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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의 현실주의

쉐퍼의 현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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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의 현실주의
2009/03/09 12:12 in CHRISTIAN/Bible & Knowledge

♣ 개혁적 복음주의 신학 
쉐퍼가 말하고 있는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은 20,30년대에 영국에서 사용한 말로서 메이첸과 그의 다른 동지들이 미합중국에서 뜻했던 바 그것, 즉, 여러 형태와 정도를 지닌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성경을 믿는 기독교”를 뜻했다.194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미합중국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의 복음주의라는 말은 성경을 믿되 스스로를 삶의 전체 영역으로부터 단절시킴이 없이 하고, 기독교를 사회, 정치, 문화의 현실적 필요성에 효과적으로 접촉하게 하도록 시도 한다는 함축성과 더불어 쓰였다. 또한 이 말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인도하되 아울러 그 문화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한다는 함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 위기에 찬 복음주의 윤두혁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87]pp.107] 

이렇듯 쉐퍼가 복음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이 관점은 그가 복음주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일반적인 광의의 복음주의는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쉐퍼의 신학은 개혁적 복음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의 열매는 그의 신학 수업과 교단 분열의 역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웨스터 민스터와 훼이스 신학교의 신학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이었다. 그의 변증적인 모습을 보면 은사인 반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둘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사상, [쉐퍼는 이것을 세계관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식론과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일치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윌리암 에드가 “반틸과 쉐퍼” 김종철,박진숙역 프랜시스 쉐퍼읽기 성인경엮음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pp.198-204 ] 

또한 그가 비록 구 프린스톤 신학의 문제점을 논하고 있지만 그의 신학적 스승이었던 메이첸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전통적 개혁신학을 가지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쉐퍼의 신학의 영향과 형성은 개혁주의 신학 특히 신칼빈주의[화란]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신칼빈주의자들의 문화 세계관운동 그리고 하나님의 영역주권 사상은 쉐퍼가 말하고자 하는 신학과 동일하다. 그렇다고 쉐퍼의 신학의 근본이 신칼빈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쉐퍼는 구 프린스톤 신학이나 화란신학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거기에는 성경의 진리를 이론적인 영역에 제한시키는 경향이나 어떤 비현실적인 관점이 담겨있다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개혁 역시 비판하기를 종교개혁 역시 지적인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 약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옳은 교리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안따까움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쉐퍼는 역동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옳은 교리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자유주의나 카톨릭 교리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부정을 표시하면서 그 다음에 성령과 영적 교제를 하고 순간 순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삶을 맡겨야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1][레인 T.데니스,Letters of Francis A. Schaeffer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홍치모역,(서울:기독지혜사1986]pp.73 ] 

2]다만 그의 개혁주의 신학의 형성이 자연스럽게 신칼빈주의 영향을 받아드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이러한 영향아래 생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적 전통을 믿는 이들과의 화합을 언제나 추구하였다. 그는 교단 분열시 앞장에 서있었지만 나중에 그는 아쉬워하였다.]쉐퍼는 가시적인 교회의 순결성을 위하여 기구의 분리가 올 때에라도 교회의 표지를 상실하면 추잡한 모습만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탄원하노니 그런 순간이 만약에 오거나 실제로 오거든 오히려 여러분은 세상 앞에 나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사랑을 내 보일 어떤 길을 찾기 바란다. 추잡한 당파로 갈라진다면 세상은 추잡성만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은 외면하고 말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추잡한 것을 보면 여러분의 아들딸들을 몇 명이라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대해 거친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부모된 여러분을 떠날 것이다. 그런즉 여러분은 가시적 교회의 사랑을 보여주고 또 그 교회의 순결성은 두 원리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실천해 보인다는 것을 잊음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버리거나 기타 다른 사람들을 멀리 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프란시스 쉐퍼,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 권혁봉역,[서울:생명의 말씀사1991]pp.90]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쉐퍼는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복음주의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쉐퍼는 그의 신학적 교의를 분명히 하여 근래의 실존주의 신학인 칼바르트를 중심으로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신학이라 배척하였다.]ibid.,pp.21-29. 쉐퍼는 칼바르트는 그의 임종시까지 계속 고등비평이론을 용납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고 하였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은많은 오류가 있었다고 했다. 칼바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성경의 진술이 역사적으로는 허위일 수 있으나 종교적으로는 진실하다고 한다.칼바르트의 기본 입장은 성경은 그 속에 여러 가지 종류외 과오가 있음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으니 단지 성경만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칼바르트는 그의 교의학Ⅱ에서 인식론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실존주의자라고 명백히 밝혔다. 이렇듯 칼바르트를 위시한 실존주의 신학은 신자유주의로서 그들은 타락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이런 죄악된 길에 돌아오게 되었느냐는 성경의 설명을 폐지하면서도 인간은 잔인한 존재라는 실제주의는 굳게 잡으려고 노력한다.그는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결과를 고수하려고 한다.그들에게는 에덴동산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이러한 교리는 예수님의 신성의 문제,삼위일체간의 구별문제,인간과 그리스도간의 구별문제,멸망자와 구원자와의 사이에도 명백한 구별이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쉐퍼의 관점은 명백하였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역사적 기독교의 완전한 교리적 입장이 명확하게 견지되지않으면 안된다. 둘째,온갖 정직한 질문에 대하여 정직하게 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역사적 기독교가 뛰어난 변증법이나 심리적 통합점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 20세기에도 하나님이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개인적,또는 공동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란시스 쉐퍼, The God Who is There 기독교와 현대사상 홍치모역, [서울:성광문화사 1992]pp .263] 


