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2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2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94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wo
창세기는 프랜의 삶의 바꾸었다.
창세기와 그리스 철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창세기의 저자는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가정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는 것을 주자했다. 창세기는 권위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다” 프랜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위대한 이야기가 그를 압도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늘과 땅도 하나님이 만들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다. 인간은 첫대부터 신과의 약속을 어겼고, 계속 반복되었다. 모든 세대가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를 실망시켰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프랜은 동의했다. “인간들은 정말 그래.” 결국 답이 보이기 시작하는 군.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진짜 답!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창세기는 흥미로운 힌트들로 가득했다. 여전히,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의 형상? 무슨 뜻일까? 이것은 히브리 성경이었다. 다수가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크리스천에게 그것은 삼위일체라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창세기 3장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는 언급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 삼위일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3장에는 구속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하나님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악에서 승리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프랜은 창세기가 지식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사실인 것 같았고 예언적이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인간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하며 간섭했다. (홍수 심판 때가 그랬다.)
“하나님은 격정적인 분이시구나.” 프랜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랜은 매일같이 성경을 들고 다녔다. 어떤 것도 그를 이렇게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 즉시 그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중심내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이 장들은 아브라함 이전의 서막(prolog) 같은 형식이었다. 아브라함 후 부터는 아주 역사적인 내용이 된다. 그렇지만 아브라함 이전의 장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과학에 무지한 인간들이 서툴게 내놓은 내용이란 말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신화? 아니면 거대한 진실의 상징인가? 아니면 이 부분도 성경의 다른 부분처럼 역사적인 것인가?
프랜은 소위 서막라고 하는 창세기의 앞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읽을수록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 그 서막을 역사적으로 보게 했다. 아담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홍수도 역사적 사실이었다. 노아도 역사적 인물이었다. 프랜은 신약의 저자들도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창세기를 여러 번 인용했다. 히브리서의 작가도 창세기를 인용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중 홀로 신이고 인간이었던 분이 그것을 역사적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했다.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막 10:6~9)
예수가 신화라고 믿는 것을 인용하면서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은 서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결국 그는 성경의 서막이 역사적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서막에 나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간을 향한 목표, 또 인간의 불복종이 허구가 된다. 프랜은 철학자들은 글렀다고 생각되었다. 교회에서 들었던 자유주의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프랜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신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개월 동안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그는 성경을 믿는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또 없는걸까? 그는 궁금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세계관의 변화는 학교생활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남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특히 영작 시간에 그의 글은 명료해졌다. 그것은 그의 사고가 명확하게 된데에 기인했다. 그는 이제 진리에 대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성화 대학 입학을 준비해야 하는 상급학생이었다. 여전히 그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가 졸업후에(1930.6월) Drexel Institute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Drexel Institute는 특성화 대학보다 거리가 멀었다. 이곳은 1891년에 재정가 앤소니 드렉셀이 세운 학교였다. 미국의 부통령 토마스 에디슨, 레비 모톤, 앤드류 카네기가 학교설립을 지지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예를 들어 이곳은 미국에서 도서학과가 있는 세번째 학교였다. 당시에 프랜은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학교에는 네개의 학과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전기 공학이었다. 그것이 프랜의 미래였다. 그는 아버지가 10살 때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 과목을 공부하려는 것이다.
프랜은 포드 자동차도 갖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이 졸업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는 그의 미래에 대해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에 그는 운전 연수를 받았다. 차를 타고 미술관에도 가고, 필라델피아 시립 도서관에도 자주 갔다. 그는 거칠면서도 자유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쓴 칼 샌드버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호소력 있는 자유로운 구절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샌드버그는 그냥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는 링컨의 젊은 시절에 대한 전기문 “Prairie Years”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었다. 샌드버그의 문장들은 거의 대부분 성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처럼, 샌드버그는 진리를 전달했지만 여운을 많이 남겨두었다.
