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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운명을 사랑하라!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었다.”라는 서양 철학의 현대를 여는 이 말은 한명의 병약한 철학자에게서 시작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서양 현대 철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양 현대 철학은 근대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다. 니체는 19세기 중후반에서 1900년까지 생존했다. 본격적인 실존주의를 비롯한 현대 철학은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본격화 되지만 니체를 미래 세대를 위해서 저작들을 남겼다. 1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서 니체는 방향과 가치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 차라투스트라에 대하여

 

 니체 자신이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했던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이름부터 주의를 끄는 이 저서는 상당히 난해한 책이다. 소설이긴 하지만 내용은 차라투스트라의  명언집 같은 느낌이다. 그는 어려 곳을 다니면서 수많은 ‘말씀’을 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놀랍게도 소설의 주인공은 현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이다. 조로아스터는 그의 영어식 표현이다. 니체가 그를 끌어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서양 기독교에서 재창하는 선과 악의 대결구조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이다. 물론 니체를 이를 강하게 반대하지만 그를 주인공으로 사용한 이유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처음으로 생각한 것도 그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이분법에 대해서 가장 많은 고민을 했을 거라는 추측에서이다. 결국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과 가면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에 개한 반발로서 차라투스트라를 예수에 비유한 많은 패러디를 담아놓았다. 또한 이 책은 니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니체의 몸 상태는 가히 최악이었다. 사랑하던 여인 루 살로메와도 멀어지고 만성질환도 더욱 악화된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말하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으로 그 고난을 이겨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하여 

 

 책은 크게 4부로 되어있는데, 1부는 신의 죽음과 위버멘쉬, 2부는 힘에의 의지, 3부에서는 영혼 회귀 사상, 4부에서는 대화 형식이 주를 이루는 패러디가 가미된 편이다. 현대사회는 우리들에게 합당한 기준과 체계가 붕괴되었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도덕과 같은 인간의 기준에 맞춰 살아왔다. 그러나 전쟁과 학살, 인간의 잠재된 본능이 고개를 들면서 사람들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결국 기존의 체계는 회의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니체의 문제의식에 그곳에 서있었다. 그는 1883년에서 1885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저술했고 결국 1889년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자신의 온힘을 부었던 이 책은 미래의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일지도 모른다. 

 

Ⅰ. 제 1부 “신은 죽었다.”

 

 1부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하산하다가 한 성자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성자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신을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고 스스로 불신에 있는 존재이지만 신은 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사랑한다고 선언하면서 “저 성자는 산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군.”이라며 다시 마을로 내려간다. 니체의 그 유명한 말은 여기에서 나온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는 놀라운 비밀들이 숨어있다. 단순히 기독교인들에게 비판받을 이야기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신을 죽인 것은 첫 번째로 놀랍게도 인간이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지만 신은 인간을 너무나 연민하였고 이러한 연민은 인간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일으켰다. 결국 인간 즉, 니체의 표현으로는 ‘더없이 추악한 자’는 끝내 신을 살해하였다. 또한 두 번째 살해자는 교회의 사제들이다. 그들은 신을 너무나 위대한 존재로 생각한 나머지 신을 왜곡하고 예수가 그토록 싫어했던 것들을 오히려 끌어안았다. 결국 그들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할 예수의 가치들을 저 너머 이상과 비현실의 세계로 보내버렸다. 결국 '더 없이 추악한 자'와 사제들은 신을 왜곡하였고 그를 살해했다. 여기에서 니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유럽 사회 전체가 병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차안의 세계를 부정하고 피안의 세계를 동경해왔다. 결국 닿지 못하는 이상에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고 혐오하게 되었고 이것이 유럽 문명이 걸린 병의 정체다. 

 

 Ⅱ. 제 2부 힘에의 의지

 

 2부는 힘에의 의지에 대해 다룬다. 보통 우리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번역해 왔던 것이지만 이것이 더 바른 표현인 것 같다. 먼저 니체가 이야기를 꺼냈던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대해서 알아봐야한다. 서양 사상의 큰 줄기는 생성과 존재에 대한 논쟁이었다. 생성은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다. 결국 사람들은 생성에서 눈을 돌리고 변하지 않는 이성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 있는 이데아와 같은 존재의 세계를 동경해왔다. 하지만 니체는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생성의 세계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한다. 결국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은 인간의 무능력이 만들어 낸 망상이고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숨 쉬는 것이고 의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가만히 존재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체를 발견했을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하였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 그곳에만 의지가 있다.”, “생명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다.”라고 말하며 의지의 존재를 밝힌다. 그래서 힘에의 의지는 인간이 더 강해지기를 원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이다. 존재는 의지를 작동시키며 수많은 의지들이 이 세상에서 대항하고 다투고 있으며 이것은 계속되고 있다. 니체에게 의지는 실체나 허상이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것이고 무엇보다 긍정적이어야 한다. 

