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 철학 번역
쉐퍼 철학 번역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40
「도시 안에 죽음」, 신이신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고, 그가 바로 거기에 있으시며 그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책들을 읽고 성경만이 세계와 삶의 관점에 있어서 일관됨이 얼마나 명확한지를 볼 때 느껴지는 영적이고 지적인 흥분을 기억한다.
진리, 완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삶을 위해 필요한 것과 경건의 모든 것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적으로- 우리 삶의 기본적 의문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포함한다.
우리의 시발점은 거룩함과 우주의 공의로운 창조자인, 인성을 가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확신을 주신 분이다. 영생은 삶에 있어 중요한 약속이며 의미로 다가 온다. 우리 모두는 중요하며 의미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그 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세대에서 지적이고 정직한 경향(fashion)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것을 지적해 낸 사람은 바로 프란시스와 에디스 쉐퍼이다. 또한, 전통과 성경적 삶-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있어 긍휼히 여김을 받는 감정이나 종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이 없는 성경적 이론의 부적절성에 대해 강력하게 말하는 이도 바로 그이다. 우리에게 우리 삶에 계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줘라, 그는 젊은이들의 세대와 함께 그들의 선배들(teacher)에게도 도전하셨다.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상기해야 할 시간이며 이런 위대한 진리를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 33:11을 새겨야한다: “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역사의 흐름
역사는 직선적이다: 이것은 순환적이지 않다. 역사에는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대화하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며 사람에게 진정한 의지력을 주시기로 계획하시기 전부터 계속성을 보여주는 흐름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 하셨다: 나를 믿고 너희들의 영역에서 자동적인 존재가 아닌 피조물로써 번성하라. 창조자에게 피조물이 하듯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해라, 그런다면 모든 것이 형통하리라. 이것은 내가 너를 만들기 위한 이유이다.(This is the place for which I have made you.)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 그러나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창조자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 역사의 큰 재앙의 문을 연다: 하나님과의, 사람들과의, 또한 그들 스스로와의 깨어진 관계인 것이다. 인간 역사에서 타락의 영향은 거대한 것이나 그들은 영원한 과거에 뿌리를 둔 역사의 계속성은 바꾸지 못하고 본래의 창조가 하나님의 원래 계획하셨던 것으로 회복되는 때인 영원한 미래에 그리스도의 출현을 통해서 계속된다. 하나님은 불멸의 인간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죽을 때를 지켜 보라. 5분 후에도 그는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의 존재를 멈추는 어떤 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계속 존재한다. 타락했을 때에 사람은 사람으로써의 그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본질적인 사람으로써의 성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동물이나 기계가 아니다. 나는 인격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짧은 시간이 아닌 영원함으로 대해 주신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이 다른 가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실재가 단지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영원히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행위하신다. 인간 역사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써 하나님이 행위하시고 만드신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필연적인 인간 존재는 통치하기 위해 문화적 명령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정복한다. 모든 전체가 심지어 자동적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적으로 그들 스스로 진행해 나간다 할 지라도 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역사 속의 모든 것이 동등하게 “정상의” 것이 아니다. 비정상인 것은 사람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반드시 거기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가는 역사 전부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발생되고, 모든 개인 각자가 똑같이 선을 행하고 동기화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분명 틀린 것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사회로 부터 기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부터 떨어질 수는 있다. 그들은 ‘비정상적인’ 감각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한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악한 것인지에 대해 정립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실재
역사와 삶 양쪽 안에서 단지 “하나의 실재”만이 있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둘 다 존재의 일부이다. 그것들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엘리사가 시리아 군대에 둘려싸여 있을 때, 이미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그의 종이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하나님이 여셨다. “산에는 말과 불병거들로 엘리사 주위에 가득 찼다” 엘리사가 다음과 같이 그의 종에게 말한 이유이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보다 많다” (왕하6:15-17). 신약에서도 거의 동일한 말씀을 외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한 1서 4:4)
모세와 엘리야가 산에 오르신(the Mount of Transfiguration) 예수님께 나타났을 때, 그들은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오르신 바로 그 산에 있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밝은 빛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이었다”(눅 9:37) 여기에는 플라토닉적인 실제 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다른 영역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하나의 실재 안에 사건의 연속물이 있는 것이다. 영적인 항목과 자연적 항목으로 “영역”을 나누는 것은 두개의 실재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단지 하나의 실재가 있고 사실상 이것은 존재하며 연속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만졌고, 보았고, 식사를 같이 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달력상의 한 날의 한 시였다. 그가 그의 발걸음을 떼신 곳은 감람산이다” 예수님이 분명한 지리학적인 위치에 다시 돌아와 섰을 때도 세상 역사의 어느 한 날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 사막의 정오였고 예수님의 광채가 너무나 빛나서 그는 신체적으로 눈이 멀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히브리어로 그에게 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평범한 언어로 말씀하시며, 평범한 문체와 단어를 사용하셨다. 사울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다른’ 세계 속으로 이와 같은 20세기의 계획을 완전히 부인한다. 우리는 시간, 공간, 역사, 평범한 대화 그리고 평범한 언어 속에 존재한다.