그의 신학은 1930년대의 자유주의의 물결을 방어하였던 위대한 사상가겸 학자들인 벤자민 워필드,제임스 오르,그리피드 토마스,캠벨 몰간,그레샴 메이첸등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개혁적 복음주의이다. 이러한 쉐퍼의 신학적 배경은 그의 사회 개혁운동에 대한 배경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http://cafe.daum.net/CPI2002/5m8A/59



♣ 선지자적 현실주의자로서의 쉐퍼의 사역 

제1장 사회개혁에 대한 전기의 사역 -신앙적 파수꾼으로서의 사역 

프란시스 쉐퍼의 사역의 전기의 모습은 전투에 임하기 위한 훈련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쉐퍼의 전기사역의 모습은 신앙적 즉 영적 파수꾼으로서의 사역이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그의 삶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스위스의 외진 곳 라브리의 사역기간이었다. 그는 황폐해진 유럽을 가슴에 않고 허무주의와 히피들 그리고 방황하는 동양의 신비주의자들과 함게 영적인 고민을 나누고 해결해 가는 사역이 그의 전기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세계각지로 흩어지게 되었고 라브리는 영적인 쉼터로서 세계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찾는 오두막이 되었다.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쉐퍼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를 증거하였고, 수많은 이들의 심령을 깨워 회심케 하는 영적 나팔수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전기의 사역은 1973년의 삶의 전환점이 오기까지 계속되었다. 쉐퍼의 전기 사역은 1951년의 분기점으로 인하여 구분 될 수 있다. 1951년까지 쉐퍼의 사역은 단순한 목회자의 심정을 가진 사역이었다. 황폐해진 심령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가르치고 저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해주는 평범한 사역들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1951년은 프란시스 쉐퍼의 인생과 영적 부흥과 회복의 시기였다. 전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의 사랑이 없고, 진리에 대해서 딱딱하고 융통성 없으며 오히려 미움에 가득차 있는 현실을 보고 쉐퍼는 기독교의 실재성을 의심하였고 이러한 그의 혼란은 그로 하여금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게 했고 그는 기독교의 실제성을 위한 영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투쟁 끝에 그는 기독교의 실재성은 물론이고 그의 인생의 새로운 헌신을 가져온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변화는 그로 하여금 진정한 영적인 실체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였다. 쉐퍼의 전기 사역은 이렇게 1951년을 기점으로 하여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분이 분리된 사역이 아니라 새 힘을 얻기 위한 산고의 과정이었다. 1951년 이후의 사역은 그로 하여금 더욱 확고한 헌신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역의 모습은 그의 전기의 저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기 저작은 1968년에 첫 번째 저서인『The God Who Is There(1968)』을 비롯하여 『Escape From Reason(1968)』,『Death in The City(1969)』,『The Church at the of 20th Century(1970)』, 『The Mark of The Christian(1970)』,『Poullution and The Death of Man(1970)』,『True Spirtualty(1971)』,『The Church Before The Watching World(1971)』,『Genesis in Space and Time(1972)』,『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1972)』,『Back To Freedom and Dignity(1972)』,『Basic Bible Studies(1972)』,『Art and Bible(1973)』,『TheNewSuper-Sprituality(1972)』, 
이러한 저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쉐퍼는 교회와 문화 그리고 예술에 있어서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전통적 복음전도자의 사역을 하였던 것이다. 

