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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

프란시스 쉐퍼와 에드스 쉐퍼1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88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one
베시 쉐퍼는 “의사에게 가야해요”라고 소리치며 졸고있는 남편 프랭크를 깨웠다. 프랭크는 추운 겨울 한밤중에 급하게 나갔다. 베시는 진통 때문에 참기 힘들었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그녀의 첫출산이었다. 곧 눈이 침침하고 불안해 보이는 의사가 도착했다. 혹 의사가 취하기라고 한건지.. 베시는 걱정스러웠다. 취했건 아니건 의사는 침대의 발판에 시트를 묶고 베시에게 진통이 올때마다 반대 쪽으로 당기라고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소리쳤다. “쉽네요. 그저 시트를 당겼다 풀었다 했는데 아기가 침대에 있네요!”

이렇게 프랜시스 어거스트 쉐퍼는 1912년 1월 30일에 그의 부모의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쉐퍼는 독일인마을(Germantown)이라고 불리는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프랭크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사실 독일계였다. 쉐퍼의 할아버지인 프랜즈 쉐퍼와 할머니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1912년 까지 캐롤라이나에 사셨다. 한편, 쉐퍼의 어머니 베시는 영국계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 윌리암슨은 돌아가셨지만, 할머니 메리 윌리암슨은 그때까지 살아계셨다. 사실 메리의 아버지인 윌리암 조이스는 영국에서 이민와서 96세까지 사셨다.

“너의 증조 할아버지는 너가 태어나던 해에 돌아가셨단다”라고 어머니는 쉐퍼에게 나중에 설명해 주셨다. “그는 우체부였지. 모두들 할아버지를 빌리 아저씨라고 불렀단다.”

프랭크 쉐퍼의 가족은 독일인마을 중심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패스토리어스 거리에서 살았다. 어린 프랜은 곧 철제 울타리가 둘러진 작은 앞 잔디밭에서 뛰어놀기 시작했다. 라일락 나무밑의 잔디가 적은 곳에서, 프랜은 흙을 그의 작은 들통에 담았다가 부었다가 하면서 놀았다. 거리는 하루종일 마차 소리로 가득했다. 어떤 때는 가위 가는 사람의 마차였고, 또 어떤 때는 생선 가게 장수, 야채상 등이었다. 프랜은 곧 버터와 설탕을 바른 와플을 파는 아저씨를 기다리게 되었다. 해가 질 때 프랜은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watching the lamplighter ascend his stepladder to light the gas streetlights)
 
어머니 베시는 종종 “난 자녀들의 노예가 되진 않을테야.”라고 말했다.
나중에 프랜은 단지 그 태도의 결과만을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형제나 자매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혼자였던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윌리암슨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8살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형제들의 “작은 어머니”가 되어 몇 년 동안을 빨래, 다림질, 요리를 했다. 어머니의 태도는 프랜의 아버지 때문에 더 강경해졌다. 그도 역시 3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가장의 역할을 해야했었다.

“10살까지, 나는 광산에서 일을 해야했지.” 프랭크는 프랜에게 이야기 했다. “컨베이어에 발을 걸치고 하루종일 석탄에서 돌을 골라냈단다!”
어떤 때는, 프랜에게 그의 부모님은 그들이 했던 일보다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집안일로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월요일은 빨래하는 날이다. 프랭크는 일하러 나가기 전 뜨거운 물인 든 빨래통에 빨래를 채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녀의 궁핍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베시는 고기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곤 했다. 그녀는 흰 비누가 될때까지 지방을 잿물과 함께 끓였다. 비누 조각을 깎아 내서 뜨거운 물에 넣고 저으면 빨래를 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에 빨래를 넣고 섞은 후에, 빨래판에다 놓고 때를 벗겨내기 위해 비벼댔다. 물론 헹구고 말리는 데까지 해야했다. 어떤 옷감들은 말리기 전에 풀을 먹이기도 했다.

