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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주의: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

해체주의: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


해체주의: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   철학 강의록 / Philosophy 
2012/03/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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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주의, 서강대학교 서동욱 교수
 1.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
 
 
 
 이번 ‘해체주의’ 강의는 데리다의 주요 저작들을 자세히 읽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고전적인 저작을 읽어나가는 프로그램은 오래 전부터 우리 학교 철학과에서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 일환으로 이 ‘해체주의’ 강의도 개설되었습니다. 강의에 앞서 우선 평가에 대한 개략적인 사항들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가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과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과제는 가벼운 텍스트 요약이 될 것이며 수업 녹취록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학생에게는 최고 점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분량이 많고 내용 또한 어려운 만큼 녹취록을 작성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녹취록 작성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녹취록을 제출하신 학생에게 최고 점수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해나갈 철학자인 데리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데리다는 1930년에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이 당시 그는 주로 ‘현상학’을 연구하였는데, 현상학은 근대 유럽철학의 마지막 세련된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입니다. 그러면서 데리다는 유럽적 사유방식의 근본적인 형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내적인 균열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해체주의’라는 새로운 철학 사조를 개척하였습니다.
 
 해체주의는 오늘날 철학뿐만이 아니라 건축이나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현재의 많은 연구와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개론서들도 서점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렇듯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여러 방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보니, 정작 그와 관련된 책은 많은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그 핵심을 짚어내고 있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데리다 관련 개론서를 읽으시려 하신다면, 저는 『데리다 평전』(제이슨 포웰, 박현정 옮김, 인간사랑, 2011.)을 소개해 드립니다. ‘평전’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데리다에 관한 전기적인 내용보다는 그의 주요저작을 인생의 추이에 따라서 요약한 내용의 책입니다. 개략적인 사전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제가 쓴 『철학연습』(반비, 2011.)이라는 책에도 관련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데리다의 주요저작으로는 먼저 1962년에 그가 번역한 『기하학의 기원』이라는 책을 들 수 있습니다. 『기하학의 기원』은 본래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이 쓴 것이지만, 데리다는 이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번역보다 더 긴 해설을 썼습니다. 여기서 그는 서양적인 사유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논하며 자신의 사유에 대한 구상을 그 속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1967년에는 데리다의 대표저서인 『그라마톨로지』가 출간되었고, 동시에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라는 주요 저서들도 함께 출간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해체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앞서 설명하였듯이 오늘날 해체주의라는 말은 널리 퍼져있는 만큼 부정확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해체’라는 말은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성격보다는 좀 더 좁혀서 철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우선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해체’란 서구적 사고방식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으로서, 그 사고방식을 세웠던 철학자들이, 그들 스스로가 믿는 바와는 달리, 전혀 다른 구조에 의해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이 작업은 이전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그 텍스트가 어떤 구조로 짜여 있는지에 대해 개개의 텍스트를 범례적으로 사용해가며 전개됩니다. 우리가 이 강의를 통해 읽으려 하는 『그라마톨로지』 역시 이러한 작업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책 제목인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란, 풀이하였을 때 ‘문자(grammaire)’에 대한 ‘연구(-logie)’라는 의미입니다. 이름 그대로라면 ‘문자’와 ‘글쓰기’의 문제를 고민하는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문자’나 ‘글쓰기’라는 말은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릅니다. 가령 지금 우리가 강의를 노트 필기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문자’나 ‘글쓰기’와는 다른 방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라마톨로지』는 1960년대 당시의 서구 사상계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이었던 ‘구조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사고방식을 중점적으로 비판합니다. 우선 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구조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데리다, 들뢰즈, 푸코 등의 학자들을 뭉뚱그려 이야기할 때 ‘구조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 사용은 개별적인 사상가들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조주의가 데리다에게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구조주의’란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은 심층적 구조에 주목하는 이론입니다. 가령 우리가 a라는 대상을 안다고 할 때, 여기에는 “나는 내가 a라는 대상을 ‘안다는 것을 안다.’”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식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의식에 자기 반성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안다’는 것, 즉 나의 의식에 대해서 ‘자기 의식적인 구조’, ‘자기 반성적인 구조’를 통해 우리 의식은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나는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다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칸트 철학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우리의 의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구조가 있다고 주장하며 근대의 의식철학에 대해 반대합니다.
 
