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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주의 연구- 3 유목민과 탈주





유목주의 연구 - 들뢰즈와 가타리를 중심으로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I. 서론 II. 본론
  1.욕망하는 기계
  2.기관없는신체
  3.유목민과 탈주 Ⅲ. 결론
  * 참고문헌
II. 본론
3. 유목민과 탈주

기관 없는 신체를 고민하다 보면 한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는 항상 기관 없는 신체와 탈영토화된 상태만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관화와 영토화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해법이 바로 유목민의 삶, 즉 ‘유목민적 주체’이다. 

유목민에 관한 논의는 주로 『천의 고원』의 열두번째 고원인 『1227년: 유목론-전쟁기계』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으로 『안티-외디푸스』와 동일하듯, 『천의 고원』은 『안티-외디푸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24) 하지만 낯선 개념들(지층, 추상적 기계, 얼굴성, 리토르넬로, 매끈한 공간, 홈패인 공간, 지도, 디아그람)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하나의 고원을 이루며, 체계적인 경계선을 이루기보다는 열린 궤적들을 이루며 서로 공명하고 있다. 25)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개념이 ‘탈주’이며, 탈주의 구체적인 모습을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예시가 유목론이다. 즉 탈주선을 그리는 유목적인 배치가 열두번째 고원의 주제이며, 몽고제국의 징기스칸이 그 주인공이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1227년을 제목에 포함시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부르주아 역사가이건 소련의 역사가이건 한결같이 징기스칸은 국가 혹은 도시라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26)라는 징기스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맞서서 새로운 문제틀을 구성한다. 즉 저자들은 서구의 역사를 정착민의 승리의 역사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유목민은 항상 열등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금껏 무시되어 왔던 유목민의 삶을 역사, 정치, 과학, 사상 등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유목민은 단지 목초지를 떠다니며 방랑하는 것을 지칭하는가? 정착민은 이동하지 않는가? 들뢰즈 자신은 이동하며 살았는가? 이것은 유목민에 대해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민은 이주민 같은 것이 아니며, 유목민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정착민도 이동하지만 그들은 멈추기 위해서 이동한다. 즉 재영토화를 전제로만 탈영토화한다.

유목민은 어떤 영토로 영토화되거나 재영토화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탈영토화하며, 현재와는 다른 삶, 가치, 사유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착민의 산물인 국가는 그러한 유목민의 흐름을 가로막고 수로화하여 사회적 코드 아래에 위치시킨다.

유목민/정착민의 대립쌍은 전쟁기계27)/국가에 각각 대응된다. 이 책에서 전쟁기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찾을 수는 없지만, 국가가 정착민의 산물이라면,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는 국가장치 외부에 존재한다”28),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29)라고 말하며, 전쟁기계와 국가의 구분을 위해 신화, 민속학, 인식론, 사유학 등과 관련하여 네 개의 명제를 설정해 서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30)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기계가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새로운 생성과 변이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전쟁기계는 국가의 구성을 저지한다. 먼저 국가라는 체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민속학자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가 제시하는 원시사회에 주목하는데, 인류학적으로 ‘원시인들이 국가와 같은 복잡하고 미분화된 것을 알지 못했다’라는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원시사회가 단순하고 초보적이고 국가는 세분화되고 문명적이기 때문에 원시사회가 열등한 사회체계라고 이해하는 사회진화론적 입장을 비판한다. 중요한 점은 원시사회가 조직화된 국가 형태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탄생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유연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출현한다는 것은 부와 권력이 어떤 초월적 권한을 갖는 한 명의 왕에게로 귀속되는 것을 암시한다. 원시사회는 오히려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았으며, 여러 개의 중심이 공존하여 개개인의 창조적 능력과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는 그런 사회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쟁기계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간단히 점검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긍정적인 전쟁기계의 목표가 어떤 계기로 전쟁만을 목표로 삼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전쟁기계로 변하게 되는가? 

“전쟁기계는 본질상 매끄러운 공간의 구성요소이며, 이 공간에 점거, 이 공간에서의 이동, 또 이 공간에 대응하는 인간편성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기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적극적인 목표이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초래된다면 그것은 전쟁기계의 적극적인 목적에 대립하는 홈 파는 세력으로서의 국가나 도시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전쟁기계는 국가와 도시국가적 및 도시적 현상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절멸을 목표로 삼는다.”31)

전쟁은 국가장치라는 전쟁기계의 외부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전쟁은 전쟁기계의 조건도 목적도 아니지만, 전쟁기계를 따라다니며 이 기계를 보충대리(supplement)한다. 

둘째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에 의해 포획될 수 있다. 유목민의 발명품인 전쟁기계를 국가가 소유하게 되면 그 본질과 기능이 전적으로 바뀐다. 즉 이때부터 전쟁기계는 군대와 같은 국가 부속기관으로 변질되어 전쟁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게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국가에 대항하는 모든 전쟁기계에 맞서며, 더불어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다른 국가를 파괴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양상을 지니는데, “한 극에서 그것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며, 우주 끝까지 연장될 수 있는 파괴선을 형성하고 있다. 다른 한극에서는 전쟁기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극에 비하면 무한히 작은 양을 지니며, 전쟁이 아니라 창조적인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다. 32)

이제 탈주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탈주의 개념은 도피, 도망, 도주 등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그런 현실로부터의 단절, 소외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러한 것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탈주가 기관화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무한한 자유와 방종으로 보여져 무정부주의로 비춰질 수 있는 소지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탈주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탈주는 어떤 고정된 체계와 질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창조적 변이를 추구한다.33)

