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⑦ 불안, 자유의 포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⑦ 불안, 자유의 포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⑦ 불안, 자유의 포기 2004/09/24 22:08 http://blog.naver.com/heepom/6041566보들레르의 근원적인 선택은,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의존적인 삶의 편안함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평생, 마치 철없이 낭비하는 불량 학생처럼 돈을 구걸해야 했고, 여러 법정 후견인들의 은혜에 매달려야 했다. 영원한 미성년자, 늙은 청소년으로 일생 어머니와 의부, 후견인들을 증오하며 분노 속에서 살았지만 그러나 딴 사람들의 확실하고도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 자유와, 그에 따르는 고통스러운 책임감을 완전히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매맞는 사람에 비유한다. 보들레르는 기꺼이 매맞는 사람의 존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비록 매를 맞는다는 아픔은 있지만 자기의 위에는 매를 때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즉, 자기를 보살펴 주는 확실한 보호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매를 때리는 사람은 고독하다. 그의 위에는 허공 밖에는 없다. 모든것이 그의 책임이고, 그의 자유이다.연극이 상연된다. 보들레르는 자기를 기다리는 역할을 무대위에 갖고 있다. 그것은 채찍질 하는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매를 때리는 사람의 위에는 허공과 무상성(無償性)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맞는 사람 중에서 제1인자가 될 것이다-얼마나 달콤한 일인가.(La pi ce est mont e : Baudelaire y a sa place qui l'attend. Il ne scra point fouetteur - car au-dessus des fouetteurs il y a le vide et la gratuit - mais il se fera - avec quelles d lices - le premier des fouett s.)(Baudelaire, p. 82)하늘에는 허공 밖에 없고, 땅에는 인간만이 있다고 절규하던 「악마와 선신」의 주인공 괴츠의 대사를 상기하기 바란다. 희곡 「무덤없는 주검」의 다음 대사에서 역시 우리는 자유의 고통스러움을 발견한다.내가 나 자신을 정면으로 대하기는 3년만에 처음이다. 사람들이 내게 명령을 내렸고, 나는 거기에 복종했었다. 나는 정당화된 듯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아무도 더 이상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없고, 아무것도 더 이상 나를 정당화해줄 수 없다. 그저 한 조각의 잉여적 삶이 있을 뿐이다.(C'est la premi re fois depuis trois ans que je me retrouve en face de moi-m me. On me donnait des ordres. J'ob issais. Je me sentais justifi . A pr sent personne ne peut plus me justifier. Un petit morceau de vie en trop : oui.)(Morts sans s pulture in Th tre p.201)레지스탕스 지하운동을 하던 앙리는 다른 동료 투사들과 함께 잡혀 들어왔고, 그들의 우두머리도 잡혔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가 잡힌 줄 모르는 적군 장교들은 이 지도자의 소재를 대라고 한사람씩 데려다가 고문을 한다. 이때 자백을 할 것인지, 또는 자백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순전히 자신이 정해야 한다. 이때까지는 우두머리가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해야 한다.이 놀라운 자유 앞에서 앙리는 자기의 삶이 도저히 정당화될수 없는 것으로, 그저 한 조각의 잉여물인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인데 결정이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대자존재인 인간은 자기의 안과 밖에 부단히 존재의 의미를 결정하도록 강요 당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듯이, 대자는 무(無)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그저 단지 무화(無化)의 운동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대자는 타인의 존재나 세계내의 즉자 존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전혀 존재근거가 될 수 없다. 여기에서 대자는 자신을 불안(angoisse)으로 파악한다. 「악시옹」지와의 회견에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인간이 만일 지금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면, 그리고 자기를 만들면서 동시에 온 인류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면, 만일 선험적으로 주어진 가치나 도덕이 없이, 받침점이나 길잡이도 없이 혼자서, 그러면서도 모두를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 어떻게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토록 완전한 책임 앞에서 어떻게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겠는가? (Action, 1944, 12.27)이처럼 불안은 자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과오 앞에서의 인간의 불안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자유 앞에서의 불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불안을 무의 포착으로 보았다. 