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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소고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소고
신재헌

 

<글의 순서> 

I. 서론: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I. 서론: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진화론을 신앙안으로 수용하자는 주장 ―유신론적 진화론― 이 최근 기독인들 중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성경해석학적 고찰을 통하여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정립에 대한 도전을 주고자 한다.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위하여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련된 용어들을 간략히 정의 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는 소진화와 대진화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고, '진화론'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과학 이론이다. '소진화'란 보통 어떤 종(species)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종분화(speciation) 과정을 수반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한다 [1,2]. '종분화'란 어떤 종이 지리적 격리 등과 같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어미종(원래 종)과 상호 교배할 수 없을 만큼 생식적으로 격리된 새로운 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3]. (종분화의 정의는 종의 정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예를 들면 유전적으로는 교배가 가능하지만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절대로 교배하려고 하지 않는 두 생물군을 같은 종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다.) '대진화'란 현재 생물계의 모든 분류군들이 오랜 시간동안 소진화 즉 종분화와 같은 미세한 과정의 축적에 의하여 최초 (무생물의) 형태로부터 유래했음을 의미하는 (가설적) 과정이다 [1,2,4]. 많은 진화론자들은 종분화 자체를 대진화로 여기면서 종분화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대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애석하게도 창조/진화 논쟁의 격렬한 싸움들은 이와 같이 진화에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엄격하게 사용하지 않는데서 대부분 비롯된다 [5].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도 하는데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시공과 물질 그리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셨고 그 이후에는 부여하신 자연법칙 하에서 자연적인 과정으로 우주를 형성시키셨고 생물들을 진화시키셨다는 것이다 [6,7,8]. 온건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최초 생명체의 발생과 인간 영혼의 창조 등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특별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직접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물의 기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많아지는 기준으로 몇 가지 기원론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신론적 진화론 → 이신론적 진화론 → 유신론적 진화론 → 점진적 창조론 → 순간(명령)적 창조론  

여기서, '이신론(理神論)적 진화론'이란 태초에 빅뱅을 시작시킨 원인이 초자연적 존재냐 아니냐 라는 점에서만 무신론적 진화론과 틀리고 나머지는 무신론적 진화론과 같다 [9]. 이러한 이신론적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신적 목적이나 계획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전적으로 비기독교적 견해이다. '점진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매우 긴 지질학적 시간동안 단계적으로 창조하셨는데 각 창조의 사이사이에는 소진화를 사용하셔서 종들을 다양하게 하셨다 라는 것으로 지질학적 발견들을 성경과 조화시키면서도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10,11]. '순간(명령)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행위를 통하여 사실상 거의 즉각적으로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그 생물들이 원래의 종류에서 크게 벗어남 없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라는 것으로 [9], 홍수격변설과 함께 창조과학의 이름으로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창조론이다.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은 창세기 1장에 나와 있는 '종류대로의 창조'를 지지하는데, 이 때의 '종류'는 현재 생물분류학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취급하는 '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genus)'이나 '과(family)'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종류라는 단어를 종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하면서 종분화까지도 부인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좀 더 온건한 창조론자들은 종분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5]. (앞으로 특별한 수식어 없이 그냥 '창조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을 함께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과연 대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과연 모든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발생되어 어떤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현재의 복잡한 형태로까지 되었다는 주장을 사실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본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과연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진화론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우를 범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소진화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종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로부터 어미 종으로부터 딸 종으로 분화하는 종분화 현상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식물의 경우 종분화는 관찰 가능한 과학적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비록 직접 관측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16종의 갈라파고스 핀치새'라든가 '수백 종의 하와이 초파리' 등과 같이 종분화를 지지하는 몇 가지 '상황 증거'들이 있는데, 그 증거들은 ―물론 '종류'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라는 창조론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일단 종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된다 [12]. 신다윈 종합설에 의하면 이러한 종분화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은 '자연선택', '유전적 (돌연)변이', 그리고 '지리적 격리'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종분화 현상을 그대로 대진화로 여기면서 대진화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인) 학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13-17]. 금붕어와 지네의 차이나 낙지와 꿀벌과의 차이와 비교해 볼 때, 하와이 초파리의 종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너무나 미소하다 [17]. 그러한 미소한 형질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기관'을 만들어낸다는 진화론적 설명은 실제적 증거가 아닌 가설과 유비를 근거로 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13]. 비록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소진화의 메커니즘은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매우 다른 형태의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내는 대진화의 메커니즘으로써 역시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이클 덴튼(M. Denton)은 이러한 상황을 '날씨 변화'와 '계절 변화'에 비유하는데, 매일 매일의 날씨 변화를 설명하는 고기압이나 저기압과 같은 현상을 가지고 계절 변화와 같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7]. 

