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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마술-사도행전의 경우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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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마술-사도행전의 경우들을 중심으로
무속, 환생, 뉴에이지 문화와 개혁신앙(5)
1997년 06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연락  안양대 교수
(자료출처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4)
요즘 '환생 신드롬' 등 무속적 사상이 사회에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상업주의'와 맞물려 독버섯처럼 우리네 삶에 번지고 있다. 이 현실을 기독인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국개혁신학회(회장 김영한) 주최로 지난 1997년 3월 29일에 열린 '무속, 환생, 뉴에이지 문화와 개혁신앙'의 심포지엄은 그 질문에 성경적 답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본지는 이날 발제된 원고 전량을 독자께 제공한다. <편집자 주>

1. 연구의 경향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의 마술에 대한 연구들을 검토한 1980년 논문에서, David E. Aune는 마술의 본질과 역할 그리고 종교와의 관계를 지난 한 세기 이상 연구들의 끊임없는 논쟁점들 중 하나로 지적하면서, 인류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의 연구들의 도움으로 그 동안의 마술에 대한 잘못된 정의들을 비판하고 본질적으로 마술과 종교의 엄격한 구분 혹은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마술의 본질적인 요소들로 神들이나 靈들 혹은 사건들에 행사하는 '강제성(coercion)', '통제성(control)', 혹은 '조작성(manipulation)'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다만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이 가치 중립적인 입장에서 종교와 마술의 유사성 혹은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동질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 나름대로 정당성을 지니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마술은 그 자체 종교적인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전통들에 관여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종교와 마술이 구분되는 것은 종교와는 달리 마술은 기존의 제도권 안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런 연구들과 발맞추어 학계의 일각에서는 예수를 마술사들이 행하는 것들을 행하는 마술사로 규정하기도 하며, 당시에 예수와 기독교 전도자들이 마술사들로 여겨지거나 비난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현대 종교학자들과 같이 가치 중립적인 입장에서 마술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나 기독교 전도자들을 마술사들로 여기지 않았으며, 마술이 그 자체로서 그들에게 주된 관심사가 될 수도 없었다. 신약은 다만 기독교 선교현장에서 부닥치는 문제들 중 하나로서 마술을 취급할 뿐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 종교와 마술의 유사성이나 동질성을 주장하는 학계의 경향이나 기독교가 마술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비난받았다고 하는 학계의 이해가 신약의 저자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마술로부터 차별화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하다.

신약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신약이 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차별화를 꾀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오히려 마땅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마술사들과의 대면 기사들에서 저자가 기독교와 마술을 어떻게 차별화하는지를 검토하기로 한다(이미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게 행해져왔기 때문에, 그 연구들을 따라가면서 정리하고 새로운 시각을 찾아보도록 시도한다).

신약에서 마술을 나타내는 단어들로는      (마 2:1, 7, 16; 행 13:6, 8),       (행 8:11),       (행 8:9),          (행 19:19; 딤전 5:13),         (갈 3:1),          (갈 5:20; 계 18:23),         (계 9:21),         (계 21:8, 22:15) 등이 사용된다. 이 중       -단어들은 갈라디아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악행의 목록에 사용되고,         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적대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빗대어 마술에 걸린 것으로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이들 단어들과는 달리,    -단어들은          와 함께 사도행전 한 책에서 마술사들의 행위에 관계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다른 단어들보다 당시의 마술에 대한 이해를 생동감 있게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단어들이 나타나는 본문들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그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8:4-25, 13:4-12, 19:8-20.

