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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⑧ 자기기만(Mauvaise foi)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⑧ 자기기만(Mauvaise foi)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⑧ 자기기만(Mauvaise foi) 2004/09/24 22:11
http://blog.naver.com/heepom/6041624

자유가 너무나 무섭고 괴로운 것이어서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은폐하고 싶어한다. 그 하나의 방법이 자기기만(mauvaise foi)이다. mauvaise foi는 직역하면 「잘못된 신념」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짓말과는 구별되는, 부정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공포와 불안의 차이와 비슷하다. 공포는 세계 안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자신 앞에서의 불안이었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은 초월적 대상(의식 밖에 있는, 의식이 아닌 어떤 물체)인 어떤 진실에 대해 말 또는 행동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기만은 자기에 대해, 자기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에서 불안이 유래한다. 사물은 우리가 부여한 의미를 가지며, 상황을 규정하는 의미체계는 우리에 의해 세계에 부과된 것이다. 영원히 절대적인 가치체계란 없다. 의미란 결코 사물에, 다시 말해서 즉자존재 안에 영원히 새겨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즉자존재로부터는 의미를 도출할 수 없고, 모든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나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그리해서 나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없다. 이 가증스러운 자유를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이 자유 이외의 아무것에도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불안이다. 그런데 의미가 사물 속에, 세계의 객관적 조직 속에 짜 넣어져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방식은 자유이며 무 그 자체인데 그것을 마치 사물이나 객체의 존재방식, 다시 말해 즉자적 존재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것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자유로우며 우연적인 존재임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심각한 사람」(esprit s rieux) 이라는 말로 비꼰다. 이런 망각은 자유의 은밀한 부정인 동시에 불안을 회피하는 한 방법이다. 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자기기만은 자기와 자기가 일치하지 않는 의식의 존재방식 때문에 가능하다. 돌맹이처럼 자기와 자기가 완전히 일치해 있고, 자기 존재가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존재라면, 거기에는 자기기만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자기기만의 과정은 어떤 경로를 거치는가? 우리는 다른 여러 가능성들을 가능성으로 간주하기를 피하면서 어떤 하나의 가능성만을 선택한다. 그런데 우리가 택한 이 하나의 가능성이 순수한 무화적 자유에 의해 떠받쳐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기존의 어떤 대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치 타자나 사물인듯이 밖으로부터 포착하려고 시도하면서 불안을 회피한다.(Ainsi, fuyons-nous l'angoisse en tentant de nous saisir du dehors comme autrui ou comme une chose.)(E.N. p. 81) 보들레르가 그랬다.
그는 단숨에 반성의 차원에 올랐다. 왜냐하면 자신의 타자성을 포착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타인이듯이 자기를 보았고, 또 보기를 원했다.[…] 보들레르는 자기 눈 앞에서 자신을 물체로 구성하려 했다.(il s'est plac sur le plan de la r flexion parce qu'il voulait saisir son alt rit . […] Il se voit ou tente de se voir comme s'il tait un autre. […] Baudelaire tente de se constituer en objet devant ses propres yeux.)(Baudelaire, p. 104-105)
 
이런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불안을 눌러 없애거나 은폐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는 우리 외부에 있는 한 대상(물체)을 은폐시킬 수는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독립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딴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나와 그 대상의 실재(實在, r alit )는 각기 자기 삶을 영위하게 되며, 나의 의식이 그 대상과 맺었던 우연한 관계도 사라지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의 사라짐이 서로 상대방의 실존을 변질시킨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내가 탁자에서 눈을 떼어 벽의 그림을 바라본다고 해서 탁자의 존재가 달라지는 것을 전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은폐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나자신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내가 보고싶어하지 않는 내 존재의 어떤 양상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그 양상을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거기서 눈을 돌리기 위해서 나는 내 존재 안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지시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내가 도망치고 싶어하는 그 대상을 영원히 내가 지니고 다녀야 할뿐만 아니라 내내 그것을 목표물로 삼아야만 한다.
 
결국 불안은 불안의 지향적 목표물이며 동시에 확실성의 신화를 향한 불안의 도피이다. 즉 불안은 불안이 불안해하는 대상인 동시에 그 대상으로부터의 도망이다. 이러한 불안은 똑같은 하나의 의식 속에 주어져 있다. 즉 나는 불안을 무시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것을 피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불안의 도피는 불안을 의식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불안은 은폐될 수도, 도피할 수도 없다. 내가 불안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내 자신의 존재에서 약간의 중심 이동을 했다는 의미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안이 아닌 형태」의 불안의 존재이며, 불안의 한 가운데에서 무화의 힘을 갖는다. 이 무화의 힘은 내가 불안을 피하는 것만큼 불안을 무화시키며 스스로를 무화해 간다. 이것이 자기기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의식으로부터 불안을 몰아내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나의 무의식적 정신 현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단지 나는 나의 불안을 자기기만적으로 파악할 따름이다. 나와 나 사이의 무를 메꾸려는 것이 자기기만인데, 이것은 오히려 정확하게 그 무를 암시해 주고 있다.(cette mauvaise foi, destin e combler le n ant que je suis dans mon rapport moi-m me, implique pr cis ment ce n ant qu'elle supprime.)(E.N. p. 82)

우리의 존재는 그 중간에 무(無)가 있기 때문에 초월성의 성격을 띈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와 자기 자신의 지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는 곧 자유와 동의어였다. 이 무(無)인 자유에 의해 나의 존재는 초월성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의연하거나 과거의 실패를 만회할수 있는것도 모두 나의 존재가 초월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서부터 도망치고, 나에게서부터 벗어나 이미 저만치 앞으로 나가 있다. 그러니까 나를 흉보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의 손에 남겨준 나의 존재는 내가 방금 빠져나온 나의 누더기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저만치 나에게서부터 빠져나와, 내 누더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냉소지을 수 있다. 이것이 초월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초월성과 함께 사실성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사실성이란 사물의 방식으로 존재하기인데, 우리의 자유가 미치치 못하는 부분, 다시 말해서 우리의 태생, 나라, 계층, 인종, 외모 등 우리에게 우연히 주어진 조건들이다. 인간이라는 실재의 두 측면은 이처럼 초월성과 사실성이다. 그런데 자기기만은 이 사실성과 초월성 사이에,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존재 양식과 있는 그대로가 아닌 존재 양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자기기만은 나의 초월성을 사물의 존재 양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l'ambigu t n cessaire la mauvaise foi vient de ce qu'on affirme ici que je suis ma transcendance sur le mode d' tre de la chose.)(E.N. p. 96).
 
