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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2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2
자료출처 http://cafe.daum.net/biblefoodcafe/FqKH/274

 
5. 카이퍼 사상의 문제점

1) 기독교인의 과제설정의 우선순위에 대한 오해

카이퍼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바로 그 과제라고 한다. 그것을 “문화대사명”(the Cultural Mandate)이라고 한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과제를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어서,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해 버렸던 원래의 그 관계로 회복되어진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1:28의 이 “문화대사명”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실제 목적을 요약하고 있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들의 구원”(the salvation of sinners)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대구속”(the redemption of the cosmos)에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궁극적 그 목적을 향한 일종의 수단(means)이 된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원래의 그 문화적 대사명을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한국의 이미 신칼빈주의화되어져 있는 “칼빈주의자들”, “개혁주의신앙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별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화대사명”은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다보니, “선교적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 마28:19-20)과 비교해 볼 때, 이 문화대사명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SFC의 강령의 용어로 치자면, “세계와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라는 구호에서, “세계와 국가와 학원”이 “복음화”라는 것보다 더 무게중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복음화”의 개념이 바뀌지게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두 개의 요소는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SFC의 신학이다. 두 요소를 모두 강조하고, 놓쳐서는 안될 요소이다. 문제는, 지금 현하의 SFC가 어떠한가함이다. 현재 국내에서 개진되고 있는 논의를 지켜보건대, 이 두 요소의 긴장을 적절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툼의 골이 깊어지는 감이 있다. 진지하게 SFC의 본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필자의 소망은, SFC가 “복음화”의 본질, 곧 “복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희석되지 않으면서, “세계와 국가와 학원”의 문제에 대해서 광범위한 관심을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세계, 국가, 학원”만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관심이 그 활동을 통해서 개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일차적이어야 한다.
 
곁길로 새었다. 카이퍼로 되돌아 가자. 카이퍼는 이 두 요소에 있어서, 균형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그리스도는 그래서 구속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중보자이시다. 잃어진 바 된 죄인들만 아니라, 잃어진 바 된 세계와 우주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어디에 중점이 있는 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조점의 전이는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강화되어진다. 심지어는 이러한 문화대사명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절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 대사명이 완수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지나친 감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경적으로 적절한 강조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문화적 대사명을 성취해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그 진보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우리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우리의 활동과 관련된 점을 지적하자면, 이 문화적 대사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교(전도)적 사명에 있다는 것이 신약성경이다.  마태복음24:14을 보라.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님께서는 문화적 대사명을 완수해야만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창세기1:28절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아니다. 큰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여서, 마태복음28:19-20을 대치시켜버릴 정도가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신학적 강조점이 그런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논지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인류에게 사명을 주셨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소위 ‘문화대사명’이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졌는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문화대사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율법주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은혜와 은혜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명이 주어졌던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고, 이젠 이 사명을 실행할 수 없는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는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사명을 성취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있다. 문제는, 우리의 사명, 우리의 문화적 대사명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그 능력과 그 동기에 의해서 실행되어야 하고,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에 다시 주목하기 바란다. 문화대사명을 바로 강조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이 사명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우리들이 그런 구원의 감격과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실행하게 된다는 것에는 조그만 차이인 듯 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된다. 문화대사명에 대한 강조가 자칫 신율법주의적 강조가 되기 쉬운데, 이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앞당겨진다느니 하는 식의 주장은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행하심보다 더 앞서 행하기 쉬운 경향이 있음을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대사명”이란 개념이나 용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조심해서, 경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원형”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지 않고 이것을 주장해야 한다. 사실, 영국의 경우를 치자면, 이 문화적 대사명에 대한 강조는 존스토트의 신학과 연관이 되고,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그 사실들을 유념하기 바란다. 어느 쪽의 신학을 취할 것인가? 두 분 모두에게서 배워야 한다. 무엇을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하겠는가? 로이드 존스목사의 “중생과 회심”의 청교도신학이 우선 강조되고, 그런 강조에 기초해서, 존 스토트목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과제를 균형있게 강조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요소를 균형있게 강조할 수 있는 신학이 현하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개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생과 회심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과연 중생에 대해서, 회심에 대해서 알아야 할 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과연 한국교회는 이 “중생”의 신학을 지금까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이제는 이 문제를 고리타분하게 여길 정도까지 되었는가?  그래서 이젠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책임”에 대해서 강조해야 할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인됨에 대해서 확실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윤리와 그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율법주의”가 되기 쉽다는 것은 교회사의 교훈이다.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문화,예술, 정치, 경제 등)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에 기초해야 한다. 이것에 강조하지 않고, 곧 “복음”과 “복음화”에 대한 충분한 강조없이 “문화대사명”에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케하시는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잊어버리게 할 경향이 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이 상실될 위기,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를 잃어버릴 위기가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이다.
 

