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③ 대자(對自), 즉자(卽自)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③ 대자(對自), 즉자(卽自)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③ 대자(對自), 즉자(卽自) 2004/09/24 21:56 http://blog.naver.com/heepom/6041290우리는 위에서 의식의 성격을 초월성으로 규정한바 있다. 초월성이란 의식이 의식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부단히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의식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의식 밖의 「그 자체로 있는 존재」에 관한 의식으로만 존재한다. 의식은 언제나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 관한 의식인만큼 그 자신의 성질이나 상태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투명하고 속이 비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존재는, 우리의 의식이 있건 없건, 다른 존재가 있건 없건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인 탁자, 의자, 나무, 책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므로 이것을 즉자(卽自, en-soi)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이와 다르다. 의식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대상의 세계 안에 있는 즉자들에 대한 인식, 지각, 욕망, 해석, 이해등의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대상에 대한 초월성인데, 의식은 이외에도 자기와 대면하여 자기를 반성하는 성질도 갖고 있다. 나무나 책상같은 사물은 자기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며 비판을 하거나 평가를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자기와 자기의 두겹 분리가 그 특징이다. 즉 「자기에 대해서 있는 존재」이다. 자기에 대해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대자(對自, pour-soi)라고 부른다.그런데 자기와 자기 사이의 빈틈, 그리고 의식과 의식외부의 대상과의 사이에 있는 빈틈이 무이다. 따라서 대자는 한 가운데에 무가 들어있는 그러한 존재 양식이다. 그런데 의식은 그 자체의 존재가 없이 투명하고 오직 외부의 어떤 존재를 향해서만 있다고 했으므로 의식 그 자체도 무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대자, 그리고 무는 모두 동의어이다. 이처럼 무(無)인 의식 때문에 인간은 다른 생물과 구별된다. 의식은 내용물이 없고, 투명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이 무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반성할 수 있다. 그런데 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없음」인데 사르트르는 이것을 존재속에 위치 시킨다. 존재의 앞이나, 뒤, 또는 밖이 아니라 마치 과일 속의 벌레처럼 바로 존재의 심장부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ce n'est ni avant ni apr s l' tre ni, ≪...≫en dehors de l' tre, mais c'est au sein m me de l' tre; en son coeur, comme un ver.) (L,Etre et le n ant, p.57)존재가 무를 품고 있는 경위를 살펴보자. 무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화작용을 통해 인간의 기도를 앞으로 투사한다든가, 대상적 세계를 인식한다든가, 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무화」(無化, n antiser)하기 위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란 「아무것도 없음」(非一存在)이므로, 아무것도 없는데에서 어떤 힘을 끌어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무에게 무화의 힘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로지 존재(L'Etre)만이 무화의 추진력을 갖고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무엇을 무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무엇이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즉 무엇이 있은 연후에야 그것을 존속시키거나 없애거나 할 수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무를 무화시키는 성질을 가진 한 존재, 자기에 의해 무가 이 세계에 올수 있는 그런 존재가 필요하게 된다.그런데 그것 자체로 충만한 물질성인 즉자존재는 결코 자기의 밖에 어떤 무를 만들어낼 수 없다. 자기 존재 안에 무를 간직하고, 자신의 실존으로 끊임없이 무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만이 무를 만들수 있을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의식, 즉 대자이다. 대자는 자기 자신이 무(無)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는 존재 고유의 가능성이고, 존재 그 자체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갖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존재와 무는 「있음」과 「없음」이므로 정반대의 뜻이 되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전혀 반대말이 아니다. 무는 존재의 밖에 있을수 없으며, 자기 자신이 「있기」위해서 존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무는 비-존재이므로 자기를 무화시키는데 필요한 힘을 자기에게서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는 「없음」이므로 자신의 「있음」을 어디서 빌려와야 하는데 그것은 존재에서부터이다. 그러니까 존재와 무는 같은 몸체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존재가 사라지면 무가 지배하는, 그런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라 존재가 사라지면 무도 사라지는 공동 운명체의 관계이다.이제 대자와 즉자의 성격이 거의 분명하게 드러났다. 인간의 의식 밖에 있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것, 그것이 즉자이다. 반면에 즉자같이 그 자체로 있지 못하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것, 다시 말해서 언제나 「…에 대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는것,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의식이며 동시에 대자이다. 여기서 용어의 문제를 한번 짚고 넘어 가기로 하자.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존재( tre, 영어로는 be 혹은 being)를 서로 상반되는 여러가지 의미로 썼기 때문에 글을 한층 더 난해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서 「무가 자신의 존재를 존재에게서 가져온다」(c'est de l' tre qu'il prend son tre)(E. N. p.52)라는 문장에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있음」이라는 뜻이고, 「존재에게서 가져온다」의 존재는 존재일반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문장에서는 tre가 즉자이고 의식 또는 실존이 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존재는 의식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원인일 수는 없다」(L' tre ne saurait tre causa sui la mani re de la conscience.)(E. N. p.32)는 문장에서 존재는 즉자를 뜻하고 의식은 대자를 뜻하는 것이다.사르트르의 저서에 흔히 나오는 "Il n'est pas, il existe"(그는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 같은 문장에서도 tre는 단순히 「있다」「없다」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즉자적 존재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exister는 대자적 존재 양식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께 쓰인 단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tre는 단순히 「있음」으로 해석되거나, 존재 일반이거나, 또는 "즉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떤 대상이 나타날 때만 지향성으로 존재하는 대자는 속이 텅 비어 있다. 