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 울타리에 대한 탐구
해체주의: 울타리에 대한 탐구
http://blog.naver.com/1019milk/80155358180해체주의: 울타리에 대한 탐구 철학 강의록 / Philosophy2012/03/12 23:34복사http://blog.naver.com/1019milk/80155358180전용뷰어 보기4. 제사(題詞)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13쪽 인용구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봅시다. 여기서도 몇 가지 핵심적인 표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13쪽 마지막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표음문자의 형이상학이다.”라는 내용은 ‘로고스’ 즉 ‘마음의 상태’라는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음성’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음성’에 비하면 ‘문자’라는 것은 2차적인 수단이고, 영혼의 상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음성’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문자’로 적은 내용들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가를 상식적인 차원에서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문자의 2차성 또는 문자의 불완전성과 관련된 예를 든다면, 아마 일본어야말로 문자의 불완전성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어의 경우는 어떻게 발음되어야 하는지 문자 자체로는 충족이 되지 않다보니 옆에 지시를 따로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다른 예들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어찌되었든 13쪽은 결국 영혼의 상태가 ‘음성’으로 가장 잘 표현되며, 문자는 2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수단으로 생각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것은 ‘표음문자’, 다시 말해 “로고스 중심주의는 표음문자의 형이상학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럽과 중국을 가르고 크게는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민족 중심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14쪽은 그래서 “이 형이상학은 그 심층에서 보자면 수수께끼 같지만 본질적인 이유들, 단순한 역사적 상대주의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강력한 민족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여기서 데리다는 이러한 전황과 관련해서 세 가지 중요한 탐구 주제를 아래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문자의 표음화가 발생하면서 이 표음화가 그것의 고유한 역사를 감출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세계에서 문자의 개념”, 즉 영혼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음성’이고 ‘음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표음문자’라는 생각에서 ‘음성 중심주의’가 성립했는데, 그 사고가 성립하면서 도리어 그 배후로 숨겨져 버린 ‘비표음적’이고 ‘비음성적’인 문자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탐구 주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설명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두 번째는 서구적인 사고가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으며, 여기 나와 있듯이 “문자언어를 ‘충만한’ 음성언어(parole) 밖으로 내몰아 억제에 왔던 것이다.”라는 점입니다. 보통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형이상학, 다시 말해 ‘음성 중심주의’적인 것, ‘음성’이 순수한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며 ‘문자’는 2차적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구별, 즉 ‘기표’와 ‘기의’ 구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을 때 잘 나타납니다. 소쉬르는 ‘기의’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인 반면, ‘기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기의’에 자의적으로 서로 편승하는 방식으로 붙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표’를 ‘개’라고 하건 ‘Dog’라고 하건,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기의’는 동일합니다. 즉 이것은 경험적인 문자체계 배후에 문자적인 편차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상정했던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런저런 맥락에서 혹은 이 고장 저 고장에서, ‘용기’는 무엇이고 ‘법’은 무엇이고 기타 등등 여러 가지의 단어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이지만, 진정한 ‘법’이란 무엇인가 또는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물었을 때 그런 이질적인 편차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하게 보존된 ‘시니피에’가 있다는 생각. 바꿔 말하자면, 현세적인 것들은 이렇게 저렇게 오염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진짜 겨냥하고 탐구해야하는 ‘이데아’가 세계 저편에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은 플라톤 철학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는 세계를 넘어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형이상학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로고스 중심주의’, ‘음성 중심주의’는 이러한 독특한 형이상학과 맞물려 있습니다. 따라서 ‘로고스 중심주의’, ‘음성 중심주의’를 탐구하는 일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세 번째 “과학의 개념, 또는 과학의 과학성──과학이나 과학성은 항상 논리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의 개념”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기호를 사용하는데 이 기호는 결코 표음문자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과학 기호들에도 음가가 있기는 하고, 보통 알파벳으로 표현되지만, 편의상 그것을 사용하는 과학자 본인의 나라 말로 부르기 때문에 기호 자체는 ‘표의문자’입니다.