(카이퍼의 창1:28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성경해석학적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도 언급해 둔다. 기회가 되면 이 점에 대해서만 써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2) 문화에 대한 낙관적 견해 및 문화구속의 가능성에 대한 착각
위에서 지적한 카이퍼신학의 문제점은 그의 일반은총론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져 있다. 곧 그의 일반은총론은 세속문화활동에 그리스챤들이 활동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칭의나 중생의 개념에 있어서의 외현화(externalization)를 낳게 되는데, 이 항목에서는 일반은총론에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카이퍼 이전에는 일반은총이라는 것을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동시에 햇빛을 비춰주시는 그런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일컬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원하기도 하였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별다른 문제를 지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퍼에게 있어서의 일반은총이란 주로 우주와 문화의 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일반은총의 개념은 그의 예정론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 두 가지 길을 통해서 성취되어진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신학체계가 형성되었다.  곧, 한편으로는, 택함받은 자들이, 특별은총을 통해서, 구속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일반은총을 통하여서 우주가 그 모든 문화의 가능성을 담지한 채로 구속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결국 문화와 세상에 대한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카이퍼는 천재였었고, 은혜를 많이 입은 자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균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죄의 이 우주와 인간에게 미친 엄청난 결과에 대한 성경적 시각을 잃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반정립의 사고방식이 철저해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그 추종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의 단초이다. 이런 일반은총론을 취한 많은 추종자들에게서는, 이 세상과 그리스도인 간에 있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너무 엄격하다는 식의 방향으로 발전(?)되어갔던 것이다. 소위 개혁주의자라고 하면서도 복음주의 신학을 선호하고, 목회에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구분하지 않고, 또한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들도 다 이런 식으로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주의를 표상하지만, 실상 개혁주의 신학으로 목회하는 자들이 별로 없게 되어 버린 것이 바로 현대 개혁주의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필자의 요지는, 신칼빈주의가 바로 세속화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있어서 이 일반은총론이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칭의라는 개념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칭의가 “체험적으로”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  칭의가 단지,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이해되는데 그치고 일종의 신조상의 고백으로 이해되고 마는 불행이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의 교리가, 불타는 교리가,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체험에 대한 지나친 경계가 아예 체험을 무시하는 신학체제로 변형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신칼빈주의의 경향을 W. Aalders같은 학자는 “The Great Derailment”(엄청난 탈선)라고 평가하였다. 은혜의 교리가 외현화(externalization)되어 버렸다고 탄식했던 것이다. 카이퍼의 이 세상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열심이, 영적 가치를 세속화시켜버리는 과정을 가속화시키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교회사를 통해서 흔하게 있었던 일이 아니던가! 세상과의 계속되는 접촉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세상의 영에 노출되면서, 점점 더 개혁주의 신앙은 외현화되어지고, 공허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바로 카이퍼의 생애에서도 지적되었던 문제였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카이퍼의 신학에 동조해서 시작된 교회(the Gereformeerde Kerken in Netherland)가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에도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회에 대해서 대항해서 31조파(K.Schilder의 1942년<?>의 분리운동으로 시작)라고 불리워지는 교회가 나중에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맺게 되고, 이 고신교단에서 SFC운동이 태동되었다는 것은 이 SFC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일종의 좌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화란교회 내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운동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약술하기로 하겠다).
 