그러나 프랜은 한가하게 읽고만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 만으로는 부족했다. 미국은 경제 대공항에 빠져들고 있었다. 프랜은 페인트 칠을 하는 임시직을 구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서 로스가에 새로산 집을 수리했다. 그는 처음으로 면도칼과 셔츠와 긴 바지를 샀다. 성년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당시의 소년들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바지를 입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랜은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와 믿음의 색이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8월의 어느 무더운 저녁에 저먼타운 중심가로 가게 되었다. 말을 타고 꽤 오래 갔다. 차들이 거리로 덜컹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Ashmead Place의 코너에 빈 장소에 텐트가 있었다. 그곳에서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프랜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는 줄을 맞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닥은 톱밥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설교단에 서 있는 사람의 인도에 따라 진심으로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뒷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자는 이탈리아 억양이었으나 불같이 말하고 있었다. 성경 구절을 설교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그의 살아온 이야기 들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구원 받았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감옥에 있었다. 프랜은 흥분되었다. 이 설교는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지루한 설교들과 너무나 달랐다. 설교가 끝나자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단으로 초청했다. 프랜도 일어나려고 했다.
설교자가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왜 여기에 있나요, 구원을 위해서요? 아니면 헌신하려구요?”
프랜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프랜은 기뻤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프랜이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했던 것들을 말해주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 설교자가 앤소니 제올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집으로 달려가서 그의 위대한 발견에 대해 일기장에 썼다. 그가 쓴 것은 앤쏘니 제올리의 설교보다 더 많았다. 프랜은 이렇게 썼다. “1930년 8월 19일 – 텐트에서의 만남, 앤쏘니 제올리 – 내 삶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드릴 수 있게 한 사람.”
프랜은 그의 삶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기로 한 것이다!
몇 년동안 프랜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살을 앓아 왔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진리를 찾는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랬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8월 22일에 그는 제올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8월 26일, 또 갔다. 친구들은 그런 프랜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Drexel에 기술을 배우러 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9월 2일에 그는 Drexel 야간 학교에 등록했다. 오전학교를 다닐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낮에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프랜은 일기장에 “모든 진리가 성경에서 나옴을 확신한다”고 썼다. 그가 계속 기술 공부를 하지 않게 될 것은 당연했다. 그의 교회에서 하는 설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담할 사람을 찾았다. 처음에 그는 저먼타운 학원에서 주일학교 선생님과 이야기 했다.
“햄프던-시드니 대학이 어떨까.” 오쉬본이 말했다.
프랜은 햄프던-시드니 대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쉬본은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프랜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햄프던-시드니 대학은 작지만 버지니아에 있는 유일한(전문적인) 대학이었다. 사실 그 대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장로교인들인 1776년에 세운 미국에서 열번째로 오래된 대학이었다. 그 대학의 학생들은 윌리엄스버그와 피터스버그에서 영국인들과 싸웠다. 패트릭 헨리와 제임스 매디슨이 그 대학의 첫 이사였다. 그 대학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종합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프린스턴 신학교, 버지니아 주립대학과 같은 다른 대학들과 연결되기 시작되었다. 햄프던-시드니는 프랜이 나중에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최고의 기반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오쉬본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고등학교때 대학 준비 과정을 밟지도 않았는걸요,” 프랜은 슬픔에 잠겨 그렇게 말했다.
오쉬본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육가였다. “너가 부족한 부분은 외국어 밖에 없어. 센트럴 고등학교 야간수업때 라틴어와 독일어를 공부하면 1931년 가을에는 햄프던-시드니에 들어갈 수 있을거야.”
1931년 가을이라고! 1년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햄프턴-시드니에 가기위해 노력하면서도 9월 15일에 Drexel에서 야간 학교에 가게 되었다. 열흘후에 그는 전기 회사 RCA Victor에서 시간당 42센트 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직장은 뉴저지에 있었다. 그는 델라웨어에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RCA 공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나면,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저먼타운으로 돌아와 Drexel에서 공부했다. 야간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주방 테이블에서 공부했다.
그의 계획은 10월이 되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RCA에서 프랜은 컨베이어 벨트로 가득한 동굴 같은 건물속에서 머슴처럼 일했다. 남자들은 부품 조립은 남자들이 하고, 나중 작업은 여자들이 했다. 그를 신경질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공장장이 시간외 근무에 대해 봉급을 주기로 했는데, 남자들에게만 준 것이었다. 더 많은 남자들이 일에 참여했고, 여자들은 물량을 따라가느라 숨돌릴 시간도 없이 일을 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시간외 근무에 대해 한푼도 받지 못했다. 이런 불공평은 프랜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여자들은 불평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930년대 당시에는 일자리를 얻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욕이 계속되는 동안 한 여성이 소리쳤다.
