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⑨ 권리(droit)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⑨ 권리(droit)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⑨ 권리(droit) 2004/09/24 22:13 http://blog.naver.com/heepom/6041668자신의 자유를 은폐하기 위해 자기 존재를 사물의 존재 양식으로 간주하는 것이 자기 기만이다. 이제 자기 기만의 한 형태로서의 권리 개념을 고찰해 보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또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이 있었던 말은 아마도 「부조리」(不條理, absurdit )와 「정당화 될 수 없음」(injustifiabilit )라는 단어일 것이다. 이 두 말은 거의 같은 뜻으로서 인간은 존재이유나 존재의 필연성이 없는 우연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길가에 구르는 돌맹이는 세상에 생겨나 존재하고 있을 하등의 이유도 없고, 실현시켜야 할 어떤 목적도 없다. 거기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잉여물이다. 그저 단지 우연하게 생겨나 우연하게 그 위치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돌맹이의 존재는 잉여물이고,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고(부조리)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어떠한가? 인간도 돌맹이나 다름없는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은 발견한다.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거추장스럽고 귀찮게 느껴지는 한 더미의 실존자들이다.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있을 손톱만큼의 이유도 없다. 우리들 모든 실존자들은 혼란스럽고 막연하게 불안감을 느끼며 다른 실존자들에 대해 자신이 잉여물임을 느낀다. 저 나무들, 철책문, 조약돌들 사이에 내가 성립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관계는 「잉여적」이라는 것이었다.[…] 저기 내 앞에, 약간 왼쪽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도 잉여물이다.[…] 그런데 나른하고, 축 늘어져 있고, 외설스럽고, 음식물이나 소화시키고 있고, 우울한 생각이나 머리 속에서 굴리고 있는 나는, 나 역시 잉여물이었다.(Nous tions un tas d'existants g n s, embarass s de nous-m mes, nous n'avions pas la moindre raison d' tre l , ni les uns ni les autres, chaque existant, confus, vaguement inquiet, se sentait de trop par rapporr aux artres. De trop: c' tait le seul rapport que je pusse tablir entre ces arbres, ces grilles, ces cailoux.[…]Et moi - veule, alagui, obsc ne, dig rant, ballotant de mornes pens es - moi aussi j' tais de trop)(La Naus e, p. 180-181)신이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사람도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나 목표가 없다. 어떤 임무를 띄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괜히 우연하게 태어나, 왜 사는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표류하다가, 출생만큼이나 우연하게 또 갑자기 죽는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신이 나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고, 그 임무를 수행하라는 대가로 나를 이 세상에 내보냈다면 나의 생은 공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얼마큼의 값을 치른 것이고 따라서 나의 인생은 그 만큼의 값이 나가는 당당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은 그냥 공짜로 주어졌다.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상성(無償性, gratuit )이다. 자기원인(cause de soi)도 없고, 임의적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하는 이 무상성은 결국 우연성과 같은 뜻이다. 한글에만 익숙해 있는 독자들은 무상성(無償性)을 무상성(無常性)과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인생무상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할 때의 무상(無常)함이란 인생사의 덧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얼굴에 주름이 진 늙은 노파의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 시절 사진을 보면 우리는 인생이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상성(無償性)은, 공짜로 밀가루를 배급하는 무상배급, 6.25때 미국이 대가없이 우리에게 준 무상원조, 의무교육 대상 아동들에게 실시하는 무상 교육 등의 말과 마찬가지로, 아무 대가 없이 공짜로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공짜로 생긴 물건을 우리는 별로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쓸데없는 물건이므로 잉여물(de trop)이다.로깡땡의 까닭모를 구역질은 이 엄청난 사실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마치 자신의 삶에 필연성이 있는 듯이, 자신에게는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 듯이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 우리 인간은 이처럼 존재근거가 없이 유동적이고 어처구니 없다(absurde). 게다가 우연성과 무상성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근본적인 존재양식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이다. 그저 외관에 불과해서 우리가 문질러 닦으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로깡땡의 심장은 빙빙 돌고, 모든 것이 허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게 바로 구역질(Naus e)이었다. 그러나 실존의 이러한 근본적인 존재 양식을 모든 사람들이 다 느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살고 있고, 또 그것을 느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우연성은 은폐하고, 눌러 없애려 한다. 「나는 어떤 자리에 꼭 필요한 존재다」, 또는 「나의 생존에는 이러 저러한 원인이 있다」등의 구실을 만들어 냄으로써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살로」(Salaud, '치사스러운 놈'이라는 욕)라고 부른다. 이것은 「셰프」(chef 지도자, 우두머리)라는 말과 함께 사르트르에 의해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프랑스 사회의 지배계급, 즉 부르주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2차대전 이후에야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격렬한 마르크시스트 투사가 되었지만 부르주아지에 대한 강한 증오심은 이미 이차대전 전, 그가 아직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던 시절, 철학 소설 「구토」를 쓸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토」의 다음 구절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게 구토다. 