즉 무에 의해 사로 잡힐때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사르트르도 키에르케고르처럼 자유앞에서의 불안을 불안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공포(peur)와 불안(angoisse)을 구별하여, 공포는 세계의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라고 했다. 높은 절벽 위에서 내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공포이고, 내가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지지 않을까 하는 것은 불안이다. 절벽위에서 느끼는 현기증은 처음에는 공포에 의해 시작된다. 나는 높은 절벽중간에 있는 난간없는 좁은 길 위에 서있다. 절벽은 내가 피해야할 대상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은 죽음의 위험이다. 이 죽음의 위협이 현실로 될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돌에 발이 채여 심연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좁은 길의 한 귀퉁이 푸석한 땅이 내 발밑에서 부스러져 내릴 수도 있다.이 여러가지 예상들을 통해서 나의 신체는 마치 사물인듯이 내게 여겨진다. 나는 마치 사물처럼 이 가능성들 앞에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가능성들은 외부로부터 내게 오는 것이고, 이 세계의 물체에 불과한 나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 가능성들은 전혀 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이 순간에 공포가 생긴다. 나는 내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곧 반성적 차원의 반응이 나타난다. 길가의 돌맹이에 조심해야지, 가능한한 낭떠러지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걸어야지 하는 의식들이 그것이다. 나는 내 온 힘을 다해 이 위협적 상황에 저항하고 있으며, 나로부터 이 세계의 위협을 멀리하게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예방적 행동을 앞으로 투사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나의 가능성이다. 외부조건의 개연성에 나의 가능성이 대체될 때 나는 공포에서 벗어난다.그러나 이 행동들은, 그것이 정확히 나의 가능성인 한에서, 나와 무관한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는 볼 수 없다. 나의 가능성인 그 예방적 행동들은 정확하게 유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행동들이 지켜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에는 당연히 그에 어긋나는 행동, 또는 정반대의 행동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 예컨대 길가의 돌맹이에 주의를 하지 않거나, 달음박질을 치거나, 다른 생각을 할 가능성, 또는 절벽 밑으로 내가 스스로 몸을 던질 가능성이다. 지금 현재는 그러하지 않지만 잠시 후에 그렇게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의 나는 내가 앞으로 될 존재의 기초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토대 위에 미래가 세워진다는 것은 세계 속에서의 일일뿐,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현재의 부정, 다시 말해서 현재의 무화 다음에 미래가 오는 것이다.그러므로 현재와 미래는 단절이다. 그 어떤 현재의 실존자도 내가 되려고 하는 존재를 정확하게 결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벌써 내가 앞으로 될 어떤 존재이다. 즉 「나는 아직 미래의 내가 될 모습이 아닌 방식으로나마 미래의 내 존재이다.」(je suis celui que je serai sur le mode de ne l'e tre pas.)(E.N. p69). 나는 공포 속에서 미래를 향하고 있으며, 공포는 미래를 가능성으로 구성하면서 자신을 자꾸만 무화시킨다. 아직 그렇게되지 않은 방식으로나마 현재의 자기가 다름아닌 자신의 미래라는 의식,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불안이다. 그러니까 불안이란 미래 앞에서의 불안이다.「존재와 무」에 나오는 도박꾼의 예화는 과거 앞에서의 불안인듯 하지만, 이것 역시 미래의 자기 행동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한 도박꾼이 자기의 자유의사로 진지하게,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도박대의 초록색 융단 앞에 오자 갑자기 자신의 결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더 이상 도박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유혹 앞에서 도박꾼들은 그 결심에 도움을 요청한다. 어젯밤에 결심을 했으므로 이 결심은 아직 유효하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속에서 갑자기 그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과거의 결심이 더 이상 효과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과거의 결심은 물론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단단하게 굳어 있고, 비효율적이고, 이미 과거지사이다. 