“대항하자!” 그녀는 소리질렀다.
다른 여성들도 그녀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다른 여성들은 대항자들에게 반대했다. 여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프랜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위로 올라갔다.
“네! 싸웁시다! 싸워요!” 그는 소리질렀다.
그게 RCA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공장에서는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그는 집근처에서 야채 배달을 하는 새 일을 얻었다. 전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의 후원자, 샘 체스넛은 교회 성도였다. 교회에서의 그의 교제가 그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은 그에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고 권면했다. 그는 이제 몇몇 지체들과 기도하게 되었다. 12월 까지는 그의 부모를 설득해야만 했다.
“Drexel을 그만 다닐 생각이에요.”
“아니 왜?” 아버지는 반문했다. “지난 학기에 대수학에서 B학점을 받지 않았니?”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성적이랑 관계없어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독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프랜은 저먼타운 학원 원장인 오쉬본이 알려준 대로 아버지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랜이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된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목회자에 대한 혐오는 그의 어린시절부터 생긴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목사는 돈도 잘 못벌 뿐 아니라, 참기 힘들 정도로 거만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그는 배심감마저 느꼈다. 몇 년 동안 그는 기술적으로 생각하고 손수 일하도록 프랜을 가르쳤다. 모든 것이 허사였다. 목사들은 결코 손으로 일하지 않는다. 프랜의 어머니는 반대의 소리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아버지보다 더 실망한 듯 보였다.
프랜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걱정들이 적혀있다.
12월 14일 :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나의 계획에 적대적이다. 하나님께서 더 강하고 확실하게 인도해 주셨으면 좋겠다.
12월 15일 : 하루종일 걱정만 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등을 돌린 것 같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12월 16일 : 아버지와 단 둘이 이야기 했다. 아버지는 그냥 하던 것을 하라도 하신다. 그러면 어머니도 좋아지실 거라고..
반대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침대 맡에서 그는 성경의 여호수아를 펼쳤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다.”
그가 19살이 되던 1931년 1월 30일에 그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책 읽는 시간을 갈망했던가. 이제 그는 리빙스톤 힐의 증인을 읽고 있다. 그 소설의 첫 장에는 신앙심이 깊은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 주님, 이것이 프랜도 이런 길을 가야 할 운명인가요? 그러나 소설에서 박해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 학생이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는 전심으로 또 즐겁게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랜은 일기장에 ‘증인’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썼다.
1931년 가을 즈음, 프랜은 결국 햄프던-시드니에 갈 준비가 되었다. 모두 샘 오쉬본 같은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프랜은 튼실한 나무 상자에 그의 소지품들을 담았다. 그는 정장을 입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캠퍼스에서 knickers(여성용 속옷이라고 하는데 왜 쉐퍼가 여성용 속옷을 입었을까요.. -.-;)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속옷, 양말, 셔츠, 운동복, 우비, 면도기, 수건, 빈, 칫솔, 몇권의 책, 그리고 성경과 함께 마지막으로 knicker를 넣었다. 한가지 생각하기 싫었던 것은 등록금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어려움은 프랜을 좌절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햄프던-시드니에서는 1년에 600달러가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당 30센트짜리 일로는 1년에 600달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 했다. 어떻게 하면 공부도 하고 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긴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몇주 버티다가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인가. 그는 하나님만 의지했다.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를 만났다. 새벽 5시 반이었다. “나는 목사 아들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너를 떠나보내기도 싫구나.”
프랜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아버지가 많이 누그러지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은 이후로 프랜은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번개처럼 그의 치는 것이었다. 그는 지하방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다.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하지요?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결국 비용을 지불하기로 결심했다. 존 웨슬리 같은 사람들도 전에 그랬었다. 그러니까 나도 햄프던-시드니로 간다. 그는 말했다. 그는 동전을 세번 던졌다. 모두 그가 가야한다는 쪽이었다. 정말 그는 가고 싶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계속 그곳에 계셨다.
“아버지, 저 갈게요…”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난 일하러 가야한다.”
프랜의 아버지는 현관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셨다. 아버지는 문을 쾅닫고 나가셨다. 프랜은 마음이 안좋았다. 마지막 인사도 안해주시다니.. 영원히 안 보실 생각인가. 이것은 프랜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안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프랜은 문밖에서 아버지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내가 첫학기 등록금은 내주마.”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94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wo
창세기는 프랜의 삶의 바꾸었다.
