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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1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1
자료출처 http://cafe.daum.net/biblefoodcafe/FqKH/274

개혁주의가 몸살을 앓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주창하는 교단과 그룹에서 개혁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의가 일고 있다. 건전한 논의이다. 이 건전한 논의가 건전하게 유지되고, 또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데 일조가 될까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논의의 상대방을 정죄하기 싶고, 그 마땅히 삼아야 할 대적자, 사탄에게 훼방거리만 더해 줄 가능성이 있겠기 때문이다.
 

특별히 최근 SFC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SFC개혁의 논의와 관련해서 SFC가 지향하고 있는 개혁주의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참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개혁주의권”내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전체의 문제이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 신앙과 행함의 관계와도 깊히 연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칼빈주의-신칼빈주의논쟁과도 연결된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소위 칼빈주의 진영과 신칼빈주의 진영간의 논쟁을 중심으로 개혁주의의 몸살의 현황을 진단하고, 그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정리, 제시해 보려고 하는 글이다. 학문적인 깊이에 대한 관심보다도, 이런 글에 대한 한국교회내에서의 관심과 필요를 느끼고 급한 마음으로 스케치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질문해 온 후배 손재익형제에게 이 글을 바친다. 후배를 사랑하는 선배의 마음을 항상 간직하길 바란다.
 
 
 
 

1. 개혁주의와 칼빈주의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교단이나 그룹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개혁주의가 아님을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금방 간파할 수 있다. 한국교회로 예를 든다면, 한신대에서도 자신을 “개혁주의자”들이라고 칭한다. 스위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바르트의 개혁주의 신학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총신, 합신, 고신 등의 교단(‘교단’이란 말 대신에 ‘총회’라는 말이 더 올바른 뜻 하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교단’이란 말을 쓴다) 에서도 “개혁주의”를 주창한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개핵’이란 말과 더불어서 약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띄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개혁주의’라는 단어가 어떤 식으로 ‘진화’되어갈 지 모를 일이다.
 

실은, 이 ‘개혁주의’라는 말이나 개념이 ‘칼빈주의’라는 말과 연관된다는 것이 통례이다. 원래 ‘칼빈주의’라는 말은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선호되는 말이 아니었다. 칼빈 자신도 자신의 신학체계를 ‘칼빈주의’로 불리워지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어느 ‘주의’에 사람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대개 ‘이단’과 연결되는 경향들이 많기 때문에, 소위 ‘칼빈주의자’로 불리워지는 자들도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불리워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는 그러했었다. 단지 ‘개혁주의 신앙인’(the Reformed Believer) 등으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앙인들이 ‘칼빈주의자’들로 불리워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된 계기가 생겼다. 계기라기 보다는,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활동 이후로, “칼빈주의”(자)라는 말에 대해서 오히려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뉘앙스를 띄게 되었다. 이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이 글을 다 읽게 된 독자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이런 “칼빈주의”라는 어휘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아브라함 카이퍼 그 이전에 사용되던 “칼빈주의”와 카이퍼와 그 이후의 “칼빈주의”에는 개념상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이 그러했다. 그래서, 그 이전의 칼빈주의와 대별해서 카이퍼의 신학체계에 의한 칼빈주의를 ‘신칼빈주의’로 명명해서 구분하기도 한다(원래는 카이퍼의 신학사상에 반대하던 자들이 카이퍼 신학을 명명하는데 사용했는데, 카이퍼 자신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흔쾌히 이 용어를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이 글의 논지의 핵심은 바로, 이전의 칼빈주의와 카이퍼 이후의 신칼빈주의간에 개혁주의 신앙노선과 관련된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 점에 제한해서 이 글을 쓰는 것에 주지하길 바란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2.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활동
 

