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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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인간의 성숙 단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탐구하였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차별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인간은 모두 마땅히 똑 같은 존재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로 존재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케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단계를 성숙이라는 기준에 따라 미학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었다. 즉 미학적 단계가 가장 낮은 인간의 존재 단계이고, 종교적 단계가 인간의 가장 높은 단계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윤리적 단계가 놓여져 있다.
1. 미학적 단계.
“그러면 미학은 어떻게 하는가? 미학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결혼을 하려고 하는 두 경건한 사람은 우연의 힘으로 상대방의 아량있는 결심을 서로 주고받는다. 사랑의 고백을 하기에 이르고, 서로는 어느새 실제적인 영웅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영웅적인 결심을 하기 위해서 생각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학은 마치 그들이 오랜 세월을 투쟁한 끝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아주기 때문이다. 미학은 시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농담인건 진담이건, 미학에 있어서는 시간의 흐름이 같다.” 키에르케고르 저. 손재준 역. 공포(恐怖)와 전율(戰慄), 철학적(哲學的) 단편(斷片). 죽음에 이르는 병. 반복(反復) 삼성출판사 1982. 112쪽.
“미학은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얽혀지기를 바랄 뿐, 그 밖의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한번쯤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미학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미학은 곧 한 쌍의 새 연인들을 결합시키려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미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불성실한 학문이다. 미학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짐승일 수밖에 없다.” 앞의 책. 153쪽.
미학적 단계는 인간의 가장 낮은 단계이다. 이 단계로 인하여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지만 인간의 성숙 단계 중에서 가장 낮다. 인간은 욕망이나 욕구를 추구한다. 미학적 단계는 욕망이나 욕구를 충족하는 기준에서만 존재하는 단계이다. 즉 인간의 원초적 단계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만족하는 삶을 원하기 때문에, 현실의 ‘나’에 충실한다.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는 의미가 없다.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연속 상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상에 ‘나’가 놓여 있다. 현실의 ‘나’는 과거의 산물도 아니며 미래를 투영한 산물도 아니다. 따라서 미학적 단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치 않다. 지금의 ‘나’를 충족하기 위해 삶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각적 쾌락과 심미적 안정을 우선으로 여기는 단계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 단계에서 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원초적 단계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미학은, 타인에게서 위로를 구한다는 것은 영웅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아가멤논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또한 그는 여인을 배려해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것이 나타나지 않도록 숨기고 있어야 한다. 한편 영웅은 그야말로 영웅이 되기 위하여, 클리뎀네스트라와 이피게니아의 눈물이 펼쳐놓게 될 그 무서운 유혹으로부터 시험을 받아야 한다. 미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학에는 하나의 편법이 있다. 미학은 늙은 종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그로 하여금 클리뎀네스트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해결한다.” 앞의 책. 123쪽.
미학은 우연성의 산물이다. 미학적인 단계에서 어떠한 문제의 해결은 우연적으로 결정된다. 사물의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율이 미학적인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모순된 상황에서도 우연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미학적인 단계이다.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 사고는 즉 신과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신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이고 창조된 세계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논리적 진리의 근원이고, 자연법칙의 원리이며 윤리적 가치의 최고의 근원이며 보증이다. 또한 신은 완전하고 전능하고 선한 존재이며 사람들에게는 인격적 존재로 다가온다. 이러한 신은 인간 존재의 필연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미학적인 단계는 우연성의 산물이므로 신과는 관계없는 단계이며 따라서 우연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리고 미학적인 단계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인간의 외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허례와 허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기만적인 단계이다. 결국 미학적 단계는 절망을 일으킨다.
