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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⑤ 자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⑤ 자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⑤ 자유 2004/09/24 22:02 http://blog.naver.com/heepom/6041439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한다. 매 순간 자기 몸을 앞으로 던지는데, 어느 때는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그는 그 실패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시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매 순간 자기의 상황, 행동, 그리고 시도 앞에 나타나는 장애물을 극복하거나,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하면서 어떤 행동을 한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는 자신의 자유를 증명한다. 이 자유는 대자적 인간이 갖고 있는 무 때문에 가능하다. 대자의 운동은, 직전의 자기 존재를 무화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존재를 목표로 삼는 것인데, 현재의 나와 직전의 나 사이, 그리고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는 무가 생긴다. 이처럼 무를 분비하여, 앞과 뒤에 온통 무의 바다를 이루고 그 사이에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렇게 자신을 고립시키는 무를 분비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 자유이다. 인간에게는 고정된 인간본성이 없다. 인간의 삶은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하는 모색이지만 결코 자기를 규정하는 정의(定義)를 발견할 수 없다. 설사 그런 정의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자기가 결정한 것에 불과하다.

대자는 행동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다. 행동이란 이 세계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것이고,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수단들을 배치하는 행위이다. 행동이란 원칙적으로 지향적(intentionnel)이다. 즉 모든 행동은 미래의 어떤 상태를 결핍으로 간주하는 것과 동시에 과거의 자기와 세계로부터 몸을 빼내는 것(arrachement soi-m me et au monde)이다. 미래의 유토피아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혁명가는 미래의 유토피아가 현재 결핍된 것으로 느끼고, 지금 현재의 자기 상태,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현재의 세계로부터 몸을 빼낸다. 그것이 그의 혁명 운동이다. 이처럼 자기와 세계로부터 몸을 빼내는 모든 행동에는 행동 주체의 자유가 절대적이며 근본적인 조건이다. 
이것은 물론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이다.

『만일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고 도스토엡스키는 말했는데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신이 없으므로,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안이나 자기 밖, 그 어디에도 매달릴 데가 없으므로, 그는 그냥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악마와 선신」의 주인공 괴츠의 다음과 같은 절규는 신의 부재에 대한 확인이다. 나는 혼자입니다. 신부님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나는 어떤 표시를 보여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늘에 멧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내 이름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매 순간 신의 눈에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신은 나를 보지 않고, 신은 내 목소리를 듣지 않고, 신은 나는 모릅니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이 허공이 보이십니까? 그게 신입니다. 문 사이에 있는 이 틈새가 보이십니까? 그게 역시 신입니다. 침묵, 그게 신입니다. 부재, 그게 신입니다. 신, 그것은 인간의 고독입니다. 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기로 나 혼자 결정했습니다. 나 혼자 선을 창조해냈습니다. 속임수를 쓴 것도 나이고, 기적을 행한 것도 나입니다. 오늘 나를 비판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인간인 나 말입니다. (Moi seul, cur , tu as raison. Moi seul. Je suppliais, je qu mandais un signe, j'envoyais au Ciel des messages : pas de r ponse, le ciel ignore jusqu' mon nom. Je me demandais chaque minute ce que je pouvais tre aux yeux de Dieu. A pr sent je connais la r ponse : rien. Dieu ne me voit pas, Dieu ne m'entend pas, Dieu ne me conna t pas. Tu vois cette br che dans la porte? C'est Dieu encore. Le silence, c'est Dieu. L'absence, c'est Dieu. Dieu, c'est la solitude des hommes. Il n'y avait que moi : j'ai d cid seul le Mal ; seul, j'ai invent le Bien. C'est moi qui m'accuse aujourd'hui, moi seul qui peux m'absoudre ; moi, I'homme.)(Le diable et le Bon Dieu, P. 267)
 
천국도, 지옥도 없고 오로지 땅 뿐이다. 신은 죽었고 이 세상에는 사람뿐이다. 텅 빈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사람은 땅위에 고독하게 있다. 『인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희곡 「악마와 선신」의 마지막 대사이다. 신이 없고 땅위에 인간만이 있다면 모든게 인간의 책임이다. 변명은 어디서도 찾을수 없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므로 어떤 기성의 고정된 인간성을 참조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규정할 결정론이 없다. 인간은 자유롭고 자유 그 자체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행동에 합법성을 부여해줄 그 어떤 명령이나 가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밖 그 어디에서도 우리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나 변명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혼자다.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고 그저 자유로울뿐인 인간은 일단 세계에 던져진 이상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

