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퍼스의 哲學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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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의 哲學思想
認識論
야스퍼스에게 있어 인식 방법은 회의론적이다. 야스퍼스는 주관성의 인식론적 우위를 강조함에 있어서 데카르트를 훨씬 능가한다. 즉 나의 사고는 주관성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왜냐하면 자각은 항상 부분적 해석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기술들의 결과들이 보편적 존재론을 이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자아들이 경험들을 비교하는 한 증명될 수 있다.
철학에 있어서나 혹은 과학에 있어서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궁극적으로 직관과 나 자신의 자아의 결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종종 잘못된 가정들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의 탐구방법은 완전한 세계상을 위하여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實存哲學
자아의 본성은 실존해명(Existenzerhellung)을 통하여 발견된다. 실존해명은 인간의 가능성들, 즉 자아와 존재의 이해를 추구하는 실재의 가능성들을 드러내 준다. 실존해명은 질문자 자신에로의 접근을 허용한다. 인간에 있어서 실재적이며 가치 있는 것, 즉 진정한 것은 실존(Existenz)이라 불리어 진다. 실존은 새로운 가능성들에 무한히 열려 있으며, 전통적인 탐구로는 접근할 수 없다. 비록 실존이 개념적으로 한계 지워질 수 없는 인간존재의 결정적인 영역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경험된다. 실존은 인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이며, 반면에 현존(Dasein)은 인간의 현세적인 차원이다. 현존은 기술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영역이며, 이론적 반성으로 접근될 수 있다. 단순한 현존을 나의 존재인 실존의 진정한 근거와 혼동하는 것은 우둔한 유물론이며, 난파를 초래한다. 반면에 현존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허무주의를 초래한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이 중용인 것이다.
인간은 그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생존은 의존과 공존하는 자유, 고독과 공존하는 사귐, 악과 공존하는 선, 불행과 공존하는 행복, 죽음과 공존하는 삶 같은 역설과 이율배반들로 가득차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은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의하여 제한된다. 이러한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특성은 그의 유한성이다. 인간은 유한성을 자신의 실존에 대한 한계로서 경험한다. 진정한 실존은 가능한 이러한 한계들을 밀어 되돌려 보내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을 수용하고 견디어 나가려고 한다. 죽음은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뒤로 연기하지 않고 확실하게 삶의 절박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상황성의 한계는 우리가 한편으로 우리 자신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자유는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이다. 자유는 도덕적 책임의 문제가 되는 선택의 압도적인 중요성을 초래한다.
실존은 한계상황을 통해 감지되고 실현되며, 또한 초월자를 감지함으로써 실존이 나에게 증여되는 나의 현실적 실존이다. 실존이 한계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깨닫는 비약은 첫째 모든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세계현존으로부터 보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고독한 자아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둘째 좌절의 세계 속에 내가 필연적으로 참여하여 한계상황에 있는 자신을 알고, 이 한계상황을 사유함을 통하여 사물들을 관찰함에서부터 가능적 실존의 해명에로 나아가는 것이고, 셋째 가능적 실존으로의 현존으로부터 한계상황 속에 있는 현실적인 실존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한계상황의 해명을 통하여 실존해명이이 이루어지고, 한계상황의 주체적 체험을 통하여 현실적 실존에로의 비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V. 야스퍼스의 倫理思想
야스퍼스에 의하면 철저한 절망은 자아존재에로 향하는 첫 번째 길이다. 개개인이 아주 벗은 채로 자기 자신에게 내 던져진 후에는 그가 참으로 함께 연합하는 다른 개별자와 더불어 시작하는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존속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내적 고독을 극복하게 해주는 수단을 우리는 사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존적 사귐은 현존적 사귐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며, 인간존재가 자아존재로서의 본래성을 획득하려는 요구에서 비롯된다. 나는 타자와 협력함으로써만 서로 자신을 개방하고 명백하게 될 수 있다. 자기의 고유한 자유는 타자의 자유가 존재할 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고립된 혹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자아존재는 단순한 가능성으로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無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귐에의 길은 사람들간의 단순한 인사말 교환이나 우정 그리고 사교적 교제가 아니라 [명백히 됨}(Offenbarwerden)에로 부단히 나아감이다. 실존적 사귐은 현존적 사귐과 달라서 과학적으로 탐구될 수 없고, 오직 철학적 해명을 통해서만 밝혀진다. 왜냐하면 실존적 사귐은 초월자에 근거를 두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독자적인 실존사이의 사귐이기 때문이다. 참된 사귐으로서의 실존적 사귐은 거기서 처음으로 자기의 존재를 타자와 함께 실현하면서 자기를 본래적으로 알게되는 사귐이고, 경험적 사실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존재는 사귐속에서만 자아에 도달하고, 실존은 사귐에 있어서만 실현되며, 실존의 가능성은 연대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자아존재와 [사귐속에 있는 존재](In-Kommunikation)는 불가분적이기 때문에 실존적 사귐의 주제는 자아존재이다.
