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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④ 결핍(manque)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④ 결핍(manque)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④ 결핍(manque) 2004/09/24 21:58 http://blog.naver.com/heepom/6041339

대자는 속에 무를 품고 있고, 자기와 자기가 분리되어 결코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근본적으로 결핍임을 느낀다. 즉 자신을, 완성되거나 채워져야할 하나의 미완성으로서 느끼는것이다. 대자의 삶은 그의 내부에 있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세계를 향해 자신을 투사하는것이다. 이와같은 대자는 자신의 결핍을 괴로워한다. 대자에게 부족한 결핍이란 무엇인가? 욕망 속에서 대자가 지향하는 대상, 투기 속에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대상,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면서 그가 되기를 원하는 총체성,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자신이다. 이제 대자 속에 들었는 무(無, n ant)는 결핍(manque)이라는 말로 좀더 윤곽이 분명해졌다. 대자는 항상 지금 현재의 자기가 아닌 다른 모습의 자기를 꿈꾸는 존재이다. 즉 현재의 자기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형태로서만 존재한다.(c'est l'olbigation pour le pour-soi de n'exister jamais que sous la forme d'un ailleurs par rapport lui-m me)(E. N. p.121)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더 이상의 변화가 없이 모든것이 중지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자기가 원하던 것을 이루면 곧 또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변화 생성이 중단되는 것은 죽음의 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의 존재 양식일 뿐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인간의 존재 양식은 대자이고, 대자인 한에 있어서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것을 원하는데 이 욕구는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결핍이란 즉자존재에 대한 결핍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미래의 자기 모습으로 설정해 놓은 존재는 즉자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자는 자신을 「존재의 결여」(d faut d' tre)로 규정해야만 무화의 운동을 유지시킬수 있다. 무화란 단순히 의식의 내부에 하나의 허공(vide)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존재의 결여로 규정한다는것은 자신이 존재(즉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어떤 계획을 이루기 위해 대자는 부단히 과거의 자기를 부정(무화)하는데 이때 그의 과거는 완결된 물질성이므로 즉자이다. 그러니까 대자는 즉자에서부터 자신을 정립하고, 또 즉자에 대항하여 자신을 정립하는 존재이다. 무화란 결국 대자와 즉자 사이의 관계이다. 그런데 자신이 (즉자)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두가지의 차원이 있다. 과거의 부정에서처럼 자기가 고의로 자신의 직전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또 하나는 미래의 존재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존재의 결여이다. 대자의 기획투사(projet)란 어떤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리로 향해 현재의 자기 존재를 부단히 과거로 돌리면서 자신을 앞으로 투사하는 행위이다. 이때 목표로 설정해 놓은 것은 하나의 완결된 물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즉자이다. 이 즉자존재가 대자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유학을 가거나 취직을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유학생이 된 자기모습, 그리고 직장인이 된 자기 모습은 결핍의 상태로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되고자 하는 염원과 함께, 아직 그것이 되지 못했고, 또 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이 결핍을 매우 괴로워하고 애석해한다. 결핍이란 의식 자체가 미래의 어떤 완결성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미래의 목표물로 설정해놓은 완결된 모습, 지금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모습에서 현재의 모습을 뺀 부족한 부분, 이 세항이 결핍의 3위일체적 구조이다. 초생달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그것을 온전한 달(보름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둥근달이 전체이고 초생달은 둥근달의 4분의 3이 부족한 상태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초생달이 「현재의 존재」(existant) 또는 「부족한 분량만큼 결핍되어 있는 존재」(ce quoi manque ce qui manque)이고, 앞으로 채워질 4분의 3은 「결핍된 부분」(ce qui manque, 또는 manquant)이며, 둥근 모습의 만원은, 부족분에 의해 이지러졌으나 현재 상태와 부족분의 종합으로 복원될 전체성(une totalit qui a t d sagr g e par le manque et qui serait restaur e par la synth se du manquant et de l'existant)(E. N. p.129)이다.
 
다시 말해서 「결핍의 대상」(manqu )이다. 그러므로 결핍의 3위일체적 구조는existant-manquant-manqu (현재의 존재-부족분-결핍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결핍이란 완전한 실증성인 즉자에게는 없는 것이다. 초생달을 만월의 결핍으로 보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초생달 그 자체는 완전하지도, 불완전하지도 않고, 다른 어떤 존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있을 뿐이다. 이 즉자존재가 만월에서 부족된 존재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초월하여 전체성으로 갔다가 다시 현재의 상태로 돌아오는 인간의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실현될 전체성을 지금 존재의 기초로 간주하는 의식이다.

