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과 구원에 대한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과 구원에 대한 이해
------------------------------------ 인용 자료 시작 ------------------------------------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 인용 자료 시작 ------------------------------------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과 구원에 대한 이해
이문균(한남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그리스도론, 특히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학적인 전통과 관점에 따라서는 구원을 그리스도론 뿐 아니라 교회론과 밀접히 관련시켜 해명하기도 하고, 성령론과 관련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 경우 구원론은 주로 구원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가능하고 현실화되느냐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구원을 구원자와 구원의 매개자의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구원의 대상인 인간을 중심으로 구원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구원의 목표는 무엇인가? 죄를 짓고 타락하기 이전에도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했는가? 타락한 인간은 어디에 문제가 생겨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선행, 혹은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리스도는 인간의 조건 및 인간의 구원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매우 세밀하고 종합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구조를 따라 인간을 설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인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영과 육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구원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죄가 어떻게 인간을 하나님의 원래 의도로부터 빗나가게 했는지, 왜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성취하는데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 볼 것이다. 흔히 개신 교회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반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선행과 공로를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대중적인 이해인데,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의 구원관은 죄와 은혜의 구조로 파악되기도 하지만 인간과 은혜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파악된다. 아퀴나스의 인간과 구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세 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개신 교회의 신학적 특성, 특히 구원과 관련하여 개신 교회의 관점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된다.
2.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한 하나의 이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과 함께 인간의 육체성에 대한 긍정을 함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의 이상 혹은 구원의 목표와 맞닿아 있다. 그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갖는 의미와 그리스도의 인격이 갖는 의미를 중심으로 구원론으로 확대된다.
(1) 영혼과 육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 이해한다. 그는 “인간은 영혼만도, 육체만도 아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다.”라고 주장한다.1) 그는 종(種)을 결정짓는 요소가 질료(matter)로서의 육이 아니라 형상(form)으로서의 영혼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성은 여전히 견지된다. 그러므로 우선 그의 영혼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그의 인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을 ‘생명의 제일 원리(the first principle)'라고 규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생물에는 영혼이 있어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식물이나 동물의 영혼과 달리 인간의 영혼을 지성적인 영혼(intellectual soul)이라고 표현한다.2) 여기서 지성적인 영혼은 식물에게 있는 성장하는 영혼(vegetative soul)과 동물의 감각적인 영혼(sensitive soul)과 구별되는 동시에 그러한 두 가지 성격의 영혼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인간의 지성적인 영혼은 생명의 성장 기능과 동물적인 감각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3)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incorporeal)이지만 실재하는(subsistent)4) 어떤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는 인간의 특징을 들어내는 것은 지성(intellect)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영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오해가 없도록 영혼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세심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눈이 사물을 보듯이 영혼이 사물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이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혼을 통해서 사물을 이해한다.” 감각을 느끼는 작용도 육체적인 기관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의 단독적인 작용이 아니라 영과 육으로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인간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5) 인간은 두 개의 실재로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전체적인 영적 실재인데, 영혼은 육신을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심상태 교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두 개의 온전한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원천적 단일성 안에서의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들로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인(全人)의 행위로 파악된다.”고 하였다.6)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육의 통일체로 이해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물질이나 육체에 의존해서 존속하거나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는 보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영혼의 우위성은 여전히 유지된다. 인간의 영혼은 질료(matter)에 몰입되지 않고, 질료에 완전히 싸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러므로 영혼이 비록 육체에 대해서 형상(form)으로 존재하지만 육체의 어떤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소멸된 후에도 자신의 존재(being)를 보유한다.7) 그렇다고 그 영혼이 다른 형상들로 바뀌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었을 때에도 육체와 결합하려는 성향과 자연적인 욕구를 갖고서 자신의 고유한(proper) 존재를 유지한다.
