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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기독교세계관

들뢰즈는 왜 다시 전위를 이야기하는가?:

들뢰즈는 왜 다시 전위를 이야기하는가?: 


들뢰즈는 왜 다시 전위를 이야기하는가?: 
 ‘전쟁기계’와 ‘장인’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28호
오창룡󰋯서울대 박사과정/ 정치학과

“언제나 무엇인가가 흘러나가고 탈주한다.” “탈영토화된 것은 필연적으로 재영토화된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집필한 󰡔천 개의 고원󰡕에는 이 두 가지 명제가 동시에 등장한다. 전자의 명제가 강조될 경우 들뢰즈와 가따리의 정치철학은 봉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한 매우 급진적인 기획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낙관과 긍정은 분명 매력적으로 보인다. 광폭한 자본의 공격 앞에서 모두가 좌절하고 있을 때, “왜 새로운 유형의 혁명이 가능해지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라는 들뢰즈 특유의 낙관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들뢰즈가 의미를 부여한 개념들, 그리고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많다. 언뜻 보기에 그의 철학은 세계를 구체적으로 변혁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명제가 강조될 경우, 들뢰즈의 철학은 뒷짐 지고 모든 혁명과 좌절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관조하는 해석의 철학에 그치게 된다. 
국내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둘러싼 논쟁은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의미한 이론이 ‘차이의 철학’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동일성의 철학’이어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층위의 문제에 집중되어왔다. 이러한 쟁점은 변혁의 주체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들뢰즈 스스로가 그러한 변혁의 주체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를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 12장에서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서 ‘전쟁기계’ 혹은 ‘유목민’이라는 개념을 통해 ‘저항하는 민중’의 상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소위 ‘유목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하에서는 󰡔천개의 고원󰡕 12장에 등장하는 ‘전쟁기계’와 ‘장인’ 개념에 집중하여 들뢰즈의 ‘민중’에 대한 고민을 추적해보겠다. 󰡔천개의 고원󰡕은 많은 은유들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해석의 정당성 문제가 거론될 수밖에 없으며, 들뢰즈에게서 특정 형태의 ‘민중론’을 도출해 내는 것 역시 매우 무리한 시도일 수 있다. 이하에서 필자는 다만 들뢰즈에 대한 하나의 다른 해석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자 하며, 그렇게 해석된 들뢰즈의 논의가 현재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들뢰즈의 ‘전쟁기계’ 혹은 민중에 대한 논의

1) 전쟁기계란 무엇인가?