카이퍼는 1837년 홀란드(네덜란드) 남부의 Maasslui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J.F. Kuyper. Dutch Reformed Church에 속했으며, 중도노선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무지무지하게 똑똑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알파벳을 배우고 나서부터 책읽기를 엄청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책 좀 읽으라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12살 때 Leiden의 짐나지움에 입학해서 6년 동안 공부하고 우등(with distinction)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 이후 Leiden 대학에서 7년 간 수학하고 1862년 졸업하게 되는데, 최우수성적으로 신학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주지할 것은, 이 학교생활을 통해서 이전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신앙적 견해를 취하게 되는데, 그 이전의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에서 자유주의 신학적 견해를 취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는 그 당시 현대주의(modernism)의 대표적인 기수 중의 한 명이었던 Scholten박사가 배경이 되었다. 이 일을 되돌아 본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카이퍼의 생애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은혜가 없었더라고 하면, Sholten박사보다도 더 좌경화 되어서, 심지어는 배도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역사적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단지,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단편 하나를 언급한다. 카이퍼는 1862년 화란개혁(국가)교회의 목사후보생으로 신청한다. 그 당시 후보신청자들이 너무 많아서, 일년 뒤에야, 목사가 되는데, 첫부임지가 바로 Gelderland의 동부지역에 있는, Beesd란 조그만 교회. 그런데, 이 교회의 교우들 중에 별로 카이퍼의 설교와 목회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Pietje Baltus라는 여성도는 그의 설교에서 직감적으로 카이퍼목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카이퍼목사가 자기집에 방문했을 때에 그 점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생하지 않고는, 목사라고 하더라도 영멸에 처하여질 것이라고 하는 경고를 했던 것은 어쩜 당연한 일(한국교회에서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선 이 여성도의 증언을 통해서, 한 시대의 영웅이 될 카이퍼를 부르시게 된다. 이 여성도와의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카이퍼의 생애에 전적인 변화가 오게 된다. 물론 Beesd에서 만난 다른 성도들과의 접촉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심각한 영적 고뇌를 거친 뒤에 주님의 은혜로 그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상에서 이뤄진 그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모든 지식에 뛰어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새롭게 중생하게 된 목사 카이퍼는 아주 빠른 시간내에 정통신학의 수호자로 부상되고 더욱 영향력있는 교회의 부름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다. Utrecht로 그 다음엔 Amsterdam으로 임지를 옮기게 된 것. 이곳에서 Doleantie(영어로 Grievance라는 뜻인데, 그 당시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슬픔’을 표명하고 있는 듯함)의 지도자가 되어서, 기어이는 화란개혁(국가)교회로부터의 분리에 이르게 되는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 분리운동은 1886년에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이전 1834년에 있었던 교회분리운동과 유사하면서도 차별이 된다(이런 화란교회의 역사에 대한 것은 별도로 설명할 기회를 갖겠다).
 

카이퍼는 교회개혁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국가문제와 정치영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었다. 주간지였던 De Heraut (The Herald)지의 편집장이 되고, 기독교일간지 De Standaard (The Standard)도 편집을 맡는다. 결국 국회에 진출하게 되고, 반혁명당의 지도자가 된다. 여기서 반혁명당이란 프랑스 혁명의 무신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일종의 기독교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혁명 정신을 무작정 옹호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을 보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 주의해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은 이 혁명정신이 기독교신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개진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역사평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카이퍼는 이런 프랑스혁명의 무신정신에 반대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 혁명정신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어째튼, 20세기가 시작되던 어간, 곧1901년부터 1905년까지 정부의 수상이 되어서 빈민구호정책을 위한 여러가지 법들을 통과시키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데 열중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들.
 

카이퍼는 또한 Free University대학의 설립자. 이 학교는, 성경과 개혁주의 원리에 기초한 고등학문을 주창하는 학교. 이러 저러한 활동들로 카이퍼는 화란의 교회 및 정치사에 있어서 거의 반세기 동안을 지배했던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이 카이퍼의 활동으로 ‘칼빈주의’라는 말과 개념이 화란의 국가적인 차원에서 회자되면서 영향력을 미쳐서, 이 역사를 돌아보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복음과 사회(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칼빈보다 오히려 더 귀감이 되는 인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위대하다, 귀감이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칼빈주의와 그 이전의 칼빈주의가 과연 일치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바로 개혁주의 진영에서의 몸살의 진원이 된다고 보인다.
 
