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기독교세계관학교

삼위일체(三位一體)와 일신론에 대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와 일신론에 대하여 
자료출처 http://windowchurch.com/board/view.php?menu_id=33&no=193
 
일신론에 대하여 참고로 퍼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왕은 메소포타미아의 계급적인 다신들의 권위를 힘입어서 정치를 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신들은 길가메시왕을 창조할 때 그에게 완전한 육체를 주었으니, 위대한 태양의 신 사마시(Shamash)는 그에게 아름다움을 주었고, 폭풍의 신 아닷(Adad)은 용기를 넣어 주었으며, 그 외의 많은 신들이 그에게 거대한 들소처럼 강한 힘을 주어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게 하였도다. 3분의 2는 신이요, 3분의 1은 인간으로 만들었도다.”(N.K 샌다아즈, 길가메시 서사시, 범우사,1978,p.11).
길가메시 왕은 신들이 주는 권위을 이용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더더욱 다신을 섬기는 종교생활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왕 한 사람에게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왕이 밑에 사람을 지배하면 그 밑에 있는 사람은 또 밑에 있는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계급적 다신관이 모든 사회를 계급적 사회로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이런 문화가 가정에까지 들어와 가부장적인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마치 신에게 권위를 부여받은 왕같이 가정의 왕으로 가족들을 통제하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대화는 없습니다. 오직 명령만 있을 뿐입니다. 
 
다신론보다 더 강력한 계급적인 권위주를 가지게 하는 신관은 유대교와 이슬람을 믿는 일신론자들입니다. 일신론자들은 다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신이 유일한 신이기 때문에 그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유일성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일인 절대권위자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자신들도 절대권위적 계급적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을 절대적 유일한 권위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신관이 그 사람의 사고를 지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신을 좋게 생각하고 영향을 받아서 자신도 모르게 신이 인간에게 명령을 하듯이 자신도 타협이나 대화보다는 명령과 복종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과 이슬람국가간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일신론자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대화하거나 굽히지 않고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관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관의 영향을 받는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는 크게 계시종교(啓示宗敎)와 이법종교(理法宗敎)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계시종교는 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신론자들, 일신론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법종교는 인간의 도리와 예법을 믿는 종교입니다. 불교나 유교가 대표적인 이법종교입니다. 물론 무신론자도 여기에 속합니다. 무신론자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을 구분한다면 인간의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법종교에 포함 시킬 수 있습니다. 이법종교중에 유교는 계시종교같이 신은 없지만 인간의 도리가 신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도리중에 가장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정신입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順序)와 질서(秩序)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아랫 사람이 말대꾸 하는 것을 제일 싫어 합니다. 유교의 영향 때문에 언제나 계급적으로 관계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의 명령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처음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법종교의 영향 때문에 언제나 계급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대화는 없습니다. 오직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나이많은 사람이 명령하고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회는 잘 나가는 것 같지만 하루 아침에 뒤집어지고 사고가 일어납니다. 권위 때문에 대화가 안되니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다신론이나 일신론, 이법종교의 신관에 영향을 받으면 인간의 세계속에는 명령과 복종의 절대적 지배 체제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신관을 믿는냐는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이 세례를 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신관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신관은 삼위일체의 신관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조직신학교수인 김명용교수가 기독교의 신관인 삼위일체 신관에 대하여 말하기를 “삼위는 세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일체는 한분 하나님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한 하나님을 보면 그분과 더불어 다른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자안에 성부가 계시고 성령안에 성자가 계시고 성부안에 성자가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다.”(김명용,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이해해야 한다,” 목회와 신학 10(2000),pp.202,204).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간에 계급이 없습니다. 다신론같이 누가 큰 신이고 작은 신이 없습니다. 모두가 같습니다. 또한 이 세분은 하나로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이 하나는 일신론같이 독재적인 한분의 이미지가 아니라 셋이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심위일체 하나님은 세 분이 서로 계급적인 구조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한분의 독재적인 이미지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신관의 흔적을 가족에서 찾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는 각각 독립적인 세 인격의  사람이지만 그러나 사랑으로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김균진, “삼위일체 하나님(1) 기상 342호(1987),p.17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신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이 믿는 일신론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 분 하나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만 계급적이지 않고, 민주적이며, 독재하거나 폭력을 쓰거나 명령하는 신이 아니라 사랑으로 셋이 하나로 존재하는 독특한 존재양태를 가지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계급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하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계급적이지 않고 민주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서로를 구속하거나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부모라도 자녀들을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돈이나 권세로도 사람들을 지배하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관을 묵상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계급적인 사람에세 민주적인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이법종교의 영향을 오래 받아서 너무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고 깨달알으면 우리도 원래 하나님이 민주적이셨던 것 같이 우리 사회도 가정도 민주적인 곳이 됩니다. 행복은 민주적일 때 행복감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치 형태도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신관을 믿으면 독재적이거나 독선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특히 일체는 셋이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체의 신관을 믿으면 우리도 언제, 어디서나 분열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치와 하나를 지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