󰡔천개의 고원󰡕에는 많은 은유가 등장하고 있고, 주요한 개념들이 그물망처럼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을 떼어내어 설명하는 것이 힘들게 되어 있다. 󰡔천개의 고원󰡕 12장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쟁기계’ 개념 역시 그 의미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전쟁기계를 다음의 세 가지 공리로 설정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ⅰ)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 ⅱ)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 ⅲ) 유목적인 전쟁기계는 소위 표현의 형식이며, 이것과 관련된 내용의 형식이 바로 이동적 야금술이다. 이러한 공리들만 떼어 놓고 보면 수수께끼와 다름이 없지만,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라는 두 번째 공리에서부터 전쟁기계의 의미를 추적해볼 수 있다. 들뢰즈는 유목민들을 정해진 땅에서 항상 떠나고, 이동하고, 약탈하는 무리로 묘사한다. 이 유목민 혹은 야만족들은 오고가며, 국경을 지나가고 강탈하지만, 또한 통합되고 재영토화되기도 한다(천고 423-4; MP 272). 유목민들이 전쟁기계를 발명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전쟁기계는 특정한 물질적 대상을 지칭하기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벗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유목민들의 흐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불복종 행위, 봉기, 게릴라전, 혁명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천고 742; MP 480). 따라서 ‘전쟁기계’란 고정된 질서와 통제를 벗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민중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다음으로 이러한 민중 혹은 전쟁기계가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쟁기계는 처음부터 국가 외부에 있었다.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로 환원 불가능하며 국가의 주권 외부에 존재하고 법에 선행한다. 전쟁기계는 구속을 푸는 동시에 계약을 배반한다. 모든 측면에서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와 다른 종류, 다른 본성, 다른 기원을 갖는다(천고 672-3; MP 435-6). 들뢰즈가 이렇게 전쟁기계와 국가장치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유는, 전쟁기계 자체가 국가 장치의 ‘폭력’ 혹은 ‘군사제도’와 때때로 혼동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종종 전쟁기계를 전유하기도 하지만, 전쟁기계는 분명 국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전쟁기계의 국가에 대한 외부성을 논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단순한 ‘안과 밖’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관계 맺는 외부는 특이하게도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국가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향유하는 다국적 형태의 기업들 혹은 기독교, 이슬람 등의 종교적 단체들(세계적인 거대 기계)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 권력 기관에 맞서, 사회의 권리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패거리, 주변부 집단, 소수자 집단들(국지적인 메커니즘)이다(천고 689; MP 445). 이러한 방향 설정을 따른다면, 전쟁기계가 위치하는 국가의 외부란 역설적으로 국가 내부의 국지화된 공간을 의미하게 된다. 거기서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와 공존하고 경쟁하며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천고 690; MP 446).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들뢰즈가 전쟁기계라는 개념으로 묘사하는 ‘저항하는 민중’의 상(像)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저항하는 민중’은 언제나 속박과 통제를 벗어나는데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등장을 단지 국가의 구성원이 국가에 반기를 드는 것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민중이 이루는 흐름은 처음부터 국가 밖에 있었고, 처음부터 국가장치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복종, 봉기, 혁명 등은 국가의 역사를 완전히 벗어나 처음부터 그 외부에 있었다. 이때 그 ‘외부’란 공간적인 의미의 바깥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의 내부에 국지적으로 퍼져있다. 민중들은 그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에서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넘쳐흘러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반면 국가는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저항의 흐름들을 국가 안으로 내면화한다. 이러한 상호과정 속에서 국가는 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내면화된 경계를 다시 넘어야 하는 민중의 저항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변신해 나간다.

2) 전쟁기계와 정념의 문제

들뢰즈의 고민은 이러한 전쟁기계가 무엇에 의해 추동되는가의 문제로 진행한다. 들뢰즈는 “민중들은 왜, 어느 순간에 자발적 예속을 중단하고 경계 밖으로 나오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보통의 패거리들, 무리들, 집단들을 ‘저항하는 민중’으로 변신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들뢰즈는 먼저 정념(affect)에 주목한다. 들뢰즈에게, 민중들은 계약과 계약의 파기에 의해 국가에 종속되고 또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은 그들의 물리적 결합이 화학적 결합으로 변할 때, 즉 정서적 끈에 의해 관통당하고 서로를 자극하게 될 때, 국가가 설치한 울타리를 넘어서게 된다.

정념은 화살처럼 신체를 관통한다. 정념은 전쟁 무기인 것이다. (중략) 그리고 긴장증 혹은 실신, 섬광 혹은 가속의 끝없는 연속을 부여할 것이다. 긴장증은 “이 정념은 내겐 너무 강렬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섬광은 “이 정념의 힘이 나를 휩쓸어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거기서 자아(Moi)는 이제 행동과 정서가 탈주체화된, 죽음을 무릅쓴 인물이 된다(천고 682; MP 440).

일상의 공간에서 ‘개인’으로 호명되는 자아들이 무리 속으로 들어가 개인을 넘어서게 되고, 또 위험을 무릅쓰게 되는 원인은, 이들이 이처럼 정념에 의해 관통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념에 휩싸이게 될 때, 패거리, 무리, 집단들은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르는,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이끌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념은 단순한 감정(sentiment)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정념은 정서(emotion)의 급속한 방출, 반격인 반면, 감정은 항상 치환되고, 지체되는 단단한 정서이다(천고 768; MP 498).
이러한 전쟁기계의 정념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되기(생성)’의 중요한 단계로 설정한 ‘동물-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추론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들뢰즈에 따르면, 동물-되기에는 언제나 무리, 패거리, 개체군 등의 다양체가 수반되고, 이러한 무리-되기는 팽창, 전파, 전염을 가져온다. “늑대 인간은 그를 바라보는 여러 마리의 늑대에 매혹된다.”(천고 455; MP 293). 여기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모든 동물은 일차적으로 패거리이며 무리’라는 점이다. 즉 어떠한 변화를 원한다면, 무엇인가를 생성하고자 한다면 일단 무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강조한다.