종분화가 대진화의 메커니즘이 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논증은, 종분화 과정이 유전정보가 새로 생성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잃는' 과정이라는 주장에 기초한다 [18]. 새로운 기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유전정보들이 새롭게 생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파충류가 진화해서 조류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던 날개가 생겨야 될 뿐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허파나 심장 같은 여러 기관들도 그 형태가 엄청나게 변화해야 하는데 [19],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새로운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기능적 정보들이 하나 둘 생성되어 기존의 유전정보에 첨가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것을 대체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종분화 과정은 특정 유전정보를 잃음으로써 어미종으로부터 분리되어져 가는 현상이므로 이와같은 대진화적 변화의 근거로 제시되기가 힘들다 [18]. 

최근에 필자는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새들이 점점 진화해서 나중에는 우주를 날라다니는 새들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새가 수 억년 (또는 수 십 억년) 뒤에 우주를 날라다니는 생물로 진화될 수 있을까? 혹자는 허황된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대진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먼 훗날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화론의 가능성에 너무나 심취된 나머지, 진화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식의 어떤 '신앙'적 형태로 진화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줄리안 헉슬리(J. Huxley)는 다윈 100주년 기념식에서 '생명의 진화는 이제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의 근거이다... 우리는 의미론과 정의라는 수렁에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라는 식의 교조적 발언을 했다 [13]. 반면, 그 바로 전 해인 1959년 독일의 동물학자 베른하르 렌쉬(B. Rensch)는 대진화는 소진화 과정을 연장해서 설명할 수 없으며 현재 알려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당시 지도적 생물학자들의 리스트를 제시하였다 [20]. 이러한 의견 차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진화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진화계통수상의 가상적 공통 조상들과 전이 형태의 생물들이 화석 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원시 단세포 생물과 현재의 복잡한 생물들 사이에 있을 법한 수많은 '공통 조상' 또는 '전이 형태'의 화석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오히려 전이적 형태의 부재가 더 일반적인 법칙임을 보여주고 있다 [21, 22]. 거의 모든 주요 무척추동물 문들의 대표들이 어떤 전이 형태 없이 갑자기 등장한 소위 '캄브리아기 폭발'이나, 대부분의 '피자식물' 즉 꽃식물들이 이들이 속하고 있는 군의 분류 형질을 그대로 갖고 특수화 된 채 백악기에 돌연히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출현초부터 고도로 특수화 되어 있고 서로가 고립된 분류군으로서 돌연히 출현하고 있는 '어류군' 등은 아직도 해석이 안되는 골칫거리로 남아 있고 [21, 22], 이 외에도 화석상의 수많은 의문점들이 점진주의적 다윈 진화론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현재 주류 기독인 생물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리처드 라이트(R. T. Wright) 교수는, '화석은 진화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한 역사적 증거이지만 이는 점진적 다윈주의자들이 제안한 계속적 변화이기보다는 불연속적 기록이다. 즉, 전이적 형태들보다는 공백이 더 많은데 이는 대량 멸종이 발생하며, 새롭고 복잡한 것들이 화석 유물에 아주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들은 감지할 만한 변화 없이 수백 만년 동안 존재한다... 즉, 진화론의 경우 문제점은 화석 증거의 부족 ―전이적인 형태의 부재― 에 주로 기인하며..' 라고 말한다 [21]. 