즉 속에 무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즉자는 존재의 충실이다. 한 치의 틈새도 없이 속이 단단하게 차있는 돌맹이, 그것이 즉자의 이미지이다. 즉자는 침범할 수 없이 견고한 것, 동요되지 않는 것, 아무런 욕구나 견해가 없는 것이다. 능동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다.(L' tre est soi)(E. N. p.32)대자가 「자기와 자기의 관계」인데 반하여 즉자는 자기와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와 자기가 두겹 분리되는 대자와 달리 즉자는 자기와의 완전한 일치이다. 따라서 어떤 회의(懷疑), 판단, 의식같은 것이 없다. 대자는 「지금 그러하지 않은 모습의 존재이고, 동시에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존재」( tant ce qu'il n'est pas et n' tant pas ce qu'il est)인데, 즉자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존재」(l' tre est ce qu'il est) (E. N. p.33)이다. 즉자는 내부의 빈 공간이 없다. 따라서 「비밀이 없고 단단한 덩어리이다」(L'en-soi n'a pas de secret : il est massif.)(E. N. p.33) 그것은 충만한 실증성이고 타자성(他自性, alt rit , 자신을 마치 타인인 듯이 느끼는것)을 모른다. 완전히 고립되어 있고, 자기 아닌 다른 존재와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모르는 두 사람이 함께 어떤 공간 안에 있다고 상정해 보자. 그들은 괜히 불안해져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해하고, 상대방의 존재가 부담스러워 어쩔줄 모를것이다. 이것은 그 둘이 모두 속에 무를 품은, 그리고 초월적 의식을 가진 대자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는 서로 상대방의 존재에 스며드는 삼투성이다. 그러나 빈 방에 두 개의 돌맹이를 들여 놓았을 때 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맹이의 내부에는 의식이, 즉 무가 없기 때문이다. 돌맹이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기일 뿐이다. 돌맹이 상호간에는 아무런 삼투성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그 존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즉자는 시간성에서 벗어나 있다. 「즉자는 존재할 뿐이다」(l' tre-en-soi est)(E. N. p.34). 여기서 est로 인칭변화된 tre(영어로는 be) 동사는 exister(영어로는 exist)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대자적이 아니라 즉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실존과 반대 의미에서의 존재이다. 이처럼 즉자가 그것 자체로 충만한 상태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능성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어떤 필연성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 구르고 있는 단단한 덩어리의 돌맹이는 가능성 또는 필연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점에서 즉자의 존재는 우연성(contingence)이다. 가능성은 대자의 구조인데, 즉자는 가능, 불가능을 초월하여 그저 있을 뿐이다.(il est). 미래의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고 반드시 이 세계 안에 있어야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는 즉자 존재는 잉여물이다.(il est de trop)(E. N. p.34) 신에 의해 창조된것도 아니고, 존재이유도 없고, 다른 존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즉자 존재는 그저 영원히 잉여물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즉자존재의 성격 규정은 다음 세 줄의 동어반복적 공식이 될 것이다. 이때 l' tre는 역시 즉자 존재의 의미이다.L' tre est.L' tre est en soi.L' tre est ce qu'il est. (E. N. p34)(존재는 존재한다.)(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존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한가지 조심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의식을 대자로, 의식 앞에 있는 물질적인 대상을 즉자로 단순하게 명명했었다. 이런 단순한 설명은, 모든 사물이 즉자이고, 인간의 의식은 대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심어줄 위험이 있다. 즉자가 사물의 존재 양식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성질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사물의 정의를 "비삼투성, (…) 맹목적 지속성, 외재성"(par leur imperm abilit , leur permanence aveugle, leur ext riorit …) (Qu'est-ce que la litt rature? id es Gallimard, p.14) 등으로 규정했다. 여기서 비삼투성이란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는 물리적인 뜻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독립적, 고립적 존재라는 뜻이고, 맹목적 지속성이란 변화 생성에서 벗어나 있는 타성적(inertie) 존재라는 뜻이며, 외재성이란 인간 의식의 밖에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이라 하더라도 이런 성격을 갖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즉자존재일 것이다.예를 들어서 1년전 어느 날의 내 삶의 형태는 즉자존재이다. 그날의 나는 대자적으로 살았겠지만 이미 과거속에서 완결된 그날의 삶은 이제 와서 수정할 수도 되돌이킬 수도 없는 완결성이다. 「나는 그날 그때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채 그저 나의 과거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르게 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듯이 나는 그 과거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E. N. p160) 이처럼, 과거를 수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나로 하여금 과거를 「사실의 상태」( tat de fait)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것이 과거의 사실성이다. 사실성에 의해 과거는 사물과 같은 성질을 띄게 된다. 마치 속이 가득찬 돌맹이처럼 그것은 비삼투성, 지속성, 외재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즉자이다.나의 과거는 내 의식의 전개였고, 나의 대자적 삶의 양식이었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즉자존재가 되었다. 한편 미래는 어떠한가? 미래는 현재의 걸핍을 메우기 위해 대자가 앞으로 던져놓은 어떤 모습이다. 미래는 대자가 아직 되지 않은 모습이며, 가능성으로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것이다. 내가 되고자 하는 어떤 상(像)을 신기루처럼 하늘에 그려 놓고 나는 그리로 향하여 나의 기도(企圖)를 투사한다. 그때 그 미래의 모습은 과거의 내 존재와 마찬가지로 완결된 사물적 존재를 가졌다.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 중에서 현재만이 대자이고, 과거와 미래는, 인간의 삶이면서도 즉자적 존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물=즉자, 의식=대자라는 단손한 공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 인간의 삶도, 그가 끊임없는 초월성의 긴장을 버리고 하나의 고정된 형태 속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즉자적 존재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대자 존재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그 가능성은 결핍의 자각에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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