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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cognito.egloos.com/198896

글에 덧붙여: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한다. <논리-철학논고>조차 겨우 뒤적거린 것이 전부인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그가 말하거늘 내가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이번 글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논하고 있는 여러 해설서를 추려보고자 한다. 발췌한 책 목록을 미리 밝혀둔다.
<철학 vs 철학> (강신주), <비트겐슈타인과 철학> (R. 수터),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레이 몽크),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K.T. Fann), <비트겐슈타인> (박병철)


생각은 무엇인가?

오늘은 알고 지내던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뭐 기분 나쁘게 한 거 있어?” 나는 일말의 감정도 없는데,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내가 아무런 감정이 없음’을 납득시켜야 할까? 나는 바로 “아니요! 전혀 그런 일 없는데 왜 그러시죠?”라고 답을 했다. 그렇지만 내 심정을 그 사람이 오해 없이 헤아려줄 수 있을까? 정말 내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메를로 퐁티의 말은 다음과 같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으며, 말하는 동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생각 자체인 것이다. (중략) 생각은 내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세계와 말의 밖에 있지도 않다. 그 점에서 우리를 속이는 것은 이미 이것이 구성된 것이자 생각의 표현이라며 말없이 스스로에게 회상시키고 내적 삶의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 퐁티의 이 글귀는 생각 자체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흔하지만 중요한 통찰을 포함한다. 흔히 말에 대해, 우리는 말을 꺼내기 전에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고 파악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생각은 무엇인가? 속으로 어떤 의미문장을 구성하는 것 역시 생각이 아니라 말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결국 생각이 가리키는 시니피에는 아무 데도 없다. 결국 생각은 언어 행위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의 문제는 결국 ‘남이 오해하지 않도록 말할 수 있을까’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실례로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의미의 차이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본다. 혹자는 소통의 부재로 그 상황을 본다. 생각 역시 말이므로, 내 생각을 말로 만들어 표현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타자가 내 생각과 의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꿰뚫어 내가 말하고저 했던 바를 정확히 간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유아론(solipsism)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정녕 불가능한가? 그건 아닐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타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고 시도했다. 언어의 유희로 인해 빚어진 혼돈을 해결하려는 이 시도는 1951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논리 실증주의는 문장 또는 언어의 유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고의 일반적인 특징을 도출해내려는 작업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수학적 기법에 기초를 둔다. 그들에 따르면, 순수 수학은 임의로 정의된 공준으로부터 출발한 완전히 연역적인 학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현실 세계의 사실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언어행위 역시 수학적인 명제로 규정한다면, 위와 마찬가지로, 사실적 문장들 역시 이론적으로 확인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 따라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경험의 한계를 넘는 이데아에 대한 사변을 거듭하는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또한, (~하는 것이 좋다/옳다 등의) 윤리적 문장은 한갓 정서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문장은 발화자의 찬성/반대를 나타낼 따름이요, 객관적 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33세의 나이로 1921년에 출간한 <논리-철학논고>에서 그가 하려 했던 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별이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조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만 삶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인 것으로, 정작 철학적 의의는 그곳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논리 실증주의를 표방하며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했던 ‘빈 학파’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을 만든다. (...)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명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 현실의 모델이다. (...) 그림 속에서 그림의 요소들은 대상과 대응된다. (...) 그림은 그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논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는 현실을 보여 주는 그림과 같다. 결국 언어(명제)는 타자와 지각적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는 구체적 사실에게만 부여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만 유일하게 타자들에게 말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논리 부호로 치열하게 함축된 <논고>는 오히려 자연과학의 명제를 보는 듯하다. (그가 논리 실증주의와 연관된 것이 이것 때문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은 어떠한가? <논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 언급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명제들 ――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것 ――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누군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말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도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고>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내면적 문제, 이를테면 종교적, 윤리적, 미적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 것에 관한 한 타자는 내 생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쩌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이라 언급하고 이러쿵저러쿵 명제를 붙이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고 못박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철학적 과제는 없었다. 그는 스승 럿셀의 완강한 반대에도 케임브리지 대학을 유유히 뜨고, 1920년부터 1926년까지 빈 남쪽에 있는 여러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교육 방식은 지역 주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썩 좋은 교사는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유복했다. (물론 그의 부친의 덕이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다. 대궐 같은 집에는 그랜드피아노가 7대나 있고, 브람스 같은 당대의 피아니스트들이 종종 저녁 초대 손님으로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골짜기 초등학교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된다. 오히려 그 곳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통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골 사람들의 거친 삶과, 감정에 치우친 언어는 그가 살아왔던 환경과는 너무나 달랐다.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왜 그 타자에게 근거들을 주지 못하는 걸까? (...) 근거들의 끝에는 설득이 있을 뿐이다. 선교사들이 원주민을 개종시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생각해 보라. <확실성에 관하여>
107. 실제 언어를 좀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철학적 탐구>

결국 자연과학적 명제만을 말하고자 했던 그의 유아론적인 통찰이 얼마나 속 좁은 일인지가 드러나고 만 것이다. 원주민들 역시 자신들의 언어로 구성된 고유한 원리를 바탕으로 살아왔다. 그는 수많은 규칙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실천적 언어철학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언어는 게임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와의 연속성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에 든 통찰력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기 시작했다. 가령 사고와 언어와 세계가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이 하나 있으며 철학자라면 그것을 발굴할 수 있다는 자신의 전제였다. 하지만 그는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이후 논리적인 형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기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아주 신속히 도달했다. 이것은 그의 저작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에 있다”고 강조하지만 여기서의 언어는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와는 차이가 있다. 같은 한국어라도 10대와 50대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상이할 수 있다. 문맥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같은 단어도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논고>에서 보여주던 칼끝 같은 엄밀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는 너그러워진 듯하다. 비로소 그는 <논고>의 그림 이론을 폐기하고, 언어를 일종의 게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논고>에서 그는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가 오해되기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가 시도한 것 역시 논리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철학자들의 늪인 ‘일반성에 대한 갈망’에 자신도 빠지고 만 것이다. 이제 그는 우리 언어 특유의 논리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언어와 그 언어에 얽힌 행위를 통틀어 언어 게임이라고 부르자. 각 언어는 고유한 규칙이 있고, 낱말들은 그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어, ‘장기’와 ‘체스’라는 언어가 있다면 차와 포 같은 장기말이나 비숍과 퀸 같은 체스말들은 그 언어의 어휘와 같다고 얘기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순간에, 규칙의 맹목성은 언어뿐만 아니라 삶이 맥락을 이루는 모든 장소에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그 질곡 하나하나에서 다양한 언어와 규칙들이 존재한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이 곤경에 빠진 것은 언어가 잘못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명석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는 투명한 것이 아니라 온갖 문법적 오류, 신화적 선입견으로 가득차있다. 따라서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틀을 통해 보아오던 기존의 지각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일상 언어를 올바르게 정돈하고 그 관계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에 있어서는 초기-후기에 차이가 없지만, <논고>에서는 ‘수정 같은 명료성’을 담지하고 있는 논리적 실체가 언어 배후에 있을 것이라 가정한 반면 <철학적 탐구>에서는 그 본질이 있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본다. 우리가 본질이라 생각했던 것은 언어에 내재되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 현상이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의미 역시 고정된 그림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에 단말마에 떠오르는 (사람마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심상으로 봐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언어와 타자, 그리고 인간의 삶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려 노력한 것이다.
(자료출처 http://cognito.egloos.com/viewer/198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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