라브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사역은 대학의 초청 강연으로 대부분 이루어졌으며, 철학과 문화를 중심으로 현대인들이 지금 어디에 와 있으며, 지금의 교회와 신앙이 무엇이 문제이며, 또한 현대 교회가 도전 받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문화적 이해 위에 기독교인의 생활과 교회문제를 다루었다. 
쉐퍼는 시대의 문제를 다루면서 말하기를 이 시대가 진정으로 중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기에 바른 해결책을 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시대의 교회가 그런 어리석음속에 빠져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중심문제는 자유주의, 근대주의, 로마교, 신로마교도 아니며 공산주의의 위협도 아니며, 더우기 합리주의의 위협이나 우리 주의에 있는 통제된 사상의 통일성도 아니다. 이들은 위험하나 일차적인 위협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성령의 힘보다는 육의 힘에 의존하여 일하려는 경향이다. 중심문제는 우리 주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 자신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시대속에서 바른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즉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특수한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모방하는 것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놀라운 약속에서 우리를 멀리하는 것이니 즉 그 약속은 인간 기술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이다" 

쉐퍼는 이 시대의 전쟁은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늘의 전쟁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힘으로 나아갈 때 만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보수적인 관점이라고 까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개혁과 부흥이라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개혁 없이는 부흥이 없고, 부흥없이는 개혁이 불완전하다고 하였다." 특별히 이러한 개혁과 부흥을 위하여 성도 개개인의 삶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쉐퍼는 말하기를 성도의 생활은 세 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면 이것이 되어질 때 그곳에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쉐퍼는 『진흙길을 걷는 세대』라는 설교에서 이 시대의 문제를 더욱 근접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절대와 보편의 소망을 포기하고 인간의 믿음을 종합에 두고 세상이 분열된 이분법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향하여 싸워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 

"세상 영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외부적 행동만을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싸움은 사상계에 있다. 중요한 사상면에서의 저항이다. 우리가 외부적으로 세상 영을 따르고 있느냐의 여부는 내적으로 세상 영을 따랐느냐 따르지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싸움은 정신에 속한 문제다. 
세상의 진흙길을 걸으면서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첫째로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상계에서 세상 영의 한 형태를 따르지 않는 일이다. 
성령으로 행하여야 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를 통하여 그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쉐퍼는 현대의 세상은 영은 예술면에서, 음악면에서, 현대신학면에서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까지 절대가 없는 상대주의 유령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는 이러한 상대주의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경의 도덕 원리에 맞추어 살지 못한다면 성경을 믿는 신자가 된다는 것도 휘날리는 깃발에 불과할 것이다. 현대신학과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형 교회의 순결을 위하여 싸우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따른다면 참 교리와 결혼하는 것도 단지 깃발을 흔드는 것에 불과하다." 

쉐퍼는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은 대중매체의 영역 즉, 오락의 영역에도 나타난 무서운 시대가 되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현대인들을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고 사색하기를 싫어하여 이러한 갈라진 틈을 타서 오락은 인간을 도피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알코올도 도피의 한 방편이 되어왔다. 우리 시대는 또 마약까지도 복용한다. 많은 청년들은 이 마약을 버리고 알코올을 마시고 있다. 그러나 알코올과 마약주의자만이 도피주의자가 아니다. 귀에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매일 꼽고 있는 자도 역시 도피주의자들이다. 현대 인간들은 조용하게 되면 현실에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조용한 장소를 원치 않는다. (아무도 조용한 장소를 발견할 수 없다.) 자신들의 편견으로 현실은 무의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현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조용한 장소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끄러울 때는 오락으로 생활을 보낸다." 

이러한 현실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고 본 쉐퍼는 그러나 신자들은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을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이렇게 주어진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신자의 소명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도피가 필요 없다고 생각된다. 알코올, 마약, 계속되는 소음, 또 오락 등은 필요 없다. 물론 우리도 판에 박힌 생활을 한다. 신자라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표준은 아닌 것이다.. 이론 면에서나 실제면 에서 신자들은 감히 가리우지 않은 생활현실에 대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 우리는 현실에 대면하기를 원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영광과 인간이 된 경이함, 또 무서운 타락의 현실과 결함 많은 우리 인격을 초래한, 오점을 가진 인간의 비극 등 이런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신자는 현실주의자이다. 성령이 함께 하며 현실에 부딪히는 것이 신자의 소명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쉐퍼의 전기사역은 현대의 사상에 맛서 싸워서 교회의 순결성을 회복하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자는 철저한 영적 전쟁의 모습을 보여 주고있다. 
그러나 그가 예술이나 철학 그리고 새로운 신학의 문제점들을 들추어내고,20세가 초의 사상적 흐름을 간파하고 이미 20세기는 절망의 시대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함으로 그의 삶은 현실을 향하여 포효하기 전의 두 눈을 부릅뜬 선지자와 같은 준비가 되어있던 것이다. 