살로들은 자신의 권리 개념으로 이것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 무슨 불쌍한 거짓말이란 말인가. 아무에게도 권리는 없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무상적(無償的)이다. 그들도 자신을 잉여물로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도 속으로는 은밀하게 자신이 잉여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무기력하고, 희미하고, 슬픈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voil la Naus e ; voil ce gue les Salauds […] essaient de se cacher avec leur id e de droit. Mais quel pauvre mensonge : personne n'a le droit ; ils sont enti rement gratuits, comme les autres hommes, ils n'arrivent pas ne pas se sentir de trop. Et en eux-m mes, secr tement, ils sont trop, c'est- -dire amorphes et vagues, tristes.)(La Naus e, p.185).자신의 무상성을 은폐한다는 것은 우리가 앞 장에서 본, 자기기만의 의도와 동일한 것이다. 자신의 대자적 존재, 무, 자유를 굳이 부정하고 자기를 사물의 존재 양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기기만이었다. 그런데 살로로 명명된 부르주아들은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자기기만을 시도한다. 그 누구도 사람에게는 살 권리가 없는데,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는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인데, 부르주아들은, 마치 자기들에게만은 살 권리가 당당하게 주어져 있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로깡땡이 방문한 부빌 시립 박물관의 초상화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살로들이다. 그들은 모두 오늘(1930년대)의 부빌시를 있게한 공로자들로써 부빌시의 지도계급이었다. 그 초상화 인물들에 대한 사르트르의 묘사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탁월한 풍자화이다. 그 냉소와 풍자의 중심 개념은 물론 권리 개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듯이 믿고 있다. 살 권리, 일할 권리, 부(富)를 소유할 권리, 남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 남의 존경을 받을 권리, 그리고 하다못해 영생을 얻을 권리까지도 말이다. 그들은 어려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잘 양육될 권리, 흠잡을 데 없는 가문과 번창하는 사업의 상속자가 될 권리, 남편이 되어서는 보살핌을 받을 권리, 부드러운 애정에 감싸일 권리, 아버지로서는 존경 받을 권리, 남의 웃사람으로서는 군말없이 남의 복종을 받을 권리를 요구한다.이때 웃사람이라는 뜻으로 사르트르는 내내 chef 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들은 마치 순수 권리(사르트르는 이것을 Droit Pur 라고 대문자로 썼다)로 뭉쳐져 있는 것 같다. 이 당당한 권리의 화신 앞에서 로깡땡은 자기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더욱 더 자신은 존재할 권리가 없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훌륭한 가문, 아름다운 아내, 공부 잘하는 자식, 그리고 우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자신에게는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없고, 현실에 뿌리박을 만한 아무런 구체적인 삶이 없어서 권리의 개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정, 직장, 사회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자신은 마치 돌맹이나 풀, 또는 한갓 미생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찮은 풀이나 돌맹이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돋아나고 딩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도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와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권리 개념은 소유의 개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자서전인 「말들」에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한 레스토랑에서 그는 이제 일곱살밖에 안된 주인 아들이 계산대 앞에 앉은 여자 종업원에게 『아빠가 안 계실 땐 내가 주인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저게 진짜 사나이로군!』하며 사르트르는 냉소의 쓴 웃음을 짓는다. 그 나이에 자기는 그 누구의 주인도 아니었고, 자기에게 속한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회상한다.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사망했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얹혀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마치 미혼모가 어린 아이 하나를 낳아 데리고 들어온 것처럼 어머니는 다시 미성년자로 돌아가, 엄격한 할아버지와 신경질적인 할머니 밑에서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가끔 어린 사르트르가 집안을 어지르면 어머니는 아이의 귀에 대고 『조심해! 이건 우리 집이 아니야!』라고 소근대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외손자를 거의 탐익하다시피 사랑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과는 달리, 자신의 인생의 말년을 위로해 줄 일종의 애완물에 대한 사랑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외손자를 죽은 사위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내려준 아이」, 또는 「기적의 아이」취급을 하면서 애지중지했다. 이처럼 의무나 책임, 또는 소유에서 완전히 배제된, 마치 애완물같은 어린 시절의 체험이 자신에게 존재의 가벼움을 가져다 주었다고 그는 실토한다.가족들은 나를, 죽은 사람의 아들이기 보다는 기적의 아이로 취급했다. 아마도 나의 믿을 수 없는 가벼움은 거기에서 유래하는 듯 하다.(Plut t que le fils d'un mort, on m'a fait entendre que j' tais l'enfant du miracle. De l vient, sans aucun doute, mon incroyable l g ret .)(Les Mots, p.13)그 존재의 가벼움은 권리개념과 맞물려 있다.나는 한번도 누구의 윗 사람인적이 없었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 적도 없었다. 명령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다.