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68혁명과 그 영향
프랑스 68혁명과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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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수 없음을 불안해 하는 상황이었다.(3)노동자의 불만60년대에 프랑스는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으나 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 쇠퇴에 따라 경기는 침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그 결과 일자리가 줄어들게 되고,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수준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었다.3.. 프랑스 68혁명의 전개 (68.세계를 바꾼 문화혁명(오제명) 참고)(1)혁명의 시작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낭테르 대학’에서 혁명의 도화선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낭테르 대학은 세밀하고 권위적인 규정으로 학생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남녀 기숙사 출입 제한에 불만을 가진 남학생들이 1967년 3월 21일 낭테르 대학의 여학생 관을 점거하였고, 1967년 11월 17일 사회학과에서 수업거부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1일 파리대학전체가 수업거부를 시작하였고 경찰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1968년 2월에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반전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3월20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지부 앞에서 베트남 반전시위가 이루어졌고, 시위에 참여한 8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랑글라드’ 라는 낭테르 대학학생이었고, 이는 대학생들의 석방 집회를 야기한다. 이 들중 600명은 강의실 점거하고 150명은 총장실을 점거하게 된다. 이 때 ‘다니엘 콘벤디트’를 필두로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이 ‘3.22운동’ 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된다. ‘3.22운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과열되고 정부와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1968년 5월2일 소르본 대학 총장이 낭테르 대학을 폐쇄하게 된다.(2)혁명의 확산낭테르 대학이 폐쇄됨에 따라 학생들은 소르본 대학에 항의하기에 이르고 한차례 마찰 후 소르본 대학마저도 폐쇄되게 된다. 이 때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5월6일 이후 부터는‘고등학생행동위원회(CAL)','전국 중등교원조합(SNES)' 등 교원 학생 조합과 경찰은 학생들이 쌓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격렬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교육부장관, 내무부 장관과의 협상은 결렬되고,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공격함으로서 수 백명이 다치고 수 백명이 부상하게 된다.학생의 시위에 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노동총동맹(CGT)',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 ’노동자의 힘(FO)'도 시위 행렬에 합세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5월 11일에는 각 노조가 총파업을 하겠다는 성명이 발표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5월 13일 이후 학생운동은 노동운동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는데, 급기야 5월21일에는 전국적인 총파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무려 600만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정부와 모든 노조는 5월 27일 ‘그르넬 협약’을 체결하였으나 전국적으로 협상조약을 파기하라는 항의가 잇다르게 된다.CGT에서 노조 간부들이 연이어 탈퇴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5월29일 ‘반 드골 시위’를 일으키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이 이 시위를 계기로 직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마침내 6월 10일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종식된다.(3)혁명의 결말드골정부는 5월의 모든 상황에 대해 무력했다. 5월30일에 파리로 들어온 드골은 대국민 연설을 하고, 의회를 해산한다. 극좌계열의 학생조직이 해체하면서 상황은 진정국면으로 다가선다. 이에 드골은 해결책으로 6월 23일,6월 30일 총선을 실시하여 승리를 거둔다. 편파적 선거명부와 지역으로 승리를 얻어낸 드골은 자신감을 가지고 이듬해 재신임 투표로 승부를 걸었으나 결국 패배하고 하야하게 된다. 68혁명 후에 해산된 좌파 조직들은 이념을 통한 이합집단화 되며 강경한 투쟁을 벌인다. 이들은 갱내 폭발시 광부가 사망하자 화염병 투척, 고급 식료품점 약탈, 미국영사관 습격, 유명인사들 납치, 르노 자동차의 부장인 로베르 노그레트 납치 등의 과격 양상을 띄었으나 민중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영화 ‘몽상가들’에서 바라본 68혁명의 모습-영화 ‘몽상가들’ 은 68혁명 시기의 젊은이들의 심리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화적 해석은 미루더라도 68혁명 당시의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와의 갈등상황, 혁명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한 모습들을 편집하여 발표에 이용했음.4. 6.8 혁명의 성격(1)기성 사회와 체제에 대한 저항(가부장적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우선 가부장적 기성질서에 대해 신세대들이 저항 심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우선 생계를 유지하는 삶의 패턴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에 걸맞는 ‘복종’, ‘겸손’, ‘금욕’,‘국익 우선’ 등의 삶의 가치 덕목들을 우선시 했다반면에 신세대들은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삶을 누릴 줄 알았고 그에 따라 ‘자유’,‘일탈’ ‘사랑’ 등 기성세대와 대조되는 가치를 추구했다. 