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4>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4>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
장석주 시인의 들뢰즈 설명이다.
들뢰즈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
강신주는 들뢰즈의 자살을 미화했다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4>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관련이슈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입력 : 2012-05-20 23:41:43https://www.segye.com/newsView/20120520021007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18일∼1995년 11월4일)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사유는 들뢰즈가 펼쳐낸 철학적 사유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철학은 생각함에서 시작하고, 그 생각함은 낡은 개념들에서 새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개념들은 이름짓기이고, 개념들의 가능태가 되는 한에서 새롭다. 개념은 어떤 사안, 역사의 문제들에 대한 역학과 정향을 담는데, 이때 앞선 것들에 대한 변이와 전복의 특이성을 성분으로 삼을 때 이미 있는 것들을 가로지른다.철학자들은 개념의 창안자로서 개념이라는 동판 위에 제 이름을 새김으로써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다.동물은 자신의 분비물이나 냄새, 소리 따위로 어떤 장소가 제 영토임을 선포하고, 다른 동물 개체가 그 장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가차 없이 공격적인 행동에 나선다. 이것을 영토화 개념이라 할 수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영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탈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세계일보 자료사진들뢰즈는 리좀, 노마디즘, 기관 없는 신체, 욕망하는 기계, 탈영토화, 재영토화 따위의 개념들을 철학사에 등재한 철학자다. 들뢰즈가 젊은 펠릭스 가타리를 끌어들여 공저한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에서 영토성·탈영토화·재영토화의 개념들이 나오는 대목을 보자.탈영토화의 여러 운동과 재영토화의 여러 과정은 끊임없이 가지를 뻗고 또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떻게 이들 사이에 상호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한편 말벌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영토란 동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장소를 말한다. 호랑이나 늑대, 멧돼지나 개들, 어떤 조류들은 자신의 분비물이나 냄새, 소리 따위로 어떤 장소가 제 구역임을 선포하고, 다른 동물 개체가 그 장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가차없이 공격적인 행동에 나선다. 이것을 영토화 개념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영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탈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왕의 영토가 아니라 다른 곳에 제 영토를 만들 때 이를 재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서양란은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하고,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를 이룬다. 말벌과 서양란 상호간의 모방은 미메시스, 의태(擬態), 속임수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서양란의 말벌 되기, 혹은 말벌의 서양란 되기는 서로 간에 탈영토화하면서 동시에 재영토화를 꾀하는 운동들이다. 이렇듯 ‘천 개의 고원’은 무수한 개념들이 창안되고 이 개념들이 춤추는 고원들이다.들뢰즈는 무엇보다도 현존을 꿰뚫고 지나가는 ‘차이’에 대해 사유한 철학자라고 할 만하다. 존재들, 혹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는 존재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근원적 요소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를 “궁극적 단위”라고 말하며, “유사성·동일성·유비·대립 등은 근원적 차이 혹은 차이의 근원적 체계의 결과나 생산물로서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것으로 고려되지 않는다”(‘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차이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닮은 것들은 오직 다름(차이)으로 인해 닮는다. 그러니까 다름(차이)만이 서로 닮음을 인증하는 관계가 성립한다. 우리 삶은 끊임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이 반복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바로 ‘차이’의 반복이라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 하나의 연극, 하나의 오페라, 하나의 교향곡도 연주할 때마다 연주 시간이 다르고, 연주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은 항상 차이를 전제로 한 반복이다. 종(種)과 유(類)로서 인류 역시 생명과 죽음을 반복하지만, 동일한 것으로서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머금은 채 반복한다.