개방된 체계
한 단어로, 성경적 역사 철학은 초자연이 실재의 부분인 만큼 우리 일상의 “자연스런 현상”인 “열려진 체계”이다. 이것은 단순히 닫혔거나 자연스러운 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쉐퍼가 계속해서 지적한 점이다.
역사를 지각하는 관점
역사를 지각하는 관점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육신에 있다. 심지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역사의 방향은 예수님의 처음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다. 예수님이 죄, 죽음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가져오신 승리는 전에 없었던 삶과 역사에 의미와 목적을 가져다 주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원래의 창조가 영원한 미래에서 새로운 창조로 재건될 때,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지각하는 관점인 것이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역사는 불합리하다고, 쉐퍼는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사람은 지각하는 관점과 역사를 판단하기 위한 어떤 완전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발점은 잘못된 것이고 그의 모든 계산을 던져버리고 있다. 그들은 작고 유한하며 결점이 있고 제한 된 사람으로 시작했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연장들은 단지 맹목적인 뒷길 아래로 이끈다.
그는 우주의 형상을 본다: 이것은 “여기에 버려진 한움큼의 자갈이 분명히 아니다” 어디에서 그것이 왔는가? 왜 이것이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아름답고, 특정하게 복잡한 형태로 말이다. 만약 누군가 비인격적인 우주로 시작했다면, 여기에는 인격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없을 것이고 사람들 스스로가 영원의 문제의 가정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창조 공간-시간 , 역사의 실재 그리고 창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단지 여기에 서 있고, 그 자체로 운행된다. 해결점이나 답 없이.... 현대의 사람들의 [절망]은 언제나 존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기대하는 모든 피조물의 실재를 잃어버린 데에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확실히, 역사 공부를 위한 거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인간’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지 또는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기본적인 본성이 무엇인지 쉐퍼는, 정확히, 성경과 전통적인 성경적 이론에서 세상의 역사적인 “악의 문제”에 대한 설명을 찾아냈다. 성경적인 체계에서 쉐퍼는 남자와 여자는 흠없이 창조되었다. 도덕적 장애물은 없지만 하나님께 “예”뿐만 아니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의지가 있었다. 그들이 단지 그렇게 했을 때, 죄는 세상과 죄에 의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래서 역사의 악은 모든 것을 거쳐갔다.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죄는 하나님의 정의에 들어왔다. 그의 힘있는 로마서의 해석 제1장에서 쉐퍼는 사람은 자신의 추론 에서 멍청해진다고 논평했다. “그는 지적인 바보가 존재하는 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 또한 인정하면서-이것은 우주와 이것의 형태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진리에서 인간이 멀리 떠날 때,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이고 우주가 무엇이라는 점에 관해서 바보가 된다. 그는 자신이 살 수 없는 자리를 가지고 떠난다, 그리고 여러 지식과 개인적인 긴장의 속에 잡혀 있다. 「도시 안의 죽음」에서 쉐퍼는 로마서 1장을 원죄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등을 돌리는 어떠한 국가나 문화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원칙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님께로 멀어진 나라는 사람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친밀감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의 잊어버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역사의 기간이 얼마가 되었는지 효과는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그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러므로 그는 그가 누구이며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손은 정의 안에 있는 문화 아래 속에 있다.... 거대한 번개를 던진다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제우스와는 달리, 우리의 세대가 하나님을 외면함과 같이 하나님은 정의를 외면하신다. 그리고 그는 역사 속에서 따르는 인과음보를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정의를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주실 수 있다. 역사 안에서 직접 중재를 하시거나 역사의 바퀴를 전환함으로써 말이다.
종교개혁은 “위대한 자유의 선물... 주(state)와 사회의 자유와 형태의 균형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기본을 외면한다면, 매우 자유스러운데, 형태과 없는 지금의 자유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역사 바퀴의 전환점에서 정의를 불러 일으킨다... 폴리스 안에 죽음이 있으며 도시 안에 죽음이 있다!!!”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특성을 기초로 한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세대에서도 똑같이 행위하신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실제의 부분인 것이다.