무리를 이룬 집단이 공유하는 정념이란,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어떤 특징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아를 들어올리고 요동시키는 역능을 의미한다. 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자아를 인류로부터 분리시키고, 설치류처럼 빵 조각을 긁어대도록 만들고, 고양이의 노란 눈을 갖게 만드는 그런 동물적 시퀀스의 폭력을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천고 457; MP 294).

3) 전쟁기계의 종교성과 단체정신

이상의 내용을 다시 종합해보면, 전쟁기계 혹은 저항하는 민중이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단지 공통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특정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정념에 의해 자아를 넘어서고 무리를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상의 논의에서 전쟁기계에 ‘국가 외부’라는 절대적인 장소를 마련해주고, 정념이라는 가공할만한 무기를 장착해 주었음에도, 이 전쟁기계를 전투에 바로 투입하지 않고 그 내부를 더 깊게 파들어 간다. 들뢰즈는 전쟁기계를 다시 ‘종교’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들뢰즈는 발생기의 이슬람교, 십자군 등을 예로 들어, 종교가 전쟁 기계화되는 경우 그것은 거대한 유목성, 절대적 탈영토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들뢰즈는 종교와 유목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왕이라는 국가의 인물, 사제라는 종교의 인물에 대립하는 예언자는 운동을 지휘함으로써 종교가 전쟁기계로 되거나 전쟁기계의 편으로 넘어가게끔 한다. 이슬람교와 예언자 모하메드가 이런 종교의 전환을 수행했고 진정한 ‘단체정신’(몸체를 이루는 정신; esprit de corps)을 구성했다는 이야기는 종종 있어왔다. (중략) 예언자들이 유목민적 삶을 비난해도 소용이 없었다. 종교적 전쟁기계가 이주 운동과 정주의 이상을 특권화하려해도 소용이 없었다. 종교 일반이 그것의 특수한 탈영토화를, 정신적인 혹은 심지어 물리적인 재영토화―성스러운 전쟁을 통해 세계의 중심인 성지(聖地)를 정복한다는 명분을 갖는―로 대체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전쟁기계로 될 때, 그것은 가공할 만한 중량의 유목주의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동원하고 해방시킨다(천고 737; MP 476).

종교가 가공할 만한 전쟁기계가 될 수 있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매우 생소하기도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특정 종교에 소속되어 있는 신자들이 한 무리의 전쟁기계가 되어 밖으로 나오는 사례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평소에도 집단을 이루어 생활해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상주하는 공간 밖에서도 쉽게 무리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신도들을 하나의 전쟁기계가 되도록 하는 것, 들뢰즈는 그것을 단순히 정념이라고 칭했던 것에서 더 나아가 ‘단체정신(몸체를 이루는 정신)’이라 지적한다.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이르게 된다. 집단적 몸체(corps collectif)란 무엇인가? (중략) 많은 단체(몸체)들 안에는 이러한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별도의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몸체와 ‘단체정신(몸체를 이루는 정신)’이 군대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군대적’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유구한 유목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유기체로서의 국가가 자신의 몸체들 때문에 곤란을 겪는 시기, 이 몸체들이 특권을 주장하면서 무심결에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 위로 개방되는 시기, 짧은 혁명적 순간, 실험적인 도약은 언제나 존재한다. 혼란한 상황. 매번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경향들과 극들, 운동의 본성을 분석해야 한다(천고 702-3; MP 453-4).