“식탁보, 냅킨, 앞치마는 풀을 조금만 먹여도 되지,” 그녀는 프랜에게 이야기 했다. “그렇지만 너희 아버지 셔츠의 칼라와 소매는 풀을 많이 먹여야 했어.”
빨래가 마르면 베시는 물을 조금 흩뿌리고 접어 놓았다. 화요일에 베시는 식탁위에 담요를 펼치고 시트를 씌운다. 이것은 그날의 다림질판이 되었다. 무거운 다리미는 윗부분이 뜨거웠다. 나무 손잡이를 잡고 다리미가 식을 때까지 옷을 다렸다. 그리고 나서 새 다리미로 교체했다. 하루 종일 베시는 다림질을 해야했다. 수요일은 수선하고 바느질 하는 날이었다. 단추를 다시 달고 옷단을 고치고, 찟어진 옷을 수선했다. 바느질은 지루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않아서 하는 수선일은 끝나는 일이 없었다. 목요일에는 독일인마을 거리에 있는 시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시장에서는 길에서 살 수 없는 식료품을 샀다. 프랜이 좀더 자랐을 때는 그가 시장으로 수레(wagon)를 끌고 가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수레가 꽤 무거웠다.
“야채 떨어뜨리지 말거라.” 그의 엄한 어머니는 경고했다.

금요일은 고된 날이었다. 베시는 스카프를 두르고 청소를 했다. 집안 구석구석의 먼지들을 떨어냈다. 가구에 광을 내고, 양탄자를 쓸었다. 일주일에 한번 베시는 할머니 댁에 청소를 도우러 가셨다. 물론 베시는 봄과 가을에도 그랬다. 이때는 밖으로 나가서 매트리스를 말리고, 카페트를 털어서 먼지를 없앴다. 프랜의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베시 만큼이나 바빴다. 베시가 배관이나 가스등의 문제나, 움직이지 않는 창문등을 발견하면 프랭은 그것을 고쳤다. 그는 그의 직업(그는 엘리베이터나 증기기관을 잘 수리하기로 유명했었다.)만큼이나 집안일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프랭크는 미국-스페인전 동안 모니터라 불리는 전함에 있었던 해군이었다. 기계를 다루는 일에 있어선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프랭크는 독일인 마을에서 집에 처음으로 전기를 연결한 사람이었다. 프랜은 아버지를 도우며 도구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심지어 톱까지.
“이제, 옷을 더럽히지 말거라.” 베시는 말하곤 했다. “농담 아니다.” 사실 형제는 없었지만 프랜은 힘든 일을 하면서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들은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했다. 베시는 붕대 감기나 선교지에 보낼 옷을 수선하는 부녀회에 속해 있었다. 프랭크는 교회에서 작은 평화를 맛보았다. 그는 어렸을 적 다녔던 교회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었다. 그는 늘 “가난한 아이” 취급을 받았다. 10살에 탄광 일꾼으로, 프랭크는 (considered the soft-handed pastor-not himself-a ward of society)
“목사는 노동이 뭔지 몰랐어. 그는 그저 앞에 서서는 말만했지.” 프랭크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부지런한 쉐퍼도 때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스크림을 만들거나 더운 여름날 수박을 시원하게 해서 먹었다. 좀더 재밌게는 불꽃놀이를 하거나 근처의 페어마운트 공원에서 하이킹을 하거나 아틀랜타 시내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아침에는 가족과 함께 수레를 타고 달라웨어 강으로 가기도 했다. 나루터를 건너서 뉴저지부터 아틀랜틱 시내까지 기차를 타기도 했다. 저녁에는 독일인마을로 돌아왔다.

프랜은 그런 가정환경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부모님을 자랑스러워 했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굴곡진 머리가 멋있는 분이셨다. 아버지도 짧은 머리 넓은 어깨, 단단한 팔 근육이 멋진 분이셨다. 프랜의 부모님들이 어렸을때부터 힘든 노동을 하긴 했지만, 프랜에게는 학교에 가지 않을 때만 일을 시켰다. 그의 가장 어려운 일은 1마일 떨어진 얼음가게까지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큰 얼음덩어리를 끌고 집으로 온다. 그러나 그는 바깥에서의 자유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웃에는 그를 귀여워하는 할머니가 두분이나 계셨다. 학교는 그의 집에서 1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할머니 한분이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셔서 프랜은 그곳에서 매일 점심을 먹었다.

할머니의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 때문에 프랜은 어머니가 얼마나 날카로운 분인가를 깨달았다. 가끔 어머니는 엄한분이셨다. 한번은 어머니가 프랜이 크리스마스 행사때 교회에서 시를 낭독하는 것을 보면서 무척 좋아하셨다. 그는 넘어져서 스타킹에 구멍이 났다. 그의 출현은 악몽과 같았다. 어머니는 그를 잡고 쏟살같이 집으로 달려와서 가죽 끈(아버지가 면도날을 날카롭게 할 때 쓰는)으로 스타킹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서 프랜은 다시 급하게 교회로 달려가 시를 낭독했다. 공연은 잘 마쳤지만, 그에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아니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그를 벌줄 때 가죽끈을 사용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해주셨던 것은 단지 그의 실망을 나타내는 것뿐이었다.
“프랜시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입을 한 일자로 다무셨다.
그리고 프랜은 풀이죽었다.