‘천 개의 고원’ 책 표지.내가 본격적으로 읽은 들뢰즈의 첫 책은 ‘천 개의 고원’이다. ‘천 개의 고원’은 펠릭스 가타리와 들뢰즈가 ‘앙띠 오이디프스’(민음사, 1997)를 내놓은 지 8년 만인 1980년에 두 번째로 세상에 펴낸 책이다. 1000쪽이 넘는 책을 미욱하게 다 읽고 난 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 난해함에서 생긴 어지럼증을 한동안 수습할 수가 없었다. 쥐뼘만 한 내 앎의 체계가 여지없이 으깨졌으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누가 나를 가리켜 섭치거나 째마리라고 손가락질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천 개의 고원’은 ‘고원’들에 관한 책이다. 두 사람은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쓴다.들뢰즈와 가타리는 각가가 다른 연호(年號)를 가진 열다섯 개의 고원을 탐색한다. 그 열다섯 개의 고원들은 진화·기호·신체·전쟁·국가·기술 따위의 다양한 주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뇌처럼 미세한 균열들을 가로질러 서로 소통하는 책,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표면적인 땅 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어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일종의 리좀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고원들로 구성했다. 우리는 이 책이 순환적 형식을 갖도록 했지만, 그것은 웃자고 그랬던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는 각자 어떤 고원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경험했으며, 여기 다섯 줄, 저기 열 줄을 쓰곤 했다. 우리는 환각을 경험했으며, 작은 개미떼 대열 같은 선들이 한 고원을 단념하고는 다른 고원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천 개의 고원’의 서문으로 나오는 리좀에 대한 설명은 신선하고, 기발하고,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리좀을 넘어 다음 고원으로 넘어갈 때마다 나는 헤매기 시작했다. 이 책의 해설서인 이진경의 ‘노마디즘’(휴머니스트, 2002)을 시난고난하며 서너 번 읽은 뒤에야 겨우 맥락을 잡을 수가 있었다.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 이정우의 ‘천 한 개의 고원’, ‘들뢰즈와 정치-앙티 외디프스와 천의 고원들의 정치철학’(태학사, 2005) 등에서도 도움을 얻었다. 들뢰즈의 책을 부지런히 읽고, 그 해설서들도 눈에 띄는 대로 구해서 읽었다.무엇보다도 ‘천 개의 고원’의 난해함은 두 사람이 가진 지식의 방대함, 그것을 바탕으로 자유자재로 빚어서 쓰는 개념들의 낯섬과 발상의 독창성에서 비롯한다. 이진경이 ‘잡학’이라고 말한 지식의 방대함은 정신분석학·철학·문학·언어학·신화학·민속학·동물행동학·경제학·고고학·음악·미술사·물리학·분자생물학·수학 등으로 방사선을 그리며 펼쳐진다.들뢰즈의 ‘잡학’은 얕고 넓게 퍼져 있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심층(深層)이고, 다의적(多義的)이며, 불명료성으로 세상을 품는다. 아무튼 나는 ‘천 개의 고원’에 대한 깊은 인상과 형이상학적 울림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니체, 스피노자, 칸트, 베르그송, 프루스트 등을 가로와 세로로 뛰어넘는 들뢰즈의 책들을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책읽기의 번뇌와 기쁨을 동시적으로 느꼈다. 감히 나는 ‘들뢰지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형은 독일군 점령기간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푸코는 “20세기는 언젠가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르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48년 철학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다.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8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퇴임한 뒤로 줄곧 좌파 이념에 힘을 보태는 집필과 방송활동을 이어갔다. 1995년 갑작스럽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들뢰즈는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다. 아무도 들뢰즈가 왜 자살했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노쇠와 질병으로 인해 제 존재를 제 의지대로 제어하고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 고갈되었다고 판단한 철학자는 제 삶을 더 밀고나가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삶은 가사(假死) 상태에 이르렀고, 인공호흡기와 인공폐에 의지해 생명을 겨우 연명하는 것이 구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죽음은 완만한 죽음에 대한 가차없는 단절이라는 점에서 급진적인 탈영토화의 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장석주 시인■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이정우·김동선 옮김, 그린비, 2008제임스 윌리암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해설과 비판’, 신지영 옮김, 라움, 2010자료출처 https://www.segye.com/newsView/201205200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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