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기독교세계관학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⑥ 본원적 선택(choix originel)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⑥ 본원적 선택(choix originel)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⑥ 본원적 선택(choix originel) 2004/09/24 22:05
http://blog.naver.com/heepom/6041498

자유는 선택과 동의어였다. 시간성 속에서 우리가 매순간 행하는 기획(projet)과 무화(n antisation)는 매순간의 선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 끊임없는 선택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선택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최초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우리의 생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본원적인 선택(choix originel)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최초의 기획」(projet initial), 혹은 「전체적 기획」(projet global)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메카니즘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자유는 무, 또는 무화와 동의어이므로 거기에는 아무런 받침점이나 발판이 없다. 따라서 역시 자유와 매한가지인 우리의 기획(projet)이 존재하기 위해서 그것은 매 번 자기 쇄신을 해야만 한다. 한번 선택한 것으로 평생을 밀고 갈 수는 없다. 대학의 선택 이후에 직장의 선택, 결혼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히트곡을 부른 가수는 자기 노래가 인기 정상에 있을 때 벌써 새로운 노래를 연습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획의 쇄신이 없다면 나는 즉자 존재로 떨어질 것이다. 한번 취직한 것에 만족하여 창의적인 긴장감을 앓고 하루하루 생활에만 안주하다 보면 무능한 말단 사원으로 결국 퇴출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매 번 나는 내가 되어야 할 존재를 선택해야 하고 또 그 존재를 추구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 필연성을 사르트르는 「쫓기는 쫓음」(la poursuite-poursuivi)이라고 부른다.
 
언제나 선택이 문제이므로 선택은 또다른 선택을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이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거나 의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택한 선택에 내가 확신을 갖지 못한다거나, 어쩐지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의 자유는 나의 자유를 좀먹어 들어간다. 나는 매 번 앞서의 기획을 무화하고 그것을 과거화한다. 대자가 자신을 꽉 움켜 잡았다고 믿는 순간 벌써 그것은 자신에게서 몸을 빼내 앞을 향하고 있다. 새로운 기획의 출현은 과거의 기획의 붕괴 위에서 실현된다. 자유란 선택이며 그것은 변화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자신이 앞에 투사해 놓은 목적에 의해 다시 말하면 그것이 앞으로 되어야 할 미래의 모습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 안에서 특정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특정의 기도들은 결국 크게 보아 우리 인생 전체의 틀인 「전체적 기도」(projet global)안에 통합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전 생애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궁극적인 기획(projet ultime)일 것이다. 과정의 다양한 선택들은 부차적인 구조일 뿐, 그것들은 좀더 큰 선택의 조망 속에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각각의 선택이 본원적인 선택의 부차적인 구조라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치가 없거나 의미가 없는 행동은 하나도 없다. 즉, 하나의 행동은 그것만으로 고립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전 생애를 형성하게 될 무수한 선택의 직조물 속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야 하다. 이 본원적인 선택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후퇴적 분석(analyse r gressive)의 방법을 써야한다. 후퇴적 분석이란 결론에서부터 그 이유가 되는 전제로 거슬러 올라가는 논증의 진행 방식이다. 사르트르가 내세우는 실존적 정신 분석은 바로 최초의 기획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이 현상학적 방법이다.(E.N. p. 559) 후퇴적 분석은 우리를 한 인간의 최초의 기획으로 안내한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대자가 자신의 사실성(facticit ) 및 세계와 갖는 근원적인 관계를 만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실성(事實性, facticit )의 문제에 봉착했다. 사실성은, 아무런 필연성도 이유도 없이 그저 단순히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연성(contingence)과 거의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인간 조건, 즉 내가 태어난 나라, 인종, 계급, 가정, 건강, 용모등이 모두 사실성이다. 실존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실성을 들어서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마음대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기는 커녕 우리 자신도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나의 계층, 내 나라, 내 가정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권력이나 재산을 쌓을 수도 없다. 나의 운신을 제한하는 것은 축적된 역사로서의 사회적 제도만이 아니다. 깊은 두께의 역사는 우리 육체 안에 체화되어 지속적인 성향을 이루고, 그 성향이 우리의 충동과 욕구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것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의 끊임없는 검열을 받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종속적인 존재이다. 소위 이중적으로 묶여 있는 (double bind)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결정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땅의 기후와 종족, 계급, 언어, 역사, 유전, 그리고 유년 시절의 개인적인 체험, 후천적인 습관, 또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의해「만들어진」존재라는것이다. 물론 그들의 말은 옳다. 과연 나는 이것들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태생, 나의 과거, 나의 사회적 위치가 무조건 나의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의 사실성에 대해 내가 내리는 해석 여하에 따라 나의 인생은 결정된다.
 