 
 
 
 
 
3.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이해의 핵심: 하나님 절대주권
 

먼저, 카이퍼의 칼빈주의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Historically, the name of Calvinism indicates the channel in which the reformation moved, so far as it was neither Lutheran, nor Anabaptist nor Socinian. In the philosophical sense, we understand by it that system of conception which, under the influence of the master-mind of Calvin, raised itself to dominance in the several spheres of life. And as a political name, Calvinism indicates that political movement which has guaranteed the liberty of nations in constitutional statesmanship; first in Holland, then in England, and since the close of the 18th century in U.S.A.”
 

위의 인용문의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정의가 바로 칼빈주의에 대한 카이퍼의 과학적 정의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카이퍼의 칼빈주의는,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칼빈주의와 비교하면 상당히 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기본적으로 교회적인, 그리고 고백적인 운동이라고 여겼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란, 주로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을 의미했었다. 곧, 은혜의 교리, 칼빈주의 5대교리를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와 현대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이해했었었다.
 

이런 그 당시의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카이퍼는 칼빈주의란 그 이상의 것이라고 보았고, 그의 생애를 통해서, 그 이상의 것을 그 당시의 신자들에게 설득시키려고 하였었다. 그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란, 전포괄적인 세계관이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현실을 제대로 의미있게 이해하는 일종의 체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로,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의 과제란, 칼빈주의 원리를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연관시켜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변혁시키며, 구속해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로 그리스도 그 분에게 모든 피조세계가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어 잘못되었는가? 잘못된 것이 없다. 전혀 없다.
 

잠깐만!
 

정말 없을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글을 읽어야 한다. 그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해 보기로 하자. 먼저, 그의 절대주권사상.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의 핵심은, 우주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sovereignty)사상에 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삼중적으로 인간의 주권 속에 반영되어 있다면서, 카이퍼가 국가에서, 사회속에서, 그리고 교회 속에서 이 인간주권이 행사된다고 하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카이퍼의 신학을 반대하는 자들 뿐만 아니라 바로 카이퍼와 카이퍼사상의 추종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신칼빈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고전적 칼빈주의, 곧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에 있어서 발견되지 않는 “신”칼빈주의의 새로운 주장인 것이다. 이 “새로움”에 대해서, 카이퍼는 주장하기를, 칼빈과 다른 것이 아니고, 칼빈의 사상 속에 이미 씨앗으로 존재하던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카이퍼 자신의 사상 전개에 의해서 발전되고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칼빈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가르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구원의 문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삶의 영역과 연관되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 가정의 역할, 사회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소명, 과학의 역할 등등에 대해서 칼빈이 가르쳤었다. 하지만, 이 글의 논지는, 이 칼빈의 신학과 사상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발전시켜가는 과정 중에, 아주 중요한 영역에서, 신칼빈주의가 그 원래의 칼빈주의와는 다른 이상야릇한 칼빈주의(곧, 신칼빈주의)체계로 변형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상야릇함”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되어지는데, 그것의 시작은 이미 카이퍼 자신의 칼빈주의이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칼빈주의 이해의 “이상야릇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비판하기 전에,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 칼빈주의의 원리를 네덜란드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려고 함으로 인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영향 자체를 부인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런 비판과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을 제안한다.
 
 
 
 
 
 
4. 카이퍼의 반정립(Antithesis)사상과 일반은총론
 

왜 카이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게 되었는가? 그리하여 그가 이해한 칼빈주의의 핵심과 골자를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에 두었는가? 이것을 사실, 카이퍼 당시의 네덜란드사회 속에서 이해되었던 칼빈주의가 주로 내향적이고 경건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것 때문이다. 그 당시의 칼빈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카이퍼가 보기로는,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극복하고, 기독교인들은, 칼빈주의자들은, 고립된 교회내에서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부름을 받아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카이퍼는 느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여기서 간단히 지적해 두고자 하는 근대교회사에서의 역사적 평행이 있다. 네덜란드에서의 이런 카이퍼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제에 대한 강조가 바로 미국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헤롤드 오켕카, 칼 헨리 등의 “신복음주의”운동, 그리고, 로이드 존스 등의 청교도 연구관심과 대조되는, 존 스토트 등으로 대변되는 영국과 유럽에서의 로잔언약운동 등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세계적인 범위에서의 교회사의 변화추세는 현대교회의 배경이 되는 세계문명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지시켜 본다.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터모더니즘으로 변화되어가는 전이과정 속에 있었다).
 