신개혁주의의 철학화 경향에 대해서는 4)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3) 교회의 유기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제도적 측면에 대한 강조의 약화
신칼빈주의의 철학화와 체험무시경향을 다루기 전에, 먼저, 신칼빈주의가 그 당시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카이퍼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행하던 철학적 개념이 바로 “유기체”라는 개념이다. 독일 관념론적 낭만주의 철학의 중심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유기체”란 말은, 생물학적 용어로서 자기 법칙적 발전과 내재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 바로 이 개념을 카이퍼(와 바빙크)가 차용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그의 제도적 교회와 유기체적 교회의 구분이다. 이런 용어의 차용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철학의 개념과 용어를 빌려서 성경적 개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교회사에서 시도되어 왔었다. 문제는 성경과 복음이 왜곡될 정도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교회론에서 있어서도 이런 왜곡의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다.
 

카이퍼에 의하면,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로, 교회가 구분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세가지 직분(목사, 장로, 집사)이 주어져서 가르치고 성례를 베풀며 권징을 행하는 일을 한다. 신자들의 몸인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사회적 활동에 연루되는데, 그래서 문화적 대사명을 실행하게 된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분명해 진다.

“The church as institute is not all of the church, nor the real or essential church, not the church itself, but an institute established through the church and for the church in order that the Word can be effective in its midst.”

제도로서의 교회가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제도로서의 교회는 단지 유기체로서의 교회인 성도들을 무장시켜서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속시켜가도록 사회적 활동을 활발하게 개진해 감으로 문화적 사명을 성취시켜 가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다.
 

카이퍼 이전의 개혁주의 신앙인들 속에서는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는 바로 죄인의 구원에 있었다. 이제 카이퍼의 신학에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이 이미 중생되어진 채로 이 세상에 들어온다. 태어날 때 이미 중생되어져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아가 중생되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베풀게 된다(이런 중생관과 회심관은 아래의 5)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결국 교회의 주된 직무는, 이렇게 이미 중생한 사람들을 양육해서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서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가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그의 교회관에 근거하면, 불신자의 상태에서 신자로의 변화에 이르게 되는 회개나, 믿음, 새로운 출생, 칭의, 성화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카이퍼는 이런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와 문화를 구속하기 위해서 활동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기체라는 독일관념적 낭만주의 철학의 개념이 카이퍼의 신학을 통해서 교회 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기체 개념은, 그 당시의 정통주의교회의 기계론적 초자연주의나 19세기의 물질주의나 진화론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인과론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일종의 유기체적 원리로서 이해하게 되는 길로 인도하게 된다. 결국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세속화된 이해나 무관심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4) 언약에 대한 철학적 개념화
위에서는 “유기체”라는 개념의 차용에 대해서 살폈거니와 이젠 “언약”의 개념 자체가 카이퍼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 마디로, 카이퍼에 이르러서, “언약”의 개념이 형이상학적으로 변화된다. 곧 그 이전에는 “언약”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어떤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였었다. 그런데, 카이퍼와 그 후예들은 이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확장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세상, 예를 들면 국가) 사이의 모든 관계들에 대하여서도 적용시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언약”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유기체”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곧, 세계와 신과의 유기체적 관계를 설정하는 독일관념주의 철학적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면, 이런 유기체적 관계를 성경의 “언약”의 개념 속에 잡아넣게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되는 셈이다(신칼빈주의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기체적 관념론은, 범신론적 경향을 갖고, 결국, 슐라이에르마허의 자유주의신학과도 연결되는 것에 유의해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의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만, 언제나, 그 철학의 단점과 문제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외에는 우리의 삶과 신앙에 기준과 근거가 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없다. 절대 없다.
 