그는 이미 70년 초에『Pollution and The Death of Man(1970)』을 발표함으로서 생태학 즉, 공해와 환경문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대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쉐퍼가 전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의 시각을 사회문제로 돌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쉐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비판적 보수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일관된 모습으로 살은 영적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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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퍼의 영향과 도전 

제1장 사회와 문화에 대한 현실주의 인식 

20세기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딜레마에 빠져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과연 세속 문화 속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였다. 성경이 진리라고 믿고있으면서 이 진리가 문화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어떻게 변화든 간에 교회 안에서의 삶만을 바르게 행하면 된다는 매우 위험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특별히 쉐퍼가 말하고 있듯이 플라톤적 영성을 소유함으로 이원론적 신앙 생활에 빠져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쉐퍼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영역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문화는 예외 없이 세계관의 영향으로 탄생되는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문화의 침투는 그리스도인의 사고에 치명타를 입힐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행위로 보았다. 쉐퍼는 이러한 문화의 영역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로워져야 함을 보여 주었고, 기독교의 진리가 역사속에서 문화를 어떻게 이루워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서 기독교적인 바른 대안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인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삶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하나의 인식의 전환점을 가져왔던 것이다. 인문과학자인 진 에드워드 베이스는 

"나는 대학원에서 쉐퍼의 책을 읽으면서 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기독교에 진가를 이해하는 데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나의 학문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프란시스 쉐퍼는 문화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근래 우리의 기억 속에서 프란시스 쉐퍼만큼 인문과학이 제 기능을 하도록 회복시킨 사람은 없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사회에 참여할 것을 고무하였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사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는 세상의 사상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또한 정신 의학자인 리차드 윈터는 쉐퍼는 자신에게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고 고백한다. 

"쉐퍼 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정신 의학을 계속 할 수 있었을 지도 궁금하다....내가 프로이드, 융, 후기 프로이드 주의자,스키너,행동주의자들,로저스,매슬로우,그리고 인본주의적 사상과 치료 방법을 주장하는 많은 부류의 학자들을 흥미있고 안전하게 연구 할 수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쉐퍼는 문화의 전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새롭게 하여 주었다. 특별히 문화의 실제성을 보게 하였고, 세계관의 이해를 가지고 사물을 보게 하였고, 분열된 진리를 기독교의 관점으로 통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현실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하여주었다. 특별히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강제의 명령을 하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복종과 무력의 사용 등의 주장은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적극적이며, 생명의 싸움임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는 실로 현실을 아파하는 심정을 가진 개혁주의 행동가였다. 

쉐퍼에게 있어서 성경은 현실적인 책이며, 현실의 진리에 관한 책이다. 이러한 그의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삶의 전체영역에서의 그리스도가 주가 된다는 그의 고백은 교회 안에서 만의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던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분명한 경종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사고가 단순히 쉐퍼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개혁주의의 전통을 20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재천명 하였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신학위에 바른 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바른 신앙은 현실의 사회를 바로 보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쉐퍼의 이러한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어떠한 구석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매우 중요한 도전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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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와 엘룰의 사회개혁을 위한 저항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지금까지 쉐퍼와 엘룰의 사회개혁으로서의 저항사상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보게 되면 첫째로 타락에 대한 결과를 보는 데에 있어서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쉐퍼도 엘룰도 죄에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사회에 소외가 들어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외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외가 들어 왔다는 것이다. 엘룰은 바로 이것이 필연성의 실재라고 한다. 쉐퍼는 이 타락으로 인하여 네 가지의 분리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의 실재라는 것이다. 둘 다 바로 이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둘째로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 혁명성과 불복종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두 사람의 견해는 매우 비슷함을 볼 수 있다. 또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혁명성의 기반이 바로 현실주의의 입장이다. 다만 엘룰이 이 현실주의에 대한 관점을 마르크스에게서 빌려왔다면 쉐퍼는 성경은 현실적인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입장에서 가저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공히 현실주의의 입장으로 바라본 것은 그들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둘 다 신성화 되가는 국가 절대주의나, 사회학적인 법에 대항하여 불복종등의 사회 참여운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있다. 