결국 결핍이란 인간의 존재와 함께 이 세상에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에 의해서 결핍이 이 세상에 오는 존재인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결핍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핍은 결핍에 의해서만 오기 때문이다. 자기 충만성인 즉자는 결코 다른 즉자에 대한 결핍을 야기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결핍인 존재(son propre manque)이다. 초생달을 보고 만월을 상정하듯이 인간은 미래의 어떤 모습을 상정해 놓고 지금 그것이 되지 않았다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결핍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다. 크고 작은 범위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만족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하다못해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쪽으로 가는 행위도, 갈증의 해소라는 전체성에 대한 현재의 결핍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핍이란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구조이다. 먼저 인간이 존재하고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가 부족한 것과의 관련 속에서 자기를 결핍으로 느끼는 그러한 존재양식을 가졌다. 대자의 삶은 그의 내부에 있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세계를 향해 자신을 투사한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완전한 존재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한다. 그런데 이때 그가 상정한 완전한 존재는 누구인가? 그것은 초월적인 신인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욕망 속에서 대자가 지향하는 대상, 투기 속에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대상,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면서 되기를 원하는 전체성, 그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 이 세계 안의 그 먼길을 우회하는 것이다. 희곡 「파리떼」에서 자신들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것인가를 묻는 누이 엘렉트라에게 오레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몰라. 아마 우리 자신을 향해서겠지. 산과 강의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오레스트와 엘렉트르가 있어. 그들을 열심히 찾아야만 해. (Je ne sais pas ; vers nous-m mes. De l'autre c t des fleuves et des montagnes il y a un Oreste et une Electre qui nous attendent. Il faudra les chercher patiemment.)(Les Mouches in Th tre, p.116) 
「보들레르」에서도 우리는 대자적 존재양식이 결핍이라는 것과 그 결핍의 종국적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불만족은 그가 방금 인식한 인간적 초월성의 결과이다. 상황이 어떠하든, 제공된 기쁨이 어떠하든, 인간은 끊임없이 저편에 있다. 그는 다른 목적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 상황과 기쁨들을 넘어선다.(L'insatisfaction r sulte plut t de la conscience qu'il a tout de suite prise de la transcendance humaine. Quelle que soit la circonstance, quel que soit le plaisir offert, l'homme est perp tuellement au-del , il les d passe vers d'autres buts et finalement vers lui-m me.)(Baudelaire, p.120)
 
대자는 존재의 결여이기 때문에 존재의 충실을 원한다. 즉 공허가 메꾸어질 것을 요구한다. 매순간 자기의 생을 결정해야 하는 불안감에서 해방되어 아무런 감정이나 의식도 없는 돌맹이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은 즉자존재를 동경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즉자존재란 사물의 성질이 아닌가? 인간에게는 사물이 되고자 하는 은밀하면서도 강한 욕구가 있다. 「보들레르」의 다음 구절을 보자.
 
평생 이 사람은 오만과 원한에 의해, 다른 사람의 눈에나, 자기 눈에나 자신이 사물이 되기를 시도했다. 사회적인 대축제에서 동떨어져, 하나의 조상(彫像)처럼 단호하고, 불투명하고, 동화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뚝 서기를 원했다. 한마디로 그는 존재(즉자)이기를 원했다. 존재란 물체의 엄격하게 규정된, 고집스러운 현존을 뜻한다.(…) 그는 물체가 되기를 원했다. (Cet homme a toute sa vie, par orgueil et rancune, tent de se faire chose aux yeux des autres et aux siens propres. Il a souhait se dresser l' cart de la grande f te sociale, la mai re d'une statue, d fintif, opaque, inassimilable. En un mot, nous dirons qu'il a voulu tre - et nous entendrons par l le mode de pr sence t tu et rigoureusement d fini d'un objet.(…) Il veut bien tre un objet…) (Baudelaire, p.98)
 
il a voulu tre에서 사르트르는 tre를 이탤릭체로 씀으로써 단순히 "있다"는 뜻이 아님을 시사했다. 그것은 「존재와 무」에서도 여러번 나왔듯이 즉자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즉자는 돌이나 조각품 같은 물체(objet)의 존재양식이다. 물체는 그 부동성(不動性), 조용한 비삼투성(非渗透性), 지속성, 자기와 자기의 완전한 일치 등(immuabilit , imp n trabilit calme, permanence, adh sion totale de soi soi) (Baudelaire, p. 215-216)으로 고요한 휴식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돌의 휴식, 무생물적 존재의 휴식일 뿐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상태는 아니다. 인간은 물체의 편안한 행복감을 원하지만 그러나 죽음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즉자가 아니라 즉자와 대자의 종합이다. 대자이면서 즉자인 상태, 즉 유동적 운동의 변화 생성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견고한 어떤 사물의 성질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대자의 특권을 보유하면서 즉자로서의 충만성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존재의 충만성이고,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자기 원인인 동시에 목표인 이상적인 존재는 신(神)밖에 없다. 희곡 「악마와 선신」에서 주인공 괴츠가 신을 향해 『충만성인 당신이 어떻게 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comment concevriez-vous le N ant, vous qui tes la pl nitude?)(Le Diable et le Bon Dieu, p.115)라고 말한것은 신의 충만성과 인간의 결핍을 잘 대비해 보여 준다.