마술사를 가리키는      는 원래 페르시아 종교에 있어서 점성술에 관계하여 제사장 역할을 하던 메데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마태복음에 '동방박사'('현인')는 이 단어의 기원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된 경우이다. 단어의 기원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어려우나 이 단어는 마술사로도 사용된다. 신약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두 의미는 헬라시대에 나란히 사용된다. 마술사로서의 이 단어는 반드시 나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마술사는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어떤 통제력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마술사 혹은 마술이라는 용어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 용어를 중심하여 나타나는 사건 묘사에 따라 마술/마술사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술에 대한 신약의 이해에 대한 연구들이 적지않으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관계한 연구들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두 작품들을 들 수 있다: Susan R. Garrett, The Demise of the Devil: Magic and the Demonic in Luke's Writings (Minneapolis: Fortress, 1989); Hans-Josef Klauck, Magie und Heidentum in der Apostelgeschichte des Lukas (Stuttgart: Verlag Katholisches Bibelwerk, 1996).  Garrett은 마술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이 마술에 대한 어떤 특정한 정의를 전제하고 그 전제에 따라 복음서 저자들의 세계관이나 예수의 행위들이 마술적이었는지 아닌지를 규명할려고 시도했으나 이는 비생산적이요 만족스럽지 못한 노력("an unproductive and unsatisfying endeavor")이라고 비판한다.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작품의 세계(the narrative world)에서 마술에 대해서 말해지고 있는 바, 곧 해석되고 있는 바를 들을려고 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작품의 세계 속에서 마술사를 하나님의 대적자요 사탄의 사역자로 밝히면서, Garrett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사탄의 세력은 약화되고 예수의 이름을 신실히 부르는 자들은 사탄의 세력을 이긴다는 점을 마술사들과의 대면에서 밝혀낸다. 결론 부분에서 그녀는 이 본문들이 던져주는 의미들을 마술사들과 기독교지도자들의 차별화에서 기인한 반마술변증론(anti-magic apology)에서 찾고, 마술사들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회개치 않는 유대인들이 마술사들이 범하는 것과 같은 악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비난하는 것에 누가의 관심이 있다고 주장한다.

Hans-Josef Klauck의 단행본은 사도행전의 마술을 다룬 가장 최근의 연구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출판할 이 책의 내용을 1994년의 소논문에 요약 발표를 했다. 이 두 작품에서 마술과 이방사상을 사도행전의 본문의 세계를 엮어주는 여러 주제들 중 두 가지라고 간주하면서, Klauck는 이 주제들을 통하여 누가는 당대의 교회 내 외적으로 밀어닥치는 혼합주의의 위험에 경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은 방법론적인 고찰 없이, 사도행전의 관련 본문을 차례로 석의한다. 특히 마술사 시몬의 경우, 교회 내에서 이방 방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과 교회 직분자들의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행위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고; 바보에서의 마술사 바예수의 경우, 기독교복음 전파의 최대의 敵은 혼합주의에 있음을 주장하고 마술사 바예수는 개종 이전의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마술책들을 공개적으로 소각한 것을 반마술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 독자들에게 마술에서 떠나고 새로운 기독교인의 삶을 순수하게 견지할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위의 두 연구들이 보여주는 바는 최근 신약해석 경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과거의 역사적인 연구 일변도에서 사회문화적인 측면에 관심을 돌리고 있음과, 본문의 세계를 추구하는 문학적인 연구의 부흥을 읽게 된다. 두 연구가 함께 본문의 세계를 중시한 만큼, 연구의 결과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이해가 많이 보인다. 둘 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을 떠나서 일어나는 마술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만 본문이 마술을 통하여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밝혀보려는 점에서 이들은 일치한다.

우리도 신약이 제시하는 마술에 대한 이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본문이 말하는 바를 청취해야 할 것이다. 물론 본문의 세계라 함은 본문이 가정하고 있는 바를 전제로 한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앞으로 사도행전 본문이 가정하고 있음을 보겠지만, 여기서 이제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의 마술에 대한 이해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2.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의 마술

우리가 살펴볼 사도행전 본문들에 나타나는 마술사들은 유대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문이 전제하는 유대인 사회에서의 마술에 대한 이해를 부분적이나마 본문해석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 마술은 기성 종교 전통의 틀 안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리스-로마 종교에서뿐 아니라, 유대교나 후에 기독교에서도 마술이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대 유대인들이 마술을 행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동시에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마술을 행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유대교의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마술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헬레니즘의 문화적인 영향은 지대했다. 특히 도시에 있어서의 이방 문물의 침투는 막을 수가 없었다. 경건한 랍비들이 영적인 것이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우수하고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유대 대중들 사이에 파고드는 헬라화하는 물결을 막을려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웃 이방 민족들의 마술이나 점성술을 비롯 각종 미신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막으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결국 랍비들은 그런 이방 풍속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합법화하고 유대교화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할 만한 史料들은 주로 바벨로니아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에서 찾아지지만, 그보다 더 이른 시대의 자료들에서도 나타난다. 미쉬나에 언급되는 여인의 옷에 묻은 핏자국(blood-stains)에 관한 속담(Nidda 7.3)은 마술에 사용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참된 마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요세푸스의 경우 솔로몬은 귀신을 쫓아내는 주문(呪文)을 남겨 요세푸스 자신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그 주문을 따라 귀신을 효과적으로 쫓아내도록 했다고 기록한다.