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과학이야 말로 문자 체계는 결코 표음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가장 간단한 산수만 떠올려 보아도, 또는 더 간단한 예를 들어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의 체계를 떠올려 보아도 그렇습니다. ‘영’과 ‘일’이라는 음가만 가지고는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의미 체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4쪽 아래의 내용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표음문자에 호소하면서 실제로 끊임없이 로고스의 제국주의에 의의를 제기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전복은 과학의 기획을 발생시켰고, 전적으로 비표음적 특징을 지닌 규약을 탄생시킨 소통 체계(systeme allocutoire) 내에 언제나 포함되어 왔다 할 것이다.” 즉, 데리다는 자기 입장을 잘 예증해줄 수 있는 하나의 예로서,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문자’라는 것이 ‘음성’에 종속된 2차적인 수단이 아니라 ‘음성’에 앞서서 그 자체로의 작동방식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과학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이런 점 때문에 데리다는 과학과 관련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15쪽을 보겠습니다. “과학의 어떠한 진보적 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문자의 표음화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현상이다. 이러한 부적절함은 언제나 이미(toujours deja) 운동을 야기 시키기 시작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미’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하이데거식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가장 잘 나오는 표현들 중 하나를 꼽자면 이 ‘언제나 이미’라는 것이 빠지지 않습니다. 데리다가 탐구하는 것이 ‘음성 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망각된 채 작동하고 있는 비음성적인 ‘문자’를 드러내려하는 것이라면, 즉 ‘언제나 이미’ 음성중심주의 안에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으로서 비음성적인 문자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라면, 이는 서구 형이상학 안에서 서구 형이상학이 망각하고 있던 ‘존재’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한 하이데거적 기획과 맞닿아 있습니다.하이데거의 철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가령 시공간을 항구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실체로서의 ‘존재자’에 대해서 서구철학이 사유하고 있는 동안, 바로 이 존재자를 있게끔 한 ‘존재함’이라는 것은 망각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4가지의 원인, 형상인·질료인·운동인·목적인, 이것은 모두 출현한 ‘존재자’에 대한 기술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형상이나 질료 이전에, 그것의 ‘있음’이라는 것이 선행하는 것이며, 이것 자체는 서구철학에서 잊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하아데거가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어떤 것이 출현하는 바람에 그 배후로 밀려나버린 ‘존재하게 함’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미’ ‘존재자’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구철학은 ‘존재자’를 기술하는 것을 존재론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be동사’같은 것으로만 기술될 수 있는 ‘존재함’이라는 것은 망각되고 잊혀져버렸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데리다의 기획, 즉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만 가장 잘 표현된다는 서구철학 뒤편에 ‘문자’의 작동이 잊어진 채로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획과 상당히 유사합니다.그 다음 쪽에도 역시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16쪽 두 번째 문단을 봅시다. “메타포·형이상학 그리고 신학에 의해 속박당한 문자과학에 대한 암시를 통해, 위에서 인용된 제사(題詞)가 예고하게 되는 바는 이 문자학(에크리튀르 과학)──그라마톨로지──이 결정적인 노력에 힘입어 세계에 자기 해방의 표시들을 나타낸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 그라마톨로지라는 기획 자체에는 내재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망설임이 있습니다. 이미 설명 드린 ‘성립시키고 와해시키는 양면적인 기획’과 관련된 것입니다.17쪽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과학과 문자의 극히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서 오늘날 겨냥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통일성이 원칙상 다소간 비밀스럽게, 그러나 언제나 한 역사적-형이상학적 시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울타리를 엿보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울타리’입니다. 한 역사적, 형이상학적 시대의 울타리, 그런데 이 울타리는 “종말은 아니다.”라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그 다음 쪽을 봅시다. “그것은 이미 형성된 정상성과 절대적으로 단절되는 그 무엇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괴물 같은 기형의 형태로만 예고되고 나타날 수 있다. 미래의 세계에 대해서, 이 미래의 세계에서 기호·음성언어(말)·문자언어(글)의 가치들을 뒤흔들어 버리게 될 그 무엇에 대해서, 여기서 우리의 전(前)미래를 이끌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아직은 제사(題詞)가 없다.” 역사적 형이상학적인 시대의 울타리를 엿보게 한다는 것을 약간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칸트 철학을 예로 들겠습니다. 칸트 철학이 무엇인가 하면, 경험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경험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칸트에게서는 그것이 지성에 뿌리를 둔 열두 개의 범주입니다.