그러나 존재의 무인 대자는 항상 먼데 있는 존재,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존재이고, 자기와 자기가 분리되어 있고, 존재의 결핍을 괴로워 하는 존재이다. 만일 자기와 자기가 완전히 일치하여 하나가 되고, 존재의 결핍이 메꾸어져 충만성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대자의 성격을 상실하고 즉자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신이 아닌 한, 대자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은채 즉자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대자는 자신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경련적인 긴장이다. 그리하여 존재의 추구는 부단히 지속되지만 결국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이다. 즉자와 대자의 종합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인데 인간은 평생 이 불가능한 즉자-대자 존재를 희구하고 동경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쓸데없는 수난」(passion inutile)이라고 불렀다. passion은 「정열」의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은 우연성인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또는 자기 자신에게 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종교에서의 신과 비슷한 자기원인자(自己原因者, Ens causa sui)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끊임없는 무화 작업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의 수난과도 비슷한 자기상실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기 파멸이 신의 강림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에 반해서 인간의 기도(企圖)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고 만다. 왜냐하면 그가 희구했던 즉자-대자의 종합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
인간의 수난은 예수의 그것과 정반대이다. 인간은 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신의 관념은 모순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헛되이 우리를 상실한 것이다. 인간은 헛된 수난이다.(Ainsi la passion de l'homme est-elle inverse de celle du christ, car l'homme se perd en tant qu'homme pour que Dieu naisse. Mais l'id e de Dieu est contradictoire et nous nous perdons en vain ; l'homme est une passion inutile.)(E. N. p.708)
 
그러므로 크게 보아서 인간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실패( chec)에 불과하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 매 순간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이 삶이다. 이와같은 노력이 긴장이다. 사르트르에게서 대자는 긴장이고, 즉자는 긴장이완이며 추락이다. 왜 그런가? 의식은 대자와 즉자의 관계이며, 영원한 무화 작업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는 무이다. 어떠어떠한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란, 긴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의식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모든것, 예컨대 이 세계의 어떤 물체나, 과거의 자기 의식이나, 혹은 부재의 대상을 향해 자신을 초월하여, 지각, 추억, 상상 등의 정신작용을 수행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듯이 대자는 영원히 즉자를 동경한다. 한 순간도 쉴새없이, 직전의 자기자신이나 세계의 대상을 무화하고 다시 (즉자)존재를 만들고 또다시 그것을 무화하는 운동을 되풀이 하는 것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간은 돌의 휴식과 같은 평화를 원한다. 따라서 이 영원한 긴장의 노력은 영원한 긴장이완의 위협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긴장이 이완되어 사물(즉자)의 상태에 떨어지는 것은 추락, 또는 타락이다. 즉자는 마치 강한 자력으로 끌어다니는 극(極)과 같이 끊임없이 대자를 밑에서부터 끌어 당긴다. 의식은 이 즉자존재의 홀리는 듯한 매력에 사로잡혀 그것에 덥석 물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끈끈이에 들어붙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사르트르는 보들레르의 당디즘(dandysme)도 대자의 긴장으로 파악한다. 온갖 기이한 치장으로 멋을 부렸던 보들레르는 화장이나 옷치장을 찬양했고 옷차림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옷치장이나 화장은 단순한 모양 내기가 아니라 정신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일종의 금욕주의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아무런 고민없이 바보같이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에 대해서도 보들레르는 추락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냉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
그토록 쉽게 행복을 느끼다니 나는 당신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로 한 인간이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하겠소! (Je vous plains, Monsieur, d' tre si facilement heureux. Faut-il qu'un homme soit tomb bas pour se croire heureux!)(Baudelaire, p. 117)
보들레르는 이러한 심리적 긴장을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행복한 사람」은 정신의 긴장을 잃고 땅바닥에 넘어진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에 훌륭한 사람, 못난 사람의 등급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긴장의 정도에 따라서라는것이다. 결국 보들레르가 표방하는 귀족성과 위대성은 긴장이완에 대한 혐오의 다른 이름이다.
 
보들레르가 주장하는 인간의 귀족성과 위대성은 대부분, 무관심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무기력, 포기, 긴장이완은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으로 보였다. (La noblesse et grandeur humaine de Baudelaire viennent en grande partie de son horreur du laisser-aller. La veulerie, l'abandon, la d tente lui paraissent des fautes impardonnables.)(Baudelaire, p.169)  실존적인 삶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긴장이완을 일종의 악으로 간주한 보들레르의 태도는 그런 점에서 대자 존재의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다.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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