이런 점에서 영혼의 우위성이 육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구원은 영혼의 해방이나,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육신을 포함한 전인(全人)의 구원을 지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토니즘에서 가르치는 것과 달리 육신은 영혼의 감옥도 아니요, 영혼의 방해물도 아니며, 영혼의 도구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육신성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소여되어 있는 것으로 진술된다. 인간 영혼은 육신을 통하는 도정을 거쳐서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영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육신성을 자기 자신의 실재로 정립한다.8)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지성적인 영혼은 불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영혼의 불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불멸적인 영혼은 육신으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육신이 멸한 이후에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영혼은 육체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인간의 몸으로 존재하게 될 때, 육신의 형상(form)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불멸성이란 영혼이 본질적으로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영혼이 육체가 해체된 이후에도 그 존재가 존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9)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에 있어서 영혼의 불멸성은 영혼 그 자체가 신성을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그 존속이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육신-영혼관은 그 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적 교리로 수용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인간을 물질적 육신과 정신적 영혼으로 이루어진 합일체로 가르치고 있다. 제 5차 라테란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Ⅴ, 1512-1517)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영혼이 사멸적이고 모든 인간들 안에서 오직 유일한 하나의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배격하면서, 영혼이 불사 불멸적이고, 육신의 다수성에 대응하여 영혼도 다수라고 가르쳤다. 즉 육신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각 개인에 따라 개체성을 가진다는 것이다.10)
(2) 영과 육의 통일체인 인간과 구원의 이상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인간의 육체성을 헛된 것이나 죄악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의 기독교의 영적 지도자들은 대체로 육신은 영혼이 더 높은 경지로 나가는데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영혼은 육신과 철저히 구분된다고 생각하였다. 영혼은 불멸적인 것이지만 육신은 죽어서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러한 이원론적 이해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인간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 이해하는 것은 삶과 구원에 대한 관점과 직결되어 있다.
첫째, 영과 육의 일체됨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흔히 하나님에 대한 인식, 영적인 깨달음은 육신과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육신을 매개로 한 감각(the senses)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의 존재와 의도는 성육신이라고 하는 육신적인 사건에 계시되었으며, 육신적인 감각을 매개로 해서 듣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이르려는 사람은 물질로부터 도피하면 안 된다. 인간 최고의 정신 활동은 육신의 감각과 상상에 근거하며, 그런 것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11)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영혼의 장애물로 여기거나 영혼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12) 인간은 육신을 매개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둘째,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소중히 여기고 육신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육신을 떠난 영혼의 평화는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육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형상(form)”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영혼이 육체와 초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형태를 부여하는(inform) 관계 가운데 육체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영혼은 육체적인 기능과 육체적인 외양에 참여하여 육체에 힘을 주고 육체를 생기 있게 한다. 영혼은 뼈와 살과 신경이 응집하여 인간을 형성하도록 힘을 조직하고 통일시킨다.13) 하나님이 온 우주에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은 육체 전체 안에, 그리고 육체의 모든 부분에 깃들어 있다.14) 하나님이 바위보다 천사와 더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우주의 구석구석을 창조적으로 채우고 계신 것처럼 영혼은 육신의 모든 감각과 육신적인 활동 가운데 친밀하게 그리고 온전히 현존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영혼이 모든 육신의 기능에 작용하고, 그 기능을 살아나게 한다는 점에서 영혼에 무가치한 육신은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육신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우리 육신의 실체(substance)는 마니 교도들이 상상하듯이 악의 원천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친밀감을 가지고 육신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15) 전통적인 이원론적 인간관은 생명의 본능, 성과 관련된 감각적 쾌락을 부정적으로 본다. 육신을 죄악시하고 타락과 결부시킨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육체적 쾌락과 육체적 욕망이 죄의 표시라든지 죄악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죄란 육신적 열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고 진정한 만족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은 육신을 벗어버린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다.16) 인간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 보는 것은 육신에 대한 긍정을 요구한다.
