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제일성 uniformity of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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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제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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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제일성(自然-齊一性)은 우리의 인식의 근원은 경험이며 과학의 유효한 귀납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리고 귀납적 추리는 특수에서 보편으로 이끌 때 귀납적 비약을 하나, 이를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 J.S. 밀은 자연의 제일성(齊一性)을 가정했다. 즉 자연은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는 동일한 현상을 발생시켰다는 그러한 통일적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원리이다. 이것은 공간적인 공존의 제일성과 시간적인 계기(繼起)의 제일성으로 나뉜다.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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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현상[自然現象]
자연계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말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일어나며, 변화가 반복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자연의 제일성이라는 원칙으로는 일정 범위의 생물이 똑같은 특색을 지니는 '공존(共存)의 제일성'과 같은 원인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계기(繼起)의 제일성'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는 우리 인간이 느끼거나 또는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물리적 현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현상은 인간의 의지나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일어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렇게 자연작용이 일어나는 방법에는 수만 년 전의 옛날이나 지금에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예를 들면 어느 한 곳에 고기압이나 저기압이 발생하면 대기가 이동하면서 바람이 일고, 물이 열을 받으면 증기로 변하고 식으면 다시 물로, 또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변하는 것이나, 어두운 밤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현상, 또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 생태계의 모습이 바뀌는 것 등이 모두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자연계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따라서 현상계에 변화가 반복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자연계의 현상 사이에 성립을 되풀이하게 되는 하나의 필연적인 관계이다. 자연의 질서에는 ‘자연의 제일성(齊一性)’이라는 원칙이 존재한다. 곧 생물 번식의 경우에 나타나는 동식물의 종(種) 또는 유(類)에서 보는 것처럼 일정 범위 안의 것들이 똑같은 특색을 지니는 성질이 있는데 이를 ‘공존(共存)의 제일성’이라고 하며, 또 같은 원인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가리켜 ‘계기(繼起)의 제일성’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자연적 현상을 벗어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을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한다.
(자료출처 http://doopedia.co.kr/m/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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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제일성 uniformity of Nature
Posted on 03/07/2010 by y0tsuba
자연의 제일성이란, 흄의 ‘귀납의 문제(the problem of induction)’ 분석에서 귀납 추론의 기초적인 전제이다. 이를 네 가지 서로 다른 형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유사한 원인들은 유사한 결과를 갖는다.
자연은 한결같다(uniform).
미래는 과거를 닮을 것이다.
미래는 과거와 일치할 것이다.
이 명제들 중 하나라도 옳음이 보여질 수 있다면, 귀납 추론을 확증할 수 있다. 명제의 옳음을 보이는 방법은 연역 논증이거나 귀납 논증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연의 제일성은 연역으로도 귀납으로도 증명될 수 없다. 이를 보이는 것이 귀납의 문제를 다루는 흄의 전략이다.
우선 연역 논증의 불가능성은 간단하게 보여진다. 위의 네 명제들의 부정이 가능한가? 그렇다. 가능한 것의 부정을 연역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연역 논증은 불가능하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연의 경로(the course of Nature)가 변화한다 해도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다(4.18)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의 경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창밖에 보이는 차도 한가운데가 갑자기 내려앉아 버렸다고 하자. 원시인에게 이는 “땅은 갑자기 꺼지지 않는다”는 믿음의 반례이다. 그는 “땅은 갑자기 꺼지기도 하고 꺼지지 않기도 한다”는 불안한 믿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과학 교육을 충분히 받은 현대인에게 이는 ‘숨겨진 원인’을 찾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할 뿐이다. 그가 믿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은 “땅은 갑자기 꺼지지 않는다”가 아니라 “지하의 구조는 이러저러하다” 인 것 같다. 그로부터 “땅은 꺼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지지된다”는 믿음 역시 지지된다.
지하의 구조가 땅을 지지하는 만큼 지하의 구조에 대한 믿음이 땅에 대한 믿음을 지지한다. 그가 땅에 대한 믿음에 도달하는 방식은 물론 지하의 구조에 대한 믿음으로부터의 추론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들 간에는 그러한 지지의 구조가 있다. 그리고 상부의 믿음이 흔들릴 때 하부의 믿음이 의심과 수정, 분석의 대상이 된다. 하부의 믿음이 그 과정을 통하여 재확립되면 상부의 믿음 역시 그에 따라서 변화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 때 수정되는 것은 믿음들의 내용이다. 그러나 수정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경로라는 말로 흄이 지칭한 것, 즉 자연 법칙(law of Nature)이며 자연의 제일성이다.