이 미학적 단계를 이것이나 저것이냐에 의하면 이 단계에도 5가지의 세부적 단계로 나눈다. 인격이 정신보다 육체적인 것으로 규정해 건강이 제일이라는 인생관, 인격을 부 ․ 명예 ․ 신분 등으로 규정하여 그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인생관, 인격을 재능으로 규정하는 인생관, 인격을 욕망 충족을 규정하는 인생과 욕망의 지옥에서 절망하는 인격 등이다. 그리고 황제 네로를 ‘욕망의 지옥을 예감한 사람’으로 보고 “미적 인생관의 최후는 절망 그 자체이다” 라고 하였다. 이 절망의 현실을 알고 뉘우치면 다음 단계로 상승한다. 윤리적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2. 윤리적 단계
“윤리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으로서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 즉, 언제, 어떤 순간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이라는 말이다. 윤리적인 것은 그 자체 속에 내재하고 또 머물러 있으며 자기의 목적이라고 하는 그런 것을 자기의 외부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 자체가 그 외부에 지니고 있는 그 목적이 된다.” 앞의 책. 119쪽.
“그러나 미학은 표명을 요구하고 우연에 의해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윤리학은 표명을 요구하며 비극적 영웅에게서 만족을 발견한다.” 앞의 책. 122쪽.
“그러나 윤리학은 그 우연도 모르고 다감한 정(情)도 모른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게 빠른 개념을 갖고 있지를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리학으로 문제를 잘 다룰 수가 없다. 윤리학의 범주는 순수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경험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경험이라는 것은 사실상 가장 우스운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서 있지 못할 때, 사람을 현명하게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미치게 한다. 윤리학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설명이 있을 수도 없다. 윤리학은 품위를 조롱하지 않는다. 윤리학은 영웅의 허약한 어깨 위에 무거운 책임을 얹어 놓는다. 윤리학은 행위를 통해서 신의 섭리를 희롱하는 것을 불손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또 윤리학은 고통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희롱하라고 하는 행위도 비난한다. 윤리학은 행위를 통해서 신의 섭리를 희롱하려고 하는 행위도 비난한다. 윤리학은 현실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자기 스스로 책임을 낳은 그 무력한 고뇌와 싸우느니보다는 차라리 모든 현실의 압제와 투쟁하는 용기를 갖기를 명령한다. 윤리학은 고대에 있어서 신탁(神託)보다도 믿을 수 없는 오성(悟性)의 교활한 타산(打算)을 믿지 말도록 경고를 한다. 윤리학은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여하한 용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것을 앗아가려할 때, 그때야말로 용기를 표명해야할 시간이다. 그러면 윤리학은 스스로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앞의 책. 122쪽.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단계가 윤리적 단계이다. 개별적 인간은 도덕적인 보편성에 합일한다. 즉 도덕적 인간,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 단계이다. 윤리적 단계의 기준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 실재하는 신에 의해서도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도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즉 내면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내면의 명령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의자 의무이다. 인간의 감각적 쾌락과 상충되는 것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명령에 따르는 삶이다. 이것은 칸트의 정언 명령이 이에 해당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는 인물로 키에르케고르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에 나오는 아가멤몬, 구약성서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입다, 로마의 집정관 부루트스를 꼽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을 죽게 했지만 거기에는 민족의 운명을 구하는 보편적 인류가 있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학적 단계에서 죽음은 반드시 피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윤리적 단계에서는 도덕적 규범들과 의무에 따라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성적,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나약함을 극복해야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용기가 필요로 한다. 이 용기로서 보편적인 것 속에서 개체를 소멸하게 한다. 즉 보편적인 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 윤리적 자아(개체)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이다.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며 스스로의 선택에 의지한다. 윤리적 단계에서의 실존의 힘은 자신의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만이며, 결국 죄의식과 후회를 던져준다. 윤리적 단계에 있는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닌 추상적인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자아이다. 윤리적 단계에 있는 인간은 오직 가능성으로만 자신이 되려고 한다. 이 윤리적 자아는 자신의 구체성을 인식하고 자신을 자기 스스로 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추상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결국 유한할 뿐이어서 무한성으로 운동해 들어갈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에서의 지향성이 말과 행동이라는 표현 양식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즉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것을 종용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자신의 죽음을 설명한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언제나 충분히 생각한 끝에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로고스(logos)외에는 어떠한 마음속의 의견도 따르지 않는다” 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적인 모습도 극히 드물다. 대게의 개체는 죄를 짓든지, 아니면 유혹에 빠지든지 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종교적 단계.