창세기와 그리스 철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창세기의 저자는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가정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는 것을 주자했다. 창세기는 권위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다” 프랜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위대한 이야기가 그를 압도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늘과 땅도 하나님이 만들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다. 인간은 첫대부터 신과의 약속을 어겼고, 계속 반복되었다. 모든 세대가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를 실망시켰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프랜은 동의했다. “인간들은 정말 그래.” 결국 답이 보이기 시작하는 군.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진짜 답!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창세기는 흥미로운 힌트들로 가득했다. 여전히,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의 형상? 무슨 뜻일까? 이것은 히브리 성경이었다. 다수가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크리스천에게 그것은 삼위일체라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창세기 3장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는 언급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 삼위일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3장에는 구속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하나님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악에서 승리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프랜은 창세기가 지식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사실인 것 같았고 예언적이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인간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하며 간섭했다. (홍수 심판 때가 그랬다.)
“하나님은 격정적인 분이시구나.” 프랜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랜은 매일같이 성경을 들고 다녔다. 어떤 것도 그를 이렇게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 즉시 그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중심내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이 장들은 아브라함 이전의 서막(prolog) 같은 형식이었다. 아브라함 후 부터는 아주 역사적인 내용이 된다. 그렇지만 아브라함 이전의 장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과학에 무지한 인간들이 서툴게 내놓은 내용이란 말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신화? 아니면 거대한 진실의 상징인가? 아니면 이 부분도 성경의 다른 부분처럼 역사적인 것인가?
프랜은 소위 서막라고 하는 창세기의 앞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읽을수록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 그 서막을 역사적으로 보게 했다. 아담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홍수도 역사적 사실이었다. 노아도 역사적 인물이었다. 프랜은 신약의 저자들도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창세기를 여러 번 인용했다. 히브리서의 작가도 창세기를 인용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중 홀로 신이고 인간이었던 분이 그것을 역사적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했다.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막 10:6~9)
예수가 신화라고 믿는 것을 인용하면서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은 서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결국 그는 성경의 서막이 역사적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서막에 나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간을 향한 목표, 또 인간의 불복종이 허구가 된다. 프랜은 철학자들은 글렀다고 생각되었다. 교회에서 들었던 자유주의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프랜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신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개월 동안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그는 성경을 믿는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또 없는걸까? 그는 궁금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세계관의 변화는 학교생활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남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특히 영작 시간에 그의 글은 명료해졌다. 그것은 그의 사고가 명확하게 된데에 기인했다. 그는 이제 진리에 대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성화 대학 입학을 준비해야 하는 상급학생이었다. 여전히 그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가 졸업후에(1930.6월) Drexel Institute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Drexel Institute는 특성화 대학보다 거리가 멀었다. 이곳은 1891년에 재정가 앤소니 드렉셀이 세운 학교였다. 미국의 부통령 토마스 에디슨, 레비 모톤, 앤드류 카네기가 학교설립을 지지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예를 들어 이곳은 미국에서 도서학과가 있는 세번째 학교였다. 당시에 프랜은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학교에는 네개의 학과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전기 공학이었다. 그것이 프랜의 미래였다. 그는 아버지가 10살 때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 과목을 공부하려는 것이다.
프랜은 포드 자동차도 갖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이 졸업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는 그의 미래에 대해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에 그는 운전 연수를 받았다. 차를 타고 미술관에도 가고, 필라델피아 시립 도서관에도 자주 갔다. 그는 거칠면서도 자유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쓴 칼 샌드버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호소력 있는 자유로운 구절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샌드버그는 그냥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는 링컨의 젊은 시절에 대한 전기문 “Prairie Years”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었다. 샌드버그의 문장들은 거의 대부분 성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처럼, 샌드버그는 진리를 전달했지만 여운을 많이 남겨두었다.