즉 자기의 존재 양식이 끊임없는 무화 작용의 초월성이라는 것은 인정하는데, 다만 그 초월성을 변화 생성의 운동이 아니라 마치 사물처럼 굳어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성으로 탈바꿈한 초월성, 즉 《초월-사실성》(transcendance-facticit )은 자기기만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도구 중의 하나이다. 불안을 회피하는 방법, 다시 말해서 자기기만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결정론이다. 이때까지 일어난 모든 일, 완결된 모든 일이 그와 다르게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생각이다. 심리적인 결정론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에 미리 결정된 어떤 성격이 있어서, 그것이 그런 행위들을 생산해 낸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즉자 존재의 절대적 실증성을 우리 안에 도입하여 우리를 그저 단지 「지금 현재의 존재」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두번째 수단은 인과율이다. 자유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고 믿으며, 대자의 모든 행동을 인과율이라는 자연 법칙의 결과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매순간의 단절일 뿐 결코 인과율의 연속이 아니다. 한 사람이 평소의 그와는 달리 갑자기 기상천외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의식이 결코 인과율에 종속되는 연속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평상시의 그의 성격이라는 것도 실은 그가 그런 성격을 유지하겠다고 매번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성실성과 감정까지 자기기만으로 간주한다.

어머니의 상을 당한 한 사람의 슬픔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슬프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그의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그의 모든 슬픔의 행동들을 합쳐놓은 의도의 덩어리일뿐이다. 즉, 슬픈 시선, 축 처진 어깨, 아래로 떨군 머리, 완전히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 몸매 등이 합쳐진 통일체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의 순간에도 그는 완전히 슬픔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한 조문객이 나타나면 나는 머리를 쳐들고 평상시의 생생하고 활기있는 자세를 되찾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슬픔이란 하나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슬프다는 것은 슬픈 자신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스스로에게 슬픔의 존재를 만들어 준다는 것은 마치 물건처럼 이 존재를 다른 데서 받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의 성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슬픈 존재」란 마치 내가 친구에게 책을 하나 건네주듯 그렇게 나에게 줄 수 있는 기성품의 존재가 아니다. 슬프다는 것은 슬픔의 처음부터 끝까지 슬프도록 스스로 나를 만드는 행위이다. 슬픔의 감정을 재창조하거나 다시 취하는 행위없이 그저 최초의 감정적인 도약만으로 슬픔을 지속시킬 수는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최초의 쇼크는 나를 슬프게 하여 처음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실컷 울고 나서 눈물이 마를 때 쯤 되어도 나는 조문객 앞에서 눈물을 짓거나 비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때의 나의 심리 상태를 미세하게 분석해보면 분명 거기에는 이미 최초의 슬픔을 없다. 그런데도 장례 기간이나 그후의 얼마동안 계속 내가 슬플 수 있는 것은 매번 내 의식 속에서 슬픔을 되살리려는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가짜 슬픔을 가장한다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분노건, 우리의 감정은 책처럼 건네주고, 건네 받을 수 있는 그런 즉자적인 사물이 아니다. 따라서 한번 촉발되면 마치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물체처럼 그렇게 관성의 법칙을 따라 끝까지 같은 모습으로 유지되는 그런 물체가 아니다. 의식 작용이므로 그것 역시 우리의 기획(企圖. projet)의 하나이고, 따라서 매 순간의 쇄신만이 그것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유지시켜 준다. 의식은 사물이 아니므로 거기에는 관성의 법칙이 없다. 내가 슬픔을 표시하는 행위에 의해, 그리고 그 행위 속에서, 슬픔이라는 존재는 나에게서 빠져나간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번 나는 그것을 붙잡아야만 한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성격은 실상 이런 메카니즘을 갖고 있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 자신이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이 되어 보고, 그런 모습의 인간이 되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글에서 마치 강박관념 처럼 자주 나오는 말, 「연극을 하다」(jouer la com die)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외교관은 외교관의 연기를 하고 있고, 신문기자는 신문기자의 연기를 하며, 카페의 종업원은 카페 종업원의 연기를 하는 것이다.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는 카페의 웨이터는 자신이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와 다를 게 없다. 머리 속에서 그가 그리고 있는 전형적인 웨이터의 상에 따라 그는 기계적인 제스추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카페의 웨이터라는 즉자적 존재이다. 여기에는 초월성이 없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을 일종의 사물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웨이터의 일관된 모습을 유지한다 해도, 그것은 매 순간 그가 웨이터이기를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은 그의 행동을 통하여 순간마다 재확인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다. 대학 교수도, 신문 기자도, 매번의 강의, 매번의 취재 때마다 자신의 선택을 재확인한다. 정년 퇴임한 노교수가 강의 때마다 매번 불안했다고 실토한 것은 인간의 이러한 대자적 성격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단 어느 경지에 달했으므로 이제는 자기 직업의 수행에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의 대자존재가 유연성을 잃고 즉자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 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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