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전시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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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전시대의 철학(252p) ~ 258p끝까지 (강범규)철학사 Season 3조회 수 788 추천 수 0 2012.03.19 23:15:40
키다*.253.68.247http://www.philosopher.co.kr/2770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전시대의 철학
매번 그런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점에서, 전(前)시대의 철학에 얽매여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도 이미 아페이론을 알고 있었다. 이 아페이론은 거기서 완전히 분리되어 주장되고 있는데 플라톤은 이 아페이론을 개별적인 존재자들과 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지었다. 플라톤의 질료도 역시, 형상을 받아들이는 장소, 즉 ‘생성의 유모’였다. 그러나 그는 이질료를 마지 못해 받아들였으나, 관념론적인 추론에 의해서 그 장자권을 다시 빼앗으려고 노력했다.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이 질료가 형상과 나란히 독자적인 원리이며 동시에 형상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질료가 개별화의 원리라고 하는 점에서 특별히 질료에다 새로운 위치를 인정해 주고 있다. 물론, 이 가장 형식이 없는 것이 어떻게 가장 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질료가 이런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의 어느 시대이고 인정되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은 시간-공간적인 것을 일회적인 개별자라고 본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도 조금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함축하고 있는 뜻은, 시·공간적인 것의 존재에 가까운 것이다.
운동의 시초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그의 운동원리, 즉 소위 능동인이다. 그는 ‘운동과 변화를 낳는 내재적인 힘이 없다면, 영원한 실체를 가정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플라톤을 반박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이 동적인 것이라고 일컫는 것이 어느 정도 파악되게 된다. 이런 점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어떤 정적인 것이나 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플라톤은 현실의 커다란 분야, 즉 생성과 운동을 자기의 철학으로써는 설명하지 못하고 만 것으로 될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런 점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피스테스’가 밝혀주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미 운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직 이데아를 통해 운동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차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이데아가 동적인 것, 생성 및 운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현실의 이런 부분도 설명할 수 있을 한 가지의 원인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것이 바로 운동원인 또는 능동원인인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원인에서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생성의 종류
먼저 우리들이 생성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운동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게 되면, 우리들은 사태를 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개념을 운동의 개념 밑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의 개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은 보통 변화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별을 할 수가 있다. 첫째 양적인 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은 성장하고 소멸하는 데서 성립되고, 둘째 질적인 운동이 있는 바, 이 운동은 다른 것으로 변하는 데서 성립된다. 셋째로 공간적인 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은 장소를 이동할 때에 생긴다. 이 세가지의 운동들 중에서, 장소의 움직임(운동)이 운동의 원형이다. 이 장소의 움직임은 영원하다. 그래서 생성도 영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세가지 운동 모두에게 특징적인 것은 항상 한 가지의 주체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 속성적인 것들이다. 이런 속성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은, 실체적인 생성, 즉 주체 자체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생서의 종류 하나하나를 형상이 정해져 있던 것이 차례로 바뀌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어떤 것이 처음에는 이렇게 정해졌다가, 그 다음에는 저렇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성의 세 가지 요인, 즉 질료·형상·형상의 결여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생성의 시발점과 그 종착점이 파악되었을 뿐이고, 본래적인 생성 자체, 즉 옮겨감을 파악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도 플라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형상이 다시 정적인 어떤 것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옮겨감, 즉 운동 자체란 무엇인가?
운동의 본질
“운동이란 가능태로서의 존재가 자체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생성이란 실현시키는 것이다. 금속을 가지고써 한 가지의 조각을 만들 때, 생성은 금속 자체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금속은 조각에서도 역시 변함없이 금속이기 때문이다. 생성은 금속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과 관계된다. 이 가능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는 데에 생성과 모든 운동의 본질이 있다. 이렇게 해서, 생성은 현실화된다는 개념에 의해서 설명된다.
인과의 원리
이와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근본이 되는 한가지의 공리, 즉 인과의 원리가 생기게 된다. 이 공리란 “움직여지는 모든 것은, 반드시 한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리를 자명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연학》 7권1장에 나타나 있는 이 증명은 원래에는 플라톤의 자기운동설에 반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증명은 자기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안에도 움직이게 하는 자와 움직이는 자가 있으며, 따라서 움직여지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하는 원칙은 여기서도 타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꼭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증명된 것이 아니라 전제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명제에 관한 증명은 자기원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원인에 관해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과원리에 관한 보다 더 보편적인 표현방식을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현실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자는 가능성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자보다 항상 이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명제에 의하자면, 현실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보다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것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과 꼭 같기 때문에, 가능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을 전제로 삼을 때에만 생각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시간적으로도 이르다. 왜냐하면, 과연 가능적인 것이 항상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는 하나, 이 가능적인 것은 항상 미리 있던 현실적인 것의 인과관계에 의해서만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미 현실화되어 있는 인간에 의해서 생겨나며, 음악가도 이미 현실화되어 있는 음악가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사람과 음악가 안에는 맨 처음에 움직여주는 자가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씨앗보다도 이르다. 그래서 결국 현실적인 것은 본성적으로 가능적인 것보다 이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시간적인 발생을 따지자면 늦다고 하더라도, 에이도스와 우시아를 따르자면 이르기 때문이다. 즉 형상이 미리부터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모든 생성은 그것들이 형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 한가지의 목표에 이르려고 애쓴다. 그런데 이 목표란 작용을 미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작용을 미치는 현실’이 엔텔레케이아, 즉 ‘목표에 도달한 것’이라고 불린다. 실제로 눈으로 보는 작용이 보는 능력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보는 능력이 실제로 보는 작용을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가능성보다 이른 것이다.