인간의 절대적 책임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록에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든다. 이차대전중에 그를 찾아온 한 제자의 이야기이다. 이 청년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독일에 약간 협력하는 쪽이었다. 그의 형은 1940년 독일 공세때 죽었다. 좀 단순한 감정에서 이 청년은 형의 원수를 갚고 싶었다. 그래서 자유 프랑스 군에 입대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배신, 그리고 형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는 어머니는 그와 함께 살며, 그에게서만 생의 위안을 찾았다. 이 청년은 자유 프랑스 군에 입대하기 위해 영국에 갈 것인가 아니면 남아서 어머니를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의 어머니에게는 아들만이 희망이고, 아들과의 이별은 그녀를 절망에 빠트릴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아주 상반되는 두 행동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봉사하는 일이다.
 
한편 군에 입대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는 일은 훨씬 더 광범위한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매우 모호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영국까지 가지 못하고 스페인에서 멈추게 되거나 아니면 영국이나 알제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전투에는 참가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서류 작성같은 일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개의 모랄 사이에서 망서렸다. 하나는 개인적인 헌신이고 또 하나는 좀더 큰, 그러나 유효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그러한 도덕성이었다. 그가 선택하는 것을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기독교의 교리도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교리는 자비를 베풀것, 이웃을 사랑할 것, 남에게 헌신할 것, 힘든 길을 택할 것, 등만 가르칠 뿐 어떤 것이 가장 힘든 길인지 그리고 누구를 자기 형제처럼 사랑해야 할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의 투사를 택할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어머니를 택할것인가? 이것을 결정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존의 그 어떤 모랄도 그것을 말해 주지는 못한다. 칸트의 도덕률은, 타인을 결코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어머니 옆에 머물러 있게 되면 나는 어머니를 목적으로 삼지만 그러나 전쟁에서 싸우는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된다. 반대로 군에 입대하면 다른 투사들은 목적으로 삼지만 나의 어머니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 이 청년에게 사르트르는 『너는 자유롭다. 선택하라. 다시 말해서 창조하라.』(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Nagel, p. 47)고 말한다.

그 어떤 일반 도덕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행동의 근본적인 조건은 자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묘사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자유에는 어떤 본질이 없으므로 자유에 대한 설명은 아주 힘들다. 자유는 어떤 필연적인 논리에 속해 있지도 않고, 다만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행동을 통해 자유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에 대한 규정이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정의를 내릴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무(無)가 세계에 오는 것은 대자, 즉 인간에 의해서라고 했다. 무 또는 무화란 결국 부정(否定. n gation)과 동의어이다.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어떤 목적을 위해 종전의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세계를 부정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단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끊임없는 단절의 가능성이 바로 자유이다. 이 끊임없는 단절의 가능성은 나의 현재를 끊임없이 부정하여 그것을 「…이었던 나」의 형태로 자꾸 만들어 간다. 따라서 대자는 직전의 자기자신이었던 즉자를 무화시키는 존재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데 자유는 바로 이 무화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자가 자기의 존재에서 몸을 빼내는 것도, 그리고 자기 아닌 어떤 대상에서 몸을 빼내는 것도 모두 자유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대자는 「지금 그러하지 않은 모습의 존재이고, 동시에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존재」라고 말했거니와 이것은 인간이 미래의 존재라는 뜻이고 동시에 인간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현재의 모습으로 완결되어 굳어진 존재가 아니다. 오늘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 해도 내일 그것을 만회할 수 있다. 지금 별 볼일 없는 하찮은 사람이라해도 미래의 어느 날에는 화려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수치를 만회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현재의 하찮은 사람이 성공한 인물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는 끝내 수치스러움을 만회하지 못하거나, 영영 하찮은 인간으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나는 순전히 내 책임하에 어떤 선택을 하여,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 속에서 과거의 나를 시시각각 무화시키며 목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자유, 선택, 무화, 시간화라는 것은 결국 똑같은 의미이다(Ainsi libert , choix, n antisation, temporalisation, ne font qu'une seule et m me chose)(E.n. p. 543).
 
