반마의 몸체(몸)에 대해 진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를 후설은 ‘의사정립적’(quasi-positional)이라는 매우 어려운 말로 분류합니다. 상상을 통해 반인반마를 떠올리면 반인반마의 몸체(몸)가 함께 떠오릅니다. 몸체(몸) 없는 반인반마는 아예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몸체(몸)에 대해 명시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컴퓨터나 책상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이 모든 사물들의 몸체(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인반마의 몸체(몸)에 대한 체험과는 완전히 그 성격이 다릅니다. 정말이지 바깥에 이렇게 자신의 몸체(몸)을 갖고서 다른 몸체(몸)가 그 자리에 결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렇게 당당하게 버티고서 자신들의 몸체(몸)를 ‘자랑하고’ 있는 사물들을 지각한다고 할 때, 사실 그 같은 사물들에 관한 사실들은 지각을 통해 성립될 뿐입니다. 말하자면, 지각 체험을 통해 그 같은 사실이 체험될 뿐입니다. 그런데 체험이란 그 성격상 어떻습니까? 사물 자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사물의 몸체(몸)에 대한 체험과 사물의 몸체(몸)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몸체(몸)에 대한 체험을 통해 사물의 몸체(몸)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사물의 몸체(몸)에 대한 체험과 사물의 몸체(몸)을 동일하게 여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달리 말하면, 사물의 몸체(몸)가 우리에게 체험될 때, 그것에 대한 체험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반인반마의 몸체(몸)에 대한 상상의 체험과 반인반마의 상상적인 몸체(몸)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반인반마의 몸체(몸)가 상상적으로 체험될 때, 그것에 대한 상상적인 체험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체험됩니까, 아니면 그것에 대한 상상적인 체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체험됩니까? (말이 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논리적인 상상력을 더 잘 발휘하기 바랍니다.) 후자의 경우로 체험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흔히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사물들의 몸체(몸)에 대해 지각적으로 체험할 때 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울 역을 지금 떠올려 봅시다. 지금 당장 서울 역을 명시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인반마를 떠올릴 때 하고 엇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양자가 같은 방식으로 떠올려집니까, 어떻습니까? 서울 역을 떠올릴 때에는 서울 역이라는 몸체(몸)가 서울 역을 떠올리는 체험(표상 체험)과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느낌이, 반인반마를 떠올리면서 반인반마의 몸체(몸)가 떠올리는 체험과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느낌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말하자면, 직접 지각하지 않더라도 지각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떠올리더라도 그 몸체(몸)가 그것을 떠올리는 체험과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느낌이 확실히 다가듭니다. 반인반마와 같이 지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떠올리는 체험과 독립해서 그 몸체(몸)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정리해서 말해 봅시다. 사물의 몸체(몸)에서 그 독자적인 존재성은 원리적으로 우리의 체험에 의존해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느냐 하면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의 몸체(몸)에서 그 독자적인 존재성은 원리적으로 우리의 체험에 의존해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요? 그것은 바로 근원적으로 오로지 ‘지각 체험에 의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각 체험에 의해서’라는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로 강력하게 해석하는가가 문젭니다.