나는 그 결심에 대해 의식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내 의식의 초월적 대상, 즉 나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객체의 물건이다.그것이 내 의식의 대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미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즉자적 존재, 즉 사물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내가 그것에 부여한 임무를 그 결심은 이행하지 못한다. 여기서도, 나는 과거의 존재가 아닌 방식으로 과거의 모습인 존재이다. 이때 도박꾼을 사로잡는 것은 대자운동의 그 영원한 단절이다. 그 자신과 그 사이에는 무가 있다. 나는 물론 더 이상 도박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파산을 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 가족들의 절망감 등의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두려움 때문에 나는 어제 도박을 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박과 나 사이에 튼튼한 장벽을 쌓은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 종합적인 두려움이 한갓 관념의 추억, 또는 감정의 추억으로만 생각키우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다시 생생하게 생겨나 나를 돕기 위해서는 내가 그 두려움을 완전히 처음부터, 순전히 내 자유의사로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 도박을 하는 것이 나의 여러 가능성중의 하나이듯이, 그 두려움 또한 나의 여러 가능성중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족들을 가슴아프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나는 다시 찾아야만 하고, 생생하게 체험되는 공포로서 되살려야만 한다. 그 두려움은 마치 뼈와 살이 없는 유령처럼 내 뒤에 있어서, 거기에 뼈와 살을 주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어젯밤 결심할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헐벗은 모습으로 도박의 유혹 앞에 서 있다. 도박과 나 사이에 끈질기게 장벽을 세워 놓고 결심이라는 마술의 반지 속에 성공적으로 끼어 들었는데, 이제 나는 아무것도 나로 하여금 도박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도박을 시작하는 것은 나의 자유이니까.의식은 자신의 자유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자유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결정은 철회될 수 있다는 것이 의식을 불안하게 한다. 모든 규칙은, 그것이 자유롭게 제시되었던만큼 역시 자유롭게 위반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결정은 결정위반의 유혹이 될 수 있다는 확신감이 의식을 불안하게 한다. 절벽 앞에서 느끼는 등산객의 불안감은 그가 자유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돌맹이라면, 그는 자기 길을 이탈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관성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지금 땅위에 있는 돌맹이가 갑자기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이 아니고 대자존재인 인간 자신이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즉 자신이 몸을 던질까봐 불안하다. 자기 자유 앞에서의 불안인 것이다. 알콜 중독자나 도박꾼이 술병이나 초록색 융단 앞에서 느끼는 불안도 마찬가지이다.어젯밤에 내렸던 굳은 결심과, 술이나 도박의 해독을 피하기 위해 쌓아올린 모든 이유들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왜냐하면 현재의 의식은 어젯밤의 의식이 아니고, 그 어떤 이유로도 현재의 의식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기증이나 도박의 유혹 같은 것은 결국 대자가 자신의 가능성에 홀리는 상태이다. 마치 여우에 홀리듯이 대자는 자신의 자유에 홀리는 것이다. (fascination par la libert ).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사물에 대한 의미나 가치가 나의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모든 가치나 의미부여가 우리의 자유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면 우리는 심하게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안은 자유와 동의어이다. 이러한 불안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유를 은폐해 주는 구체적인 것들은 세계 안에 많이 있다. 자명종, 게시판, 세금 고지서, 경찰관 등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사회속에서의 일상적인 삶이다. 그러나 하루의 일상생활을 마치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왔을 때 인간은 갑자기 자신의 전면적인 자유를 의식한다. 