셋째, 우리가 천상에서 누릴 축복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신화(神化)에 이르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고 생각하였다.17) 그런데 인간의 구원의 목표는 육체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온전한 합일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영과 육이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되어 있으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충만한 희열(ecstasy)을 위해 인간이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축복을 누리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 앞에서 황홀한 실재가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다.18)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황홀한 실재가 되는 것은 육신을 벗어나 영적인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그 자체가 비물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영혼은 육신을 위해 지음 받은 것으로서 육신이 없이는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다. 천상에서의 축복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복된 성취에 이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 자신의 어떤 한 차원이나 어떤 한 측면이 아니라 바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물론 천상의 몸이 이 세상에서 누리던 육신과 연속성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몸이 영혼과 깊은 조화 가운데 있다는 점에서 지상에서의 몸과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영혼에 의하여 온전히 소유된 몸은 훌륭한 몸, 영화된 몸이 될 것이다.”19) 죄악된 우리 실존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육신과 영혼이 조화를 잃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상태는 육신과 영혼이 조화를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희열에 참여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활의 육신은 모든 부패와 흉함과 결핍으로부터 해방된 몸이어서 그 몸의 감각으로 기쁨을 누리고 육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육신을 통합한 영혼(embodied soul), 더 나은 표현을 쓴다면 영혼을 통합한 몸(ensouled bodies)으로 최종적인 성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20)
그런데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다. 예수께서 구체적인 인간이 되신 것은 바로 영과 육의 통일체인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황홀한 실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놓은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의 인간의 몸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간의 구원과 깊이 연결됨을 확인하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볼 때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매우 기이한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올려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희열에 넘쳐 자신을 내어주시는 기이한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표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복음의 하나님이 모든 사상과 철학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기이한 분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으로부터 시작된다.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보여주는 성육신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구원론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갖고 있는 속죄의 의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구원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우선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 지식은 인간의 이성을 통한 지식, 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계시에 근거한다. 계시에 근거한 된 지식이 구원에 필수적이다.21) 그런데 계시를 통한 하나님 지식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흔들어 놓고, 움직여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유한한 것들 속에 파뭍혀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면서 우리 자신 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영적인 각성이며, 인간 존재의 재정립이며, 존재의 중심을 건드리는 것이며, 우리를 고무하여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2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바로 알려주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희열에 넘쳐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신비를 알리시는 기이한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인 지복의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는 진리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는 길을 보여줌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길이며, 하나님이 누구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볼 수 있게 하는 빛이시다.23)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과 하나님을 보여주는 빛이 되신 것은 성육신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성육신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초월성과 신비에 대한 바른 감각을 가질 수 없었다.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결합하기 위하여 자신을 굽혔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인가?24) 하나님은 단순히 최고의 존재,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을 스스로 내어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성육신이다. 우리는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디오니시우스(Dionysius)를 통해 선하심은 그 자체가 확산되는 성격이 있음을 배웠다. 선하심은 샘이나 해와 같아서 항상 흘러 넘치고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하나님이 성육신 하여 우리의 피조성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제한적인 선함, 사랑에 있어서 제한된 존재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은 희열이 넘쳐흐르는 존재임을 발견한다.25)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은 십자가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과 희열이 넘쳐흐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 넘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근거한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 장소요 순간인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다운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소요 순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희열을 계시하는 동시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희열이 가득한 인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순간과 우리 인간을 갈망하는 하나님의 열정이 만나는 순간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양자의 희열(ecstasies)을 결합한다.26)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씻고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구원자가 되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이다.27)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이 신적 원천에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인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 생명의 능력을 굳이 표현하자면 기질적 은혜(habitual grace)라고 한다.28) 우리 인간은 기질적 은혜로 충만한 예수에게서 은혜를 받는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grace for grace)러라.”(요한1:1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을 은혜를 위한 은혜로 가득한 분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마음은 은혜의 유입을 가능하게 하는 기질적 은혜로 충만하다. 예수의 영혼은 하나님의 희열, 곧 넘치는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원천(源泉)에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원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희열로 가득한 예수로부터 넘치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은혜로 충만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생명의 초월적 원천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초대와 인간의 응답 사이에 지속되는 사랑의 대화다. 셋째,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혼 안에는 기질적 은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중보자로서 예수는 충만한 은혜를 인류에게 흘러 넘치게 하신다. 하나님의 희열로 가득한 예수는 희열의 원천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희열로 가득한 존재가 되게 한다.29)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은혜를 위한 은혜다.