학교생활은 안이나 밖이나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은 교칙을 어긴 학생들을 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랜은 종종 선생님께 맞았다. 때때로 프랜은 충동적이고 장난이 심했다. 사과를 굴려서 선생님 책상에 놓는 것은 일상이었다. 어느 날은, 나무 바닥위로 사과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프랜의 사과가 선생님의 머리 뒤 칠판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랜에게는 다행히도, 선생님은 누구의 장난인지 알아채지 못하셨다. 한번은 프랜이 선생님의 날라오는 주먹을 피해서 선생님이 의자에 부딪친 적도 있었다. 선생님의 고통은 프랜이 맞았을때(만약 맞았다면)의 고통보다 더 했다. 운동장은 전쟁터와 같았다. 그는 어린나이였지만, 다른 아이들이 프랜을 쉽게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치고박고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무척 사나웠다. 장난감 총에 의한 상처는 가장 오래갔다. 총알이 그의 뺨에 세게 부딪쳐서 작은 상처가 남은 것이다. 학교 공부는 프랜에게는 쉬운 일이었지만, 응용하는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일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은 그에게 집에 전기를 연결하는 일이나 신식 라디오를 만드는 것 같은 실용적인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보다 교육을 덜 받은 아버지도 그런 것들을 만들수 있었다. 세상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 지고 있었다. 자동차, 비행기, 심지어는 세계대전까지.. 그러나 그것들이 학교 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선생님들은 미래의 교육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약간의 회의가 들었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부모님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님은 나를 독일인마을 학원으로 보내려고 이야기 하고 계셨다.” 그는 후에 그렇게 기억했다.
학교생활을 마칠 즈음 프랜은 평범하고 거칠지만 유능한 학생이었다. 그는 수레를 비탈길에서 끌고 내려왔다. 겨울에 그는 썰매를 타다가 넘어지기도 했고, 스키를 타다가 눈덮인 언덕에 머리를 파묻기도 했다. 한번은 미끄러져서 언 연못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얼음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물은 무릎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집으로 올때는 뼛속까지 추위가 느껴졌다. 홍역을 앓기도 했다. 그 당시는 전염병이 있는 가정은 격리되었다. 보건소에서 나온 사람이 “홍역”이라고 쓰여진 프랭카드를 그 집 정문에 붙여놓았다. 보건소 관리들만이 그 프랭카드를 제거할 수 있었다. 프랜의 열은 며칠동안 식을 줄을 몰랐다. 가끔 물을 떠 먹여주는 어머니를 알아볼 정도였다. 그 물맛이 얼마나 꿀맛이던지! 그는 그의 머리맡에서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얼굴을 기억했다.

“안녕, 아빠” 프랜은 의식이 돌아올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11살때, 프랜은 루즈벨트 주니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리디에.C.벨 선생님의 그의 담임이었다. 미술감상과 그리기 시간에 그는 선생님께 큰 감명을 받았다. 순수미술은 처음 접해 보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프랜은 보이스카웃에 들어갔다. 그는 멋진 배지를 달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말하기 대회에 대표로 출전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우승컵에는 “4분 말하기 대회 우승 탑, 프랜시스. A. 쉐퍼, 38단, 1923년(Pyramid Club Cup Four Minute Speech Contest Won by Francis. A. Schaeffer, Troop 38, 1923)”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보이 스카우트는 독일인 마을의 첫 장로교에서 모임을 가졌다. 곧 프랜과 그의 부모는 그 교회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YMCA에 가입했고, 수영과 체조시범을 배웠다. 그들은 피아노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곧 레슨을 그만두었다. 심지어 심벌보다 잘하는 것이 없어서 보이스카웃 밴드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는 음악적인 것에는 취미가 없었다.