도대체 이런 유기체적 언약의 개념을 끌어들인 동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과 사상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 한 켠으로 치우칠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게 된다. 정당한 염려이다. “하이퍼-칼빈이즘”(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간의 행함이 구원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그 구원에 이르게 되는 방편의 사용조차도 금지하는 경향을 가진 사고방식)의 위험을 숙지하게 되면, 이런 절대주권의 지나친 강조로부터 오게 되는 위험이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시도된다. 그래서 언약의 개념을 끌어오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언약의 개념이 상호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런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언약의 개념 자체에 어떤 변경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변경된 개념으로서의 신칼빈주의의 유기체적 언약개념을 바로 이런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언약의 개념이 그렇게 상호대립된 것일까?
 

이 부분의 설명이 무척 어렵게 여겨질 지 모르겠다. 애당초 약속처럼, 대략적으로 스케치를 한 뒤에 필요한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시도하도록 하겠다. 우선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대한 우려, 노파심…..바로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할 중요한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런 노파심 때문에, 기존의 “언약”의 개념에 변경을 가한 “유기체적 언약”의 개념은, 결국,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관계를 파악하려고 하는 일종의 “Hyper-Covenantism”을 낳게 하고, 애당초 견제하려고 하였던 “Hyper-Calvinism”의 오류에 빠져들어가게 되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우리를 이 아이러니에서 건져주실 자가 누구인가? (감사하리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실 지니!) 그래서 헤르만 도예베르트 같은 “신칼빈주의”철학자는 벌코프의 신학이나 반틸의 변증학, 나아가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등을 홀대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벌코프, 반틸의 신학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도 참 할 말이 많은 영역이지만, 이렇게 언급만 해두기로 하자).
 

도대체 이런 언약의 개념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인가? 우선, 이렇게 언약의 개념이 확장이 되면, 언약의 최우선적인 의미가 “죄인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문화변혁”에 있게 된다. 신칼빈주의에서 창세기 1:28의 소위 “문화대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죄인의 구원”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 않은 채로 “세상의 문화변혁”에 우선적인 관심을 둠으로 해서, “죄인의 구원”, 곧 회심과 중생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그 신학적 논리를 상실해 버리고, 그런 것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고(이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신학에 대한 혐오감의 실상이고,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현주소가 아닐까?), 결국 나아가서, 인본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노정하게 되고, 세속주의에 물들어가게 되는 것이 일종의 사회학적 관찰이다. 예술과 문화행위가 또 다른 우상적 행위로 변질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현금, 포스터모더니즘으로 달려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벌써 예술과 문화가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화활동을 우상화되지 않으면서 크리스챤으로서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결론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주 관심사이고, 카이퍼신학의 비판동기이기도 하다. 비판의 과정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의 주관심사항인 5), 6)항으로 넘어가기 전에, 신칼빈주의의 언약개념의 문제점에 대해서 한가지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신칼빈주의에서는 언약의 개념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서의 언약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얼마간 변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게 된 언약이라는 것이, 신칼빈주의에서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된 인간의 타락하기 이전 상태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카이퍼 이전의 칼빈주의에서는 아담이 하나님께로 받은 행위언약 이전에도, 일종의 도덕률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강조했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1절에 잘 나타나 있다.
 

“The distance between God and the creature is so great, that although reasonable creatures do owe obedience unto him as their Creator, yet they could never have any fruition of him as their blessedness and reward, but 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 which he hath been pleased to express by way of covenant.”