인간은 자신의 출생과 사망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선택하는 존재이다. 똑같은 사실성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해석과 선택에 따라 사람들의 인생은 크게 변한다. 똑같이 가난한 집에서 자란 형제라 하더라도 그 중에는 훌륭하게 인생의 성취를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의와 낙오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사실성이란 자유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며, 거기에서부터 자유는 자신의 목표를 세운다. 우리는 물론 우리 앞 세대가 우리에게 형성해준 공간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 한 우리는 항상 이 주어진 조건들을 극복할수 있는 존재이다. 자신의 실존의 조건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외부적 사물로서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대자적 존재이다. 인간은 마치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자신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가 곧 변화라고 앞에서 말했거니와, 변화라는 것은 변화시켜야할 어떤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자유는 내 사실성을 움켜 잡는다(la libert est l'appr hension de ma facticit )(E.N.P. 575). 대자는 자신이 하나의 인간이 되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한 민족공동체나, 계급이나, 가정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자신의 목표를 세울 수 없다. 여기에 선택의 문제가 제기된다. 인종이나, 허약한 체질, 또는 못생긴 용모등은 나의 열등감이나 자만심의 선택 속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나의 자유가 그것들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성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나의 인생이 달라진다. 나의 사실성에 부여하는 나의 해석 및 의미, 그것이 나의 본원적 선택(choix originel), 혹은 최초의 기획(projet initial)인것이다.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실존적 정신분석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실존적 정신분석은 그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행동을 그 자체로 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은 프로이트도 같은 입장이다.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그 뒤에는 좀더 깊은 구조가 숨겨져 있으며, 이 구조를 밝혀주는 방법이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의 관심은 어떤 특정의 인물이 특정의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 조건하에서인가이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바로 직전의 순간과 연관지어 해석하지 않는다. 직전의 순간과의 인과관계만을 따지는 것은 수평적인 심리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행동은 상징적이다. 다시 말하면 좀더 깊숙한 곳의 욕망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행위 주체의 리비도라는 근원적 결정론에서부터 해석이 된다. 그러니까 프로이트는, 수평적인 결정론은 피했지만 수직적인 결정론을 형성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개념은 이러한 우회를 통하여 행위 주체의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행동의 밑에는 감정, 즉 심리-생리학적 경향이 깔려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감정이란 인간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어떤 심리적 경향이 특정의 대상에 고착되는 것은 그 행위 주체의 외부적 환경, 다시 말해서 역사에 의해서이다. 예를 들어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20세기초 비엔나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생겨난 현상이라는 설이 있다. 백인 부르주아 사회가 아닌 다른 형태의 사회, 예컨대 태평양 산호섬의 원시 부족 가정에서는 이런 복합심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백인의 부르주아 가정에서라도, 유년 시절에 이 복합심리가 해소되었는가 보존되었는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결국 프로이트의 수직적 결정론도 수평적 결정론의 축 위에 있는 셈이다.

어떤 상징적 행동이 내면의 욕망을 표현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은 좀더 깊은 어떤 복합심리를 드러내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후퇴적 방법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는 복합심리가 상징에 의해 발현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그 복합심리는 과거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과거가 그것을 구성하는 방법으로는 전이(transfert)나 응축(condensation)등의 고전적인 개념을 들었는데, 이것들은 정신분석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삶을 결정론적으로 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들에서 우리가 익히 보아온 것들이다. 결국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는 미래의 차원이 없다. 거기서 인간은 탈자(脫自. ek-stase)라는 대자적 존재 양식을 잃고, 오로지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후퇴적 방법에 의해서만 해석이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약점이다.

프로이트와 달리 과거의 결정론을 떨쳐 버리고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밝히고자 하는 것, 그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적 정신분석(psychanalyse existentielle)이다. 사르트르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결정론적인 우연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행동을 이해 가능한 현상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이 현상을 과거의 시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미래의 회귀로 보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그것이 가능성을 향한 자기의 기획으로서 파악될 때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서 두 사람이 크게 달라지는 부분은 무의식에 대한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욕망이 의식 표면에 떠오르지 못하고 깊숙히 감추어져 있다가, 오랜 잠복기 끝에 갑자기 어떤 계기를 맞아 돌발적인 행위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이 억압된 욕망을 무의식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이와같은 무의식의 동기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무의식을 대체할만한 개념은 본원적 선택(choix originel)이다. 보들레르의 기이하고도 반항적인 행동이나 당디즘도 애초에 보들레르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정신분석학자들이 무의식 속에다 치워버리는 그 어두운 화학 작용과 동일시해서는 안되다. 보들레르의 이 선택은 그의 의식이고, 동시에 그의 근원적 기도이다. (Mais il ne faut pas non plus assimiler une libre lection de cette esp ce aux obscures chimies que les psychanalystes rel guent dans l'inconscient. Cette lection de Baudelaire, c'est sa conscience, c'est son projet essentiel.) (Baudelaire, p. 100-101).
 
