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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 (정리: 박정민)
LEEYOUNG 2005/09/25 17:57 | DELEU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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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어 콜브룩, 『들뢰즈』(백민정 옮김, 태학사 2004) 119-152쪽
                        
          
1960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후설 현상학이 내세우던 '대상 세계의 최후 근거로서의 초월론적(transzendental) 주체'에서 눈을 돌려, '타자의 개입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주체'를 그려내려 하였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 앞에서 수치심과 함께 발생하는 주체를 그리려 했고, 레비나스는 고통당하는 타자의 얼굴에 직면함으로써 발생하는 도덕적 주체를 이야기했다. 또한 메를로-퐁티는 화가를 '바라보는' 대상의 시선을 말하면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주체의 시야가 발생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라캉은 타자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써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가 본暉磯鳴?말했다(서동욱 213-218 참고). 들뢰즈 역시 초월론적 토대로서의 주체에 대한 믿음을 비판한다. 그는 주체가 경험의 토대가 된다는 근대철학의 입장에 반대하며, "자신 이외에 어떤 근거로 지니지 않는 경험이나 삶 또는 생성"(119)을 사유하려 하는데 이것이 그의 '초월론적 경험론'의 기획이다.
 

1. 초월성과 주체
 
초월성(transcendence)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자. 초월성이란 초월하는 것, 바깥에 있는 것, 어떤 외부성(exteriority)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알 수 있고 드러낼 수 있고 혹은 해석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리고 우리에게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122)이다. 푸코는 이러한 초월성에 대한 복종이 전통적 서양 철학이 갖는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그 자신은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했다. 푸코의 기술을 따르자면 "가장 분명하고 일반적인 초월성의 형식"(123)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해석, 또는 계시와 폭로를 기다리는 어떤 초월적인(transcendent)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사제들'과 '금욕주의'에게로 이끌며,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로 이끈다. 허무주의란 것은 "우리가 현상들 이면에 있다고 상상했던 더 높은, 더 참된 세계가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때 발생하는 절망"(124)에 다름아니다. 
 
들뢰즈도 역시 초월성의 철학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한다. 그런데 들뢰즈와 푸코에 따르면 진리 말고도 특정한 초월성의 환각이 하나 더 獵? 그것은 바로 '주체'라고 하는 관념이다. 근대철학의 체계 속에서, 경험이란 언제나 어떤 주체에게 주어진다. 즉 경험은 '주체의 경험'인 것이다. 그런 한에서 주체는 경험을 가능케 하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이다.
 
주체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진리, 존재 혹은 세계가, 경험된 세계라고 주장함으로써 정립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회의나 의문에 열려 있다. 회의될 수 없는 것 혹은 의문을 넘어서 있는 것은 주체, 경험하거나 회의하는 자 자신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로 표현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을 의심할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사유하고 있고, 그래서 어떤 확실성의 근거가 존재하게 된다(125).
 
'생각하는 나', 즉 근대철학이 내세우는 초월론적 주체는 모든 초월적이고 독단적인 기초를 철학에서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는 주체 역시 "초월성의 다른 하나의 형식"(125-126)에 불과하다. 주체 개념과 함께 우리는 고래의 초월적(=외재적인) 기초를 제거했지만 그와 함께 우리는 궁극적인 기초로서의 '사유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유의 이미지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의견과 공통감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은 ∼라고 생각한다"든가 아니면 "우리 모두는 ∼라는 것을 알고 있다"든가 아니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든가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이것 역시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은, 임의적인 전제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 내재성의 구도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궁극적인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 이를테면 '나는 무엇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에 이것이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사람들은 이미 세계와 구별되는 '나'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는데, 들뢰즈는 이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으로서 나와 세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는 주체들이나 대상들, 안과 겉이 없이 경험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128). 그는 이것을 내재성의 구도(plane of immanence), 즉 "어떤 구별되는 지각자들도 없는 삶과 지각작용의 순수한 흐름"(128)이라 한다.
 
