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⑫ 대타관계의 변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⑫ 대타관계의 변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⑫ 대타관계의 변화 2004/09/24 22:26 http://blog.naver.com/heepom/6041930「존재와 무」에서 인간관계를 갈등의 관계로 규정한 것은 철학적인 의미에서였다. 전편을 통해 반복 강조되고 있는 인간의 자유도 정치적 자유나 경제적 예속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는 갈등의 초점과 계기가 물질적이고 경제적이어서「존재와 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인간들 사이의 갈등은 물자의 부족(raret )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는 결핍에 의해 발생된 긴장의 영속적 맥락속에서 발전되었다. 최초의 원시인들은 광대무변한 지구상에서 먹을 것이나 잘 곳의 부족함을 몰랐을 것이다.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과일을 따먹고, 물고기나 동물을 잡아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동굴이나 큰 나무둥치 아래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그 중의 똑똑한 사람들이 아무 곳에나 말뚝을 박고 『이건 내 땅이다.』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같은 인구의 증가와 사유재산의 편재(偏在)로 말미암아 지구상에는 최초의 부족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렇게되면 인간은 서로 부족한 물자를 놓고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데 인구는 점점 증가하고, 기득권의 확대로 사유재산의 편재는 점점 더 심화된다. 가히「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이리」(Homo hominis lupus)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이러한 갈등과 투쟁의 역사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이와같은 결핍의 장(champ de raret )에서 이루어진다. 결핍은 생명의 재생산에 필요한 요소들의 수량적 부족이다. 이 현상은 주어진 것이고, 사실상의 필연성이다. 그것은 우연적이지만 그러나 엄연히 존재한다. 타자와의 만남이 결핍의 장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족한 식품을 쟁취하기 위해 타자가 나와 경쟁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만남은 나 자신에게, 혹은 그 자신에게 죽음의 위협이 될 수 있다. 타인은 내 죽음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 또한 타인의 죽음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와 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는 부정적 상호성의 관계이다. 즉 결핍에 의해 소외된 상호성이다.그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잔인성의 의미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성은 타락한 인간성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죄의 과실도 아니다. 그것은 결핍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러나 이 갈등이 아무리 심각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연적인 현상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당한 낙관주의를 허용한다. 「존재와 무」에서는 인간관계의 갈등현상이 의식의 대자적 성격 자체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는 물질적 수요공급의 불균형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와 무」에서의 갈등은 인간존재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의 갈등은 우연적인 요인에 의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의식의 대자적 성격은 의식 자체의 내면적인 본질에 속하지만, 물질적 자원의 부족은 의식의 본질과는 무관한 우연적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의 해소라는 측면에서는「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존재와 무」보다 한층 더 낙관적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족은 생산성의 향상으로 해소될수 있는것이지만 존재론적 갈등은 해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갈등은 우리가 각자의 수요에 따라 물자를 배분받는 물질적 낙원에 진입했을 때도 여전히 우리를 기다릴 것이며, 또 계급없는 사회가 도래하더라도 타인은 여전히 지옥일 것이기 때문이다.공동집단으로서의 '우리' 라는 개념도 「존재와 무」에서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설사 우리 모두가 하나됨을 느끼는 공동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 감정은 우리의 여러 의식을 통해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하나' 라는 느낌은 개인적 느낌들의 합계일 뿐 「하나의 종합적 전체로서, 각 부분들을 능가하고 감싸는 상호주관적 의식」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싸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우리'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동일할 구조로 파악하는 제3자의 출현에 따라 그 '우리'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공동집단은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존재와 무」에서는 '우리'의 개념이 영원히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사르트르는 산재집단(散在集團, s rie)과 융화집단(融化集團, group-en-fusion)의 개념을 만들어, '우리'의 개념을 창출했다. 산재집단이란 버스를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 같은 집단이다. 버스는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고,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에 밀접해 있지만, 그러나 실상 그들은 서로 딴 사람들을 좌석 경쟁자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서로에게 전혀 무관심하다. 대부분의 사회집단은 이런 차원이다.산재성(散在性, s rialit )은 인간을 사물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개인들은 버스, 사무실, 신문, 횡단보도 등의 집합체(collectifs) 에 의해 끊임없이 물화(物化)된다. 이 모든 집합체들은 그에게 말을 걸고, 그의 방향을 결정해 주고, 그를 조종하고, 그에게 어떤 자리를 지정해준다. 그런데 이 지정은 그의 인격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불특정의 '어떤'(quelconque) 사람으로, 다시 말해서 그 누구하고라도 바꿔치기할 수 있는(interchangeable), 물건같은 사람으로서이다. 산재성은 상호성을 밀쳐낸다. 각자는 다른 누구와도 같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이 없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결합되지 않는 다수의 물질성에 종속되어 있다. 각자는 외부로부터 조건지어지고, 그 조건화에 복종한다. 비록 그가 거기에 반감을 갖는다 하더라도(TV프로에 동의하지 않는 TV시청자처럼) 그는 자신의 반항의 무력감만을 느낄 뿐이다. 산재 관계의 성격은, 비록 개인들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각 개인에게 집합체의 요구에 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개인이 거기에 복종하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이러한 불가능성의 인식에서부터 집단(groupe)이 생겨난다. 집단은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자유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이제 집단은 무기력하고 타성적인 숫자가 아니라 결합이 되었다. 