대자의 실존적 기획은 결국 존재, 행위, 소유( tre, faire, avoir) 등 세 카테고리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목표로 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 태도, 열정, 기호(嗜好) 등을 지시해 주는 기본적인 선택이 있다. 과거 저 멀리로 거슬러 올라가 인생의 첫 경험으로까지 가는 이 선택은 새로운 경험을 할때마다 끊임없이 다시 선택되고 재확인된다. 이 선택은 자유로운 선택이고, 의식적인 선택이다. 결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유년의 억압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의 차원은 아니고 비반성적 (conscience irr fl chie)인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비정립적 의식이다.

이 최초의 기획, 또는 본원적 선택을 밝히고 설명하기 위해서 실존적 정신분석이 필요하다. 일단 선택이 밝혀지면, 후퇴적 방법으로 주체의 실존의 전개를 되짚어서 할 인격 전체의 종합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후퇴적(r gressif), 전진적(progressif) 방법이 교대로 이어지는 비교의 방법이 채택된다. 이러한 실존적 정신분석의 방법을 적용하여 사르트르는 보들레르와 장 쥬네, 그리고 플로베르를 연구했다. 이 저서들은 각기 「보들레르」, 「성(聖) 쥬네, 희극배우 혹은 순교자」, 「집안의 백치」등의 제목을 갖고있다. 이러한 실존적 정신분석의 방법을 통해 사르트르는, 보들레르의 고립감이나 금치산자로서의 성격이 실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장 쥬네는 스스로 도둑이 되기로 선택했고, 플로베르는 간질병을 구실로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보들레르」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
 
벌써 그는 이 고립감을 하나의 운명으로 생각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이 고립감이 잠정적이기를 바라면서 이것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는 분연히 그리로 달려갔고 그 고립감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거부된 보들레르는 이 고립을 자기 나름으로 회수하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고독을 스스로 요구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적어도 그것이 자기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D j il pense cet isolement comme une destin e. Cele signifie qu'il ne se borne pas le supporter passivement en formant le souhait qu'il soit temporaire : il s'y enferme […] D laiss , rejet , Baudelaire a voulu reprendre son compte cet isolement. Il a revendiqu sa solitude pour qu'elle lui vienne au moins de lui-m me, pour n'avoir pas la subir.)(Baudelaire, p. 20-21)
 
사람들에게 저버림 받은, 고독하기 짝이 없는 삶을 보들레르 자신이 선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저버림과 고독은 물론 처음에는 외부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보들레르에게 가해진 것이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이것을 수동적으로 당하면서 한탄만 하지 않고 차라리 자기쪽에서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는 오만함을 보인 것이다. 자신의 조그만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저버림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사르트르는 여러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온갖 실용성을 거부하고, 죽을힘을 다하여 비정상의 행동을 꾸며냈던 그는 스스로 영원한 미성년자, 영원한 어린아이로 간주되는 것을 즐겼고, 이것은 바로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 이것이 보들레르의 본원적 선택이다. 「보들레르」에서 우리는 본원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보들레르가 자기 자신에게 행한 본원적 선택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즉, 우리 인간 각자가 어떤 특정의 상황 속에서, 자신이 앞으로 되어야 할 모습, 또는 현재의 자기 모습을 결정하는, 그 절대적 참여행위 말이다. (Nous touchons ici au choix originel que Baudelaire a fait de lui-m me, cet engagement absolu par quoi chacun de nous d cide dans une situation particuli re de ce qu'il sera et de ce qu'il est.)(Baudelaire, p. 21)
 
자기 팔자를 탓하여 신세한탄을 하는 여자들에게서 우리는 가끔 『이 사람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사나운 팔자」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은 자기 자신이 해결하거나 또는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 나쁜 팔자는 그녀의 본원적인 선택이다. 마치 보들레르가 평생 고통받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고통받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고통받기를, 그는 근본적으로 선택했다.(Qu'il ait choisi originellement de souffrir et de souffrir plus que tous) (Baudelaire, p. 116)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