자명종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팻말을 읽고 꽃밭이나 잔디밭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직장 상사의 명령에 민첩하게 따르는 것도, 자기가 쓰는 책의 흥미를 결정하는 것도 모두 자기에게 달린 일이다.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최초의 기획 앞에서 나는 혼자, 불안하게 솟아나 있다. 이 불안감을 은폐하는 모든 장벽, 모든 방패막들은 일단 내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 모두 무너져 내리고 무화되어 버린다.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내 자신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는 그 어떤 가치에도 의존할 수 없다. 나는 무를 사이에 두고 세계 및 나의 본질과 분리 되어 있는데, 이러한 나를 보증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 세계와 내 본질의 의미를 실현시켜야만 하며, 그것을 아무런 변명도 없이, 도저히 정당화되지 않는 채, 그저 혼자서 결정할 뿐이다.」(j'ai r aliser le sens du monde et de mon essence : j'en d cide, seul, injustifiable et sans excuse,)(E. N. p. 77) 어떤 행동에 대한 결정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순전히 내 판단으로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이 정당하다고 판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러나 그 결정이 잘못 되었을 때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이것이 매 순간의 대자적인 삶이다. 이것이 자유이다. 그 자유를 분명히 느끼게 될 때 (다시 말해서 반성적으로 포착하게 될 때) 우리는 심한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자유에 눈뜨는 것은 인간에게는 크나큰 고통이다. 이러한 삶을 사르트르는 「외설스럽고도 무미 건조한 실존」이라고 말했다. 아르고스의 사람들을 자유에 눈 뜨게 해주려는 오레스트를 보고 주피터가 하는 말이다.불쌍한 사람들! 너는 그들에게 고통과 수치심의 선물을 하려는가, 내가 이때까지 그것을 덮어 씌워가려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벗겨내려 하는가. 그리해서 갑자기 그들에게 그 외설스럽고도 무미건조한 실존을, 대가없이 그냥 주어진 그 실존을 보여주려 하는가.(Pauvres gens! Tu vas leur faire cadeau de la solitude et de la honte, tu vas arracher les toffes dont je les avais couverts, et tu leur montreras soudain leur existence, leur obsc ne et fade existence, qui leur est donn e pour rien.)(Les Mouches. p. 113-114).사르트르의 용어에서 불안(angoisse)은 현기증(vertige)과 동의어이다. 보들레르가 어디에선가 쓴 『나는 항상 현기증을 느낀다.』는 말을 사르트르는 자유 앞에서의 불안으로 해석한다. 그의 소설 제목 「구토」(La Naus e)도 자유 앞에서의 불안이라는 의미이며, 아마도 보들레르의 이 「현기증」에서 암시받은 단어인듯 하다. 그리고 심연(gouffre)은 자유를 뜻한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심연, 그것이 자유의 이미지이다. 「보들레르」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그는 자유롭다. 그것은 자기 안이나 밖에 자유에 대항할 만한 그 어떤 수단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몸을 굽혀 자기의 자유를 내려다 본다. 이 심연 앞에서 그는 현기증을 느낀다.[…] 보들레르는 심연을 느끼는 사람이었다.(Il est libre, cela veut dire qu'il ne peut trouver en lui ni hors de lui aucun recours contre sa libert . Il se penche sur elle, il a le vertige devant ce gouffre : […] Baudelaire ㅣ'homme qui sent un gouffre.)(Baudelaire, p. 48).자유에 대한 자각은 현기증인 동시에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운명이다. 이 절망을 딛고 일어설 때에 비로소 참된 실존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유에 눈뜨게 한다고 비난하는 주피터에게 오레스트가 답한 다음의 말은, 실존주의를 요약해 주는 감동적인 경구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다.오레스트-내 안에 있는 절망을 왜 그들에게 주지 않겠는가? 그것이 그들의 운명인데.주피터-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뭘 할까?오레스트-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겠지. 그들은 자유로우니까. 인생은 절망의 저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네.(Oreste-Pourquoi leur refuserai-je le d sespoir qui est en moi, puisque c'est leur lot?Jupiter-Qu'en font-ils?Oreste-Ce qu'ils voudront : ils sont libres, et la vie humaine commence de l'autre c t du d sespoir.)(Les Mouches, p,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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