하나님께서 양보해 주셔서(“some voluntary condescension”이란 글귀 참고), 언약, 곧 행위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행위언약을 맺기 이전에도 아담은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마땅히 복종해야 할(“owe obedience”라는 글귀 주목)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미세한 차이처럼 보인다. 이런 차이에 주목해야, 칼빈주의-신칼빈주의논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현하 개혁주의가 앓고 있는 몸살을 치료할 수 있다. 곧, 신칼빈주의는, 이런 미세한 차이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과 하나님 간에 맺은,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the law as covenant of works)과, 그 이전에도 있었던 인간의 마땅한 본분으로서의 “생의 법칙이 되는 율법”(the law as rule of life)을 혼동함으로 인해서, 결국 표현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의 씨를 뿌려놓게 되었던 셈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이런 비판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위험의 가능성이 있는 hyper-Calvinism과 연결되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언급해 두고 싶다. 문화활동과 사회에서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실상은, 이런 반율법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지 모르지만, 유념해 두어야 할 대목이다. 문화활동과 사회참여가 실상, 곧 복음의 원형에 근거하지 않고,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복음의 이해와 관찰에 근거한 인본주의적 운동이 될 가능성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5) 잘못된 중생개념과 유아세례관
카이퍼 신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그의 중생개념이다. 이 중생개념에서 파생된 것이 그의 유아세례관이다. 필자는 장로교 목사로서 칼빈의 이해를 따라서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사람이되, 결코 카이퍼의 유아세례관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지금까지의 신칼빈주의의 언약개념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감지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아담과의 맺어진 언약이 모든 인간과 더불어 맺어진 언약이었고, 이 언약은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출생하게 되는 바로 유아 때부터 맺어지게 된다는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카이퍼의 생각이다. 신자의 자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중생”이 되어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 언약관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언약관계를 거부하기까지는, 이 신자의 자녀는 “구원에 이르는 은혜”(saving grace)를 담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presume). 그래서, 이런 카이퍼의 중생관을 “간주된 중생”(presumptive regeneration)론이라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이 글을 읽어가기를 요청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게 되면, 필자가 목사된 지 6년 뒤에야  ‘참된 중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느 정도 조금이나마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의 선친은 목사였었고, 또한 필자는 유아세례를 받았었다. 그럼에도 참된 중생을 알지 못하였었다. 카이퍼가 “중생”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이후의 “회심”에 대해서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런 주장은, 중생과 회심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회상황에서, 실은,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임에도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Non-Christian)을 양산해 낼 가능성이 바로 여기 카이퍼의 신학체계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로, 카이퍼의 신학에 물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이퍼”라는 이름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가, “카이퍼”라는 이름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과 관계없이, 어쨋튼, 목사가 된 지 6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그리스도인”이었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카이퍼”의 신학체제 속에 담지되어 있는 아주 위험한 요소이다. SFC가 카이퍼 신학의 이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쩜, 허공을 치는 운동이 되고 말 것임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다. 그러니, 눈을 부릅뜨고 필자의 글을 읽길 요청하는 것이다. 대안적 세계관으로서의 개혁주의, 사회변혁의 철학적, 신학적 대안으로서의 개혁주의에 감격하고 흥분하며 주창한다고 할 지라도(필자도 그러했었다), 바로 이 중생에 대한 신학이 바로 정초되지 않으면, 그 어떤 운동도, 그 어떤 신학도 주의 나라의 일에 물거품일 뿐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이것을 바로 보게 하옵소서! (필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현재, 이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텍스트로서의 자아”(Self As Text)라는 글을 집필하고 있는데, 이번 여름이면 탈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터모더니즘으로의 변화과정에서 형성된 회심개념의 변화과정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연구”라는 글을 심도있게 집필하게 된다. 관심이 있으신 분의 기도를 부탁한다).
 

카이퍼의 “간주된 중생”론은, 얼핏 보면, 칼빈의 신학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카이퍼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니, 그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은, 논문감이다. 하지만 이 글은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간략히 기술하기로 한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칼빈의 글, Gomarus, Maccovius, 특히 Voetius 등의 글은 대부분 재침례파를 반대하기 위해서, 유아의 중생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논쟁의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한다. 재침례파는 유아세례를 반대한다. 그 반대하는 것을 반대하다 보니, 어떤 강조점이 극단으로 가기가 쉬워진다. 곧 재침례파의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어떤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중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그런 주장을, 모든 (신자의) 유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중생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게 되면, 일종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신자의 유아라 하더라도 중생하지 않는 자로 여긴다. 언약을 근거로 해서 유아세례를 베푼다 하더라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이런 입장에도 문제가 있고, 긴장이 느껴진다. 하지만, 신자의 자녀라 하더라도, 유아세례를 받은 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지정의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참된 믿음과 회개를 통한 중생의 표지를 보여주기까지는, 중생하지 않은 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카이퍼와 동시대에 살았던 헤르만 바빙크의 견해이고,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핫지나, 아키발더 알렉산더의 입장이다.
 

