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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철학개념어사전  
2010/02/0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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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어떠한 진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실증주의(positivism)라 한다. 논리실증주의는 이런 입장을 언어적 측면에서 좀 더 정밀하게 적용한 것이다.
 
가령 누군가 “책상 위에 빨간 사과가 있다.”라고 진술했다고 하자. 그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는 직접 그 진술을 한 사람이 지적한 것을 우리가 보고 검증한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다. 그 사과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진술을 참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이란 바로 이런 단순하지만 명백히 참인 진술들의 합으로 구성된다. 이런 단순한 문장들을 프로토콜 명제(protocol sentence)라고 한다. 이런 설명은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에 힘입은 바 크며 검증가능성원리(verifiability principle)라고 한다.
 
만약 단 하나라도 확인될 수 없는 무언가가 개입된 진술이 있다면 그 진술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가령 “저 벽장 안에 귀신이 있다.”는 진술은 무의미하다. 어느 누구도 벽장 안에 귀신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종교, 도덕, 아름다움 등에 관한 온갖 주장들은 우리의 경험이 확인해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주장들은 죄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외면해야 한다.
반면 기존의 실증주의는 이들 명제를 아예 거짓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논리실증주의와 다르다. 논리실증주의는 그런 주장들을 거짓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형이상학이나 종교와 싸우는 대신 그런 주장들을 외면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증주의보다 더 고도의 신비주의 응징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논리실증주의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는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학적인 동어반복(tautology) 명제들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다.”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참이다. 왜냐하면 “하나에 하나를 더함”이라는 내용 자체에 이미 “둘”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실증주의가 기존의 실증주의와 다른 점이 여기에도 있다. 기존의 실증주의는 경험적 사실들만을 중시했을 뿐 수학적 명제들은 중시하지 않았다. 이렇듯 논리실증주의는 개별적인 경험적 사실들에 관한 진술들과 수학적인 동어 반복적인 진술들에 의해 참된 과학적 진술, 즉 이론적 명제(theoretical sentence)를 이루게 된다고 보았다. 이때 개별적 관찰경험들과 이론적 명제들 사이에는 대응규칙(對應規則 correspondence rule)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어떤 이론적 명제를 제기했는데 개별적인 관찰경험들이 그 이론적 명제에 부합되면 그 이론적 명제는 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는 난점이 있다. 첫째, 책상 위에 있는 빨간 사과를 관찰하기 위해선 최소한 그것을 빨간 사과라고 인지하는 능력이 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논리실증주의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이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능력은 관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논리실증주의에 의하면 프로토콜 명제는 원자명제다. 그러나 프로토콜 명제들은 원자명제가 아니라 더 세분화될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원자명제라 할 수 없다. 가령 앞에서 예를 든 문장은 “책상”, “빨갛다”, “사과” 등의 단어에 대한 원자명제들의 합인 분자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토콜 명제라고 주장하는 진술들은 더 세분된 명제들로 무한 분할될 수 있다. 즉, 원자명제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전제일 수 있다.
 
셋째, 관찰자의 경험 내용이 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다른 사람도 그 관찰자와 똑같은 경험내용을 가지리라 보장할 수 없다. 예컨대 관찰자가 색맹이라든가 빨간색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도대체 그 진술의 타당성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넷째, 관찰자가 어떤 이론적 편견을 가지고 관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후지사과는 빨갛다.”는 명제를 부정하기 위해 파란색 조명을 설치한 뒤 “파랗다”는 관찰경험이 도출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섯째, 관찰용어와 이론적 명제들을 이어주는 대응규칙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 논리실증주의는 석연한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섯째, 관찰 가능한 것의 범위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관찰 명제와 이론적 명제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과거엔 세포를 현미경으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세포에 관한 진술은 이론적 명제가 된다. 즉, “세포가 있다.”는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직접 관찰에 의존하지 못하고 다른 직접적 관찰들에 의존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포를 직접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으므로 “세포는 있다.”는 진술은 이론적 명제가 아니라 관찰 명제가 된다.
 
이처럼 논리실증주의는 결함이 많다. 특히 포퍼(K. R. Popper)의 반증가능성이론(theory of falsifiability)으로 인해 논리실증주의는 완전히 낡은 이론으로 취급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가 이후 분석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출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작성자 채석용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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