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기독교세계관학교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 ① 의식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 ① 의식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 ① 의식  2004/09/24 21:51
http://blog.naver.com/heepom/6041184

우리는 앞장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형성해준 다섯 사람의 철학자와 사르트르를 간단히 비교해 보았다. 그들은 헤겔, 키에르케고르, 니체, 훗설, 하이데거 등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철학에서의 새로운 업적도 과거의 모든 철학적 담론의 총화에 자신의 독창적인 담론을 약산 추가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무(無)와 자유의 개념일 것이다. 무는 물론 하이데거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왜 일반적으로 존재자가 있으며, 왜 무(無)가 아닌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마치 과일 속의 벌레 처럼 존재 안에 무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무가 존재의 반대말이 아니라는것, 무는 존재에서부터 나온다는 것, 따라서 존재가 없어지면 무도 사라진다는 것등의 관념을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에게서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서의 무는, 까닭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후 예정된 죽음 앞에서 불안에 떨고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좀더 관계가 있다. 거의 죽음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서 무는 자유개념의 심층적 기반이다. 노자, 장자의 동양적 무와도 다르고, 불안감이나 허무감 같은 심리적 상태도 아니며, 열반과 같은 객관적인 공허도 아니다. 「무」(無)라는 단어에 이끌려 인생의 허무감을 달래줄 것을 기대하고 사르트르의 책을 집어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망할 것이 틀림없다. 사르트르의 무는 의식 작용의 한 부분이며 자유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 개념에 기초한 자유, 이것이 사르트르 철학의 주요 테마이며 또한 그의 독창성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선 무를 발생시키는 의식의 존재 양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의식

사르트르는 인간존재의 성질을 사실성(事實性, facticit )과 초월성(超越性, transcendance)으로 규정했다.(L'Etre et le n ant, p95)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의식이 바로 초월성의 영역이다. 사실성은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의식의 초월성부터 우선 검토해 보자. 초월성이라는 말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뜻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욕심이나 감정에서 벗어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쓴다. 고전 철학에서는, 경험적 주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상위영역을 뜻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글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이 단어는 그런 뜻과는 무관한, 훗설의 현상학 용어이다. 초월성이란 의식과 그 대상 사이의 거리이며, 의식과 의식 아닌것 사이의 관계이다. 이것은 의식의 대상이 의식의 외부에 있다는것(즉 外在性, ext riorit )을 뜻함과 동시에, 자기 아닌 것을 향해가는 의식의 긴장을 의미한다. 즉 대상을 향해 가는 대자존재의 운동(le mouvement du Pour-soi vers son objet)도 의미한다. 따라서 외재성은 초월성의 영역안에 있다. 우리는 앞에서 훗설의 지향성을 말하면서 일반적으로 막연한 의식은 없으며, 반드시 어떤 대상이 있어야만 의식이 있다는 것, 따라서 의식이란 항상 「 …에 대항 의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었다.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인 그런 의식이 바로 초월성이다. 왜냐하면 마치 인공위성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키기위해 연속폭발을 하는 추진 로케트처럼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을 폭파시켜, 자신에게서 몸을 빼내, 대상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사르트르의 글에서 직접 인용해 보자.
 
감정도 일종의 특별한 지향성이다. 감정은 자신을 초월하는 수많은 방법중의 하나이다. (…) 감정도 하나의 대상을 겨냥했는데, 다만 감정적인 방법을 겨냥하는것이다. (Les sentiments sont des intentionalit s sp ciales, ils repr sentent une fa on-parmi d'autres - de se transcender(…) Le sentiment vise un objet, mais il le vise sa mani re qui est affective) 
(L'Imaginaire, P. 93)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감정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대상을 겨냥한다'는 초월의 의미이다. "자신을 초월"(se transcender)한다는 동사를 마치 「자기를 극복」한다는 금욕주의적 의미쯤으로 해석하면 큰 잘못이다. 우리의 감정도 의식작용이나 마찬가지로 외부의 대상을 향해가는 운동이라는 뜻이다. 이번에는 「초월적」(transcendant)이라는 형용사의 예를 보자. 「초월적」이란 가끔은 고찰 대상의 밖에 있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러나 특히 「의식의 밖에」(ext rieur la conscience)있다는 의미이다.
 
