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⑪ 죽음 2004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⑪ 죽음 2004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⑪ 죽음 2004/09/24 22:21 http://blog.naver.com/heepom/6041838타자와의 투쟁에서 최종적인 패배는 죽음이다.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평가를 거부할 수 없고, 그들의 판단이 오류였음을 나의 행위로 증명할 수도 없다. 이후부터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이것 또는 저것일 뿐이고, 내가 앞으로 도저히 수정할 수 없는 어떤 성질과 특징들의 총합이 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타자에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즉자에 의한 대자의 선취(先取, reprise)라고도 할수 있다. 죽음은 왜 이처럼 일방적인 패배일까? 이 문제에 있어서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우리의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죽음이 우리의 가능성이 아니라 출생과 마찬가지로 사실성(facticit )이라고 했다.그 이유를 살펴 보기로 하자. 의식의 무화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 그것이 다름아닌 소여(所與, donn )이다. 소여가 없이는 의식도 없다. 그러나 소여에서부터 의식이 생겨난다고 해서 소여가 의식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단순히 소여를 부정할 뿐이다. 의식은 존재하는 어떤 소여에서부터 빠져나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목표 속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 내적 부정(n gation interne)은 대자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물러서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이러한 내적 부정이 없다면 인간은 그저 단순한 소여가 되고 말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쇄신이 없다면 인간은 한번 정해진 대로 일생 동안 변화도 발전도 없이 똑같은 인생을 살 것이다. 하나의 단순한 소여가 되지 않기 위해 대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고 물러서며, 조금 전에 자기 자신이었던 모습을 하나의 자료(datum)로서 자꾸만 뒤로 보낸다. 인간이 과거의 자기 존재 속에서 어떤 도움이나 버팀목을 발견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대자의 성격 때문이다.인간의 과거는 그의 미래의 조명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현재와 미래로 연결되지 않는 과거의 화려한 경력은 결코 그의 인생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챔피언 자리를 뺏긴 과거의 세계 챔피언,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과거의 베스트 셀러 작가, 인생에서 낙오한 학창 시절의 우등생 등을 생각해보라. 과거의 화려한 경력은 그를 평가하는 하나의 자료(datum)일 뿐, 결코 현재의 그의 존재를 떠받쳐 주지 못한다. 대자는 앞으로 존재할 어떤 것에 비추어 과거의 존재를 있게 하는 존재이다. 대자의 이러한 능력이 자유이다. 그런데 자유란 앞에서도 보았듯이 어떤 소여나 성질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음」(rien), 즉 무(n ant)이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선택없는 자유란 없다. 그러므로 대자의 자유는 항상 무슨 일인가 착수해(engag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정해지지 않은 불특정의 가능성(possibilit ind termin e)이나, 또는 자기 선택에 선행해서 존재하는 자유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나의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행위(projet)는 뭔가 내가 목표를 정해 놓았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목표의 선택 없이는 기획의 투사도, 무화도, 따라서 자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자살이나 순교 등, 자기의 죽음을 목표로 삼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대자의 존재 양식인 자유의 차원이 아닌 별개의 차원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완결성(finitude)으로 보고, 이것을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써 인간 존재는 전체성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유로운 선택이란 우리가 즉자 존재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행하는 자기쇄신이다.이처럼 영원히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필연성은 나의 모습을 「쫓기는 쫓음」(poursuite-poursuivie)의 형태로 만들어 준다. 하나의 선택은 다른 여러 선택들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비록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공공연히 눈앞에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 선택에 대해 확신감이 없고 왠지 불안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벌써 여러 선택의 가능성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첫 번째 선택도 나의 자유이지만, 그 외의 선택을 하는 것도 나의 자유이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또 다른 나의 자유를 침식해 들어간다. 자유로우므로 나는 나의 가능성을 앞으로 투사하고, 또 그러한 투사의 운동에 의해 나는 자유롭다. 그런데 내가 죽음의 방법을 스스로 택하여 자살이나 순교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것이 진정한 나의 실존적 선택인가? 그렇지 않다. 죽음을 나의 불특정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의 기획(projet)은 다른 모든 기획, 다른 모든 선택을 전제로 하는데, 죽음이란 모든 기획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자의 영원한 모습은「쫓기는 쫓음」인데 죽음을 추구했을 때는 「쫓김」만 있고 더 이상 「쫓음」이 없는것이다. 죽음이라는 시점에서 그냥 중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자의 삶이 아니다. 죽음은 내 고유의 가능성일 수도 없고, 내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주장과는 반대로 죽음은 내 자신의 가능성이기는 커녕 원칙적으로 내게서 벗어나고, 근본적으로 내 사실성에 속하는 우연적인 사실이다. 죽음은 전혀 내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 안에 들어있지 않다. 적어도 내가 대자인 한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다만 내 존재 안에 나와 별개인 어떤 치명적인 것이 들어있을 뿐이다. 대자적 존재 안에는 죽음이 있을 자리가 없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도 없고, 그것을 향해 나의 기도를 투사할 수도 없다. 죽음은 전혀 나의 완결성이 아니다. 