그런데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를 선택하려면 그 앞에 또 다른 자유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 있었던 자유로운 선택을 매번 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원한 자유의 연결을 살펴보면 우리의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일 뿐, 자유로운 존재를 선택하는 자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되어야 할 어떤 목표를 선택하는 것이지, 자유로운 존재와 자유롭지 않은 존재 중에서 자유로운 존재를 나의 삶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단, 나를 자유롭지 않은 존재로 만들 자유는 없다. 「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nous sommes condamn s la libert )(E.N. p. 565)라는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구절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일 뿐 선택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다.」(E.N.p.561) 다시 말하면 「자유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고, 따라서 실존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la libert n'est pas libre de ne pas tre libre, et qu'elle n'est pas libre de ne pas exister.)(E.N. p. 567)

이처럼 자유는 인간의 원초적 존재 양식이다. 자유는 모든 인간에게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자유는 신과 반대되는 개념이고, 인간의 존재근거이며, 인간의 존재 그 자체이다. 희곡 「파리떼」에서 자유를 자각한 주인공 오레스트는 다음과 같이 신과 자유를 대립시키며, 자유를 신의 위치에 올려 놓는다.
 
우리는 마치 두척의 배처럼 부딪치지 않고 나란히 미끄러져 간다. 당신은 신이고 나는 자유롭다. 우리는 비슷하게 고독하고, 우리의 불안은 비슷하다. (Nous glisserons l'un contre l'autre sans nous toucher, comme deux navires. Tu es un Dieu et je suis libre : nous sommes pareillement seuls et notre angoisse est pareille.) (Les Mouches, p.113)
 
한편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자유를 인간과 동일시한다.「예술작품, 다시 말해서 하나의 자유를 향한 자유롭고도 무조건적인 호소」(oeuvre d'art, c'est- -dire d'un appel libre et inconditionn une libert .)(Qu'est-ce que la libert ? p.184)라는 문장에서 자유는 인간존재 자체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자유란, 그 누구의 법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법을 자신이 만들고, 그 누구의 길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자기가 만드는 그런 존재를 뜻한다. 오레스트가 주피터에게 『우리는 비슷하게 고독하고, 비슷하게 불안하다.』고 말했듯이 자유는 행복이나 축복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저주받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롭도록 처단되었으므로 이 운명을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이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모습은 비장하고 영웅적이기까지 하다.
 
내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라는 것을 잘 안다. 자연에도 어긋나고, 변명의 여지도 없고, 나 이외의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법질서 밑에 돌아가지 않겠다. 나는 나의 법 이외의 다른 아무런 법도 갖지 못하도록 운명지워졌다. 나는 당신의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수천개가 있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기의 길을 만들어야 하니까. (Eteanger moi-m me, je sais. Hors nature, contre nature, sans excuse, sans autre recours qu'en moi. Mais je ne reviendrai pas sous ta loi : je suis condamn n'avoir d'autre loi que la mienne. Je ne reviendrai pas ta nature : mille chemins y sont trac s qui conduisent vers toi, mais je ne peux suivre que mon chemin. Car je suis un homme, Jupiter et chaque homme doit inventer son chemin.) (Les Mouches, p.113)
 