그러나 프랜은 한가하게 읽고만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 만으로는 부족했다. 미국은 경제 대공항에 빠져들고 있었다. 프랜은 페인트 칠을 하는 임시직을 구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서 로스가에 새로산 집을 수리했다. 그는 처음으로 면도칼과 셔츠와 긴 바지를 샀다. 성년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당시의 소년들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바지를 입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랜은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와 믿음의 색이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8월의 어느 무더운 저녁에 저먼타운 중심가로 가게 되었다. 말을 타고 꽤 오래 갔다. 차들이 거리로 덜컹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Ashmead Place의 코너에 빈 장소에 텐트가 있었다. 그곳에서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프랜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는 줄을 맞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닥은 톱밥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설교단에 서 있는 사람의 인도에 따라 진심으로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뒷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자는 이탈리아 억양이었으나 불같이 말하고 있었다. 성경 구절을 설교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그의 살아온 이야기 들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구원 받았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감옥에 있었다. 프랜은 흥분되었다. 이 설교는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지루한 설교들과 너무나 달랐다. 설교가 끝나자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단으로 초청했다. 프랜도 일어나려고 했다.
설교자가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왜 여기에 있나요, 구원을 위해서요? 아니면 헌신하려구요?”
프랜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프랜은 기뻤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프랜이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했던 것들을 말해주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 설교자가 앤소니 제올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집으로 달려가서 그의 위대한 발견에 대해 일기장에 썼다. 그가 쓴 것은 앤쏘니 제올리의 설교보다 더 많았다. 프랜은 이렇게 썼다. “1930년 8월 19일 – 텐트에서의 만남, 앤쏘니 제올리 – 내 삶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드릴 수 있게 한 사람.”
프랜은 그의 삶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기로 한 것이다!
몇 년동안 프랜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살을 앓아 왔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진리를 찾는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랬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8월 22일에 그는 제올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8월 26일, 또 갔다. 친구들은 그런 프랜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Drexel에 기술을 배우러 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9월 2일에 그는 Drexel 야간 학교에 등록했다. 오전학교를 다닐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낮에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프랜은 일기장에 “모든 진리가 성경에서 나옴을 확신한다”고 썼다. 그가 계속 기술 공부를 하지 않게 될 것은 당연했다. 그의 교회에서 하는 설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담할 사람을 찾았다. 처음에 그는 저먼타운 학원에서 주일학교 선생님과 이야기 했다.
“햄프던-시드니 대학이 어떨까.” 오쉬본이 말했다.
프랜은 햄프던-시드니 대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쉬본은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프랜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햄프던-시드니 대학은 작지만 버지니아에 있는 유일한(전문적인) 대학이었다. 사실 그 대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장로교인들인 1776년에 세운 미국에서 열번째로 오래된 대학이었다. 그 대학의 학생들은 윌리엄스버그와 피터스버그에서 영국인들과 싸웠다. 패트릭 헨리와 제임스 매디슨이 그 대학의 첫 이사였다. 그 대학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종합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프린스턴 신학교, 버지니아 주립대학과 같은 다른 대학들과 연결되기 시작되었다. 햄프던-시드니는 프랜이 나중에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최고의 기반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오쉬본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고등학교때 대학 준비 과정을 밟지도 않았는걸요,” 프랜은 슬픔에 잠겨 그렇게 말했다.
오쉬본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육가였다. “너가 부족한 부분은 외국어 밖에 없어. 센트럴 고등학교 야간수업때 라틴어와 독일어를 공부하면 1931년 가을에는 햄프던-시드니에 들어갈 수 있을거야.”
1931년 가을이라고! 1년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햄프턴-시드니에 가기위해 노력하면서도 9월 15일에 Drexel에서 야간 학교에 가게 되었다. 열흘후에 그는 전기 회사 RCA Victor에서 시간당 42센트 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직장은 뉴저지에 있었다. 그는 델라웨어에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RCA 공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나면,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저먼타운으로 돌아와 Drexel에서 공부했다. 야간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주방 테이블에서 공부했다.
그의 계획은 10월이 되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RCA에서 프랜은 컨베이어 벨트로 가득한 동굴 같은 건물속에서 머슴처럼 일했다. 남자들은 부품 조립은 남자들이 하고, 나중 작업은 여자들이 했다. 그를 신경질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공장장이 시간외 근무에 대해 봉급을 주기로 했는데, 남자들에게만 준 것이었다. 더 많은 남자들이 일에 참여했고, 여자들은 물량을 따라가느라 숨돌릴 시간도 없이 일을 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시간외 근무에 대해 한푼도 받지 못했다. 이런 불공평은 프랜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여자들은 불평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930년대 당시에는 일자리를 얻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욕이 계속되는 동안 한 여성이 소리쳤다.