우리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가령 아까 ‘인과율’이라는 범주는 우리 지성에 뿌리를 둔 것인데, 칸트는 이것에 대해 ‘싹’과 ‘씨앗’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치 우리 안에 어떤 재산처럼 형성되어 있는 ‘인과율’이라는 관념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율’은 오로지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마음을 들여다봐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과율’과 같은 방식의 판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범주를 출현시키게 해 주는 ‘지성의 판단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것이 경험 바깥에 대해서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주장합니다. 가령 “창조주는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는 자녀이다.”라는 말을 예로 들어 봅시다. 칸트가 보기에 이 말은, 경험을 성립시키는 또 경험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하는 ‘인과율’이라는 것이 경험 바깥에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사례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창조주를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의 원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범주를 잘못 사용한 경우를 고발하는 것이 칸트 철학의 주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을 더 넘어서지 않게 하는 경계선을 기술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여기서 ‘울타리’라는 표현도 바로 이러한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형이상학적인 사유, 보다 순화시켜서 우리가 써 오던 표현대로 하자면 서구인들의 근본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그 사고방식을 출현시킨 조건으로서의 ‘울타리’를 탐구한다는 것, 그 조건이 계속 우리가 탐구했던 ‘문자’의 작동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플라톤주의를 예로 들어봅시다. 플라톤에 따르면 경험 안에 있는 ‘사과’라는 것은 이질적인, 오염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 사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사유방식입니다. 형이상학자가 묻는 것은 이렇듯 ‘초월적 시니피에’이고, 그것은 ‘이성’을 통해서 탐구될 수 있고, 그렇게 탐구된 것은 다른 영혼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데, ‘음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문자’는 오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형이상학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반면, 『그라마톨로지』는 바로 이 형이상학을 성립시킨 ‘울타리’를 묻습니다. 이런 형이상학에는 ‘문자’의 작동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더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이성’은 ‘초월적 시니피에’를, ‘이데아’를, ‘순수한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이성’, ‘초월적 시니피에’, ‘이데아’ 사이에는 일종의 친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탐구된 것은 개인의 사적인 재산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전달 가능합니다. 바로 ‘초월적 시니피에’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음성’을 통해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형이상학 체계입니다. 그리고 이 체계에서는 가장 궁극적인 것들이 등장합니다. ‘초월적 시니피에’와 ‘이데아’라는 것, 그리고 그 배후를 물을 수 없는 ‘이성’이라는 것 말입니다. 또한 가장 순수한 ‘음성언어’ 역시 나타납니다.그러나 사실 이 형이상학적 프로그램은, 이 프로그램 안에서는 들리지도 않고 생각되지도 않는 그러한 것들이 작동함으로써 움직여 나갈 수 있습니다. 가령 ‘사과’를 예로 들어봅시다. ‘사과’에 대한 ‘초월적 시니피에’라는 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자로써의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즉 ‘분절’이 있어야 합니다. ‘사’자와 ‘과’자를 떨어뜨려 놓는 분절 없이는, ‘사과’라는 ‘시니피에’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이 ‘분절’은, 위의 형이상학 체계에서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시니피에’입니까 아니면 ‘이성’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전달하는 ‘음성’입니까? 발음되지 않고 사유되지도 않는 이러한 요소. 이것이 형이상학을 성립시키면서 형이상학 안에서는 생각되지 않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을 성립시키는 ‘울타리’이면서, 형이상학자들에게는 생각되지 않는 것. 바로 이런 것을 탐구하는 일이 이 『그라마톨로지』라는 저작의 목표입니다.더 쉬운 예를 들자면, 철학은 보다 ‘심층적인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유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그 ‘심층적인 것’이 교탁에 있으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의식’이라는 것으로 탐구를 합니다. 의식의 성격은 이 ‘깨어 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어 있음’이라는 것은 ‘깨다’라는 동사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깨다’라는 동사는 ‘잠자다’라는 것의 반대로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굳이 깨어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의식 활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잠자다’라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이 계속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교탁에서는 여러분들의 잠자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웃음)그러므로 이 작업은 무엇입니까? 형이상학의 종말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은 보통 무전제의 학문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그 배후에 어떤 것도 두지 않고 가장 심층적인 영역으로 내려가려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라마톨로지』는 이런 형이상학이, 사실은 자신이 사유하지도 못했던 그러한 조건에 의존해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형이상학은 와해됩니다. 형이상학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그 조건을 찾자마자 형이상학을 와해시킵니다. 