“그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체념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모든 것을 부조리의 힘으로 손안에 넣었던 것이다. 그는 쉴 새 없이 무한성의 운동을 한다.” 앞의 책. 75쪽.
“무한한 자기 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이다. 따라서 이 운동을 완수하지 않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한한 체념 속에서 나는 비로서 나 자신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신앙에 의하여 존재를 파악한다는 일이 문제되는 것이다.” 앞의 책. 83쪽.
이성에 의한 인간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적 단계에서 구원이란 것은 허상이다. 소트라테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가졌던 신념은 도덕적 우월감이지 자기 체념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한성의 운동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부조리의 힘, 신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그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란 체념을 요구한다. 종교적 실존자는 고뇌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고, 고뇌가 없어지면 그의 종교적 생활도 끝난다. 자신을 체념하는 행위를 인간에게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렇다면 이 체념 또는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체념은 신앙의 변증법적 운동의 첫 단계이다. 이 체념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자의식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이 자의식이 나타나기 전에, 의식하지 않는 체념으로 나타난다. 의식하지 않는 체념에서는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의 구별 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구별에 대한 의식이 아직 없다. 그런 의식하지 않는 절망에서 처음으로 자기 체념이 나타난다. 자신들의 절망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다가 자기 소외로서의 의식화된 결과, 절망이 나타난다. 그 다음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자기 체념은 생성된다. 이 자기 체념은 무한성의 절망을 말한다. 시간성, 유한성
(자료출처 http://kwor.org/home/module/board/boardRead.php?table=tb_ib_ref14&cl_id=ref1&clubMode=F&b_b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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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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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인간의 성숙 단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탐구하였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차별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인간은 모두 마땅히 똑 같은 존재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로 존재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케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단계를 성숙이라는 기준에 따라 미학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었다. 즉 미학적 단계가 가장 낮은 인간의 존재 단계이고, 종교적 단계가 인간의 가장 높은 단계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윤리적 단계가 놓여져 있다.
1. 미학적 단계.
“그러면 미학은 어떻게 하는가? 미학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결혼을 하려고 하는 두 경건한 사람은 우연의 힘으로 상대방의 아량있는 결심을 서로 주고받는다. 사랑의 고백을 하기에 이르고, 서로는 어느새 실제적인 영웅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영웅적인 결심을 하기 위해서 생각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학은 마치 그들이 오랜 세월을 투쟁한 끝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아주기 때문이다. 미학은 시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농담인건 진담이건, 미학에 있어서는 시간의 흐름이 같다.” 키에르케고르 저. 손재준 역. 공포(恐怖)와 전율(戰慄), 철학적(哲學的) 단편(斷片). 죽음에 이르는 병. 반복(反復) 삼성출판사 1982. 112쪽.
“미학은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얽혀지기를 바랄 뿐, 그 밖의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한번쯤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미학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미학은 곧 한 쌍의 새 연인들을 결합시키려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미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불성실한 학문이다. 미학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짐승일 수밖에 없다.” 앞의 책. 153쪽.