폴을 증오하는 것, 그것은 폴을 의식의 초월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나의 의식이 그를 지향하는 것이다. (Ha r Paul c'est intentionner Paul comme objet transcendant d'une conscience.)
(L'Imaginaire, P. 93)
 
이때 초월적 대상(objet transcendant)이란 내 의식의 밖에 있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여기 내 앞에 있는 책상, 의자, 책들을 현상학적으로 말해보면 그것들은 초월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나의 의식의 밖에 있으며, 나의 의식이 아닌 다른 물건이라는 뜻이다. 나의 의식이 책상을 대상으로 포착하여 그리로 향해 갈 때 나의 인식은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즉 대상의 외재성과 의식작용의 긴장감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 초월성이다. 이처럼 의식은, 그것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항해 경련하는 끊임없는 긴장이다. 대상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하고, 이러한 자세 속에서 매순간 자신을 소진 시킨다.
 

그런데 이때 의식이 어떤 대상을 자신의 목표물로 놓는(poser)행위, 그것을 정립(定立)이라고 부른다. 정립(영어 posit, 불어 poser, 독어 setzen)이란 일반적으로 「A가 있다」, 혹은 「A는 B이다」라는 말에서 처럼 어떤 사물이 존재함을 긍정하든가, 또는 어떤 내용을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명백히 규정하는 사고작용이다.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라는 홋설의 말은 의식이 자체의 내용물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항상, 어떤 초월적 대상의 정립(position d'un objet transcendant)임을 뜻하는 것이다. poser의 명사형이 position이고, 형용사는 positionnel이며, th matique(主題的)도 역시 같은 의미이다.
 
나의 의식이 하나의 탁자를 대상으로 하여 그 탁자에 대한 어떤 인식을 형성할 때, 이때 나의 의식은 이 탁자에 대한 정립적 의식이다. 즉, 나는 탁자를, 엄연한 실재를 가진 하나의 사실로서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의식은 단순히 「…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에 대한 정립적 의식」인 것이다. 「존재와 무」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 즉 「의식은 세계에 대한 정립적 의식이다」(la conscience est conscience positionelle du monde)(L'Etre et le n ant , p.18)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의식은 이렇게 오로지 자기 밖의 대상, 즉 세계에만 모습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기도 하는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자기를 반성하는 능력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세계를 향해 나타남(pr sence au monde) 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해 나타나는 (pr sence soi) 두 특징을 갖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초월성은 의식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즉 세계는, 의식과는 전혀 다른, 의식 밖의 물건이다. 그런데 만일 의식이 자신의 의식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때 그 대상인 의식 자체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탁자나 사과가 인식의 대상이 되듯이 의식 자체도 의식에 대해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도 다른 모든 외부의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으로부터 초월하여 의식의 밖에 독립해 있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의식은 탁자나 사과같은 다른 대상을 의식하듯이 그렇게 자신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의식은 결코 대상적 의식이 아니다. 「모든 의식은 …에 대한 의식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수정되어야 한다. 즉, 의식은 외부의 초월적 대상을 향할 때는 「…에 대한 의식」이지만,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때는 「자기의식」(conscience de soi)인것이다.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의식은 대상을 사실로서 정립하므로 정립적 의식인데 반하여, 자기의식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므로 비정립적(non positionnel)의식이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정립적 의식을 좀더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비정립적 의식이 동시에 들어 있음을 알수 있다. 역시 「존재와 무」의 한부분을 인용해 보자.
 