이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같이 뚜렷한 가치관이나 목표를 가지고 국가 전복을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기존체제에 저항하고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약간 미성숙하고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는 저항태도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68운동의 성격은 그 당시 르노 자동차 공장 노동자의 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기존 체계를 파괴하는 목표로 행동에 들어갔던 것이다6.8혁명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낭테르 대학의 여학생관 점거 사건도 이와 같은 신세대들의 가치관적 특성과 궤를 같이 한다. 젊은이들은 남녀 기숙사를 완전히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지 못했고, 68년 교육부 장관의 부분적인 개방안에도 불구하고, 이에 불만족하여, 시위가 확산되게 되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자유로운 요구가 시위에 불을 당겼다는 사실은 그만큼 가치관의 차이가 혁명 발생에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반체제 운동)드골이 정권을 통해 강인한 독재체제를 만들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관료주의의 폐단이 생겨났다. 드골은 이를 개혁하지 못하였고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결국 60년대 말에 이르러 되면 그는 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변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정책으로 국민을 실망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반체제의 성격을 띄긴 했어도 이것이 혁명의 직접적인 이유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2)뚜렷한 이념적 좌표가 없는 이상적 성격68혁명의 주도세력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같이 뚜렷한 가치관이나 목표를 가지고 국가 전복을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기존체제에 저항하고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약간 미성숙하고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는 저항태도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68운동의 성격은 그 당시 르노 자동차 공장 노동자의 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기존 체계를 파괴하는 목표로 행동에 들어갔던 것이다68 혁명 당시 나왔던 구호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상상력을 권좌로”“서른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어떤 뚜렷한 이념적 신념과 체제 전복후의 청사진을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인 것이아니라 자유롭게 상상하고 다양한 이념으로 생각한, 어찌 보면 즉흥적인 성격을 보여준다.또한 현 체제 전복이라는 목표 이후의 신체제 건설을 위한 방안이 없었다. 단순히 “현재 상황의 파괴!”라는 목표로만 움직였을 뿐이다. 이것이 68혁명이 금새 사그라 들었던 이유 중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마오쩌둥 사상 등이 기반이 되긴 했으나 이런 여러 사상들이 섞여 비체계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68혁명은 목적없는 혁명이었으며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이 없었고 과거의 혁명과는 달리 동지도, 적도 없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5. 6.8 혁명의 성과와 의의(1)실패한 혁명인가?단기적이고 표면적인 입장에서 보면 68혁명은 실패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5월 혁명 직후 68년 6월 총선에서 드골 정권이 승리하였는데 이는 5월 혁명이 패배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선거적으로 불리함이 있을지라도 어쨌든 국민은 드골정부를 선택했고,68운동은 서서히 사그러져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68혁명의 성과를 단기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68혁명이 바꾸어 놓는 사람들의 가치관,태도 등이 68혁명의 진정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꼭 어느 날이라고 집어낼 수는 없지만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하루아침에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경과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격식과 존칭을 버리고 서로 말을 트고 너라고 불렀으며, 옷을 입는 모양이 예전 같지 않았다. 젊은 여자들은 스타킹을 버리고 스타킹 멜빵을 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껴안고 키스했다. 노동자도 생 미셸 가에서 한참씩 머물렀다. 책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토론하기 위해 마스페로 책방에 들렀다.”이와 같이 68혁명은 사회 속에서의 사유 방식과 행동방식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이외의 가시적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좌파정권의 발생에 영향1981년, 물론 68년 이후 꽤 지난 시간이지만, 통일 사회당의 68정신을 지속적으로 실현시키려는 노력과, 우파적 색채도 가미하려는 노력으로, 미테랑 정권을 만들어냈다. 미테랑 정권은 여러 개혁적 제도들을 창출했는데 그 예로는 주당 35시간의 노동시간, 이민 노동자들을 위한 여건 개선, 동성애자 차별 철폐 등이 있다.(3)노동자와 여성의 권익 신장노동자는 68혁명을 통해 개선된 노동조건을 보장 받게 되었다. 인상된 기본급, 최저임금제 등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파격적인 조건에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들은 68혁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목소리를 키워 나갔다. 그 예로 피임의 권리 주장, 직업상 평등 보장 등이 있다.의의68 혁명은 그 성과보다는 그 도전과 과정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68혁명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는 몇 개의 이슈라기보다 프랑스 사회가 처한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사회가 처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고, 현대에도 그 문제들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순환한다’ 라는 말과 같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도 1968년의 프랑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68혁명의 의미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역사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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