들뢰즈는, 그것을 가로질러서 내부(마음이나 주체)와 외부(세계나 확실성)라는 구별이 도출되어 나오게 되는, 그런 전제된 장인 '내재성의 구도'를 언급하고 있다. 경험으로부터 주체는 형성된다. 지각작용이 존재하고, 이런 지각작용으로부터 지각자가 형성된다. 이 지각자는 어떤 외부 혹은 초월적 세계와의 관계에서 '나'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진리나 초월, 경험에 대한 어떠한 기초나 근거도 항상 경험의 사건이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해야만 하는 주체들로서 시작하지 않는다. 경험이 존재하고, 이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구별된 주체들이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마음이라는 주체 이전에, 들뢰즈가 '유충적인(larval) 주체들'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한다. 아직까지 자아로 조직되지 않은 다양한 지각작용들과 응시들(contemplations)이 존재한다. 외부나 '초월적' 세계라는 관념은, 주체에 의해 생산되지 않고 수동적으로 결과하는 것이고, 이런 내재성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이다(128).
 
들뢰즈는 이 내재성을 구도를 '바깥'(the outside)이라 부른다. 여기서 바깥이란 '나' 자신의 내부와 대비되는 외부(exteriority)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의존하고 있는 어떤 전제로서의 근원적 바탕이다. 그러니까, 내부와 외부라는 것부터가 "비인칭적인 경험이나 지각작용이라는 근본적인 바깥"(129)에서부터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사유자는 경험의 토대로 보여지는 초월적 개념들의 환각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유일한 내재성의 구도'(THE plane of immanence)를 그 자체로서 사유해야 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보자. 우선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것에 선행하는, 곧 삶 그 자체에 다름아닌 "차이의 흐름들 혹은 카오스"(131)가 있는데 그는 (가타리와 함께) 이것을 '카오스모스'(chaosmos)라 부른다. 이것은 아직 '세계'도 '지각된 삶'도 아닌, 근본적인 '바깥'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차이의 흐름으로부터 유기체들이 분화되어 나온다. 인간 유기체는 자신이 銖置構?된 근거인 카오스를 향해 열려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는 재인가능한 자리에서 항상 그렇게 한다. 이들은 내부와 외부의 구별을 창조하고, 초월이나 '세계'를 창조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이란 "카오스에 '일관성'(consistency)을 부여하고, 우리로 하여금 초월성을 생산했던 내재적 차이를 사유하게끔 하는 것이다"(132).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내재성 긍정의 선구적 작업을 읽는다. 스피노자는 신을 '자신과 구별되는[=분리되는] 세계를 창조한' 초월적 타자로 보려 하지 않았다. 만약 신을 어떤 외부에 있는 창조자로 보게 된다면 결국 신 이외의 어떤 것[=세계]이 존재하게 되므로 신은 절대자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표현적 실체에 다름아니고, 실체는 단지 자신의 표현일 뿐이다"(133). 세계를 구별된 실체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것은 단지 우리의 제약된 관념이다. 적합한 관념은 삶을 "자신 외부에 어떤 근거도 가지지 않는 하나의 절대적인 표현"(134)으로 본다. 따라서 적합한 관념은 우리가 제약적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우리 자신을 넘어서 사유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들뢰즈의 문맥에서는 초월성과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3. 경험론: 관념론 비판
 
경험론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그와 대비되는 관념론의 입장을 검토하도록 하자. 관념론에 따르면 우리는 불규칙적이고 혼란스럽게 주어진 것들에 관념을 매개로 ?통일적인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관념론은 질서를 부여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를 전제한다. 세계는 주체에게 ―관념을 매개로 하여―  '주어져 있는' 한에서, 또한 주어져 있는 방식으로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관념의 매개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이러한 방식에 반대한다. 삶이나 존재는 관념들에 의해 매개되거나 질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태양의 관념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 그 자체를 경험하듯이 말이다. 경험론의 입장에 따르면 관념들이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들은 경험의 결과이다. 우리는 주체가 구성하는 관념들로써 세계와 경험을 설명할 수 없으며, 반대로 "어떻게 주체가 경험으로부터 형성되는지를"(137) 설명해야 한다. 
 