“우리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탈주의 선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들은 욕망, 욕망의 기계, 욕망의 사회적 조직화를 풀어헤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파이프나 종기를 터뜨리듯 무엇인가가 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들을 막고자 하는 사회적 코드 아래서 그것들을 풀어헤침으로써 흐르게 하자는 것입니다.”34)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의 우선성을 말하는데 기관 없는 신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즉 기관 없는 신체와 탈주가 선행되며, 그 다음에 그 속에서 기관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시 그런 기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탈주이자 탈영토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탈주는 언제나 파괴되고 메워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탈주선은 항상 고유의 위험성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국가권력과 관련된 것인데, 사회에서는 지배자들의 권력이 그 사회의 탈주를 차단하고 동여매고 있다. 즉 권력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원하는 지배세력은 자신들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는 세력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적절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들을 길들이거나 효과적으로 붕괴시키고자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잘 정돈되고 질서화되고 코드화된 상태에서 권력은 자신의 얼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배권력의 특징은 오히려 권력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 모습이 더 자세히 드러내는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이 생길 때마다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탈주를 봉쇄한다.35) 따라서 탈주를 추구하는 탈영토화는 그것을 상쇄하는 재영토화에 의해 파괴될 수 있으며, 실제 그러한 위협에 의해 탈주는 정지될 수 있고, 이것이 탈주선이 가지는 첫 번째 위험이다.

또한 탈주선이 기존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힘을 상실하고, 더불어 새로운 흐름을 창안할 능력마저 상실한다면, 그것은 돌변하여 현실세계를 증오하고 파괴시키는 어두운 죽음의 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탈주선이 갖는 두 번째 위험이며,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파멸의 길을 걸었던 대표적인 죽음의 선이 파시즘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국가 혹은 한 명의 지도자가 위로부터 대중을 하나로 묶고 통합하여 형성된다. 하지만 파시즘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대중 개개인의 욕망이 상호 소통·작용하면서 만들어지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대중운동이라는 것이다. 비록 히틀러, 무솔리니 등 선동자가 존재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대중들은 국가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열렬하게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권력과는 다른 유형인 대중들의 열망은 민족주의로 왜곡되어 유태인 학살이라는 끔직한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미국의 KKK단도 탈주가 파괴의 파시즘으로 전도된 하나의 예로 꼽을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선을 전적으로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주선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보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선의 유형들을 규정할 수는 있지만,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탈주선들이 반드시 창조적이라거나 매끄러운 공간들이 분할된 혹은 홈 패인 공간 보다 나은 것이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36) 

표면적으로 이들이 유목민, 전쟁기계, 탈주선, 매끄러운 공간 등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즉 홈 패인 공간은 매끈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리고 매끈한 공간은 그 한계를 보완하여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철학의 핵심인 것이다. 

24) 『천의 고원』은 전작의 정교한 도식들을 보충하기보다는 더욱 복잡화시키고 있으며, 몰적/분자적이라는 대립 대신 몰적/분자적/노마드적이라는 삼원도식이 발견된다.(로널드 보그, 앞의 책, p.201.)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생산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그 대신 욕망과 배치, 기계라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며 욕망에 비해 배치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더불어 기관 없는 신체가 죽음의 선을 그리는 텅빈 기관 없는 신체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절대적 탈영토화의 긍정성을 부여하는 일관성의 구도라는 개념이 새로이 등장한다.(이진경, 앞의 책, pp.153-154.)
25)로널드 보그, 앞의 책, pp.201-202.
26)MP, p.676.
27)전쟁은 단어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전쟁 개념은 니체가 그리스 정치를 논할 때 사용하는 아곤(agon: 선의의 경쟁)과 가깝다. 이는 안타곤(antagon: 적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새로운 가치와 정치를 창안하지만 그것이 적대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그리스인들은 불화와 경쟁이 사라지고 어느 하나에 포섭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매우 꺼렸다고 하는데, 그런 통합된 세계가 바로 단일한 중심을 갖는 국가라 볼 수 있다. 이들이 의미하는 전쟁은 적대를 만들지 않으면서 다른 종류의 삶이나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를 방해하거나 비난하는 부정적 방식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한다.(이진경, 『노마디즘2』, 휴머니스트, 2002, pp.297-299.)
28) MP, p.671.
29)MP, p.678.
30)이밖에 이들은 전쟁기계의 특징을 전쟁기계의 공간·지리적인 측면, 산술적 또는 대수적 측면, 감응적인 측면 등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여 정착민의 삶과 유목민의 삶을 대비한다. 
31)MP, pp.799-800.
32)MP, p.810.
33)들뢰즈와 가타리는 사회가 선(線)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선이란 일종의 물질적, 정신적 욕망의 흐름을 의미하는데, 사회에는 다양한 선들이 존재하며 서로 관계·작용함으로써 다양한 욕망의 배치를 구성한다. 구조주의가 사물을 점으로 보며 일정한 체계와 구조 속에서 고정된 상태를 중시한다면, 선은 유동적인 상태, 운동, 흐름 등을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의 질적인 차이와 양상에 따라 선의 유형을 경직된 선, 유연한 선, 탈주선으로 구분을 한다.
34)N, p.19.
35)MP, p.429.
36) N, p.33.

자료출처 https://www.mmca.go.kr/study/study14/study14_j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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