내 존재의 원초적 양상인 자유의 투사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대자의 외부에 어떤 성질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어떤 사실성의 양상, 다시 말해서 소여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발견할 수도, 기다릴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도 없다. 죽음은 출생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사실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나에게 오고, 외부로부터 나를 변형시킨다. 근본적으로 죽음은 출생과 구별되지 않는다. 출생과 함께 죽음도 우리의 사실성(事實性, facticit )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세상에 태어난 것도 부조리(不條理, absurde)하고, 또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죽는다는 것도 부조리하다. 이 부조리성(absrudit )은 내 가능-존재( tre-possibilit )의 영원한 소외라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하면 나의 존재는 이제 더 이상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타자의 가능성이다. 「무덤 없는 주검」의 다음 대사는 죽음에 의한 가능-존재의 소외를 잘 보여주고 있다.네가 만일 오늘 죽는다면 사람들이 너의 존재를 확정지을 것이다. 즉 너는 자만심으로 그 애를 죽인 것이 된다. 그것은 영원히 고정될 것이다.(Ecoute, Henri : si tu meurs aujourd'hui, on tire le trait : tu l'as tu par orgueil, c'est fix , pour toujours.)(Morts sans s pulture, p.263).나의 자유는 전체적이고 무한정이다. 이것은 죽음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코 이 제약과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길 다른 차원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코 나의 기획들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죽기 하루 전날까지 우리는 힘차게 자신의 인생을 산다. 「나는 죽을 자유는 없다.」(Je ne suis pas ≪libre pour mourir≫.)(E.N. p.632) 다만 나는 자유스러운 치명성(libre mortel)일 뿐이다. 죽음은 내가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므로 나의 기획들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나 또한 나의 기획 속에서 죽음을 벗어난다. 내 주관성 속에는 죽음이 위치할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한계-상황(situation-limite)이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의 밖에 위치해 있는 사실성인 죽음이 그 외부로부터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의미는 주관성(subjectivit )이외의 곳에서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의 근본적 존재양식인 자유의 토대 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우리 인생의 모든 의미를 박탈해 간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유예 상태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자아비판, 자아변신의 능력을 갖고 있다. 살아있는 한 나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의 기획을 투사함으로써 남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뒤집을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외관에서부터 도망치고, 끊임없이 타자에게 또 다시 붙들리거나 하는데, 이 예측불허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승리가 어느 편에 돌아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은 이 싸움에서 갑자기 한쪽 편을 제거함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타자에게 안겨준다.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죽음이건 죽음은 패배이고 무서운 형벌이다. 비록 아까운 죽음이라느니, 1세기에 한번 날까말까하는 천재였다느니하는 칭송을 듣는다 하더라도, 또는 열사로 떠받쳐져 화려한 장례식이 거행된다 하더라도 죽음은 영원한 패배이다. 그를 기리는 말, 그를 열사로 떠받드는 행위마저도 타자가 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타자에 의해서 밖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에게서만 그 자신의 의미를, 그 자신의 승리의 의미까지를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의 존재, 그 자체가 우리를 통째로 소외시킨다. 그것도 전적으로 타자에게 유리한 방향에서이다. 「죽는다는 것,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Etre mort, c'est tre en proie aux vivants.)(E.N. p.628) 산 사람은 항상 옳고 죽은 사람은 항상 그르다. 죽은 사람 셋이 모인 가상의 호텔 방을 무대로 한 희곡 「밀폐된 방」에서 가르생은 그것을 통탄한다.나는 그들의 손에 내 인생을 맡겼다. […] 아! 단 하루라도 그들 사이로 다시 갈 수 있다면… 다 뒤집어 놓을 수 있을텐데! 그러나 나는 장외에 있다. 그들은 나를 염두에 두지도 않는 채 결산을 내리고 있다. 그들만이 옳다는 거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으니까. 쥐새끼처럼 함정에 빠졌다. 나는 공인(公人)의 영역에 떨어졌다.(je leur ai laiss ma vie entre les mains,[…] Ah ! revenir un seul jour au milieu d'eux…quel d menti! Mais je suis hors jeu ; ils font le bilan sans s'occuper de moi, et ils ont raison puisque je suis mort. Fait comme un rat. Je suis tomb dans le domaine public.)(Huis Clos, p.174)여기서 공인(公人)의 영역(le domaine public)에 떨어졌다는 것은 주관성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가 객체로, 대상으로, 다시 말해서 물체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의미이다. 결국 타인과의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는 죽지 않고 살아 남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언젠가 죽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은 패배인가? 사르트르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실패( chec)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대자와 즉자의 종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이지만,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도 역시 인생은 하나의 거대한 실패인 것 같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사르트르는 마르크시즘을 선택했다. 1961년에 나온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융화집단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갈등적 인간관계를 융화적 인간관계로 변형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존재와 무」에서「변증법적 이성비판」으로의 변화를 비교하는 것은 대타 관계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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