그러면 자연 법칙은 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인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사건으로부터 자연 법칙을 의심하는 회의적인 존재는 교양있는 현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원시인이다. 그는 자연 법칙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하므로 그것의 의심불가능성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예측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전 과정은 자연 법칙을 전제하면서도, 그 과정이 성공적이라는 확증을 통해 자연 법칙은 다시 한 번 그 의심불가능한 것으로 검증받는다. 합리적 설명이 제공되었음은 자연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음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성공적임은 유사한 조건이 반복되었을 때 유사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 그리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을 통해 확증되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에서 실험이 하는 역할이다. 이 전 과정이, 놀랍게도, 자연이 지니고 있는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regularity)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언제든지 자연이 달라져 버린다면 반박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항변하는 것은 문제를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 그 불가능은, 개념적인 불가능성이 아니라 사실적인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경로가 달라진다 해도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흄의 언급이 지시하고 있는 바이다.
세심한 독자라면 과학적 탐구 방식에 대한 위의 설명에서, 자연의 제일성에 대한 귀납 논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과학적 탐구 활동은 자연의 제일성을 귀납적으로 확증하며, 그에 기반해서만 그 활동이 계속될 수 있다. 인간은 탐구가 지금까지 계속 참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탐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려 할 지도 모른다. “자연은 계속 규칙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규칙적일 것이다.” 하지만 때문에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틀린 표현이다. 자연에 있어서, 과거에 그랬음이 앞으로도 그러하도록 강제하는 힘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그렇게 믿는 데는 과거의 사실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 뿐이다.
엄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위의 명제를 고쳐쓰면 이렇게 된다. “인간인 나는 자연이 지금까지 계속 규칙적이었다고 인식하였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자연이 규칙적이리라고 믿는다.” 계속해서 시간의 흐름 위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탐구자는 미래였던 현재에도 통용되는 자연의 규칙성을 인식한다. 그는 불규칙해 보이는 사건들을 규칙적인 것으로 분석하면서, 규칙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그 내용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을 더해가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의 전 과정이 자연의 제일성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인 것 같지 않은가?
정리하자면 자연의 제일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귀납 추론으로 확증되고 있다. 과학적 탐구는 본질적으로 귀납 추론이고, 탐구가 계속해서 옳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의 제일성을 계속해서 의심할 수 없음이 확증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탐구가 옳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가? 자연이 지금까지는 규칙적이었으나 그 규칙이 조금씩 변화할 가능성은 없는가? 이런 반문을 제기하는 것은 탐구에 내재되어 있는 불확실성을 겨냥하고 있다. 탐구의 전 과정이 애지중지하는 자연의 제일성 자체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탐구는 이에 대해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탐구자가 탐구를 하면서 “나는 자연이 과거처럼 현재에도 규칙적이리라 믿고 있다”는 생각을 굳이 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자연은 규칙적이다”라는 무시제적 믿음을 방어하는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탐구 방식 자체가 과거 사실로부터 미래 사실을 예측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는 자연의 제일성에 대하여도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믿고 있다고 고백하게 된다. 즉 그는 자연의 제일성을 귀납 추론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정당화는 논리적 오류라는 것이다. 흄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귀납 논증의 기반이 되는 전제를 귀납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이다. 사실 과학적 탐구자들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오류는, 과학의 기반을 침해하지도 않고, 잘못된 결론으로 탐구자들을 안내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과학을 가능케 하고, 탐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하며, 탐구는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세상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지극히 논리적이면서 이성을 믿어왔던 철학자라면 아마도 탄식하리라. 인간의 이성으로는 더 이상, 과학적 탐구의 기반을 찾아낼 수도 마련할 수도 없음을 깨달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성에 회의적인 철학자였던 흄은 좌절하지도 실망하지도 않고 이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오히려 규칙적인 자연에게 깊이 감사하고, 이리도 모자란 인간이 성공적으로 과학을 수립할 수 있게 된 데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이 아닌 무엇이 인간을 인도하고 있는지를 궁금하게 여겼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 또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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