하나님의 희열을 우리에게 안겨주기 위해 오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넘치는 희열에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도 그 희열에 참여하도록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인류의 불행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에 대한 부적절한 태도로 이어진다. 죄의 비참함은 하나님과 인간의 희열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인간의 행복의 경쟁자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4. 죄
기독교에서 죄는 도덕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문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어떤 존재인지를 가리킨다. 그러면 죄로 인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죄는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기독교에서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은 구원을 요청하게 한다. 그러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구원이 필요 없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1)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하나님을 반사하는 존재다. 인간은 신적인 것과 일치에 이르도록 지음 받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표를 나타내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신적인 삶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존재다. 우리의 모든 힘과 생각과 행동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생기를 얻는다. 그런데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쇠퇴하고 흐려져서 거의 없는 것처럼 되기도 하고, 죄인의 경우에서 보여주듯이 그 형상이 모호해지고 알아볼 수 없게 되기도 하고, 의로운 사람의 경우에서처럼 명료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은 항상 영혼 안에 자리잡고 있다.”30)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하나님과의 일치보다 못한 어떤 것으로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가 그 형상을 모호하게 하고 어둡게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형상 자체를 파괴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아름다운 보석과 같아서 더러운 것으로 덮여있어도 하나님의 빛을 어떤 측면이나마 반영한다는 것이다.31) 인간의 근본적인 선함은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마틴 루터나 종교 개혁자들의 관점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죄에 대한 이해에 깊이를 더 해준다. 우선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일치를 함축한다면 죄의 책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 서려는 바로 그것이 죄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자세,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의욕 가운데 죄가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비추어 볼 때 죄는 거짓되고 왜곡된 겸비, 혹은 비굴로 나타난다.32)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의욕은 소극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한다. 자신은 결코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굴과 도피 가운데 죄가 자리잡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죄인과 구원자의 관계가 아니라 자녀와 부모의 관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죄와 법에 의하여 처분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자녀가 부모를 반영하듯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음과 마음을 반영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신성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죄의 위험성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잊어버리고, 그 귀한 사실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을 극히 영적인(soulful) 존재라고 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과 위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2) 원죄
아퀴나스는 원죄를 우선 기질 혹은 습성(habit)으로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기질이란 형상(form)이나 작용(operation)과 관련해서 잠재적인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a subject)의 성향을 가리킨다. 그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기질 혹은 습성을 행동으로 옮겨지는 힘을 가리키는 경우와 본성에 의하여 결정된 성향을 가리키는 경우로 구분하는데, 그는 후자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원죄를 기질(habit)이라고 한다. 건강한 상태에서 육체적으로 균형이 깨어짐으로 생긴 것이 질병이듯이, 원의(original justice)의 중심에 존재했던 조화가 깨진 결과 생긴 혼잡한 기질이 바로 원죄라는 것이다.33) 따라서 원죄란 본성의 무기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 편 타락한 인간성은 단순히 원의의 결핍 이상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원죄를 부패한 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부패한 기질은 원의의 결핍이 그 유일한 원인이다. 바로 그 원의의 결핍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하도록 만든다.34) 그래서 모든 일반적인 죄(natural sin)는 그 죄의 원리(principle)로서 원죄 안에 사실상 이미 존재(pre-exist)한다고 말 할 수 있다. 형상으로 말하자면(formally) 원죄는 원의의 결핍이요, 질료로 말하자면(materially) 원죄는 일종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3) 죄의 결과
죄로 인하여 인간은 어떤 영향을 입게 되었을까? 아퀴나스는 죄가 인간의 자연적인 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검토해 본다. 그는 인간의 자연적인 선(natural good)을 다음 세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는 인간 본성 그 자체를 이루는 원리들로서, 영혼의 능력인 지성 등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게 하는 요소이며, 둘째는 덕을 행할 수 있는 본성의 선함이요, 셋째는 선물로 부여받은 원의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 본성을 이루는 요소는 죄로 인하여 파멸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감소되지도 않았다고 한다.35) 즉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 등은 그대로 손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인간의 본성적인 선함, 덕을 지향하는 성품은 죄로 인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감소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도록 하는 원의(original justice)는 처음 조상의 죄로 인하여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하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상의 견해를 볼 때, 자연 그대로의 인간으로서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도리어 악만 행한다고 하는 등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는 종교개혁자의 견해보다는 그래도 아퀴나스가 낙관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죽음과 그 밖의 육신적인 결함도 역시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36) 범죄하기 전 인간은 그 질료의 요소에 의하면 본성적으로 죽게 되어 있었지만, 형상의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의의 은총을 통해서 인간의 육신까지 어떤 불멸성을 부여해 주었다고 한다. 결국 타락하기 전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퀴나스는 인간이 병들과 죽게 된 것은 인간의 죄가 끼친 영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5. 구원