 

Ⅲ. 제 3부, 제 4부 영원회귀와 여러 가지 우화

 

 3부는 영원회귀 사상이 주요 내용이다. 영원 회귀란 말 그대로 ‘세계와 그 세계 속의 사물들이 계속 반복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불안을 야기한다. 영원히 반복되고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망과 허무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니체에게 허무주의 또는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붙여준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물체를 그저 사물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 생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수많은 힘에의 의지들이 이 세계에서 끝없는 경쟁하는 것을 니체는 영원 회귀라고 표현했다. 우리 모두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책이 말하는 것처럼 언제나 변화한다. 그래서 언제나 헤라클레이토스 식으로 말하면 ‘생성의 바다’에 놓여있다. 하지만 절대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굉장히 기발한 묘사가 소설에 나온다. 차라투스트라의 눈에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목자가 눈에 띈다. 놀랍게도 그는 거대한 뱀을 입에 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엄청난 공포와 역겨움을 느낀다. 뱀이라는 동물 자체가 영원을 의미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뱀에게서 영원회귀의 허무주의를 느낀다. 여기서 양치기는 허무주의와 영원회귀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목자에게 물어뜯으라고 소리친다. 마침내 목자는 뱀의 머리는 물어서는 뱉어내고 크게 웃는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에게서 인간이 아닌 빛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느낀다. 목자는 마침내 스스로를 극복한 것이다. 4부는 여러 가지 우화가 실려 있다. 

 

 Ⅳ.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삶을 긍정하는 법

 

 책의 각 장의 끝에는 항상 이렇게 적혀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사실 이것은 니체가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처음 사람들에게 말할 때,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신이 죽은 것이 인간에게 축복이라도 되는 것일까. 신은 죽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붙잡아 나가야 한다. 마치 무신론적 실존주의처럼 신이 죽은 그 자리에 인간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다. 니체는 시종일관 긍정적으로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만 말하면 쉽사리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스스로 인정하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 무척 읽으면서도 어렵다. 아주 어려운 연설문 같기도 하고 무슨 종교의 교리책 같기도 하다. 하지만 책은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다. ‘삶을 긍정하라.’라는 메시지는 지친 우리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우리들은 무기력하게 살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자기 비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을 넘어 니체를 자신의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긍정의 메시지를 보낸다. 흔히 니체 철학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초인’이다. 이를 원래 표현으로  위버멘쉬(Uber-mensch)라고 한다. 위버(Uber)는 ‘뛰어넘다’라는 뜻이고 멘쉬(mensch)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초인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마치 엄청난 능력을 사진 사람처럼 여겨진다. 위버멘쉬는 본래 ‘나’라는 인간을 뛰어넘은 새로운 인간상을 의미한다. 니체는 항상 “삶을 긍정하라.”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들에게 그것은 쉽지 않다. 니체는 우리의 추한 모습과 약한 점을 감추거나 연민하려 하지 말고 당당히 인정하라고 말한다. 신은 이러한 모습들을 연민했기 때문에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이는 완전하지 않다. 인간의 ‘웃음’만이 신의 가치를 몰락시키고 신을 진정으로 죽일 수 있다. 그 웃음은 뱀을 물어뜯은 목자의 웃음과도 연관이 있다. 니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항상 나를 낮게 생각하고 비하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의 모습이 어떻고 환경이 어떤지는 지금 불평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오히려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고 이겨나가는 방법을 배웠다. 절대 위버멘쉬는 슈퍼맨도 아니고 어려운 존재도 아니다. 누구나 될 수 있으나 노력은 커야한다. 계속 하는 말이지만 니체가 말한 대로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만이 이를 이룰 수 있다. 결국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생(生)이었더냐.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Amor Fati)”  

https://m.blog.naver.com/inmun_love/10180526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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