더욱이 이런 솔로몬의 마술 전승이 "솔로몬의 유언"(The Testament of Solomon)이라는 문헌을 통하여 다수 전수되고 있다. 이 책은 주후 1세기의 작품으로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마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된다. 이 문헌에 의하면, 천사장 미가엘은 솔로몬에게 악령들을 심문하는 데 사용하는 마술 반지를 주었고, 이 반지를 사용하여 악령들의 이름들과 악한 활동들을 찾아내고 축출할 수 있게 된다. 사해사본 가운데 점성술에 관한 문헌이 있다는 사실은 마술적인 요소가 쿰란공동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게 한다.

때때로 이방인들이 보기에 유대교가 마술을 행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상의 논의가 유대 사회에서 마술이 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을 근거로(예, 신 18:9-14, 20-22) 거짓 선지자들과 이와 관계하여 이방의 점(pagan divination)이 배격되었다. 마술은 거짓 예언과 이방의 점과 함께 사탄의 세력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대인 사회에서의 마술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고찰할 사도행전 본문의 세계에서 요청되는 바에 따라 활용될 것이다.

3. 사도행전 8:4-25

사도행전에서 처음 만나는 마술사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현장에서 등장한다. 저자 누가가 마술사 시몬의 인물됨을 어떻게 묘사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빌립의 사역을 중심한 인물묘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글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획기적인 새 흐름을 개척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다. 1:8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끝까지의 증인되는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예루살렘을 벗어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의 새로운 선교의 장으로 들어간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 이방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새로운 선교의 장에 새로운 인물이 사역함에도 불구하고, 전파되는 내용이나 방법은 동일하다.

아직 이방인의 선교가 시작되기 전이라는 사실은, 비록 사마리아라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을지라도, 사마리아인들을 비롯 마술사 시몬은 역시 유대인, 곧 사마리아 유대인으로 취급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방세계의 마술에 매혹되어 마술을 행하기도 하고 따라다니기도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술사 시몬이 유대인 사회에 있으면서 마술을 행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마술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마술사 시몬은 사마리아인들을 자기의 마술의 능력 아래 묶어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빌립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시몬의 마법은 풀려지고 자신을 비롯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된다. 마법이 풀렸을 뿐 아니라, 시몬은 자신의 마술과 비교했을 때 빌립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이 더 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마술의 차이를 주목하게 한다. 전하는 내용에 있어서, 빌립은 '말씀'/'하나님의 말씀'(:4, 14), '그리스도'(:5),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12)을 전한 반면에, 시몬은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전함으로써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자신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빌립은 자신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서(6:3-5) 큰 능력을 행했으나 자신을 전하지 않고, 오히려 사마리아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시몬의 관심사는 '위대한/큰'이라는 단어에 나타난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마술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의중을 드러낸다. 본문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된다. 누가복음 22:69의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7:55, 56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우편에"로 연결되어,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하나님"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따라서 누가는 시몬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인식시켰다고 기록함으로써 시몬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았음을 보여 준다.

빌립의 사역에서 그의 마술이 더 이상 통하지를 않으니 빌립을 따라 다닌다. 빌립의 마술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마술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 생활과 함께 마술을 받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며, 시몬도 자신을 신격화하였다 해도 유대인의 하나님을 빙자하여 마술을 행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후에 베드로와의 대면에서 시몬은 그의 본성을 드러낸다.

베드로에게 돈을 드려 성령을 받게 하는 권능을 살려고 한 것은, 빌립의 사역뿐 아니라 베드로의 안수도 시몬 자신이 행하던 마술과 다를 바 없는 그러나 더 큰 능력의 마술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며, 전문 마술사들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아마도 시몬 자신도 이전에 마술을 배울 때 그러했듯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마술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빌립도 하지 못하던 성령을 나누어주는 능력, 성령을 부리는 마술을 그가 행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가 돈을 들여 살려고 한 것은 그도 돈을 받고 그 능력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을 빙자하더니, 이제는 성령을 부릴려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마음을 드러낸다(:21).

요약하자면, 마술사 시몬의 눈에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 마술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였을지라도, 이 둘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시몬은 유대인 사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빙자하여 마술을 행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마술을 행하였다. 자신의 무능함이 드러난 후, 예수를 믿었으나 성령을 부리는 더 큰 능력의 마술을 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려고 하였다. 비록 자신이 마술로 큰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 앞에는 무능력해진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자의 결국은 예고되었으며(8:20) 독자는 후에 확인하게 된다(12:22-23). 바로 이런 점들에서 빌립과 베드로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구분된다.