하나님, 역사 그리고 복음주의
쉐퍼는 하나님께서 복음주의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위하시는지의 하나의 예로 구원 사역을 보았다.
여기에서 하나님 배후의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실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공간과 시간의 역사 안에서 인과응보는 실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우리는 두 부류로 알고 있다- 천사와 사람) 이성적인 도덕적 창조물은 선택에 의한 역사에 영향을 준다. 20세기 관점에서는, 사람은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요소들과 그들 자신의 영역(level)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람은 나무를 흔드는 원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뮬론적인 인과응보는 역사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도덕과 이성적인 창조물은 선택에 의한 역사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경이로움은 하나님이 우주를 의미르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점이며, 그분이 창조한 것들은 의미르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하시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행위하신다. 하나님께 역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 위에서 멈춘 것처럼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곳곳에서 거기의 존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행위하신다: 즉, 하나님은 역사 안으로 들어가 실제 행위하신다.
쉐퍼는 선정(election), 복음주의 그리고 영생과 관련된 이러한 역사적 원칙을 보았다.
영원한 미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싼 역사의 최종 고지점은 중심에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종말론에서 그는 천년 왕국의 전 시대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자로서 그리스도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대치시키는, 대기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며 그리고 나서 그와 함께 올 것이다. 죽었던 그리스도인의 몸들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눈의 반짝거림과 같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백한 오심과 그분의 성스러움의 영광 전에 “적그리스도”라 불리는 세계를 파괴하는 것 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삶을 통제할 것이며 신으로써 찬양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명백히 그리고 영광스럽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와 사단에 의한 그를 대항한 조직된 세상의 모인 힘을 타도하였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Megiddo 평원 위에 아마겟돈의 전쟁이다. 그리스도는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한다....”
새로운 천국, 새로운 세상 그리고 천국의 도시가 존재할 것이다. 계시록 21-22 장의 천국 도시의 규모를 기술하기 위해 천국의 도시가 건설된 것으로 부터, 이 도시의 설립, 문 그리고 거리가 만들어진 것이 명확하다. 이것은 객관적인 실재이다. 이것은 영원하다.- 영원히, 결쿄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에 의해 통치된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40
「도시 안에 죽음」, 신이신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고, 그가 바로 거기에 있으시며 그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책들을 읽고 성경만이 세계와 삶의 관점에 있어서 일관됨이 얼마나 명확한지를 볼 때 느껴지는 영적이고 지적인 흥분을 기억한다.
진리, 완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삶을 위해 필요한 것과 경건의 모든 것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적으로- 우리 삶의 기본적 의문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포함한다.
우리의 시발점은 거룩함과 우주의 공의로운 창조자인, 인성을 가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확신을 주신 분이다. 영생은 삶에 있어 중요한 약속이며 의미로 다가 온다. 우리 모두는 중요하며 의미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그 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세대에서 지적이고 정직한 경향(fashion)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것을 지적해 낸 사람은 바로 프란시스와 에디스 쉐퍼이다. 또한, 전통과 성경적 삶-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있어 긍휼히 여김을 받는 감정이나 종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이 없는 성경적 이론의 부적절성에 대해 강력하게 말하는 이도 바로 그이다. 우리에게 우리 삶에 계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줘라, 그는 젊은이들의 세대와 함께 그들의 선배들(teacher)에게도 도전하셨다.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상기해야 할 시간이며 이런 위대한 진리를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반드시 시편 33:11을 새겨야한다: “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역사의 흐름
역사는 직선적이다: 이것은 순환적이지 않다. 역사에는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대화하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며 사람에게 진정한 의지력을 주시기로 계획하시기 전부터 계속성을 보여주는 흐름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 하셨다: 나를 믿고 너희들의 영역에서 자동적인 존재가 아닌 피조물로써 번성하라. 창조자에게 피조물이 하듯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해라, 그런다면 모든 것이 형통하리라. 이것은 내가 너를 만들기 위한 이유이다.(This is the place for which I have made you.)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 그러나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창조자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 역사의 큰 재앙의 문을 연다: 하나님과의, 사람들과의, 또한 그들 스스로와의 깨어진 관계인 것이다. 