야스퍼스는 두 자아는 자아존재와 헌신의 긴장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그리고 서로를 위한 상호창조에 있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서로 명백히 됨의 변증법적 과정으로서의 사귐은 고독을 전제하며, 하나됨을 목표로 하면서 이원성에로 나아간다. 실존적 사귐에 있어서 실존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은 실존이 개별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들은 역사적 일회성을 가지면서 사귐에 들어갈 때 비로소 상호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독자적 근원에서 존재하고 가장 깊은 사귐을 실현하려면 고독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실존적 사귐의 한 가지 조건은 고독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동시에 실존적 사귐은 초월자에의 길에서 이루어지고, 실존과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깊이 고독 속에서 고독하면서 고독을 초월한 사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자 초월자를 지향하는 자아존재가 되어야 한다. 실존적 사귐의 조건은 고독할 수 있는 능력이며, 고독은 실존적 사귐에 필연적인 것이다. 나는 사귐 속에서 나를 타자와 결합시켜야 하지만 그러나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결국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항상 필연적으로 내면성의 계기와 창조적인 반성과 명상 그리고 고독한 자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야스퍼스가 기만적이고 이기적인 현존의 투쟁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한 실존적 수준에서의 사랑하면서 연합하는 투쟁은 자기 자신과 상대방속에 있는 폐쇄성과 사귐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사귐 속에 있는 자들의 비이기적인 상호호혜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에 있어서 타자는 자신의 자아형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자는 그 자신의 자기 목적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자아형성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서로 사귀는 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실존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실존적 사귐에 있어서는 사귐의 상대와 그의 문제를 위한 비이기적이고, 또한 상대방이 어떠한 목적이나 이기적인 관심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는 상호간의 계약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존적 사귐은 그 조건으로서 동일수준을 요구한다. 동일 수준은 자아와 자아가 거기서 근원적으로 만나게 되는 실존적 위계의 동일성으로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명백히 하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점에서의 동일성을 말한다. 내가 타자와 사귈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타자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꼭 같이 타자가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 없이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야스퍼스에게 있어서 윤리학은 경험과 자유의지의 가능성의 탐구이다. 자유는 선택, 자각 그리고 자아성과 동일시된다. 선택하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유는 그의 존재이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유롭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역사성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다. 나의 과거의 선택들은 나를 구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 내에서 나의 자유는 전체적이다. 자유는 자발성과 행위로서 경험된다. 따라서 자유는 관찰하는 이론가가 되기 위하여 보다는 행동하고 참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더욱 더 중요하다. 나의 자유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실존해명의 존재이유이다. 내가 선택할 때는 언제나 나는 행동하고, 나의 행동을 의식하며, 관련된 가치들을 알고 있고, 나의 선택의 결과들은 종종 불확실하기 때문에 모험을 하며, 그리고 어떤 가치들에 전념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의 존재는 나의 자유의 신성한 본성을 어렴풋이 나타낸다. 각각의 선택은 이전의 결정들의 축적된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초의 선택은 모든 다른 선택들을 가리운다. 결과적으로 죄책은 내 자유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나의 최초의 선택은 그 후의 나의 존재를 압도하고, 원죄의 역할을 가정한다. 나는 그 최초의 선택에 책임이 있다. 게다가 나는 더 오랫동안의 삶을 위하여 나의 성실성을 희생하거나 아니면 나 자신을 나의 진실한 실존적 가능성들에 맡기든가 하는 선택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다. 이러한 선택들의 고유한 어려움은 더 큰 죄책을 가져온다. 이 죄책은 내가 절대적인 기준들을 상상하고 그것들에로 접근해감에 의하여 완화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나는 어떠한 고정된 기준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절대주의는 합리화이며, 죄책의 한계는 참으로 꿰뚫고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은 또한 내가 나는 내 가능성들의 전망을 상실할런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동일한 고통은 나의 실존의 진정한 가능성을 이행할 것을 나의 전존재를 걸고 선택하는 절박함과 용기를 나에게 제공한다. 그 심연에 직면해서 나는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방향결정을 받아들이거나, 마치 내가 그 앞에 서 있는 그 심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이러한 문제들을 의미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허무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실존이 나를 반영하는 정도까지만 존재한다. 나 자신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실존과의 사귐의 사랑의 투쟁을 추구한다. 사실상 실존의 추구는 절대적인 소외의 심연속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 실존철학은 사귐을 통한 자기현시이며, 존재자체 조차도 비록 그것이 상징으로서 암호들에 있어서만 나타내질 수 있다 할지라도 실존의 근원인 진정한 사귐을 통해서만 명백하게 된다.
(자료출처 http://my.netian.com/~dk628/ethics/jasper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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