[…] 내 평생, 그저 재미로 하는 것 말고는, 한번도 남에게 명령을 내려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권력이라는 종양에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복종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Je ne suis pas un chef, ni n'aspire le devenir. Commander, ob ir c'est tout un. […] De ma vie je n'ai donn d'ordre sans rire, sans faire rire ; c'est que je ne suis pas rong par le chancre du pouvoir : on ne m'a pas appris l'ob issance.)(Les Mots, p.13)「파리떼」의 오레스트도 존재의 가벼움을 소유의 문제와 연관시킨다. 왕자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버림받아 남의 손에서 키워졌으므로 그에게는 재산이 없었고, 그것이 그를 마치 허공중에 떠있는듯 가벼운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아무데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듯한 이런 사람들에게는 지붕 위의 빗방울이나 주위의 자연 환경마저 낯설게 느껴지고, 자신이 마치 이방인 처럼 이세상에 얹혀 사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오레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마도 사르트르 자신의 은밀한 고백일 것이다.일곱 살에 벌써 나는, 내가 추방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소리나 냄새, 지붕위의 빗방울 소리, 빛의 떨림 등은 모두 내 몸에서 미끄러져 내 주위에 떨어질 뿐이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해 있으며, 나는 결코 그것들을 내 추억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왜냐하면 추억이란 집과 가축과 하인과 전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가름진 자양분이니까. 그러나 나는… 나는 자유롭다. 아! 얼마나 나는 자유로운가.(Je savais d j , moi, sept ans, que j' tais exil ; les odeurs et les sons, le bruit de la pluie sur les toits, les tremblements de la lumi re, je les laissais glisser le long de mon corps et tomber autour de moi; je savais qu'ils, appartenaient aux autres, et que je ne pourrais jamais en faire mes souvenirs. Car les souvenirs sont de grasses nourritures pour ceux qui poss dent les maisons, les b tes, les domestiques et les champs. Mais moi…Moi, je suis libre, Dieu merci. Ah! comme je suis libre.)(Les Mouches p.27)「말들」에도 이와 흡사한 구절이 있다.만일 아버지가 내게 재산을 물려 주었다면 아마도 내 유년은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므로,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전답과 집은 젊은 상속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를 준다. 그는 조약돌이나 베란다의 마름모꼴 유리창을 만지며 그 물질성을 가지고 자기 정신의 불멸의 실체를 만들었을 것이다.(M'e t-il laiss du bien, mon enfance e t t chang e ; je n' crirais pas puisque je serais un autre. Les champs et la maison renvoient au jeune h ritier une image stable de lui-m me ; il se touche sur son gravier, sur les vitres losang es de sa v randa et fait de leur inertie la substance immortelle de son me.)(Les Mots, p.70)오레스트, 그리고 사르트르 자신이 결핍으로 느끼고 있던것은 권리 의식이었다. 재산을 가진 명문가의 상속자들은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데, 아무런 재산도 없고 가정이라는 확고한 뿌리가 없는 사람들은 권리 의식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을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재산이란 이처럼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내 주는 물건이다. 재산이 없으므로 사르트르는 자신의 존재가 견고하지도, 한결같지도 않다고 생각한다.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재화는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반영해 준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그러하지 않은 모습만을 아르켜 주었다. 즉 나는 견고하지도, 영속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업적의 미래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나는 철강 생산에 꼭 필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나에게는 영혼이 없었다.(Au propri taire, les biens de ce monde refl tent ce qu'il est ; ils m'enseignaient ce que je n' tais pas : je n' tais pas consistant ni permanent ; je n' tais pas le continuateur futur de l'oeuvre paternelle,je n' tais pas n cessaire la production de l'acier : en un mot je n'avais pas d' me)(Les Mots, p.71)그래서 오레스트는 차라리 노예가 부럽다. 노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지쳐있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끝만 바라보고 걷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어느곳엔가 속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 속에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고, 그가 살고 있는 도시는 그의 도시이다. 마치 나뭇잎 속의 잎사귀 하나처럼,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처럼, 아르고스는 그의 주위에 묵직한 무게를 갖고, 따뜻하게, 충만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오레스트가 선망하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 자기가 앉아야할 자리같은 것이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기능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꼭 필요로 하고 있고,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 자기가 당당하게 차지할 자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앙가주망(현실참여, engagement)이다.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고, 어디엔가 구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오레스트가 부러워한 것은 자신의 존재의 무를 채워줄 앙가주망이었다.태어나면서부터 어디엔가 매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 딴 사람이 그들을 어떤 길에 던져 놓았고, 그 길 끝에는 그들을 기다리는 하나의 행위, 그들만의 행위가 있다.