인간 역사에서 타락의 영향은 거대한 것이나 그들은 영원한 과거에 뿌리를 둔 역사의 계속성은 바꾸지 못하고 본래의 창조가 하나님의 원래 계획하셨던 것으로 회복되는 때인 영원한 미래에 그리스도의 출현을 통해서 계속된다. 하나님은 불멸의 인간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죽을 때를 지켜 보라. 5분 후에도 그는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의 존재를 멈추는 어떤 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계속 존재한다. 타락했을 때에 사람은 사람으로써의 그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본질적인 사람으로써의 성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동물이나 기계가 아니다. 나는 인격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짧은 시간이 아닌 영원함으로 대해 주신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이 다른 가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실재가 단지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영원히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행위하신다. 인간 역사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써 하나님이 행위하시고 만드신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필연적인 인간 존재는 통치하기 위해 문화적 명령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정복한다. 모든 전체가 심지어 자동적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적으로 그들 스스로 진행해 나간다 할 지라도 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역사 속의 모든 것이 동등하게 “정상의” 것이 아니다. 비정상인 것은 사람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반드시 거기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가는 역사 전부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발생되고, 모든 개인 각자가 똑같이 선을 행하고 동기화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분명 틀린 것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사회로 부터 기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부터 떨어질 수는 있다. 그들은 ‘비정상적인’ 감각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한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악한 것인지에 대해 정립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실재
역사와 삶 양쪽 안에서 단지 “하나의 실재”만이 있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둘 다 존재의 일부이다. 그것들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엘리사가 시리아 군대에 둘려싸여 있을 때, 이미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그의 종이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하나님이 여셨다. “산에는 말과 불병거들로 엘리사 주위에 가득 찼다” 엘리사가 다음과 같이 그의 종에게 말한 이유이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보다 많다” (왕하6:15-17). 신약에서도 거의 동일한 말씀을 외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한 1서 4:4)
모세와 엘리야가 산에 오르신(the Mount of Transfiguration) 예수님께 나타났을 때, 그들은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오르신 바로 그 산에 있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밝은 빛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이었다”(눅 9:37) 여기에는 플라토닉적인 실제 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다른 영역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하나의 실재 안에 사건의 연속물이 있는 것이다. 영적인 항목과 자연적 항목으로 “영역”을 나누는 것은 두개의 실재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단지 하나의 실재가 있고 사실상 이것은 존재하며 연속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만졌고, 보았고, 식사를 같이 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달력상의 한 날의 한 시였다. 그가 그의 발걸음을 떼신 곳은 감람산이다” 예수님이 분명한 지리학적인 위치에 다시 돌아와 섰을 때도 세상 역사의 어느 한 날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 사막의 정오였고 예수님의 광채가 너무나 빛나서 그는 신체적으로 눈이 멀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히브리어로 그에게 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평범한 언어로 말씀하시며, 평범한 문체와 단어를 사용하셨다. 사울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다른’ 세계 속으로 이와 같은 20세기의 계획을 완전히 부인한다. 우리는 시간, 공간, 역사, 평범한 대화 그리고 평범한 언어 속에 존재한다.
개방된 체계
한 단어로, 성경적 역사 철학은 초자연이 실재의 부분인 만큼 우리 일상의 “자연스런 현상”인 “열려진 체계”이다. 이것은 단순히 닫혔거나 자연스러운 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쉐퍼가 계속해서 지적한 점이다.
역사를 지각하는 관점
역사를 지각하는 관점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육신에 있다. 심지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역사의 방향은 예수님의 처음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다. 예수님이 죄, 죽음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가져오신 승리는 전에 없었던 삶과 역사에 의미와 목적을 가져다 주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원래의 창조가 영원한 미래에서 새로운 창조로 재건될 때,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지각하는 관점인 것이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역사는 불합리하다고, 쉐퍼는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사람은 지각하는 관점과 역사를 판단하기 위한 어떤 완전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발점은 잘못된 것이고 그의 모든 계산을 던져버리고 있다. 그들은 작고 유한하며 결점이 있고 제한 된 사람으로 시작했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연장들은 단지 맹목적인 뒷길 아래로 이끈다.