관념론과 경험론의 견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과성에 대한 양자의 설명 방식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관념론적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적 사태들을 인과율이라는 관념을 통해서 하나의 시퀀스로 연결한다. 반면 경험론에 따르면 "a가 b를 따른다는 것과 같은 시퀀스의 경험이 존재하고, 이런 시퀀스가 궁극적으로 인과율이라는 관념을 생산한다"(137).
 
관념들은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는, 경험에 대한 반성들이다. 주체는 이런 관념들의 주인이 아니다. 차라리 경험이 마음 속에서 발생하고, 경험들의 계열들로부터 주체가 형성된다. 마음은 경험이 발생하는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 마음은 a와 그 뒤의 b라는 인상을 수용한다. 마음은 이런 인상들이나 이미지들을 연결시키거나 종합시키지만, 들뢰즈의 논점은 연결시키는 어떤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차라리 연결들만이 존재하고, 마음은 단지 연결들이 발생하는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137).
 
그러므로 경험은 '주체의 경험'이 아니다. "비인칭적이거나 비인격적이고 혹은 익명적인 경험의 구도는 인식과 인간적 세계를 넘어서 있다"(138).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의 계열을 응시하는 마음이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몸들이 연결되어 규칙적인 시퀀스들을 형성하고 그 다음에 이런 시퀀스들을 더 일반적인 '주체성'이라는 관념으로 반성하고 확장시킨 뒤에야, '인간'이나 '주체'라는 관념을 가질 수 있다"(141).
 
들뢰즈는 이런 경험론적 관점을 문학 이해에 적용한다. 시시한 문학은 ―저질 티비드라마가 그렇듯이― 뻔하게 주어져 있는 인물 유형들과 단순한 도덕적 구분을 갖고 있다. 사건들조차 일정한 포맷을 갖고 있다. 들뢰즈는 이와는 달리, 어떤 선행하는 근거도 갖지 않는 다양한 경험과 감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주목하는 프루스트나 찰스 디킨스와 같은 이들의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단지 자신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건들과 역사들이다. 우리 자신이 그렇듯이, 인물은 '삶의 사건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학이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재인하는 인간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들을 열어놓는 감응들의 창조"이다(143).
 
참된 문학은 다양한 감응들이나 경험들로부터 출발해서 그것들이 등장 인물이나 사람들로 조직되는 것을 추적한다(143).
 
4. 초월론적 경험론
 
사람들은 경험을 '인간의 경험'이나 의식으로 규정하려 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경험이란 우리가 능동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있는 보다 넓은 영역이다. 따라서 경험을 어떤 궁극적인 주체의 경험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존재나 관념이 결과로 나오는 그럼 흐름과 다양성으로 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경험론에서도 경험은 인간적이고 의식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경험하는 어떤 근거, 주체 혹은 존재도 없고 단지 경험만이 있다"(148)고 주장한다. "세계를 [능동적으로] 응시하는 사람들이나 존재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비인칭적인 응시들"만이 있다는 것이다(149). 들뢰즈는 경험을 어떤 관찰자나 주체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초월론적 원리로 간주한다.
 
모든 삶이 인간적 경험이나 주체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荑?우리는 주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어떻게 하나의 결과로서 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오직 경험들만이 있다. 이것들은 연결되어 몸들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런 연결들을 응시하는 몸은 자신을 이런 연결들의 저자나 근거로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이것이 초월론적 주체, 즉 그 안에서 경험이 발생하게 되는 그런 구도로서의 주체의 환각이다(150).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의도는 "경험으로부터 생산되었지만 경험을 노예로 만드는 그런 관념들과 이미지들"(150)을 파괴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취한 하나의 이미지를 오히려 경험의 입법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콜브룩은 이러한 관점이 갖는 정치적 함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면 "어떤 것도, 정의도, 민주주의도, 법도, 인간성도 우리는 정치적 논증들을 위한 근거로서 의지할 수 없다"(151)는 것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입장이 어떤 정치적 회의주의나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보는 것은 이어질 마땅한 과제가 될 것이다.
  
 * 함께 참고한 책.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자료출처 http://rienyoung.tistory.com/m/post/view/id/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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