카이퍼의 두 가지 목표, 곧, 세상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제로서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바로 이 일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카이퍼의 반정립사상과 일반은총론이다(아마,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서도,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의 차이를 별로 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한국의 칼빈주의는 이미 신칼빈주의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인내를 부탁해 본다).
 

반정립사상이란, 종교나 철학의 영역에서 상호 반대하는 입장에 선 견해나 이론을 의미한다. 카이퍼에 의하면,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반대입장으로 서로를 반대하는 적의(enmity)가 있다.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있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곧, 하나님에 대한 적의감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두 그룹 사이에는 절대 협동, 협조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카이퍼는 “일반은총”이란 개념으로 이 문제를 극복한다. 이 “일반은총”론은 물론, 칼빈과 개혁주의신앙인들이 이미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개념이다. 하지만,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은 그 이전의 “일반은총”론과는 그 강조점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전에는 일반은총의 “결과”나 “효과”로서의 그 부산물(products)에 대해서 강조했다면,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방편성”(means)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곧 그의 이전에는 일반은총으로 인하여 중생을 받은 사람이 그 중생과 회심의 감격의 동기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학문과 예술을 통한 그 결과로 사회변혁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카이퍼는, 학문과 예술이라는 행위가 사회변혁의 도구나 수단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이다. 아니, 미세한 차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미세한 차이가 큰 차이를 낫게 되는 것이 역사이다. 특별히 카이퍼 이후 몇세대를 거쳐오면서, 이 미세한 강조점의 차이는 이제 커다란 입장의 차이를 빚어지게 하였다.
 

그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살펴보자. 카이퍼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총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특별은총은 사람의 마음을 중생에 이르게 하는 반면, 일반은총은 인간사회 일반에 있어서의 죄의 효과를 극대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속에 잠재되어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개발시킬 수 있게 하고, 그래서, 인류의 타락 이전에 주어졌던 인류의 문화적 사명을 성취하는데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타락했지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서 일반은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서 동역하여 삶의 상태를 개선하고 빈곤?퇴치하며 사회정의를 개선해 갈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일반은총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하며, 감사함으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술과 과학, 문화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이 사회 속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카이퍼는 그 당시의 개혁주의신앙인들을 도전해서 그들의 “경건주의적 이원주의”, 곧주일과 평일을 구분하는 것,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을 폐지해야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자연과 은혜를 분리시키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고 도전하였던 것이다.
 

다시 주지시키거니와 이런 설명을 듣고도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별반 문제점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진정, 경건주의적 이원주의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일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날 가운데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자연과 은혜를 분리시킨 것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혹은 그 이전의 헬레니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원리에서, 영육을 분리시키는 이원주의는 마땅히 배제되어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원주의를 배제해야 한다는 말이 그 두 영역의 “구분”조차도 무시하게 될 정도로 두 영역의 어떤 차이의 정도를 약화시키게 된다면, 그 두 영역간에 혼동이 오게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이 당연한 일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이미 카이퍼의 신학에 제기되던 그 당시부터, 이런 경향을 감지한 사람들이 있어 왔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카이퍼의 신학과 사상이 소개되면서, 이렇게 그에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는 것을 함께 강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카이퍼의 신학과 사상이 견제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당했다고 하겠다. 특별히 시초부터 카이퍼의 이런 신칼빈주의에 대해서 비평해 온 사람들이 카이퍼보다 화란국교회로부터 먼저 이탈했던 사람들(1834년의 The Secession 때) 이다. Lindeboom이나 Ten Hoor같은 사람들은 심지어 카이퍼의 가르침이 아주 중요한 어떤 면에서 성경으로부터, 그리고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하곤 하였다.
 

그 벗어난 부분을 다음 몇 가지로 기술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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