카이퍼의 견해에 따르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게 되기 전에도 중생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는 회심 이전의 사울을 “중생한 신성모독자”(a regenerated blasphemer)라고 불렀다고 알려진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중생”의 개념이 얼마나 천박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천박한 “중생”개념과 거의 유사해 진다. 은사주의자들의 “중생”개념과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중생”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에, 중생 이후의 “회심”을 강조하는 이상야릇한 신학체계를 우리가 만나게 된다. “중생” 이후에 “제 2의 축복”으로서의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현대은사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그 논리의 맥이 일치하는 것에 주목하라. 왜 개혁주의 운동의 한 본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출신의 상당수의 목사들이 현대의 은사주의운동에 그렇게 거부감이 없이 몰입되고 있는가? 왜 개혁주의자들이 개혁주의 운동과 신학을 부끄러워하는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보는 것은, 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이 신칼빈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것을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더욱 구체적으로 카이퍼의 논리를 비판해 보자. 카이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신자의 자녀로서 유아 때 죽은 자들은 중생된 자로 간주된다는 것이 그 빌미이다. 이 고백을 근거로 모든 신자의 자녀들은 중생된 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논리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첫째, 신자의 어떤 자녀들(일찍 죽은 자녀들)이 중생된 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신자의 모든 자녀들이 중생된 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논리의 비약에 주목하라. 둘째, 어떤 자녀들의 중생의 가능성(possibility)에 근거해서 그 어떤 자녀들의 중생의 가망성(probability), 나아가서 중생의 간주성(presumption)으로 논리가 비약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신자의 자녀들 중 유아 때 죽은 자를 중생된 자로 여기는 경우를 인정한다고 해서, 신자들의 모든 유아들을 중생된 자로 보지는 않았었다. 그들이 여전히 중생되어야 할 자들로 보았다. 그런데 왜 유아세례를 베풀었는가? 그것은 언약의 표로서 행하였다. 곧, 구약의 할례받은 것이 그 육체의 할례로 인하여 언약의 외적 표로 삼았던 것처럼(하지만,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언약이었다), 유아세례도 앞으로 있게 될 마음의 할례에 대한 일종의 외적 표로서 행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할례에까지 이르도록 키워갈 것에 대한 부모의 서원이요, 소망이요, 결심이 담지된 행위가 바로 유아세례인 것이다. 곧, 자신의 자녀들이 참으로 중생하여서, 하나님과 더불어 자녀들 스스로 마음의 할례와 일치되는 내적 언약을 맺을 수 있도록, 그 내적 언약을 가르키는 일종의 사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마음의 할례에 이르기까지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책임으로 여겼다. 청교도들에게 가정이 그렇게도 소중한 역할을 했던 것을 바로 이런 맥락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자녀가 참된 중생을 통한 구원에 이르지 않고 어떤 다른 일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강조로부터 이미 자녀들이 중생한 자로 여길 수 있는 것으로서의 유아세례로 변화된 것은, 변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변질이다. 칼빈주의를 위협하는 아주 위험한 변질인 셈이다. 바로 신칼빈주의에게 이런 위험의 요소가 남아있음을 강조한다. 필자의 젊은 시절이 바로 이런 신칼빈주의에 희생되었던 삶이었음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통곡했는 지 모른다. 이런 통곡으로 가슴을 치는 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카이퍼의 이런 중생개념, 유아세례 개념에는 더욱 위험한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 곧,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the secret counsel of God)을 신학과 삶의 기본 토대로 삼았다는 것이다. 유아나  태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전능하신 절대주권의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그런 영역에 속한 일에 인간의 부족한 지혜의 칼을 들이대면서 해부하고, 그것으로 신학적 토대를 쌓아가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헤아릴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이다. 이미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뜻에 자족하지 않으려는 인간철학의 소산이기도 하다. 바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신자의 모든 자녀들 조차도,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로 부르셔서 중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 자녀양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모의 의무와 책임을 면제시켜주는 듯한 신학이 바로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이다.
 