“대항하자!” 그녀는 소리질렀다.
다른 여성들도 그녀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다른 여성들은 대항자들에게 반대했다. 여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프랜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위로 올라갔다.
“네! 싸웁시다! 싸워요!” 그는 소리질렀다.
그게 RCA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공장에서는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그는 집근처에서 야채 배달을 하는 새 일을 얻었다. 전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의 후원자, 샘 체스넛은 교회 성도였다. 교회에서의 그의 교제가 그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은 그에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고 권면했다. 그는 이제 몇몇 지체들과 기도하게 되었다. 12월 까지는 그의 부모를 설득해야만 했다.
“Drexel을 그만 다닐 생각이에요.”
“아니 왜?” 아버지는 반문했다. “지난 학기에 대수학에서 B학점을 받지 않았니?”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성적이랑 관계없어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독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프랜은 저먼타운 학원 원장인 오쉬본이 알려준 대로 아버지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랜이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된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목회자에 대한 혐오는 그의 어린시절부터 생긴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목사는 돈도 잘 못벌 뿐 아니라, 참기 힘들 정도로 거만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그는 배심감마저 느꼈다. 몇 년 동안 그는 기술적으로 생각하고 손수 일하도록 프랜을 가르쳤다. 모든 것이 허사였다. 목사들은 결코 손으로 일하지 않는다. 프랜의 어머니는 반대의 소리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아버지보다 더 실망한 듯 보였다.
프랜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걱정들이 적혀있다.
12월 14일 :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나의 계획에 적대적이다. 하나님께서 더 강하고 확실하게 인도해 주셨으면 좋겠다.
12월 15일 : 하루종일 걱정만 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등을 돌린 것 같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12월 16일 : 아버지와 단 둘이 이야기 했다. 아버지는 그냥 하던 것을 하라도 하신다. 그러면 어머니도 좋아지실 거라고..
반대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침대 맡에서 그는 성경의 여호수아를 펼쳤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다.”
그가 19살이 되던 1931년 1월 30일에 그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책 읽는 시간을 갈망했던가. 이제 그는 리빙스톤 힐의 증인을 읽고 있다. 그 소설의 첫 장에는 신앙심이 깊은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 주님, 이것이 프랜도 이런 길을 가야 할 운명인가요? 그러나 소설에서 박해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 학생이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는 전심으로 또 즐겁게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랜은 일기장에 ‘증인’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썼다.
1931년 가을 즈음, 프랜은 결국 햄프던-시드니에 갈 준비가 되었다. 모두 샘 오쉬본 같은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프랜은 튼실한 나무 상자에 그의 소지품들을 담았다. 그는 정장을 입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캠퍼스에서 knickers(여성용 속옷이라고 하는데 왜 쉐퍼가 여성용 속옷을 입었을까요.. -.-;)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속옷, 양말, 셔츠, 운동복, 우비, 면도기, 수건, 빈, 칫솔, 몇권의 책, 그리고 성경과 함께 마지막으로 knicker를 넣었다. 한가지 생각하기 싫었던 것은 등록금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어려움은 프랜을 좌절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햄프던-시드니에서는 1년에 600달러가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당 30센트짜리 일로는 1년에 600달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 했다. 어떻게 하면 공부도 하고 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긴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몇주 버티다가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인가. 그는 하나님만 의지했다.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를 만났다. 새벽 5시 반이었다. “나는 목사 아들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너를 떠나보내기도 싫구나.”
프랜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아버지가 많이 누그러지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은 이후로 프랜은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번개처럼 그의 치는 것이었다. 그는 지하방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다.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하지요?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결국 비용을 지불하기로 결심했다. 존 웨슬리 같은 사람들도 전에 그랬었다. 그러니까 나도 햄프던-시드니로 간다. 그는 말했다. 그는 동전을 세번 던졌다. 모두 그가 가야한다는 쪽이었다. 정말 그는 가고 싶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계속 그곳에 계셨다.
“아버지, 저 갈게요…”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난 일하러 가야한다.”
프랜의 아버지는 현관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셨다. 아버지는 문을 쾅닫고 나가셨다. 프랜은 마음이 안좋았다. 마지막 인사도 안해주시다니.. 영원히 안 보실 생각인가. 이것은 프랜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안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프랜은 문밖에서 아버지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내가 첫학기 등록금은 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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