산재성 대신에 상호성이 들어섰다. 각자는 각자에 대해서 동등하지만 그런 누구하고라도 바꿔치기할 수 있는 상호교환의 동일성이 아니다. 개인은 모두 그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개인들은 이제 산재성의 그 고착적인 타성에서 벗어나 융화집단(groupe en fusion) 속에 용해된다. 융화집단은 대혁명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군중같은 집단이다. 개인들은 공통의 위협을 통해 공통의 자유로 융합된다. 집단의 실천(praxis)은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실천에 의해 행해진다. 이러한 실천 속에서 타자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다수의 나 자신이 있을 뿐이다.「존재와 무」에서 언급된, 대상으로 떨어지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서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대형의 대자인 셈이다. 집단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각기 개인적인 의식이지만 그 개인성은 집단의식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사르트르는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여기서도 역시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대형 대자인 집단은 수명이 덧없어서 급속도로 퇴락한다. 공동의 과업이 실패할수도 있고, 집단이 형성되자마자 해체되고 분쇄되는 경우도 있다. 반란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더 이상 밀고 나가지 못하거나, 그들의 승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예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무수하게 보고 있다. 바스티유 습격이라는 극적인 융화의 순간이 지나가면 개인들은 각기 자기의 이해관계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파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노동자들은 각기 자기의 이기적인 몫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융화집단의 첫단계에서 각자의 실천은 자발적으로 행해지고, 각 개인의 의식은 전체의 행동과 기획 속에서 용해된다.그런데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각자는 타인의 어떤 강요가 없이는 자기 내분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어렵다는것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도 이처럼 이완되지 않을까, 또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 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제 위협은 그룹 구성원 자체로부터 나온다. 그리해서 각자는 타자 속에서 위협을 감지한다. 이때 융화 그룹은 이 위협을 막기 위해 단결의 서약을 한다. 이 서약은 각자에게 무장을 풀지 않도록 결심하게 만든다. 각자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맹세를 해야하며 이것이 그의 변심을 막아주는 유일한 보장책이다. 그러나 서약을 함으로써 각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자유에 선을 긋는 것을 수락한 셈이다. 산재성(s rialit )의 강제성과 무기력증(타성, inertie)에서부터 벗어나자 마자 각자는 이 산재성과 타성으로의 회귀를 막기위해 이번에는 자기 자유 의사로 타성을 다시 떠맡는다. 여기서부터 우애적(友愛的) 테러(fraternit -terreur)가 시작된다. 즉 이때까지 상호성 속에서 완전히 자유였던 집단이 모든 구성원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고, 모든 구성원도 각기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압력이란 그 구성원을 판단하는 권한과 처벌하는 권한을 의미한다.구성원들은 여전히 상호성의 관계 안에 있기는 하지만 처음에 자발성 속에서 행사되던 상호성은 이제부터는 고착되고, 어떤 틀 속에 규정된다. 자기가 다른 구성원을 평가하고 벌주는 권한이 있는 반면, 자기도 다른 구성원에게 평가받고 벌 받을 개연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상호성의 형태를 사르트르는 우애적 테러(fraternit -terreur)라고 불렀다. 동지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폭력이라는 뜻이다. 이 단계가 되면 집단은 제도화한다. 서약을 한 집단이 그 목표를 분명히 하고 힘과 영향력을 늘려가고, 장기적 행동 방침을 설정해감에 따라 이 집단은 융화그룹으로서의 유연성을 점점 더 상실한다. 집단이 커짐에 따라 우선 구성원들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게되고, 수행 업무가 다양해짐에 따라 하위그룹의 형성과 인력의 전문화가 불가피해진다. 이렇게 되면 기능과 권한이 분산되어 어떤 특정인들에게 결정의 권한이 위임된다. 비록 아직도 구성원들은 상호성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개인적 실천의 자유가 계속 행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각자는 타인 속에서 정확하게 동등함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우애적 테러가 강제성의 폭력을 도입함과 동시에 집단은, 그들이 최초에 대항하여 싸웠던 인간소외 현상을 다시 집단에 들여온다. 집단을 좀더 잘 유지시키기 위해서 각 개인은 공동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기를 객관화한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는 점점 더 침묵을 강요당한다. 산재성의 집단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이 집단 안에서 점점 더 소외되어 간다. 최초의 융화집단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고작해야 경직된 관료주의나 공포정치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타성화한 실천」(pratico-inerte)이라고 불렀다.대타관계의 이상적인 형태는 나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그와 수평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순간일 것이다. 자기 의식에 이르는 것은 곧 자기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고, 자기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타인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목적의 왕국」(cit des fins)으로 명명했던 상태일 것이다. 즉 「타인 속의 인간성을 단순히 수단으로만 취급하지말고 동시에 언제나 목적으로 취급하라」는 낙원의 정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저히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그래서 만민의 평등 이념을 기초로 세워진 나라들이 여전히 새로운 특권계급, 새로운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 체제를 뒤엎는 혁명들이 줄을 잇고 있지 않는가? 타성화한 실천의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체제가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건설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그러면서도 모든 인간이 완벽하게 서로를 인정하는 불가능한 사회를 꿈꾸며 끝까지 마르크시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사고가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를 책임감 없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년에 플로베르 연구에서 보여 준 순수문학에의 열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평생 몸바친 투쟁적 마르크시즘이 얼마만큼이나 그의 진실이었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문학의 사회 참여 이론은 말년에 와서 완전히 퇴색했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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