4. 사도행전 13:4-12

빌립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 역시 성령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해 세움을 입은 자들이다(13:1-2).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행한다(:4-5). 이들이 살라미에서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사역이 광범위하였음을 가리킨다. 아마도 그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까지 이들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에 대한 소문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가 바울을 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7) 하였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난 것은, 바울의 관례에(:5) 비추어 보아, 유대인 회당에서 만났을 것이다. 마술사 시몬처럼, 마술사 바예수도 유대인으로서 선지자 노릇도 하면서 동시에 마술을 행하였다. 거짓 선지자라는 칭호는 누가의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지, 바예수 자신이 "거짓" 선지자라고 소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유대 하나님의 선지자로 행세하였을 것이고, 그의 마술에 있어서도 유대인의 하나님을 빙자한 마술을 행했을 것이다. 그가 총독과 함께 있은 것은 총독에게 자문을 베푸는 자의 자격으로(a court advisor) 고용되었을 것이다.

그가 총독으로 하여금 바울을 믿지 못하게 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하였고, 바예수의 보기에 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은 자신이 행하는 선지자 역할과 유사하게 이해되었기에, 그들이 자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바예수가 총독으로 하여금 바울의 전하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분 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정체를 밝혀내고(:10) 주의 이름으로 저주를 선언한다(:11).

여기서 누가는 마술사 바예수-엘루마의 바울과 바나바에 대적하는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고 총독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주의 가르치심을 믿도록 하는 촉매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누가의 용어 사용과 바울이 파악한 바예수의 정체는 그가 하나님의 대적자임을 나타내 준다. 엘루마의 대적행위를 나타내는 누가복음 21:15과 사도행전 6:10에서 예수의 이름과 성령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에 대적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거나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13:10, 20:30; 눅 9:41, 23:2).

바울이 성령이 충만한데 비해(행 13:9), 바예수는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로서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자"이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것은 누가복음 3:4-5의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사역하는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돌이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바른"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독자는 마술사 바예수를 마술사 시몬의 마음, 곧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마음"(8:21)과 같은 통속으로 이해하게 된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를 시험한 자는 마귀인데, 예수를 전하는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는 그 마귀의 자식으로 여겨진다. 또한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서 빼앗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눅 8:12). 여기의 바예수 엘루마는 마귀의 자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는 총독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믿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다.

바예수의 대적 행위에 대해서 바울이 주의 이름으로 그를 저주함으로써(행 13:11), 바예수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주의 이름으로, "주의 손"으로 저주하는 것은 바예수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마술 행위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주의 손"(4:28, 30, 7:35, 11:21; 눅 1:66)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하심"을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을 나타내며, 단순한 마술의 주문으로 여길 것이 아니다. 마술사와 점성술의 관계를인정할 때, 그로 하여금 얼마동안 소경이 되어 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마술을 행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담겨있다. 사도행전 본문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바울 경험을 돌이켜 보게하는 징계로서(행 9:8-9), 바울이 그러했듯이, 얼마 후에 바예수로 하여금 돌이켜 그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는 뜻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이해는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 것과 일치한다(8:22-24).

지금까지의 이해에서 볼 때, 바울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은 외형적으로는 마술과 유사하게 보여졌을 수 있다고 하겠다. 더욱이, 마술사 바예수의 관점에서는 바울의 마술이 그 자신의 마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바예수-엘루마의 정체성을 드러낸 바울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함으로써, 바울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마술의 차이점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마술사 바예수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대적자요 마귀의 자식임이 드러났다.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대적하는' 자는 곧 이와 같다 할 것이다.

5. 사도행전 19:8-20 
본문도 역시 바울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마술사들의 방해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더 흥왕케 하는 계기가 된다. 성령의 사람으로서(19:1-6), 바울은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열심으로 사역을 하는 중,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심으로 바울의 사역을 확증하셨다. 바로 이 "희한한 능," 곧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하여[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악귀를 쫓아내는 일은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볼 때에는 그들이 하던 일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들도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악귀를 쫓아내는 일을 시행해 보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들의 실패로 끝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 예수의 이름"이 도리어 높임을 받게 된다. 동시에 믿는 자들 사이에서 마술에 대한 결별이 선언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흥왕하게 된다.