그는 우주의 형상을 본다: 이것은 “여기에 버려진 한움큼의 자갈이 분명히 아니다” 어디에서 그것이 왔는가? 왜 이것이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아름답고, 특정하게 복잡한 형태로 말이다. 만약 누군가 비인격적인 우주로 시작했다면, 여기에는 인격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없을 것이고 사람들 스스로가 영원의 문제의 가정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창조 공간-시간 , 역사의 실재 그리고 창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단지 여기에 서 있고, 그 자체로 운행된다. 해결점이나 답 없이.... 현대의 사람들의 [절망]은 언제나 존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기대하는 모든 피조물의 실재를 잃어버린 데에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확실히, 역사 공부를 위한 거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인간’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지 또는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기본적인 본성이 무엇인지 쉐퍼는, 정확히, 성경과 전통적인 성경적 이론에서 세상의 역사적인 “악의 문제”에 대한 설명을 찾아냈다. 성경적인 체계에서 쉐퍼는 남자와 여자는 흠없이 창조되었다. 도덕적 장애물은 없지만 하나님께 “예”뿐만 아니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의지가 있었다. 그들이 단지 그렇게 했을 때, 죄는 세상과 죄에 의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래서 역사의 악은 모든 것을 거쳐갔다.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죄는 하나님의 정의에 들어왔다. 그의 힘있는 로마서의 해석 제1장에서 쉐퍼는 사람은 자신의 추론 에서 멍청해진다고 논평했다. “그는 지적인 바보가 존재하는 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 또한 인정하면서-이것은 우주와 이것의 형태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진리에서 인간이 멀리 떠날 때,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이고 우주가 무엇이라는 점에 관해서 바보가 된다. 그는 자신이 살 수 없는 자리를 가지고 떠난다, 그리고 여러 지식과 개인적인 긴장의 속에 잡혀 있다. 「도시 안의 죽음」에서 쉐퍼는 로마서 1장을 원죄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등을 돌리는 어떠한 국가나 문화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원칙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님께로 멀어진 나라는 사람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친밀감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의 잊어버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역사의 기간이 얼마가 되었는지 효과는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그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러므로 그는 그가 누구이며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손은 정의 안에 있는 문화 아래 속에 있다.... 거대한 번개를 던진다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제우스와는 달리, 우리의 세대가 하나님을 외면함과 같이 하나님은 정의를 외면하신다. 그리고 그는 역사 속에서 따르는 인과음보를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정의를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주실 수 있다. 역사 안에서 직접 중재를 하시거나 역사의 바퀴를 전환함으로써 말이다.
종교개혁은 “위대한 자유의 선물... 주(state)와 사회의 자유와 형태의 균형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기본을 외면한다면, 매우 자유스러운데, 형태과 없는 지금의 자유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역사 바퀴의 전환점에서 정의를 불러 일으킨다... 폴리스 안에 죽음이 있으며 도시 안에 죽음이 있다!!!”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특성을 기초로 한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세대에서도 똑같이 행위하신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실제의 부분인 것이다.
하나님, 역사 그리고 복음주의
쉐퍼는 하나님께서 복음주의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위하시는지의 하나의 예로 구원 사역을 보았다.
여기에서 하나님 배후의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실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공간과 시간의 역사 안에서 인과응보는 실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우리는 두 부류로 알고 있다- 천사와 사람) 이성적인 도덕적 창조물은 선택에 의한 역사에 영향을 준다. 20세기 관점에서는, 사람은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요소들과 그들 자신의 영역(level)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람은 나무를 흔드는 원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뮬론적인 인과응보는 역사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도덕과 이성적인 창조물은 선택에 의한 역사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경이로움은 하나님이 우주를 의미르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점이며, 그분이 창조한 것들은 의미르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하시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행위하신다. 하나님께 역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 위에서 멈춘 것처럼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곳곳에서 거기의 존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행위하신다: 즉, 하나님은 역사 안으로 들어가 실제 행위하신다.
쉐퍼는 선정(election), 복음주의 그리고 영생과 관련된 이러한 역사적 원칙을 보았다.
영원한 미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싼 역사의 최종 고지점은 중심에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종말론에서 그는 천년 왕국의 전 시대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자로서 그리스도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대치시키는, 대기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며 그리고 나서 그와 함께 올 것이다. 죽었던 그리스도인의 몸들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눈의 반짝거림과 같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백한 오심과 그분의 성스러움의 영광 전에 “적그리스도”라 불리는 세계를 파괴하는 것 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삶을 통제할 것이며 신으로써 찬양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명백히 그리고 영광스럽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와 사단에 의한 그를 대항한 조직된 세상의 모인 힘을 타도하였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Megiddo 평원 위에 아마겟돈의 전쟁이다. 그리스도는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한다....”
새로운 천국, 새로운 세상 그리고 천국의 도시가 존재할 것이다. 계시록 21-22 장의 천국 도시의 규모를 기술하기 위해 천국의 도시가 건설된 것으로 부터, 이 도시의 설립, 문 그리고 거리가 만들어진 것이 명확하다. 이것은 객관적인 실재이다. 이것은 영원하다.- 영원히, 결쿄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에 의해 통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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