미학적 단계는 인간의 가장 낮은 단계이다. 이 단계로 인하여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지만 인간의 성숙 단계 중에서 가장 낮다. 인간은 욕망이나 욕구를 추구한다. 미학적 단계는 욕망이나 욕구를 충족하는 기준에서만 존재하는 단계이다. 즉 인간의 원초적 단계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만족하는 삶을 원하기 때문에, 현실의 ‘나’에 충실한다.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는 의미가 없다.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연속 상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상에 ‘나’가 놓여 있다. 현실의 ‘나’는 과거의 산물도 아니며 미래를 투영한 산물도 아니다. 따라서 미학적 단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치 않다. 지금의 ‘나’를 충족하기 위해 삶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각적 쾌락과 심미적 안정을 우선으로 여기는 단계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 단계에서 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원초적 단계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미학은, 타인에게서 위로를 구한다는 것은 영웅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아가멤논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또한 그는 여인을 배려해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것이 나타나지 않도록 숨기고 있어야 한다. 한편 영웅은 그야말로 영웅이 되기 위하여, 클리뎀네스트라와 이피게니아의 눈물이 펼쳐놓게 될 그 무서운 유혹으로부터 시험을 받아야 한다. 미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학에는 하나의 편법이 있다. 미학은 늙은 종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그로 하여금 클리뎀네스트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해결한다.” 앞의 책. 123쪽.
미학은 우연성의 산물이다. 미학적인 단계에서 어떠한 문제의 해결은 우연적으로 결정된다. 사물의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율이 미학적인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모순된 상황에서도 우연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미학적인 단계이다.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 사고는 즉 신과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신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이고 창조된 세계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논리적 진리의 근원이고, 자연법칙의 원리이며 윤리적 가치의 최고의 근원이며 보증이다. 또한 신은 완전하고 전능하고 선한 존재이며 사람들에게는 인격적 존재로 다가온다. 이러한 신은 인간 존재의 필연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미학적인 단계는 우연성의 산물이므로 신과는 관계없는 단계이며 따라서 우연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리고 미학적인 단계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인간의 외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허례와 허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기만적인 단계이다. 결국 미학적 단계는 절망을 일으킨다.
이 미학적 단계를 이것이나 저것이냐에 의하면 이 단계에도 5가지의 세부적 단계로 나눈다. 인격이 정신보다 육체적인 것으로 규정해 건강이 제일이라는 인생관, 인격을 부 ․ 명예 ․ 신분 등으로 규정하여 그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인생관, 인격을 재능으로 규정하는 인생관, 인격을 욕망 충족을 규정하는 인생과 욕망의 지옥에서 절망하는 인격 등이다. 그리고 황제 네로를 ‘욕망의 지옥을 예감한 사람’으로 보고 “미적 인생관의 최후는 절망 그 자체이다” 라고 하였다. 이 절망의 현실을 알고 뉘우치면 다음 단계로 상승한다. 윤리적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2. 윤리적 단계
“윤리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으로서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 즉, 언제, 어떤 순간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이라는 말이다. 윤리적인 것은 그 자체 속에 내재하고 또 머물러 있으며 자기의 목적이라고 하는 그런 것을 자기의 외부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 자체가 그 외부에 지니고 있는 그 목적이 된다.” 앞의 책. 119쪽.
“그러나 미학은 표명을 요구하고 우연에 의해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윤리학은 표명을 요구하며 비극적 영웅에게서 만족을 발견한다.” 앞의 책. 122쪽.