이외에도 대진화의 가설적 추론적 성격을 보여주는 몇 가지 논점들이 더 있지만 그것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본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본 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 몇몇 주도적 신학자, 과학자, 과학철학자 등 여러 분야의 기독인 학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지적설계가설' (intelligent design hypothesis, ID)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ID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발견된 많은 생물학적 지식들이 생물이 진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적 설계에 의하여 탄생한 것임을 증거해준다고 말한다 [23]. 이것은 세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물학적 기작들이 '환원'될 수 없을 정도의 복잡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현상이 자연적으로 탄생했다고 믿는 것 보다는 어떤 설계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래 사장에 쓰여진 어떤 글자를 볼 때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와 바람에 의해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그 글자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듯이, 그리고 과학자들이 외계에서 오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것도 그러한 메시지가 자연적으로 날라온 것이 아니라 어떤 외계의 지성적 존재가 보내 준 것이라는 지극히 정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듯이, 복잡하고 정교한 생명현상을 보면서 지성적 존재에 의한 설계를 추론해 내는 것이 결코 '비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24]. 이러한 논의는 다분히 과학철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차후에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행해질 것이라고 기대된다.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진화론은 과연 기독교 유신론과 배치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유신론적 진화론 논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일 것이다. 만약, 진화라는 단어를 '무목적적이고도 우연한 과정에 의하여 모든 생명체가 탄생한 것' 이라는 식의 의미로만 사용한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 'Yes!'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으로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목적'과 '우연'이라는 철학적 함의들을 진화론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무신론적 진화론자들로부터 공격받는 빌미가 되고 마는데 그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이 우연이라는 과정에 신의 손길을 가정함으로써 진화론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즉, '자연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충분히 진화가 일어나는데 왜 거기다가 신의 의지를 집어넣는냐' 라고 비난하는 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반응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또한, 창조론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왜 가설적인 진화론에 집착하느냐?' 라는 식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을 몰아부친다. 양측으로부터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유신론적 진화론은 도리어 양측으로부터의 공격에 부딪치고 있는 셈이다.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먼저, 과연 진화론은 무신론인가? 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당연히 'No!' 라는 대답을 함으로써 진화론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는 첫 번째 이유로 삼는다. 물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No' 이다. 왜냐하면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진화론은 생물 현상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의 몇몇 부류는 이 질문에 '예' 라고 대답한다 [25]. 역시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이러한 불일치는 바로 용어의 정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진화주의'는 세계관 차원으로 끌어올려진 진화론을 의미하는데, 자연적인 과정인 진화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모든 생물과 우주의 발달에 유일한 원인이 된다는 '믿음'이다 [26]. 이러한 진화주의는 현재 '자연주의 세계관' ―보이는 물질만이 실체의 전부라고 믿는 세계관― 과 함께 무신론을 대표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다윈식 진화론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모든 기원의 문제를 단순한 자연적인 메커니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다윈 종합설의 대가인 마이어(E. Mayr)도, '살아 있는 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해 순수하게 유물론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자연도태가 '하나님을 폐위시켰다'고 거론되었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27].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무신론이 아니지만 무신론적 세계관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 사람이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진화론이 함의하고 있는 '우연' 또는 '무목적성'은 기독교적 창조관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통상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이신론적 진화론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 부류인데,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최초의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 진화에 의한 최종 산물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모든 '초기조건'을 정교하게 잡아주셨다는 것이다 [28]. 즉, 오늘날의 모든 생물체는 하나님의 개입없이 진화를 해왔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오늘날의 생태계가 이룩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적 창조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두 번째 부류는 점진적 창조론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 부류인데, 양자역학적 함의를 도입하여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 자체에 신적 행위가 개입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29]. 이것은 진화의 밑바탕에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불확정'적인 양자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고 있고, 이 불확정성은 하나님에 의해 양자세계에 부여된 본질적인 법칙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깨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지대로 진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9]. 즉, '우연'이라는 양자적 자연법칙 안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진화 과정을 조정하실 수 있으므로 기독교적 창조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부류의 대답은 어떤 경우이든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두번째 질문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초기의 단세포 형태로부터 지금의 다양한 생물계를 이루었다 라는 가설적 설명 ―대진화적 설명― 을 수용할 필연성이 없어진다. 우리에게는 수백 만 번의 변이 없이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즉각적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6]. 

세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이다. 비록 유전적 변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더라도 자연선택이 제 기능을 하려면 결국 수많은 변이 형태의 생물들이 생겨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변이적 생명체들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될 후손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물― 이 등장하기까지 적자생존과 경쟁이라는 지극히 잔인한 메커니즘의 '희생물'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30].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생물들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모든 생물들이 정말로 수많은 변이체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그러한 것이 과연 보시기에 좋으셨을까? 이러한 논점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답변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랑'이라든가 '잔인'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개념은 인간적인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지금도 그러한 적자생존이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비록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 기준과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분명 지금의 생태계는 아담의 범죄 이후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그 이전이므로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에 의한 창조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창조관과 매끈하게 조화되기 힘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과학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점이 된다. 이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성경의 영감성에 대하여, 성경해석에 대하여, 그리고 과학의 한계와 성경의 한계에 대하여 깊이있는 연구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 [31]. 본 장에서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좀 더 나은 합일점을 향한 방향제시와 도전을 주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비단 창조/진화 문제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모색에도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그럼,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정립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첫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의 구절들을 단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조직신학자 에릭슨(M. J. Erickson)은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다룰 때에 유신론적 진화론이 사용하는 전략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인데, 하나는 창세기가 생물과 인간 기원의 방식에 관하여 어떤 구체적인 사항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다만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9]. 이는 분명히 옳은 지적인데, 왜냐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의 구문들을 단지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풍유)적인 표현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담을 지은 '흙'이 어떤 선재하는 피조물을 상징한다거나, '번성하고 충만하라'가 다른 종류를 생산하라 라는 것을 상징한다거나 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달리 개신교의 전통적 성경해석학에서는 문자적 해석을 가장 우선시한다 [32]. 여기서 '문자적'의 사전적 뜻은 '글이나 표현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구성과 의미를 따르는, 또는 단어의 일상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따르는' 이다 (Webster's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물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수사학적 표현이나 상징들, 모형들, 혹은 알레고리를 간과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32]. 중요한 것은, 문자적 접근은 다른 모든 문학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통상적 관행이며, 문자적 해석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판명 나지 않는 이상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적 의미로 대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2,33,34]. 