구원이라고 하면 보통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생각한 구원의 개념은 보다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구원은 타락한 상태로부터의 복귀일 뿐 아니라, 창조된 본래 상태보다도 더 높고 귀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할 뿐 아니라,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도 필요했으며,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7) 그러므로 아퀴나스의 구원관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인간의 능력과 한계, 그리고 은혜에 대한 개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인간의 능력과 한계
인간 본성의 능력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즉 타락 전의 인간 본성과 타락 후의 인간 본성, 그리고 타락 후에 은혜를 받은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타락 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수 있었다.38) 그러나 그 때에도 선을 의욕하기 위해서는 최초의 동자(first mover)인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주장하였다. 개신 교회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창조된 그대로 완전한 존재여서 어떤 특별한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39) 토마스 아퀴나스도 타락 전에 인간은 타락한 이후의 인간과 달리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물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복종시켰다고 생각하였다.40) 그 상태에서 인간은 본성의 힘만으로도 문자적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41) 그러나 그는 타락 전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사랑에 의한 계명의 완수가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 순결한 상태에서 인간은 죽을 죄(mortal sin)와 가벼운 죄(venial sin)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선한 상태로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여전히 죄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하여, 타락 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만이 순결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42)
이처럼 타락 전의 순결한 상태에서도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한 편, 아퀴나스는 타락 후의 인간에게서도 긍정적인 면을 발견한다. 즉 인간은 타락 후에도 여전히 인간을 이루고 있는 능력, 지성적인 인간의 능력을 보유하므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을 발휘한다고 본다.43) 인간은 자연적인 선(natural good)을 상실할 정도로 완전히 부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집짓기 등 일반적인 활동을 영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44)
그러나 타락 후에 인간은 지성의 부패보다도 의지의 부패가 더 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본성 안에 들어 있는 선조차도 자기 힘으로 온전히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합리적인 의지로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르지 못하게 되었으며,45) 사랑으로 계명을 완수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문자적으로도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46) 죄는 인간의 영혼을 녹슬게 하고 자연적인 선을 부패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징벌을 자초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타락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있다.
타락한 인간이 은혜를 받은 후에는 인간 본성의 능력과 한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죽을 죄(mortal sin)는 이성 혹은 정신과 결부된 것으로 보고, 가벼운 죄(venial sin)는 보다 낮은 부분, 즉 감각과 결부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은혜를 받음으로 정신 안은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만, 육체의 탐욕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 즉 사람이 은혜를 받음으로 이성과 결부된 모든 죽을 죄는 피할 수 있게 되지만 타락한 감각에 기인하는 가벼운 죄(venial sin)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47) 이성이 감각의 욕구를 억누르지만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우리 육체의 눈이 건강을 회복한다고 할지라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이 은혜로 말미암아 치유된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빛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바르게 살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능력과 한계 때문에 인간은 타락하기 전이나, 후에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된 상태에서나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됨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본성의 한계 때문에 요구된다. 즉 “어떤 자연적인 존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신의 실질적인 능력 이상으로 큰 효과를 이루어 낼 수 없다.”48)는 원칙에 따라 인간의 본성보다 더 큰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영생에 필요한 공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 은혜로 인간 본성의 부패가 치유되고 영생을 위한 공적(merit)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게 된다. 둘째로 인간의 의지(will)를 움직여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하여 동자(動者: mover)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49) 이상의 이유 때문에 인간은 영화스러운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은혜의 필요성에 대한 아퀴나스의 견해에는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관점이 작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부동(不動)의 동자(the unmoved mover)로서 은혜를 주는 입장에 있으며, 인간은 운동(motion)과 질료(matter)로서 은혜를 받아야 할 피조물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구원의 성취는 원동자(原動者: the Prime Mover)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인간이 원동자의 운동을 통해서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는 것은 필연적이다.”50) 여기에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즉 구원과 은혜는 죄 문제 이전에 피조물이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와 결부되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혜에 대한 이해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함에 근거하지만 은혜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는 당대의 철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은혜의 효과
아퀴나스는 은혜를 영혼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 은혜는 단순히 관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물질적인(semi-material)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어떤 선한 것이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피조물에게 그런 요소가 있도록 베풀어주신 결과라고 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같이 동일하게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51) 이런 의미에서 아퀴나스는 은혜를 자질(qua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52)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세 가지 면, 혹은 세 가지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의 세 단계는 시간적인 단계라기보다는 논리적인 단계로 이해해야 한다.