 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레비스트로스입니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철학은 언제나 의식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며 우리의 의식을 철학의 주요 문제로 세웠고, 이후의 칸트나 헤겔 등의 철학자들도 이와 유사한 의식철학적인 패러다임으로 사고하였습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구조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우리의 의식 뒤편에 의식되지 않은 사고가 있다는 점이 부각되자 이것은 종래의 서구 철학의 사고를 뒤집어엎는 혁명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구조주의조차도 서구적 사고방식의 전형이라 비판합니다. 그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다룬 다음,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루소의 사상을 분석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이렇듯 이전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의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저서 역시도 후설의 『논리 연구』라는 저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입니다. 『글쓰기와 차이』의 경우에는 논문집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테마는 없지만, 이 저서에서도 앞의 방법들과 유사한 연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번 강의에서 먼저 『그라마톨로지』를 다루고, 『목소리와 현상』은 강의 진도와 여러분들의 이해도에 따라 독해 여부를 추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간주곡으로 『글쓰기와 차이』의 주요 논문들 중 두 개를 뽑아 함께 읽으려 합니다. 특히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라는 논문은 철학계에서 많은 토론을 일으켰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또 데리다가 80~90년대에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당시의 유럽 정세와 관련한 정치·사회 철학적 작업도 공부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1993년에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책을 먼저 읽고, 1989년의 책인 『법의 힘』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데리다의 직접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와 관련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 텍스트들도 있습니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분석하고 있는 루소의 『인간 언어 기원론』과 『법의 힘』에서 이야기되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라는 두 텍스트입니다. 이 역시 수업 중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주요 교재가 되는 텍스트는 강의 시간에 가져오시길 바랍니다. 『그라마톨로지』는 동문선에서 출판된 번역(김웅권 옮김, 2004.)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번역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 번역이 강의에 사용하기에는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번역 상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강의를 진행해 나가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법의 힘』도 강의를 위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1.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
 
 우선 오늘은 간단하게 제가 쓴 『철학연습』에서 데리다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리다가 ‘해체’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서구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다음 루소와 헤겔의 책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사물들을 회화적으로 그리는 것은 야생적 민족들에게 적절하고, 낱말과 명제를 기호로 표시하는 일은 미개한 민족들에게 적합하다. 그리고 알파벳은 개화된 민족들에게 알맞은 것이다.” 루소,『언어기원론』
 