위의 인용을 보면, 들뢰즈가 종교를 끌어들여 부각시키려고 했던 바는 전쟁기계와 종교가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단체정신(몸체를 이루는 정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단체정신’은 저항하는 민중들이 국가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다른 모델, 다른 동학으로 구성하려는 성향이다(천고 702; MP 453). 이 ‘단체정신’에 의해 전쟁기계는 분화되고 위계질서를 갖는 유기적 조직체로 나가지 않고, 국가와는 엄격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힘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3. ‘장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들뢰즈는 전쟁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저항하는 민중’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자발적인 대중의 역능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시사한 네그리의 ‘다중’ 개념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상의 논의에서 멈추지 않고 ‘장인’, ‘야금술사’, ‘대장장이’의 은유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다루는 ‘장인’ 혹은 ‘대장장이’의 개념은 󰡔천개의 고원󰡕 10장과 11장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은둔자’, ‘특이자’(Anomal), ‘신시사이저’, ‘아웃사이더’ 등의 개념들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천개의 고원󰡕을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다. 이들을 묘사한 부분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첫 번째 원리는 이러했다. 즉 무리와 전염, 무리의 전염, 바로 그것을 통해 동물-되기가 일어난다. 그러나 두 번째 원리는 이와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양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예외적인 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동물-되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와 결연(끈; lien)을 맺어야 한다. 한 마리만의 늑대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패거리의 우두머리, 무리의 장(長), 아니면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쫓겨난 옛 우두머리가 존재하며, ‘은둔자’ 혹은 ‘악마’가 존재한다. (중략) 언제나 악마와의 계약이 존재하며, 악마는 때로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서 때로는 패거리의 구석에 있는 ‘은둔자’로서 또 때로는 무리의 지고한 ‘역능’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예외적인 개체는 실로 다양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중략) 요컨대 모든 ‘동물’은 자신의 ‘특이자’(Anomal)를 갖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천고 462-3; MP 297-8).

특이자는 개체도 종도 아니며, 그저 정념들을 운반할 뿐이고, 친숙하거나 주체화된 감정들도, 특수하거나 기표작용적인 특성들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인간적인 분류는 물론이고 인간적인 다정함도 특이자에게는 낯설다. 러브크래프터는 이러한 것 또는 이러한 존재자를 ‘아웃사이더’라고 부른다. (중략) 개체도 종도 아니라면 이 특이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지만, 가장자리 현상이다. (중략) 각각의 다양체마다 하나의 가장자리가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가장자리는 결코 중심이 아니라 포위선 또는 극단의 차원으로, 특정한 순간에 무리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선들이나 차원들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해준다. (중략) 이처럼 특이자가 가장자리라면 이 특이자가 가장자리를 이루는 무리나 다양체와 관련해서 이 특이자의 다양한 위치들, 그리고 매혹된 ‘자아’의 다양한 위치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어떠한 경우에건, 이 가장자리나 특이자 현상이 없는 패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강조는 인용자, 천고 465-467; MP 299-300).

이러한 기계가 하나의 배치물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신시사이저이다. 모듈, 음원이나 진동자, 제너레이터, 변성기 등 음 처리의 요소를 하나로 묶어 미시적 틈으로 조절함으로써 신시사이저는 음의 과정 자체를, 이러한 과정의 생산을 청취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며, 또 음의 질료를 넘어선 또 다른 요소들과도 접촉할 수 있게 해준다. 신시사이저는 잡다한 것들(disparates)을 재료 속에서 하나로 묶으며, 파라미터들을 하나의 방식에 다른 방식으로 이동시키면서 바꾼다. 신시사이저는 공속성을 조직함으로써 선험적 종합판단에서 근본 원리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강조는 인용자, 천고 652; MP 423-4).