담배 케이스 속의 담배를 세고 있을때 나는 그것들을 센다는 정립적인 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세고 있는 나 자신을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케이스 안에 담배가 열두개비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을때 나는 사실, 나의 덧셈에 대한 비주제적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Si je compte les cigerttes qui sont dans cet tui(...) Je puis fort bien n'avoir aucune conscience positionnelle de les compter. Je ne me . (...) Et pourtant, au moment o ces cigarettes se d voilent moi comme douze, j'ai une coscience non th tique de mon activit additive)
(L'Etre et le n ant, P. 19)
 
좀더 설명을 해보자. 담배를 셀때 나의 의식은 담배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뿐 「담배를 세고 있는 나」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즉 나는, 담배라는 대상에 대해서만 정립적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셈하는 나의 의식은 의식에 의해 의식되지 않은 채로 있다. 즉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정립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의식은 겉으로 드러나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을 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셈을 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담배를 세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숫자를 세고 있는 나의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채 나는 단지 의식의 초월적 대상인 담배만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때 담배에 대한 의식이 정립적 의식이며, 내가 셈을 하고 있다는 의식에 대한 무의식적 의식이 비정립적 의식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내가 이 가치에 대해서 갖는 정립적 의식은 필연적으로 나의 자유에 대한 비정립적 의식을 동반한다』(Et la conscience positionnelle que je prends de cette valeur s'accompagne n cessairement de la conscience non positionnelle de ma libert , Situations, II, p. 107)라는 구절의 의미도 그것이다.
 
담배를 세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에 대한 모든 정립적 의식은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정립적 의식이다.」(L'Etre et le n ant, p.19) 다시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의식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주제적 의식은, 인식 그 자체는 아니지만, 모든 인식의 근원에 있다」(la conscience non th tique n'est pas un savoir mais elle est, par sa translucidit m me, l'origine de tout savoir.)(L'Etre et le n ant, p.110) 대상에 대한 의식이 전반성적(pr -r flexif) 혹은 비반성적(non r flexif)의식이라면 자기에 대한 의식은 반성적 의식(le r flexif)이다. 실존주의적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시인 보들레르를 분석하면서 사르트르는 자기의식을 머리 숙인 사람의 자세에 비유한다. 마치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한없이 내려다보는 나르시서스처럼 보들레르는 자기를 내려다본다. 보통 사람들은 나무나 집을 볼때 그 대상에 몰두해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결코 자기를 상실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대상에 몰두하는 법이 없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그가 바라보는 것은 나무 또는 집이 아니라, 나무 또는 집에 대한 그의 의식이다.
 
사물들은 이 의식을 통해서만 그에게 나타난다.(Baudelaire, p.26) 보들레르가 이처럼 자기의 의식을 고의로 분열시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되찾고자 하는 자기회수(r cup ration)의 염원 때문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타인이듯이 자기를 보았고, 또 보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는 자기가 둘이 되어야만 한다. 즉 의식이 둘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반성하는 의식」(r flexif)과 「반성된 의식」(r fl chi)이다. 둘은 동일한 의식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마치 타인인 듯이 자기를 본다는 것은, 보는 쪽과 보이는 쪽 사이에 거리가 벌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언제나 얼마간의 거리가 필요한 법이다. 이때 반성하는 의식과 반성된 의식 사이에 벌어진 틈새, 아무것도 없는 이 허공의 거리가 바로 무(無)이다. 그러나 무는 이렇게, 반성하는 의식과 반성된 의식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한 초월적 의식 속에도 무는 있다. 의식의 초월성은 자기자신을 벗어나, 자기를 넘어서서, 자기 아닌것으로 향해 간다는 뜻이다. 의식의 본성은 이처럼 탈자적(脫自的), 자기초월적(自己超越的)이다.
 