이 본문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문제된다. 돌아다니며 악귀를 쫓아내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의 대제사장이라고 칭하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과 믿은 사람들 중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두 부류이다. 전자는 유대인으로서 특히 그들의 야웨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받아 들여도 좋을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 마술을 행하고 있었고, 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술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그 행실을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지금까지 살펴본 사마리아 유대인 마술사 시몬과 유대인 마술사-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비록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경우는 언급이 없지만,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복하고 회개의 열매로 마술책들을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19) 불살랐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전에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회개했는지 불분명하거나 아예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에베소에서의 결과는 분명하다. 본문의 흐름에 있어서 진일보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실패는, 특히 악귀가 한 대답,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는 예수의 이름은 그렇게 아무나 빙자할 이름이 아님을 보여 준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가 비록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사용했을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거명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친히 "희한한 능"을 행하신 것이지만,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그들이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예수의 이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술사들이 불러내는 이름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바울이 행한 "희한한 능"이 마술과 다를 바 없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술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악귀는 누가 진정으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권세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마술적인 사용은 효용이 없다.

악귀의 대답은 복음서에서 더러운 귀신이 예수께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41, 8:28)라고 외치던 것을 회상하게 한다. 악귀는 예수가 누구인 줄도 알고, 예수의 이름의 권능도 안다. 악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제자들을 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음도 알고 있다(눅 9:1, 9:17-20). 더욱이 악귀는 예수께서 그런 권세를 주셔서 보내신 제자들이 누구인지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악귀는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고 대답하며 달려들었다. 즉, 바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신 자라는 것을 악귀가 확증해 준 셈이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사건에 바울이 직접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바울은 다만 유대인 회당에서 석 달,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를 내용으로 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베푸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외쳤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이었다. 스게와의 아들들을 비롯 악귀를 쫓는다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명하여 악귀를 쫓아낼려고 했으나, 결국 이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가 도리어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확증해 주었고 더 흥왕하게 했다.

6. 결론적인 종합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종합하면서 몇 가지 결론적인 의미들을 도출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대 종교학자들이 마술과 종교는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경향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 논문의 논의를 시작했다. 예수 시대로부터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와 기독교를 마술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비판한 경우도 있었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였다. 마술이라고 해서 다 부정적인 인식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유대 사회 속에서 마술이 횡행하였던 시대 상황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사도행전의 마술에 관련된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세 경우 모두 빌립, 베드로, 그리고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 마술사들의 관점에서는 마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내용적인 면에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적어도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그리고 마술사들이나 믿지 않을려는 입장에서 보기에는 마술과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의 이름"은 비록 마술사들의 주문(呪文)에 사용되는 것과 유사하게 여겨질지라도, 그 이름은 아무나 함부로 이용할 수 있는 마술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했다.

이뿐 아니라, 유대인의 사회에서나 기독교인의 사회에서 마술을 버리지 않고 유대인의 하나님과 마술, 예수와 마술을 겸하여 지킬려는 경향이 농후하였음을 새삼 발견한다. 사마리아 유대인 시몬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사칭(詐稱)하여 마술을 행했을 가능성을 엿보면서, 그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여전히 마술사로서의 본능적인 기질을 드러냈던 점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유대인 마술사 바예수가 선지자 노릇을 행한 것이며, 유대인 대제사장 가문의 아들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마술]을 행한 경우라든지, 그 후 자신들의 마술 행위를 자복하고 회개한 많은 믿던 사람들의 경우는 당시의 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이 이렇게 혼합주의적으로 흐른 것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신분 보장을 위해 마술을 버리지 못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겠고, 특히 에베소의 신자들 가운데는 아직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제압하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대한 확신의 결핍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악귀가 반항적으로 대답할 때, 비로소 그들은 예수의 권능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전 마술 행위들을 고백하며 마술책들을 공개적으로 소각함으로써 마술과 결별하게 되었다.

또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시몬과 스게와의 아들들과 같이 마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넘나보는 것은 자신들의 신관(神觀)에 있어서 확신이 결핍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자기들이 이전부터 섬기던(?) 혹은 활용하던/빙자하던 신(들)을 의지하지 못하고 더 능력있다고 여겨지는 "예수의 이름"을 찾는 것은 그들의 신관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마술사들의 활동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에 도전적이었고 반항적이었으나,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를 내용으로 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되는 곳에는 마술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배후 세력인 사탄이 하나님의 통치아래 패배하고 무력화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술과 하나님의 말씀이 공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흥왕케 하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술을 이용하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 마술은 허황된 이야기로 들려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경우들이 선교현장에서의 이야기들로만 들려질 수 있기 때문이며, 오늘날 현대 과학이 마술을 정복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 마술적인 요소들은 없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인격적 만남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예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만들지는 않는지 늘 자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마술적인 것에 의존하는 경우들도 우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마술사 시몬의 경우나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마술을 행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결코 2000년 전의 사람들만은 아닌 듯 우려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6월호)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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