“그러나 윤리학은 그 우연도 모르고 다감한 정(情)도 모른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게 빠른 개념을 갖고 있지를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리학으로 문제를 잘 다룰 수가 없다. 윤리학의 범주는 순수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경험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경험이라는 것은 사실상 가장 우스운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서 있지 못할 때, 사람을 현명하게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미치게 한다. 윤리학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설명이 있을 수도 없다. 윤리학은 품위를 조롱하지 않는다. 윤리학은 영웅의 허약한 어깨 위에 무거운 책임을 얹어 놓는다. 윤리학은 행위를 통해서 신의 섭리를 희롱하는 것을 불손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또 윤리학은 고통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희롱하라고 하는 행위도 비난한다. 윤리학은 행위를 통해서 신의 섭리를 희롱하려고 하는 행위도 비난한다. 윤리학은 현실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자기 스스로 책임을 낳은 그 무력한 고뇌와 싸우느니보다는 차라리 모든 현실의 압제와 투쟁하는 용기를 갖기를 명령한다. 윤리학은 고대에 있어서 신탁(神託)보다도 믿을 수 없는 오성(悟性)의 교활한 타산(打算)을 믿지 말도록 경고를 한다. 윤리학은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여하한 용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것을 앗아가려할 때, 그때야말로 용기를 표명해야할 시간이다. 그러면 윤리학은 스스로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앞의 책. 122쪽.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단계가 윤리적 단계이다. 개별적 인간은 도덕적인 보편성에 합일한다. 즉 도덕적 인간,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 단계이다. 윤리적 단계의 기준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 실재하는 신에 의해서도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도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즉 내면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내면의 명령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의자 의무이다. 인간의 감각적 쾌락과 상충되는 것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명령에 따르는 삶이다. 이것은 칸트의 정언 명령이 이에 해당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는 인물로 키에르케고르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에 나오는 아가멤몬, 구약성서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입다, 로마의 집정관 부루트스를 꼽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을 죽게 했지만 거기에는 민족의 운명을 구하는 보편적 인류가 있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학적 단계에서 죽음은 반드시 피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윤리적 단계에서는 도덕적 규범들과 의무에 따라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성적,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나약함을 극복해야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용기가 필요로 한다. 이 용기로서 보편적인 것 속에서 개체를 소멸하게 한다. 즉 보편적인 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 윤리적 자아(개체)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이다.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며 스스로의 선택에 의지한다. 윤리적 단계에서의 실존의 힘은 자신의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만이며, 결국 죄의식과 후회를 던져준다. 윤리적 단계에 있는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닌 추상적인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자아이다. 윤리적 단계에 있는 인간은 오직 가능성으로만 자신이 되려고 한다. 이 윤리적 자아는 자신의 구체성을 인식하고 자신을 자기 스스로 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추상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결국 유한할 뿐이어서 무한성으로 운동해 들어갈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에서의 지향성이 말과 행동이라는 표현 양식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즉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것을 종용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자신의 죽음을 설명한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언제나 충분히 생각한 끝에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로고스(logos)외에는 어떠한 마음속의 의견도 따르지 않는다” 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적인 모습도 극히 드물다. 대게의 개체는 죄를 짓든지, 아니면 유혹에 빠지든지 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종교적 단계.
“그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체념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모든 것을 부조리의 힘으로 손안에 넣었던 것이다. 그는 쉴 새 없이 무한성의 운동을 한다.” 앞의 책. 75쪽.
“무한한 자기 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이다. 따라서 이 운동을 완수하지 않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한한 체념 속에서 나는 비로서 나 자신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신앙에 의하여 존재를 파악한다는 일이 문제되는 것이다.” 앞의 책. 83쪽.
이성에 의한 인간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적 단계에서 구원이란 것은 허상이다. 소트라테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가졌던 신념은 도덕적 우월감이지 자기 체념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한성의 운동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부조리의 힘, 신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그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란 체념을 요구한다. 종교적 실존자는 고뇌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고, 고뇌가 없어지면 그의 종교적 생활도 끝난다. 자신을 체념하는 행위를 인간에게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렇다면 이 체념 또는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체념은 신앙의 변증법적 운동의 첫 단계이다. 이 체념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자의식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이 자의식이 나타나기 전에, 의식하지 않는 체념으로 나타난다. 의식하지 않는 체념에서는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의 구별 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구별에 대한 의식이 아직 없다. 그런 의식하지 않는 절망에서 처음으로 자기 체념이 나타난다. 자신들의 절망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다가 자기 소외로서의 의식화된 결과, 절망이 나타난다. 그 다음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자기 체념은 생성된다. 이 자기 체념은 무한성의 절망을 말한다. 시간성, 유한성
(자료출처 http://kwor.org/home/module/board/boardRead.php?table=tb_ib_ref14&cl_id=ref1&clubMode=F&b_b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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