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세계와 존재 신비
숫자와 언어가 아닌 세계의 거대한 실상
숫자와 언어가 아닌 세계의 거대한 실상기자명 충북인뉴스 입력 2012.11.23 00:09 댓글 0러셀의 <러셀 자서전>, 독시아디스 외의 <로지코믹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레이 몽크의600,000,000. 이 ‘6억’이라는 숫자가 뜻하는 것은? 유투브(youtube)에 올라와 있는 싸이의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을 시청한 숫자다. 더원(The One)은 1인데, 요즘 많이 회자되는 가수 이름이면서, 국산담배 이름이기도 하다. 또 맥락에 따라서 ‘유일자(唯一者)’, 오직 하나인 것, 오직 하나인 분, 하나님을 의미한다.물론 1은 ‘1등’이기도 하다. 대학수학능력고사 1등도 있지만 반에서 1등도 있고 마라톤 대회 1등도 있다. 세상에는 숱한 1등, 다양다채의 1등이 있다. 2는? 2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2등, 2인자, 버금가는 것, 음과 양, 선과 악 등의 2항(二項), 쌍으로 되어 있는 것, 너와 나…….그렇다면, ‘47.5 대 44.8’과 ‘47.5 대 45.3’은? 오늘 ‘리얼미터’에서 조사한 ‘양자대결 시 대선후보 지지율’이다. ‘18’은? 앞엣 숫자에 잇대어 이해하면,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말한다. 그런 맥락이 아니라면 18은 무엇을 뜻할까? 누가 인터넷 게시물에 ‘18nomA’이라고 댓글을 달았다면 그건 ‘욕’이다. 언제부턴가 ‘18번’ 하면, 즐겨 부르는 노래나 자신의 전문영역을 뜻한다. 물론 18은 꽃다운 청춘을 뜻하기도 한다. 내 마음의 51%는 무슨 뜻일까. 마음의 열도를 측정하는 계량기가 우리 몸에 장착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숫자로 만든 세상에 살고 있다.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은 없다.이러저러한 모든 맥락을 삭제한 숫자 자체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180×90이 무엇을 계산한 건지 알 수 있을까. 1620이라는 해(解)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사물의 치수를 재고 면적을 구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숫자 는 분명히 구체적인 현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구체적 맥락(context)을 상실된 채 독립적으로 표기되는 순간 ‘의미’, 즉 현실 연관성 역시 잃기 마련이다. 숫자는 일종의 기호(記號, sign)이며, 실재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추상적 기호가 일상에서 늘 반복적으로 이용될 때 어느덧 ‘추상’이 ‘구체’를 대체한다.이른바, 기호와 상징이 실재와 현실을 대체하게 된다. 숫자·그림·언어·지도와 같은 추상물이 일련의 규칙(rule)에 의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 나름의 ‘구조(structure)’를 이루게 된다. 그것은 무형(無形)의 건축물이 되어 우리의 정신 안에 자리를 잡고 우리의 사유과정을 지배하기에 이른다.그 틀 안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관계하고 작용한다. 모양을 갖추지 않은 무형(無形)이 모양을 갖춘 유형(有形) 위에 선다. 형이상(形而上)이 형이하(形而下)를 통제한다. 18~19세기 유럽의 수학자들은 ‘수(數)의 체계’를 세계 최상위의 우주적 질서이자 객관적 ‘실재(real)’로 생각했다.이들은 세상 모든 것의 탄생과 변화와 운동과 소멸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세계의 근본요소’는 ‘수’라고 말했던 피타고라스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논리학자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 1872~ 1970)은 자신의 저서 <수학의 원리>를 집필하던 중에 그 모든 노력을, 즉 당시 수학자들이 ‘무형’의 기본요소로 ‘유형’의 세계를 대체하려고 했던 노력을 모조리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역설(paradox)’을 발견했다.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자신을 포함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만일 포함한다면, 포함하지 않는다. 또 만일 포함하지 않는다면, 포함한다”이다.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러셀의 역설’이다. 러셀은 대다수 수학자들이 ‘기호와 실재를 혼동하는’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기 증명하게끔 했다.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바로 러셀의 제자였다.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이어 ‘언어’의 문제로 더 나아갔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라는 그의 말은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실재 세계가 있다는 뜻으로,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계’를 ‘실재계’로 여기는 오류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삶은 하나”라고 말한다. 또 “나의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도 말했다. 우리 주체는 “세계의 어떤 한계”이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를 궁금하게 여기고 그 수수께끼를 풀고자 전 생애를 투여하여 그 ‘세상의 기본토대’를 발견하고자 했던 모든 이들의 노력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한다.“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그냥 ‘있음’ 자체의 신비로움에 감응하고 ‘삶’을 바르게 영위하는 데 철학의 목표가 있다고 보았다. 삶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숫자와 언어가 아니다.우리는 그저 숫자와 언어가 아닌 세계, 즉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삶의 실상을 가늠하기 위해서 숫자와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스승 러셀의 역설에 의해 유럽 합리주의 정신의 자기모순을 발견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문제의 해결은 삶의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고 말하며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말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라고 자문하였다.실로 세상에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은 유럽 합리주의 정신의 정점과 한계를 동시에 대표하는 경이로운 철학자들이었다.자료출처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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