위의 개념들은 전쟁기계를 다루는 12장에 와서 ‘장인’ 혹은 ‘대장장이’의 개념으로 수렴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들뢰즈의 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은 유목민, 그리고 정주민과도 엄격하게 구분되는 자이다. 장인은 순회하는 자, 이동하는 자이다. 이 장인들은 정주민들이 사는 홈 패인 공간에서 살지 않으며, 그렇다고 유목민들이 사는 매끈한 공간에서 살지도 않는다. 이들은 동굴이나 구멍처럼 반지하나 지하 오두막에서 산다(천고 793; MP 516). 이런 장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유목민에게 무기, 칼(sabre)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칼의 재료인 주강(鑄鋼)은 장인의 발명품이다. 장인들은 일정한 기술적 자율성과 사회적 은밀성을 누리며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유목민이 아닌 것처럼 국가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장인들은 지하 생활자들이기 때문에 역시 유목민과 교류하는 공간도 이 지하이다. 공간적으로 지하는 매끈한 공간의 지면을 홈 패인 공간의 대지와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장인들은 여기서 유목민들과 관계를 맺는다(천고 791; MP 513). 그런 의미에서 장인은 구멍 뚫린 공간·광맥·갱도의 발명자이다. 이들은 산을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고, 공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구멍을 뚫어 대지를 마치 스위스 치즈처럼 온통 구멍으로 만들어 버린다(천고 794; MP 514). 들뢰즈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들뢰즈의 장인에 대한 묘사는 역시나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이진경은 󰡔노마디즘󰡕에서 이 개념을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파업>에서 파업파괴자로 나서는 ‘부랑자’들에 비유하고 있다(이진경 2002, 440-1). 그러나 그 ‘장인’으로 비유되는 개념이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이보다는 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에게 이 ‘장인’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전쟁기계보다도 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결국 이 ‘장인’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모든 논의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하고 있는 ‘땅굴 파기’의 비유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혁명을 주도하게 될 프롤레타리아트를 두더지에 비유하였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이 비유를 ‘저항’에 대한 은유로 다시 조명하였다. 들뢰즈의 장인 역시 이와 같은 비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 ‘전쟁기계 혹은 유목민’과 ‘장인 혹은 굴 파는 자’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전쟁기계’에 대한 논의에 반전이 생기게 된다. 이제 들뢰즈의 ‘장인’ 혹은 ‘대장장이’에 대구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장인’은 바로 일종의 ‘전위’에 대한 은유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인’의 의미를 이렇게 설정할 때, 위에서 길게 인용한 ‘은둔자’, ‘아웃사이더’ 등의 개념은 역사 속에 등장했던 수많은 혁명가들과 전위에 대한 묘사가 된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장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또 다시 ‘전위’를 도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모든 중심성을 부정하는 ‘차이’의 철학자가 아니었던가?
들뢰즈는 저항하는 민중의 무한한 역능을 긍정했음에도 그의 전쟁기계를 전투에 선뜻 투입시키기를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기계와 관련하여 들뢰즈가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파시즘의 문제이다. 그에 따르면 민중들은 권력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은 일종의 자학적인 히스테리 속에서 억압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인 속임수에 의해 함정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천고 409-10; MP 262). 즉, 전쟁기계를 이루는 민중들은 자신의 정념에 이끌려 스스로 파시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인’ 개념은 이러한 전쟁기계의 이중성을 해결하고자 도입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장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 들뢰즈에게 ‘장인’은 탈주선의 가장 선두에서 전쟁기계에게 생성의 문을 열어주는 주체로 설정되어 있으나, 전쟁기계에 대한 논의를 거치면서 이미 기존의 전위 개념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들뢰즈의 ‘장인’은 ‘분화되고 위계화된 유기적 조직체(organisation)’를 이끄는 전위가 아니다. ‘장인’이 하는 일은 민중들의 정념이 흐르는 결을 좇아가고, 포착하며, 그 정념이 흐를 수 있는 굴을 파는 것이다. ‘장인’은 하나의 절대적인 준거로 작용하는 이론을 설파하지 않는다. 민중들이 일손을 놓고 거리로 나가 무리를 이루는 원인에는 ‘빈곤 혹은 불안정한 삶이라는 물질적 규정성’,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투철한 목적의식’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또 다른 무엇’을 간파하고, 그에 적절한 무기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전위가 필요하다는 것. 들뢰즈가 ‘장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4. 나오며 - ‘전쟁기계’ 및 ‘장인’ 논의의 의의와 한계