형상원인으로서의 능동인
그런데 플라톤도 이미 인과원리에 관한 말을 했었다. ‘티마이오스에는 모든 운동은 반드시 한 가지의 원리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옮겨감과 다이나믹으로서의 운동과 생성은 이데아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이와 반대로 작용을 미치는 현실(실재)에다 호소했다고 한다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현실(실재)을 에네르게이아 또는 엔텔레케이아라고 하며, ‘제일’ 에네르게이아나 ‘제일’ 엔텔레케이아와 ‘미완성’ 에네르게이아나 ‘미완성’ 엔텔레케이아를 구별한다. 이 두 가지 개념들의 관계는 그다지 분명하지가 않다. 엔텔레케이아가 미완성 에네르게이아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으나, 제일현실과 제이(미완성)현실의 구별이 에네르게이아와 엩텔레케이아라는 두 개념 속에 다같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이 때 그에게 있어서는 에네르게이아가 완성된 현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플라톤에 비해 새로운 원인으로서 등장한 현실이나 또는 엔텔레케이아도 역시 새로운 요인들에 의해 설명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대는커녕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상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엔텔레케이아도 형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움직이게 하는 자는 항상 에이도스를 가지고 있다. 이 에이도스는 개체적인 실체이든가, 질이든가 혹은 양으로서 이것이 운동의 원리 또는 운동이다.’ 《자연학 3권 1장》 따라서 《자연학》 2권3장에서 구별되고 있는 네가지의 원인들은 다시 두가지의 등급으로 환원된다. 즉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원인이 있고, 다른 편으로는 형상원인·운동원인 및 목적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것들은 한 가지로 합쳐지는 일이 많다.’ 이데아에 비해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는 능동인도 형상이라고 이해된다. 우리들은 위와 같은 견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적인 시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분명히 《자연학》의 초기의 부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이상학》 9권8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생성은 어ㄸᅠㄴ 것에서, 어ㄸᅠㄴ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데, 이 마지막 어떤 것은 에이도스와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서 능동원인으로서 나타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가 바로 현실화된 에이도스이며, 이런 점에서 플라톤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일은 상황 전체를 잘못 본 오류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현실이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을 통해 설명하고, 또 형상이라고 파악한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대의 독자들은 질료 속에서 현실화된 형상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당장 이 질료자체에서 생기는 기계적인 인과관계를 생각하고,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운동원인은 형상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앞에서 인용한 《자연학》의 같은 곳에서 원인과 결과가 에이도스에 따라 동일한 한에 있어서만, 운동원인을 형상과 하나가 되게 하려고 했던 것 같이 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특별히 물질적-기계적인 인과관계를 유호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이 《생성·소멸론》 2권9장에서 일보러 ‘보다 더 물리적인’ 물질적 – 기계적인 운동이 다뤄지고 있는 것을 읽게 되면, 그가 이런 종류의 운동 전체를 에이도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운동은 보다 중요한 원인에 있어서의 진짜 원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에이도스는 본질이고 형상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이런점에도 역시 플라톤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새로운 현실(실재)을 발견해낼 준비를 다 했었으나, 이 실재를 플라톤과는 달리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동적인 것이 형상이다. 이런 것이 가장 예리하게 나타나는 것은 《형이상학》 12권8장에서, 그가 순수한 현실태로서의 맨 처음으로 움직이는 자를 제일의 본질이라고 일컬을 때이다.
현실태-가능태
형상이 현실태로서 등장함으로ㅆ 질료는 가능태라는 뜻을 갖게 된다. 이런 것들은 형이상학의 새로운 싹이다. 《형이상학》 7권 8권에서 질료-형상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룬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9권에서 가능태-현실태 문제를 다룬다. 현실태가 규정하는 능동적인 원리인데 비해서 가능태는 작용을 미치고 실현을 할 수 있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가능적인 것이다. ‘현실태란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안에 있으며, 사람들이 가능적으로 있다고 할 때와 같은 뜻으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들은 헤르메스의 조각이 목재 안에 가능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집을 짓는 자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와의 관계, 깨어 있는 자와 잠자고 있는 자와의 관계, 보는 자와 눈을 감고는 있으나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와의 관계, 자료에서 만들어 내진 것과 자료 자체와의 관계, 완성된 자와 완성되지 못한 자와의 관계와 같은 관계가 있다.’ 《형이상학 9권6장》 현실성이 미완성의 에네르게이아와 완성된 에네르게이아 또는 제일 에네르게이아-우리는 이것을 ‘실현’이나 ‘실현된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두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된 바가 있다. 가능태에 관해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구별짓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일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따라서 절대적인 가능성을 뜻하는 순수한 가능태가 있는데, 이것은 제일질료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이미 일정한 것으로 현실화되어 있기는 하나, 그래도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혼합된 가능태로서, 이것은 제이질료에 해당되는 것이다. 위의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예들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와 가능태의 구별을 예술적 창작에 대한 관찰과 유기적인 자연에서 얻어낸 것 같다. 창작에 있어서는 형상이 잡히지 않은 재료는 예술가의 창조활동에 비하자면 가능적인 세계인 것처럼 보이고, 유기적인 자연(생물)에 있어서는 생성 전체가 소질과 완성상태, 가능성과 현실성사이에 있는 영원한 장난 인 것이다.
자료출처 : http://www.philosopher.co.kr/2770/136/track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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