아마도 그는 “상류 문화는 나랑 맞지 않나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25년 여름에 미국에는 소위 Monkey Trial이라는 것이 있었다. 테네시이 한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 진화를 가르칠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정치인 윌리엄 제닝 브라이언이 언급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파장이 컸다. 반대편에는 변호인으로 유명한 클래런스 대로우가 있었다. 게다가 건강이 안좋았던 브라이언은 배심 공판의 체재안에서 무능력했다. 대로우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성경을 비웃었고, 그가 법정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신문들은 이 사건을 다루며 그를 영웅화 했다. 프랜은 교회에서 그 재판이 종교적 근본주의에 큰 손실이었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근본주의가 뭐든지 간에..”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프랜은 대학 준비 과정에서, 그는 직업 훈련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마도 기계 설계, 목공, 전기공학, 금속 공예 등이 그에게 실제적으로 준비해야 될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락방으로 전기 선을 놓는 작업을 했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나무 마루를 까는 작업도 했다. 안과 밖에 페인트 칠을 하고, 창고를 만들고, 벽돌을 쌓고, 지붕의 물받이를 수리, 지하저장소에 석탄을 담는 통 만들기, 배관공사, 콘크리트 작업, 그 밖의 많은 기술적 작업들을 했다. 프랜이 독일인마을 고등학교를 시작할 무렵에는, 로스가의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물론 새집은 아니었다. “아버지, 무얼 먼저 고쳐야 하지요?” 프랜은 물었다. (그가 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프랜은 집밖에서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보이 스카우트 활동 뿐만 아니라, 그는 소총 클럽에 속해 있었고,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은 농구를 즐겼다. 롤러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그는 사교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그는 불량한 멤버들에게 둘러쌓였다. 갑자기 경찰이 나타났다. 멤버들은 흩어지고, 당황한 멤버들은 저항했다. 경찰들은 기분 나빠하며 그들을 경찰소로 끌고 갔다. 프랜은 처음으로 경사에게 풀어달라고 애원해야했다.
경사는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고 말했다.

프랜은 이제 토요일에도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생선가게에서 일을 했다. “생선이요, 싱싱한 생선이요”를 목청껏 외치면서,,, 그리고 나서 프랜은 손님들이 집으로 가져갈 카트에 생선을 채우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프랜이 말을 끄는데 서툴다는 것 때문에 못마땅해했고, 프랜은 그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에는 말타고 한시간 거리에 있는 레딩 터미널에 있는 고기 가게에서 일했다. 12시간 동안 얼음 창고에 있는 고기의 포장을 뜯거나 소매점에 배달하는 일을 했다. 망치와 정을 가지고 보일러의 치석을 제거하는 일도 했다. 어떤 때는 얼음가게에서 200파운드의 얼음을 수레에 싣는 일도 했다. 이런 힘들일과는 대조적으로 집에서는 여성의 머리핀에 들어가는 꽃장식을 만들어서 백화점에 팔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곤두서게 했다/ 프랜은 회상한다.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무착륙 단독 비행에 성공한 것은 프랜이 15살이되던 1927년 여름 가장 큰 뉴스였다. 다음해에 컬러 활동 사진 뿐만 아니라 TV가 나왔다. 그러나 1929년, 1930, 31년은 필라델피아에서는 전설 같은 사건들이 쏟아졌다. 필라델피아의 야구팀은 지미 폭스와 알 시몬스 같은 타자와, 왼손잡이 포수 그리고 양키로부터 우승기를 거머쥔 조지 언쇼, 무적의 베이드 루쓰, 로 게릭이 이끌었다. 양키를 이겼을 뿐만 아니라 그 여름에 월드 시리즈에서 두번이나 우승했다.

필라텔피아에서는 잊을 수 없는 멋진 시간들이었다.
프랜이 17세가 될 무렵, 그는 교회에도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녔다. 그러나 그는 그가 들은 것들을 의심했다. 어느날, 프랜은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러시아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것을 부탁받게 되었다. 프랜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리어스 서점에 가서 러시아-영어 사전을 산다는 것이 그만 그리스 철학책을 사게 되었다! 시간 낭비한 것을 불평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사상들은 프랜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삶의 본질을 찾기위한 노력이 있었다. 프랜은 그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대답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 문제는 아주 멋진 것이지만, 대답들은 모두 설득력이 없어.”
그러나 프랜은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와 구원에 대한 질문들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목사님과 주일학교 선생님의 답변은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는 자신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믿는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고 있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아파왔다. 삶에 대한 이 위대한 질문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 그는 성경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전에 성경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교회에서는 성경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목사는 말씀의 한구절을 떠서 성도들에게 건내는 식이었다. 프랜에게 그런 식의 설교가 먹힐리가 없었다.
“성경을 읽어봐야 할까?” 그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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