「보들레르」에서도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절대적 자유의 자각을 묘사한다.
우선 그가, 아무런 규칙도 이유도 없는 이 의식, 자신이 복종해야할 법칙까지 스스로 만들어야만 하는 이 의식을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맛 보았으므로, 실용성은 무의미해진다. 인생이란 하나의 도박에 불과하다. 명령도, 예고도, 조언도 없이 인간은 자기의 목표를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이 인생에서는 자기가 고의로 자신에게 주는 목표이외의 다른 아무런 목표도 없다(...) (Mais si d'abord on a d gust jusqu' naus e cette conscience sans rime ni raison, qui doit inventer les lois auxquelles elle veut ob ir, l'utilit perd toute signification : la vie n'est plus qu'un jeu, l'homme doit choisir lui-m me son but, sans commandement, sans pr avis, sans conseil. Et celui qui s'est avis une fois de cette v rit qu'il n'y a d'autre fin, en cette vie, que celle qu'on s'est d lib ment donn e, […])(Baudelaire, p. 36)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진공 상태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존재의 충만성으로 가득찬 세계 안에 들어있다. 이런 자유의 우연성을 우리는 상황(situation)이라고 부른다. 대자가 자유스러운 것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유스러운 것이지, 그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출현할 역사적 세계를 선택하지 못한다.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자유란 주어진 세계 안에서 행동하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아직 아무런 행동의 무게가 실려져 있지 않은 인간의 자유는 무한히 가벼운 것일 수 밖에 없다. 마치 행동의 영도(零度, z ro)상태라고나 할까. 「존재의 가벼움」은 이처럼 행위 이전의 추상적인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파리떼」의 주인공 오레스트는 행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이 흠집없는 존재의 가벼움(l g ret sans tache) (Les Mouches, p. 71)을 참을 수 없어한다.
 
그 자유는 마치 땅에서 10피트 상공에 떠있는 거미줄처럼 가볍다. 바람에 흔들거리다가 끊어지는 거미줄 처럼 그 자유는 실 한오라기 정도의 무게밖에 나가지 않는다.(Les Mouches, p. 26) 이 가벼운 존재를 행동으로 가득 채워넣기 위해 오레스트는 범죄를 저지를 것을 결심한다. 이미 헤겔도 「정신현상학」에서 행동을 죄와 결부시킨바 있다. 그는 「모든 인간적 행동은 죄이며, 결백하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상태에도 훨씬 못미치는, 그저 존재하는 돌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르트르의 희곡 「더러운 손」의 주제도 이런 의미이다. 오레스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현재의 왕과, 그 아내가 된 자기 어머니를 함께 죽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신화 이야기는 사르트르에 의해 존재의 가벼움을 채우는 행동의 의미를 갖게된다. 그래서 오레스트는 범죄의 결심을 『나는 가볍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너무 가볍다. 아르고스의 밑바닥까지 수직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을 정도로 내 몸을 범죄로 가득 채워야겠다. (Je suis trop l ger. Il faut que je me leste d'un forfait bien lourd qui me fasse couler pic, jusqu'au fond d'Argos.)(Les Mouches, p. 71)
 
마침내 어머니와 그 남편인 왕을 죽인 오레스트는 이제 그의 존재가 짐마차처럼 무거워졌음을 느낀다. 존재의 가벼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실천(praxis)을 행했다는 점에서 범죄는 귀중한 선물이 아닐수 없다. 불안에 떨고 있는 누이 엘렉트르를 달래는 오레스트의 말이 그것이다.
 
너에게 줄 것이라고는 나의 범죄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선물이다. 나의 범죄는 마치 납덩이처럼 내 영혼을 내리 누른다고 너는 생각지 않니? 우리는 너무 가벼웠다. 엘렉트르, 지금 우리의 발은 마치 짐마차의 바퀴가 땅 속에 패이듯이 그렇게 땅 속에 박힌다. 자, 우리는 떠날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우리의 귀중한 짐 밑에 깔려서 걸을 것이다. (... et je n'ai rien te donner que mon crime. Mais c'est un immense pr sent. Crois-tu qu'il ne p se pas sur mon me comme du plomb? Nous tions trop l gers, Electre : pr sent nos pieds s'enfoncent dans la terre comme les roues d'un char dans une orni re. Viens, nous allons partir et nous marcherons pas lourds, courb s sous notre pr cieux fardeau.) (Les Mouches, p. 115-116)
 
무서운 범죄가 축복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유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때문이다. 자유란 곧 행동이므로 그 행동은 인간에게 참된 존재를 회복시켜주는 값진 선물이 된다. 오레스트는 범죄(행위)에 의해 자신과 누이가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롭다. 내가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 같고, 또 나도 지금 막 너와 함께 태어난 것 같다. (Nous sommes libres, Electre. Il me semble que je t'ai fait na tre et que je viens de na tre avec toi; )(Les Mouches, p. 91)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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