들뢰즈의 철학에는 ‘소수 정치’ 혹은 ‘차이의 정치’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들뢰즈는 분명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들뢰즈는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대한 무리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민중들이 공유하는 정념, 정서적인 끈, 연대심 등에 주목하였다. 들뢰즈가 말하는 ‘단체정신’ 혹은 ‘정서적 끈’이라는 것은 모든 저항 집단과 단체에 존재하며,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과학’이란 잣대를 들이밀었을 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포착하고 부각시키느냐, 아니면 그것을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이라 비판하고 분석의 대상에서 배제하느냐의 문제가 발생한다. 팔짱끼고 방관 하던 개인들이 어떠한 이유로 한 무리를 이루어 거리에 나오게 되는가? 홍콩의 시민들은 왜 한국 시위대의 삼보일배에 감화되어 열렬한 지지를 보냈는가? 들뢰즈에게 이 문제는 매우 핵심적인 문제이며, 단순히 존재론으로 환원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들뢰즈는 ‘경계를 넘어 뛰쳐나온 삶’의 동인이 무엇인가, 비운동가를 운동가로 만드는 메커니즘이 무엇인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했던 민중들의 물질적 힘이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좀더 세밀한 돋보기로 보고자했던 것이다. 날아다니는 철 방패와 물대포에 살이 찢겨나가는 상황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낙관적으로만 묘사하는 것은 참으로 배부른 고민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공권력에 대한 공포와 계산된 통제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들뢰즈의 민중은 언제나 평면 위를 돌고 있다. 유목민들은 때가 오면 땅을 떠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머물러 경계 안에 갇히게 된다. 그들에게 언제나 다시 봉합될 파열이 반복되고 있을 뿐,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향하는 파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무엇인가가 흘러나가고 탈주하며, 다시 탈영토화된 것은 필연적으로 재영토화된다는 밑그림 위에서 진정한 해방을 그려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또 그의 전쟁기계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파시스트적인 위험을 피하면서 국가를 넘어서는 것은 가능한가? 이 질문은 들뢰즈 역시도 쉽게 해결할 수 없었던 질문으로 보인다.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이 문제를 ‘장인’이라는 대상을 추가로 설정하여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들뢰즈 스스로 자신의 문제 설정에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장인’에 해당하는 개념은 그의 이후 저작에서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는 7년 뒤에 출판한 󰡔디알로그󰡕에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이런 일은 날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다소 무책임한 답을 내놓으면서 ‘국가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에 대한 거부’로 논쟁의 초점을 축소시키고 있다(들뢰즈 외 2005, 250).
아울러 들뢰즈의 민중에 대한 분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정념 혹은 역능의 문제, 파시즘과 동의의 문제, 전위와 자발성의 문제는 반드시 들뢰즈를 거치지 않아도 다룰 수 있는 문제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즉 들뢰즈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서 완벽하게 새로운 지평을 연 사상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 스스로가 자신을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고, 자본주의 분석을 위해 반드시 마르크스를 거쳐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사실이다. 계급모순의 선차성을 폐기하고 ‘탈주’를 논하면서도,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 들뢰즈는 마르크스주의의 적인가 아니면 동지인가? 들뢰즈 역시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주체형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점에서, 그의 모든 논의를 덧없는 말장난으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를 마르크스를 대신하여 새롭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들뢰즈의 논의는,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과 접목되지 않을 때 결국 공허한 이야기가 된다. 근대와 탈근대의 선긋기를 시도하는 작업보다는, 기존의 역사와 이론을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현재를 더 치열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중심에 놓여야 할 것이다. 들뢰즈를 따를 때,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자본의 포섭과 통제를 넘기 위한 ‘구체적인 저항’이다.
◈ 참 고 문 헌 ◈

Deleuze, Gilles & Claire Parnet 저, 허희정·전승화 역, 󰡔디알로그󰡕, 동문선, 2005.
Deleuze, Gilles & Felix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Les Edition de Minuit. 198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 김재인 역,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 이진경·권혜원 외역, 미발간.
Marx, Karl. 1997.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Karl Marx & Friedrich Engels,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박종철 출판사.
Negri, Antonio. & Michael Hardt 저, 윤수종 역, 󰡔제국󰡕, 이학사, 2001.
Thoburn, Nicholas 저, 조정환 역, 󰡔들뢰즈 맑스주의󰡕, 갈무리, 2005.
이진경, 󰡔노마디즘󰡕 2, 휴머니스트, 2002.
자율평론 편,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http://archquo.nouvelobs.com/index.html 검색일 2005/12/17. 
(자료출처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no=610)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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