 “알파벳 문자는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 가장 지적이다.” 헤겔, 『소논리학』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문자’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에게 있어 ‘문자’는 ‘목소리’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야기되는데, 그는 이를 통해 서구적인 근본 사고방식 안에서 ‘문자’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표출되는 사고는 ‘음성중심주의’입니다. 인용문이 겉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은 ‘알파벳’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 ‘알파벳’이 ‘표음문자’로서 음성의 정확성을 ‘상형문자’나 ‘표의문자’에 비해 잘 구현하고 있으므로 다른 문자들보다 뛰어나다는 서구인들의 사고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루소가 쓴 저서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루소는 『언어기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근접해 있는 대중에게 들리지 않는 언어는 모두 노예의 언어이다.” 진실한 의미를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은 목소리이고, 그 이외의 ‘문자’를 통하여 전달되는 의미는 이미 타락된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만약 ‘문자’라는 것이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으로서 반드시 사용되어야만 한다면, 그때는 앞서 보았던 것처럼 문자 가운데서 가장 지적인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다시 말해 목소리를 목소리답게 표현하는 자신들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진보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럼 여기서 ‘해체’가 서구적 사고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구의 철학자들은 이전부터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의 정확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에 반해 ‘문자’를 통한 의미 전달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추어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문자’라는 것 중에서도 ‘목소리’를 잘 구현할 수 있는 ‘표음문자’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였고, ‘상형문자’나 ‘표의문자’를 그보다 뒤떨어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러한 서구의 ‘목소리 중심주의’ 속에는 ‘서구민족 중심주의’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표음문자를 가장 우월한 형태로 두고 동양의 문자들을 평가절하 한다는 것. 이 속에는 곧 서구 철학의 여러 작업과 그로부터 형성된 서구의 문명은 목소리의 직접적 전달을 지향하며 이루어지고 있기에 뛰어난 반면, 그 밖의 다른 철학과 문명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또 이렇듯 해체를 통해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서구 중심주의적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은 그 근본에 자연스럽게 정치적 함의를 담게 됩니다. 해체는 감추어진 서구 중심주의를 폭로하고 이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사고방식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함의를 지닐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데리다의 레비스트로스 비판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구 사상의 장, 특히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그것을 ‘구조주의’라고 부르자.)은 오늘날 너무 성급히 자신이 뛰어넘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로고스 중심주의)에서 그 성층화의 한 단층에 의해, 때로는 가장 풍성한 형이상학의 단층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로고스 중심주의’라는 개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서구 사상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logos)’는 흔히 ‘이성’이라는 뜻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말’ 또는 ‘목소리’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의미’의 참된 전달은 ‘목소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플라톤은 『파이드로스』라는 대화편에서 ‘문자’에 대해 강력히 비판합니다. 그의 주장은 철학이라는 것이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마주 대하는 사람들 간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제대로 전달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은 얼른 보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지만, 질문을 해 보면 묵묵부답, 침묵을 지키네. 글로 써 놓은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세. 사람들은 글이 마치 모종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이해해 보려고 질문을 해 보면 글은 언제나 똑같은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줄 모른다네. 그뿐만이 아닐세. 글은 한 번 쓰이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건 그것에 대해서 전연 관심이 없는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굴러다니며,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또 누구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지를 분간하지도 못하네. 또한 부당한 오해를 받거나 공격을 받을 때, 글은 혼자서도 보복도 방어도 못하고, 언제나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 하네.”
 
 그런데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있어 ‘명제’라는 형태로 표현되어집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주어와 술어 구조의 ‘판단문’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판단’이라는 사고를 담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이성’입니다. 즉, 거꾸로 다시 돌아가자면 ‘이성’이라는 것은 ‘판단문’의 형태로서 즉 ‘명제’로서 표현되어지는 것이며, ‘명제’는 ‘목소리’를 통해서 가장 잘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로고스 중심주의’란 ‘목소리 중심주의’이며 ‘이성 중심주의’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가 ‘음성 중심주의’라는 형태로 잘 표현이 되며, 이것이 여러 철학자들의 배후에 숨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식 중심의 근대 철학적 프로그램에서 떠났다고 생각하는 구조주의조차 여전히 ‘음성 중심주의’, 다시 말해 ‘로고스 중심주의’를 숨기고 있다는 비판을 펼칩니다. 그의 비판 대상은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인 『슬픈 열대』입니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의 원시림 속 부족들을 연구하여 이 부족들의 원초적·야생적인 세계가 결코 근대의 과학·기술적 세계에 비해 구조적으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는 또한 근대적인 문명질서에 의해 열대 원주민 부족들의 사회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슬픈 사실에 분노하며 서구 지성의 양심과 자기반성을 『슬픈 열대』에서 나타내었습니다. 이 저작 속에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인류학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가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서구의 편견과 차별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감동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올바른 것처럼 여겨지는 데다, 근대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문학을 구성하길 시도하며 혁신성을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60년대 철학계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주요 타겟으로 삼아 비판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레비스트로스 역시도 ‘목소리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남비콰라족이 지닌 야생의 순수함에 대해 “인간적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진실한 표현 같은 무엇을 느낀다.”라고 말하며 원주민들의 삶을 원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어서 그는 문자가 야생 본래의 순수한 사회를 망쳐놓았다고 지적하며 “문자와 배신이 한꺼번에 자기네 사회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음에 틀림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떠한 문명도 문자 없이는 들어올 수 없으므로 그는 유럽 문명의 침입과 문자의 침입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야생적인 세계 안에 차별이 들어오는 것은 결국 문자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은연중에 ‘문자’보다 ‘목소리’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목소리 중심주의’가 뒷받침되어 있고, 더 나아가 서구 중심의 ‘이성 중심주의’까지도 숨겨져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적이었습니다.
 