(Il y a des hommes qui naissent engag s : ils n'ont pas le choix, on les a jet s - sur un chemin, au bout du chemin il y a un acte qui les attend, leur acte ; )(Les Mouches, p.26-27)자기 아닌 딴 사람이,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에게 어떤 길을 마련해주었다는 것, 또 그 길의 저 끝에는 자신만을 기다리는 어떤 행위가 있다는 것, 이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의 삶의 양식이다.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는 기업가의 아들, 또는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변호사나 의사가 되는 양가집 자제들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개념이 「파리떼」와 「말들」에서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리떼」에서는 존재의 가벼움이 행동 이전의 원초적 자유를 뜻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행동, 다시 말해서 현실에의 참여(앙가주망)라는 무게가 주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오레스트는 행동을 갈구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아르고스 시민의 추억과 공포와 희망을 나눠 갖게 해 준다면, 그리해서 그들 사이에 끼어 살수 있는 시민권을 그에게 부여해 준다면, 그는 주저 않고 그 행동을 할 것이다. 그가 자기의 친어머니를 살해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도 이러한 일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행동을 한 후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가벼운 자유가 묵직한 무게를 갖게 된 것만이 기뻐서 어쩔줄을 모른다.나는 나의 행위를 했고, 이 행위는 좋았다. 뱃사공이 손님을 태워 나르듯이 나는 내 어깨에 나의 행위를 실어 나른다.[…] 그것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나는 더욱 더 그것을 즐길 것이다. 왜냐하면 내 자유가 바로 그것이므로. 어제만 해도 나는 아무렇게나 땅 위를 걸었고 수천 개의 길이 내 발 밑에서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그 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해 있으므로. 나는 배 끄는 사람의 길, 노새 몰이꾼의 오솔길, 마차꾼의 포장 도로등 모든 것을 빌렸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단 하나의 길이 있다. 어디로 난 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길이다.(J'ai fait mon acte, Electre, et cet ace tait bon. Je le porterai sur mes paules comme un passeur d'eau porte les voyageurs [...]. Et plus il sera lourd porter, plus je me r jouirai, car ma libert , c'est lui. Hier encore, je marchais au hasard sur la terre, et des milliers de chemins fuyaient sous mes pas, car ils appartenaient d'autres. Je les ai tous emprunt s, celui des haleurs, qui court au long de la pav e, et le sentier du muletier et la route pav e des conducteurs de chars : mais aucun n' tait moi. Aujourd'hui, il n'y en a plus qu'un, et Dieu sait o il m ne : mais c'est mon chemin.)(Les Mouches, p.92)그러나 「말들」에서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렇게 타기할만한 대상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당당한 권리가 없이 허공중에 떠있는 자신의 존재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자신을 기차표 없는 무임 승차객에 비유한다. 의자에서 잠이 들었는데 여객전무가 흔들어 깨운다. 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표도 없고, 즉석에서 표를 살 돈도 없다. 신분증도 집에 두고 왔다. 객찰원을 어떻게 속이고 들어 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불법으로 기차에 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황하여,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초라한 무임 승차객, 그것이 자신의 존재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자기 몫으로 남겨진, 자기만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어릴 때 집에 드나들던 시모노씨에 대한 회상에서도 「자리」에 대한 선망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외국어 학원에서 파티가 벌어졌다. 어머니는 쇼팽의 곡을 연주했고,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모든 독일 유학생들이 서로 프랑스어를 말했으며, 어린 사르트르는 마치 천사처럼 사뿐사뿐 손님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할아버지가 『여기 안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군. 시모노씨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르트르는 혼잡한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하나의 기둥이 우뚝 솟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것은 육신이 부재중인 시모노씨의 모습이었다. 손님들로 가득 찼고, 어떤 학생은 아파서 안 나왔거나 또는 일찍 핑계를 대고 가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부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시모노씨의 존재만이 부족했다. 사르트르는 한 인간에게,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Je m'emerveillai qu'un homme e t sa place fait.)(Les Mots, p.74).어디에 있든 자신은 여분의 존재, 잉여적인 존재인데, 그런 자기와 비교할 때 시모노씨의 당당한 위치는 부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마치 석고상 같고, 돌기둥 같기만 하던 시모노씨가 이 세계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불가결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사르트르는 한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자기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나, 마치 물처럼, 빵처럼, 공기처럼,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모든 인간은 본래 어떤 자리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무상적이고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기본 속성을 무시하고, 어떤 허구의 가건물을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은폐하려 하므로 그들은 자기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당당한 표정이나 행동은 영낙없이 석고상이나 돌기둥을 닮았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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