둘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성경과 과학에 대한 분리주의(구분주의, compartmentalism)란 성경과 과학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주장하면서 [35], 성경으로부터 문자적·역사적 의미는 무시하고 도덕적·영적 의미만 추출하고자 하는 이원론적 태도이다. 리처드 라이트는 분리주의에 대하여, '창세기 초반부는 신화적으로, 혹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참조점이나 자연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결여된 신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일련의 비유로 본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그 문제들을 아예 도외시함으로써 과학과 성서 사이의 갈등을 피하고 있다. 만일 진화론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세계관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분리주의자들에게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35].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에 기술된 하나님의 창조 기사로부터는 창조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알아낼 수 없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는 결국 성경과 과학에 대한 분리주의적 태도에 매우 가까움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과학의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며 성경이 기술된 방식도 비이론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신화적 서술로 격하시키거나, 아니면 엉뚱한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분명한 것은 비록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한 비이론적 서술이지만 창세기에는 분명 창조의 방식이 기술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피조물들의 관계와 지위, 역할, 속성 등도 함께 나타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은 이러한 구절들의 문자적 의미 자체를 아예 포기한다는데 있다. 

성경해석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이 취하는 입장은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 취하는 입장과 정확히 반대이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의 문제점은 창세기의 구절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모든 과학을 평가하거나 제거하고자 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나 모두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이 무시된 채 비유적으로만 혹은 문자적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있어서 과학이 성경의 해석을 좌지우지하게 해서는 안되듯이 마찬가지로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평가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중요한 점은, 어떤 과학이론이 성경의 구절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일때 어느 한쪽을 무시하기에 앞서서 성경과 과학을 각각의 올바른 방법론에 의해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선행될 때에 모순처럼 보이던 부분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최소한 필자의 눈에는― 이러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근본주의적 창조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만약 이러한 노력들이 진지하게 전개된다면 양자는 분명 좀 더 나은 합일점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본다. 성경은 어떤 책이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은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은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1]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권오식 역), p.125, IVP, 1995.

[2]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황영철 역), p.277, IVP, 1991.

[3] R. A. Wallace, et. al, 생물학 -생명의 과학- 3판 (이광웅 외 7인 역), pp.370-374, 을유문화사, 1993.

[4]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임번삼 외 2인 역), p.99, 한국창조과학회, 1994.

[5]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Ch. 4, 7, 10, 11, IVP, 1996.

[6] W. Grudem, 조직신학(상) (노진준 역), pp. 402-407, 은성출판사, 1997.

[7]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상) (신경수 역), pp. 434-435,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8]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신경수 역), p. 46,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9]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pp. 44-46.

[10]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상), p. 435.

[11]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p. 47.

[12]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93-98.

[13]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pp. 277-278.

[14]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 90.

[15]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p. 125-126.

[16] P. E. Johnson, Darwin on Trial 2nd Ed., pp. 19-20, 68-69, IVP, 1993.

[17]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99-105.

[18] P. Davis, D. H. Kenyon, and C. B. Thaxton, Of Pandas and People, Haughton Publishing Co., Dallas, pp. 15-20, pp. 77-89, 1989.

[19]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223-238.

[20] B. Rensch, Evolution above the Species Level, Columbia Univ. Press, New York, p. 57, 1959.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 99)

[21]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p. 128-130.

[22]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Ch. 8.

[23] 지적설계이론에 대해서는 www.origin.org 와 www.discovery.org/crsc 등의 인터넷 사이트 참조 바람.

[24] J. Wells, Evolution and Intelligent Design, http://www.discovery.org/crsc/crscviews/wellsdesign.html

[25]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1-185.

[26]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132.

[27]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122.

[28]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 186.

[29]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6-188.

[30]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9-190.

[31]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Ch. 8, 10.

[32] Bernard Ramm, 성경 해석학 2판 (정득실 역), pp. 167-176, 생명의 말씀사, 1996.

[33]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pp. 197-202.

[34] Bernard Ramm, 성경 해석학 2판 (정득실 역), p. 158.

[35]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93.

자료출처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6&orderby_1=subject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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