 야생의 부족이 순수하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사고방식은 사실 서구인들이 이전에 몰랐던 종류의 사고가 아닙니다. 가령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위의 사고가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의 사고는 서구 의식의 밑바닥에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실낙원 신화’와 연관됩니다. ‘실낙원 신화’란 아주 오래 전 인간은 순수한 모습을 지닌 채 낙원에서 살고 있었지만, 이후 타락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의 믿음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실낙원 신화’를 브라질 원주민들의 삶에 투영시켰고, 그것을 통해 원주민들을 서구적 사고로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실낙원 신화’의 바탕에는 다시 두 가지의 사고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순수성의 신화’라고 불립니다. 바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 모습이 순수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믿음은, 신화’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학문적으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서구인들은 원초적인 순수성에 대해 항상 일종의 노스텔지어를 지녔고, 그 순수성을 찾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망에서 ‘실낙원 신화’의 두 번째 전제가 되는 사고인 ‘목적론적 역사관’, 다시 말해 ‘종말론’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순수성으로부터의 ‘타락’에서 다시 ‘순수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발상입니다.
 
 ‘순수성의 신화’와 ‘종말론’이라는 근본적 사고는, ‘인식론’과 ‘역사학’이라는 서구의 두 가지 주요 학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먼저 순수한 의미, 순수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찾고자 하는 노력은 ‘인식론’을 낳았습니다. 플라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개념의 ‘진실한 의미’, ‘참된 의미’를 찾기 원하였고, 이를 단어에 대해 ‘정의(definition)’내리는 작업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한 ‘이데아(Idea)’ 역시, 타락한 의미가 섞여 있지 않은, 완전히 순수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철학적 발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후에까지 이어져 학문에서는 ‘인식론’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역사학’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인간의 삶을 ‘타락’에서 ‘순수’를 찾아나가려는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서구는 역사의 개념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데리다가 보기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서구의 근본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선한 얼굴의 뒤편에 숨겨져 있는 악마의 얼굴.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구조주의에조차 위계화가 숨겨져 있고, 차별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구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이러한 위계화와 차별이 나치의 ‘인종주의’로 표현되어 수많은 폭력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개념적으로 중요한 연결 고리가 생겨납니다. ‘순수한 의미’에 대한 열망은 ‘판단문’으로 구성되고,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정신적 영역은 ‘이성’입니다. 그리고 그 이성은 ‘목소리’로 표현될 때 가장 잘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소리에 잡스러운 것이 끼어들게 되면 의미 전달 과정에서 타락이 일어납니다. 이때 목소리를 타락시키는 잡스러운 것들을 통칭해서 ‘문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문자들 중에서 ‘표음문자’는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나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에 비해 상형문자나 표의문자는 저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상형문자’와 ‘표의문자’를 토대로 세워진 ‘동양 문명권’은, ‘표음문자’를 토대로 세워진 ‘서양 문명권’보다 저급하다는 결론까지도 나옵니다. 데리다는 바로 이 모든 생각들이 결국에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심지어 서구적 양심의 목소리에서조차 이러한 생각이 메아리치고 있었다는 점을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참고
서동욱, 『해체주의』(대학강의), 서강대학교, 2012. 3. 5.
서동욱, 『철학연습-서동욱의 현대철학 에세이』, 반비, 2011.
자크 데리다, 김웅권 옮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東文選, 2004.
[출처] 해체주의: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작성자 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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