세 번째로 국가 절대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국가가 전체주의가 되어지는 것은 또 다른 노예제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엘룰은 여기서 기술과 생산성의 문제 등을 통하여 국가가 지배하는 그러한 독재주의에 대하여 새로운 신성화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쉐퍼는 빈약한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엘리트를 통하여 그리고 51%의 사회적인 법을 통하여 다스리는 것은 바로 독재국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독재국가에 대하여 저항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별히 둘 다 롬13:1-14절 의 국가에 대한 해석을 같이하고 있는 것은 비로 이러한 사상의 공유점이라 할 수 있다. 본다. 

넷째, 쉐퍼와 엘룰은 교회의 표지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하여 같이 하고 있다. 엘룰은 혁명이 필요한 시대요, 폭력이 필연성의 시대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쉐퍼와는 분명히 다른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쉐퍼는 최후의 한계선으로서의 무력사용(엘룰은 이것도 폭력이라고 말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동일하게 교회의 표지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쉐퍼도 동일하게 말하기를 교회의 진정한 표지는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이 사랑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둘의 관점은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시대의 이해이다. 둘 다 이 시대는 혁명이 필요한 시대라고 보고 있다. 엘룰은 사회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기술과 민족국가가 이 시대의 새로운 신성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쉐퍼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 시대는 유물론적 상대주의 유령에 빠져있다고 본다. 둘 다 기독교의 혁명적인 복음만이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진단한다. 둘 다 롬12:1의 말씀을 통하여 시대를 분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대를 이해하고 아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알 때에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차이점

반면에 이 둘에게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특별히 폭력에 대한 이해이다. 엘룰은 폭력의 구분을 하지 않고 무조건 부정한다. 다만 두 가지의 예외 사용이 있을 뿐이요, 이것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의 법칙을 말하면서 폭력의 필연적인 세상에서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어떠한 경우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본다. 엘룰은 폭력의 정당성은 없다는 사실속에서 미국 혁명도 본질에서는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쉐퍼가 가지고 있는 한계선으로서의 무력의 사용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쉐퍼는 엘룰이 말하고있는 force에 대하여 구분을 하고 있다. 엘룰은 어떠한 구분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쉐퍼는 폭력에 대하여 분명한 구별을 하고 있다. 쉐퍼 역시 폭력은 절대로 배격한다. 그러나 한계선으로서의 무력 사용의 문제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쉐퍼 역시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다. 

둘째로는 교회의 표지인 사랑에 대한 이해이다. 엘룰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폭력의 관점은 지극히 복음주의적 급진주의 개념이다. 성프란치스코나, 재세례파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있어서 신좌파의 급진주의자의 흐름속에 있다. 현대의 복음적 급진주의는 Arthur Gish가 "The New LeFT and Christian Radicalism"(Eerdman,1970)에서 제시하듯 "기독교인은 역사 저편에 계신 분께 충성하기 때문에, 어떤 정부나, 사업, 계급, 또는 어떤 다른 제도에 궁극적 충성을 바칠 수 없다" 이러한 개념은 "하양적 개혁과 권력의 집중화에 대한 거부"가 있다. 급진주의는 실재는 인정하나 그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엘룰이 취하고 있는 태도이다. 급진주의자, 철저주의자, 근본주의자로 불린 만큼 그는 좌파성향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쉐퍼는 이 사랑의 표현을 전통적 개혁주의 입장에서 서술해 나간다. 쉐퍼는 개혁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듯이 쉐퍼도 이 세상의 실재와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가치에 대하여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정하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쉐퍼와 엘룰은 이 시대의 문제의 근원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은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역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의 적용에 있어서 타락된 인간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무력의 사용인 최후의 한계선도 인정하고 있는 쉐퍼와 타락으로 인한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진정한 해법은 없으며 특별히 폭력은 그 어떠한 경우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결과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물론 쉐퍼와 엘룰은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형성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기에 어쩌면 당연한 차이가 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향하여 부는 나팔은 일치된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향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을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세상 역사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바로 그리스도인에 있다는 확신을 믿음의 증인들이 쉐퍼와 엘룰을 통하여 증거 되고 있다. 쉐퍼는 대안을 제시한 전도자였다면, 엘룰은 방향을 제시한 전도자였다.
(자료출처 http://lexian.tistory.com/entry/%EC%89%90%ED%8D%BC%EC%9D%98-%ED%98%84%EC%8B%A4%EC%A3%BC%EC%9D%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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