6) 잘못된 회심관
카이퍼 신학의 중생관의 오류를 제대로 이해하면, 그의 회심관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간파된다. 무엇보다도 큰 잘못은,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중생과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곧 그의 신학체계에 의하면,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중생했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구원의 서정이라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중생, 믿음, 회심, 회개 등의  순위에 대한 논의를 이해해야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겠다. 사실, 이것도 논문감이다. 필자의 이 관계들에 대한 이해는, 필자의 회심의 과정을 기술해 놓은 다른 글을 언급함으로 간소화시키고 싶다. 관심이 있으면, http://www.yangmoory.org 의 “칼럼”란에 올려져 있는 <*목사의 회심이야기>란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것에 관한 책을 번역해서 곧 국내에서 출간될 예정임을 귀띰해 놓는다. 간략히 약술하면,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초기중생(수정, conception)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각성과 인정, 참된 회개와 믿음, 그리고는 거듭남(중생)과 칭의, 그 이후의 성화의 과정을 통틀어서 회심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회개는 회심의 과정 중에 있는 결정적인 변화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회심이란,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회개를 통한 기질과 성품의 변화를 동반하는 평생토록 계속되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회개와 회심을 구분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이런 회심관은, 종교개혁 이후로부터 17-19세기까지 강조되어 왔던 “기질과 성품으로 변화로서의 회심”과 일치하고, “새로운 기질”, “새성품”을 입게 되는 변화의 동반을 강조하는 회심관이며,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을 강조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하는 회심관이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만이 아니고,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선언하는 회심관이며, “나의 정과 욕심을 그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음”을 선언하는 회심관이다.
 

이런 회심을 카이퍼가 강조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분명하게 강조해 왔다. 특별히 그의 책,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문제가 무엇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중생과 회심을 분리시켜 버림으로 인해서, 이 회심에 대한 강조가 왜곡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중생이란, 거듭남을 말하고, 그 거듭남을 통해서 새로운 기질과 성품을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이런 중생이 유아때부터 이미 일어나 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기 때문에, 비록 회심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조의 위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게 들린다. 자칫하면,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가 혼동되어 버린다. 곧, 회심을 생각할 때,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혼동이 바로 현대의 신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 빈번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신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회심과 회개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구분할 수 있는 신학적 지평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혼동은,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 그리고 그 이후의 복음주의 운동의 득세와도 연결되어서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을 본다. 현대교회의 복음주의운동의 흐름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이 득세하게 된 것이 바로 신칼빈주의 때문이라고 필자가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이 아니고, 그런 현상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그 원인에 대한 대강의 분석은, 필자의 또 다른 글,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과거와 현재, 영국한인교회의 좌표”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 부분에서 지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복음병원부도사태”(이것은 그 신학이 부도상태에 이른 한 증상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의 치유는 바로 한국교회 초창기에 있었던 회개운동의 올바른 신학화, 곧 역사적 칼빈주의의 회심과 중생이론을 한국적 상황과 관련해서 올바로 정립하고, 그것을, “민족의 체질을 변혁시키는 복음”으로서, 한국사회와 교회에 대안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데서부터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이제 이 회개와 회심에 대한 왜곡된 실상에 관련해서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가자. 이 부분에 있어서의 신칼빈주의의 오해는 좀 더 심각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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