2) 지각 체험은 사물의 몸체가 지닌 독자성을 근원적으로 떠받친다면
만약 이 ‘지각 체험에 의해서’라는 말의 의미를 강하게 해석해서 ‘사물들의 몸체(몸)가 지닌 체험과 분리된 독자적인 존재성’을 저 바탕에서 가능하게 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보게 되면, 다시 한번 사물들의 몸체(몸)의 독자적인 존재성이 지각 체험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서 지각 체험을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 됩니다. 칸트의 구성론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후설의 구성론도 이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컨대 칸트는 지각 체험의 힘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물 자체’(Ding an sich) 개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물 자체’가 우리가 말하는 몸체(몸)을 지녔는지 어떤지에 대해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그 ‘물 자체’에 대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지각 체험의 힘을 아주 강력하게 해석해서 만물의 몸체(몸)의 존재성을 떠받치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것은 바로 지각 체험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선험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지성적 주체를 설정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각 체험의 주체가 말한 셈입니다. 그런데 그 선험적 통각 역시 물 자체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종의 반성적인 극과 같아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와 달리 후설은 절대적 체험류를 내세웁니다. 만물의 몸체(몸)의 존재가 체험, 특히 지각 체험에 의존해 있다면 지각 체험이 없이는 만물의 몸체(몸)의 존재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되고, 따라서 존재하니 안 하니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각 체험은 항상 흐르고 또 흘러 늘 새롭게 만들어지고 침전되고 하면서 거대한 체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를 나의 개인적이고 경험적인 지각 주체로 한정시킬 수 없습니다. 개인성을 넘어서고 경험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주체가 요구되는 것이고, 그래서 후설은 절대적 체험류라는 주체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 주체는 그저 주체의 극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무한한 만물의 몸체(몸)와 그것들이 엮어내는 뭇 사건들을 ‘체험’이라는 거대한 시간적 도관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고 보면, 이제 만물 내지는 만물의 몸체(몸)와 그것들이 엮어내는 뭇 사건들은 곧 절대적 체험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아울러 절대적 체험류는 주체이자 대상인 것으로 됩니다. 마치 원을 그리는 궤적의 운동을 위에서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데 반해 아래에서 보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이 표현은 메를로-퐁티가 주체인 몸과 대상인 사물들의 몸이 동일한 것임을 말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체험류를 어떻게 보면 뭇 사물들과 사건들이요, 또 어떻게 보면 거대한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절대적 체험류에는 안과 밖이 없는 것이지요.(이는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의 안과 밖이 없다고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절대적 체험류 속에는 지각 체험뿐만 아니라, 상상 체험, 소원 체험, 판단 체험, 논리 체험, 가치 평가 체험, 기호 작용의 체험 등 뭇 체험들과 그 내용들이 다 포함됨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후설은 이들 체험들이 지각 체험에 기초한 변형들이라고 말합니다.
6. 사물의 몸체(몸)는 체험을 넘어서서 체험의 바탕이 된다면
후설이 말하는 절대적 체험류는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시간의 이해에서 그러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지 않던가요. 이를 대상이라 알고 있는 것은 실은 주체고, 주체라 알고 있는 것은 알고 보면 대상이라 풀면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절대적 체험류를 그리고 있게 되면, 가없는 이 시공간의 전체의 삶을 그리면서, 그 속에서 발버둥치듯 영위되는 나 자신의 삶 혹은 인간들의 삶을 다소 여유 있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절대적 체험류가 설립되어 나온 근거는 뭇 사물들의 몸체(몸)가 지각 체험이라는 의식의 그물을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없다는 데서 성립합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이 능사냐 하는 것인데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지각 체험에서 지각되는 사물들의 몸체(몸)는 체험과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체험된다고 했습니다. 이를 잘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체험 자체가 체험되는 사물들의 몸체(몸)가 체험 자신과는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사물들의 몸체(몸)가 다른 몸들이 침범할 수 없는 성격을 띤다고 했습니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불가투입성(不可投入性)이라고 합니다만, 만약 이를 억지로 어기려 할 경우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억지로 저기 있는 바위 속으로 들어가 그 몸체(몸)의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당연히 우리 몸이 상처를 입거나 바스러지거나 할 것입니다. 피를 흘리게 될 것이고, 지쳐 스러져 잘못하면 죽고 말 것입니다.
그저 지성에 의거한 인식적인 주체만을 참다운 주체라고 여길 때에는, 앞서 말한 의식의 작용에 의한 체험의 힘을 사물의 몸체(몸)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신적인 감각에 의거한 삶의 주체를 참다운 주체로 여길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식적인 체험의 그물망을 넘어서서 그 인식의 체험이 가져다주는 대상적인 힘들, 특히 사물들의 몸체(몸)와 그것들이 엮어내는 사건들 자체가 지닌 힘들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힘이란 바로 우리 몸에 미치는 구체적인 힘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각 체험에서 사물들의 몸체(몸)가 지닌 체험 독립적인 존재성은 인식적인 체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체험에 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실천적인 체험의 주체인 우리의 몸(물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도록 만듦을 알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가 세계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의 몸체(몸)의 체험 독립적인 존재가 이미 성립되어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모든 의식 활동과 그에 따른 체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각 체험이 지각 대상인 사물들의 몸체(몸)가 지닌 독립적인 존재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각 대상인 사물들의 몸체(몸)가 지각 체험의 바탕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지각 체험은 지각 대상들인 사물들의 몸체(몸)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각 체험은 지각 주체인 우리들의 몸(몸체)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지각 체험을 우리들의 몸(몸체)과 사물들의 몸체(몸)와의 관계로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후설의 현상학을 넘어서서 또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물러서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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