형이상학을 ‘해체’하게 되는 그런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보통 이 ‘해체’라는 말이 통속적으로 운영되면서, 그게 마치 다 부순다는 의미의 그런 용어인 것처럼만 쓰였는데, 그것이 “종말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보여주듯이, 이 해체는 형이상학을 수립시키는 성격을 한편으로 반은 가지고 있습니다. 아까 뒤에 나와 있듯이 “이미 형성된 정상성과 절대적으로 단절되는 그 무엇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괴물 같은 기형의 형태로만 예고되고 나타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책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야 하는 것인데, 울타리를 엿보게 해 주고 그것은 “종말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이제 우리가 익숙해 있던 정상성으로 더 이상 되돌아 갈 수 없게 되어 그것은 “기형의 형태로만 예고되어 나타날 수 있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운명적으로 ‘해체’라는 것은 망설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조건으로서 형이상학을 성립시키는 동시에 형이상학을 와해시키는 그러한 운명, 이게 바로 ‘해체철학’이 노리는 바입니다.5. 책의 종말과 에크리튀르의 시작19쪽에는 이것이 더 쉬운 말로는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역사적·형이상학적 시대가 그것의 문제적 지평의 총체를 결국 언어로써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정’ 또는 ‘규정’이라고 철학에서 번역되는 것,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엇이라 사용되느냐면,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가능하게 되는 대상을 규정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칸트에게서 ‘범주’라는 것은 ‘현상’을 규정한다는 용어로 쓰입니다. ‘현상’을 경험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음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범주’가 현상을 규정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19쪽의 말로 돌아가 보면, 형이상학은 형이상학 지평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데리다가 후설과 하이데거 계통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차용한 표현인데, ‘울타리’와 비슷한 뜻입니다. 즉 형이상학을 수립시키는 가장자리, 또는 경계선이 ‘언어’에 의해, ‘문자’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문자’에 의해서 ‘음성언어’를 최우선적으로 놓는 사유방식은 성립되는 것입니다.처음 접하면 어려워 보일 수도 있고 새로운 사고방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이 책을 아주 간단한 몇 개의 명제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순전히 언어학적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목소리’를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음성언어’를 가지고 노는 형이상학이라는 놀이터는 비음성적인 ‘울타리’에 의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울타리를 보이게 해 주는 것이 ‘해체철학’이다.”라고 말입니다.‘철학’이라는 것은 그리스에 기원을 둔 사유방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철학’이라는 것의 주요 경향을 살펴보자면, 철학의 종말을 고하는 보다 심층적인 사유의 영역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철학은 ‘철학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사고방식을 수립시켜주는 그러한 요소를 탐구하는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즉, 음성중심적인 사고방식 배후에는 ‘문자’의 작동이 놓여 있었지만 형이상학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체’라는 작업은 그것을 조명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언어학적인 작업에서 보다 명확하게 기술될 수 있습니다. 21쪽에는 “기의는 그 속에서 언제나 이미 하나의 기표처럼 기능한다. 문자 언어에 한정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이차성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의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도 언제나 이미, 다시 말해 처음부터 영향을 준다.” 즉, 어떤 문제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초월적인 ‘이데아’가 있고, ‘문자’는 그것을 2차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수립한 언어학이 소쉬르의 언어학입니다. 이 고장 저 고장마다 ‘시니피앙’은 다르지만 ‘시니피에’는 동일하다는 점에서, ‘시니피에’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의’는 언제나 이미 ‘기표’처럼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순수한 ‘음성언어’가 접근할 수 있는 ‘기의’ 안에는, 이미 ‘기표’, 즉 ‘문자’의 작동이 있다는 것입니다.다시 읽어 봅시다. “문자 언어에 한정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이차성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의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도 언제나 이미, 다시 말해 처음부터 영향을 준다.” 가령 ‘사과’라는 ‘기의’는, 그 ‘기의’ 즉 ‘시니피에’에 결코 귀속되지 않는 그러한 요소에 의존해서만 성립됩니다. ‘분절’이라는 것, ‘사’자와 ‘과’자를 갈라내는 ‘분절’이 있고나서야 ‘기의’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즉 이미 그 안에 작동하고 있는 기표가 있어야만, ‘사’자와 ‘과’자를 갈라내는 기표가 있어야만 ‘기의’가 수립됩니다. ‘기의’가 1차적이고 자의적인 ‘기표’는 그것에 대해 2차적으로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이미 그 안에 ‘기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은 ‘음성언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안에 ‘문자’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문자적인 요소와 별도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초월적 시니피에’라는 것은 이미 그것을 성립시키는 문자적인 요소가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참고서동욱, 『해체주의』(대학강의), 서강대학교, 2012. 3. 7.자크 데리다, 김웅권 옮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東文選, 2004.[출처] 해체주의: 울타리에 대한 탐구|작성자 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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