그런데 의식이 좀전의 자기에게서부터 몸을 빼낼때 마다 거기에는 틈새가 생기게 마련이며, 그것이 바로 무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서부터 몸을 빼냄이 있기 때문에 의식은 존재를 문제 삼을 수도 있고, 그것을 인식하거나 판단할 수도 있으며, 다른 여럿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배제할 수도 있고, 비현실의 대상을 스스로에게 제시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 무에 의해 대자(對自)구조가 생긴다. 「…에 관한 의식」이라는 구조 자체가 대상과 의식사이에 넘을 수 없는 균열, 즉 무의 심연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의식은 자기자신에 대해서까지도 항상 무를 개입시켜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한 가운데에 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이 세계 안에서 무를 분비하는 어떤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對自, pour-soi)존재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존재와 무」에서 마치 주제음처럼 반복되고 있는 tant ce qu'il n'est pas, n' tant pas ce qu'il est (being what it is not, not being what it is)라는 말은 난해한 수수께끼와도 같아서 철학에 소양이 없는 독자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지금 그러하지 않은 모습의 존재이고, 동시에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존재」라고나 할까.
 
이 개념도 생을 운동성으로 파악한 헤겔의 체계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형용사는 unruhig(불안한)이라는 말인데, 헤겔에 의하면 우리의 생은 그 자체가 불안이다. 즉, 자기 자신을 상실하였다가 다시 자신의 타자성(alt rit ) 속에서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그러한 자기의 불안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결코 자기 자신과 완전히 부합, 합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타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항상 자기 자신을 하나의 규정 속에 정립한다. 그런데 이 규정은 이미 그 자체로 자기의 일차적 부정이기 때문에, 의식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항상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란 「결코 그 자신인 바의 것이 아니며 또한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바의 것이다.」(「헤겔의 精神現象學」. I, p.187. 장 이뽈리뜨 이종철. 김상환 共譯, 文藝出版社)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사유가 현대 실존주의의 출발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여하튼 이 난해한 공식은 서양 언어와 우리 언어의 구조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일뿐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의 나는 간편한 실내복 차림으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나는 외출복을 갈아 입고 나가 어느 찻집에서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찻집에서 친구와 함께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모습의 존재도 실은 나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항, 즉, 「나는 지금 아직 그러하지 않은 모습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찻집에 앉아 있게될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두번째 항,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존재」이다.
 
좀더 범위를 넓혀서 생각해 보자. 여기 20전후의 젊은이 한 사람이 있다. 지금 그는 학생이지만, 10년 후 또는 20년 후 그는 사업가, 회사원, 대학교수 또는 신문기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학생이지만 아직 그가 되지 않은 사업가, 회사원…등의 존재( tant ce qu'il n'est pas)이고, 동시에 지금 현재의 모습(학생)이 아닌 존재(n' tant pas ce qu'il est)이다. 결국 궤변처럼 어려운 이 공식은 인간이 가능성의 존재, 미래의 존재라는 뜻일 뿐이다. 인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가할 존재가 결코 아니다. 파락호(破落戶)시절의 젊은 이하응의 존재는 이미 미래의 흥선대원군의 존재이기도하다. 인간은 「먼곳의 존재」(un tre des lointains)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실존이다. 실존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모든것, 앞으로 할수 있는 모든것, 즉 인간의 가능성의 장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현재의 존재에서 지금 현재의 모습이 아닌 존재로 옮아가려면 종전의 내 존재를 부정하고 거기서 몸을 빼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에 적용되었던 운동성의 법칙이 인생 전체에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식의 초월성(transcendance)이「자기로부터의 도망」( chappement soi) 이듯이 총체적인 인생 그 자체도 매순간 「자기로부터의 도망」이다. 대자 존재의 생성운동은 동질적인 연속이 아니라 매순간 단절이다. 의식은 언제나 종전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새로운 계획 또는 기도(企圖)를 앞으로 투사한다. 불어에서 projet는 계획 기도라는 뜻이 있는가 하면, pro와 jet를 분리하여 어원을 따져보면 앞으로 던진다는 뜻이 된다. 사르트르는 이 두가지 뜻을 다 함축한 의미로 projet를 사용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투기(投企)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출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① 의식|작성자 학습 연구 가르침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