A. 준비(preparation)의 단계
우선 은혜는 죄의 용서 혹은 칭의(justification)53)를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한다. 이 단계의 은혜를 우리는 자유롭고, 선행하는, 실효성 있는 은혜(free, prevenient, operative grace)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단계의 은혜는 칭의의 ‘질료(matter)'인 인간이 칭의의 ’형상(form)'인 자질(habitus)을 받도록 준비시킨다. 즉 인간이 새로운 자질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한다. 어떤 것도 자신의 본성적인 한계를 넘을 수 없음으로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은혜를 일으킬 수 없다.54) 하나님만이 은혜로서 인간에게 칭의를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신다. 결국 은혜의 선물은 인간의 힘으로 마련되는 어떠한 준비도 능가한다.
B. 의롭게 됨(칭의: justification)의 단계
인간에게 준비가 갖추어지게 한 다음, 은혜는 의로운 자질을 선물로 인간 영혼에 주입시킨다. 즉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단계의 은혜를 일컬어 자유롭고, 뒤이어 일어나며, 실효성 있는, 의롭게 하는 은혜(free, subsequent, operative, justifying grace)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선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인간에게 이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자질을 주입하여 줌으로 칭의(justification)가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칭의를 불의한 상태에서 의로운 상태로 전이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55) 개신교 신학에서는 칭의를 본질적인 인간 본성의 변화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고 생각했는데 반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편에도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지 않고 억지로 인간을 의롭게 하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의롭게 됨(justification)에는 다음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즉 ①은혜의 주입, ②믿음으로 의지가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임, ③자유의지가 작용하여 죄로부터 물러섬, ④죄책이 면제됨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논리적으로는 순서적으로 일어나지만 시간적으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56)
C.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앙의 움직임은 그것이 사랑에 의하여 형성되지 않는 한 완전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불의한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는데 있어서 신앙의 움직임과 동시에 사랑의 움직임이 요구된다. 이 단계에 있어서 은혜는 사랑의 활동을 통하여 신앙이 형성되도록 의지를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우리는 이 단계를 일컬어, 뒤이어 일어나며, 협력하며, 성화하는 은혜(subsequent, co-operative, sanctifying grace)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단계의 은혜는 앞의 두 단계에 있던 은혜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목적은 수단보다 항상 더 중요한데, 이 성화하는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의 최종 목적과 결합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성화하는 은혜, 협력하는 은혜가 바로 영생을 위한 공덕(merit)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덕이 은혜를 받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서 공덕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은혜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가운데 누리는 영원한 삶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도록 인간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은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가능한데, 아퀴나스에 의하면 그 사랑의 활동을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성화하는 은혜라고 한다.57)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 공로를 쌓는다고 생각하였다. 자유의지의 협력이 없이는 공로를 쌓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위한 인간 편의 공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최초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공로는 결코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행위는 어느 때에든지 은혜에 의해서 발생할 때만이 공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인간은 은혜에 의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런 선행을 통해서 은혜의 증가를 얻을 수 있는 공로를 쌓게 된다. 인간이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공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Ⅴ. 맺는 말
모든 신학은 당대의 철학을 활용하거나 사상의 흐름을 탐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조로 채용하여 기독교의 계시적인 내용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당시 희랍 철학에 익숙한 중세 사람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그의 신학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신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사고에 깊이 배여 있는 것이 곳곳에서 보이지만 그래도 가능한대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듯이 하나님의 계시는 철학과 이성을 파괴하지 않고 성취시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 이해하였다. 그는 인간의 인간다움은 지성적인 영의 능력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육에 대해서 영이 형상(form)으로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영과 육이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비록 토마스 아퀴나스가 육체에 대한 영의 우위성을 견지하기는 하였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과 육의 통일체이며, 모든 기능도 영과 육의 통일적인 활동으로 영위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영과 육을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보고 인간의 특성을 지성과 정신에서 찾으려고 한 것은 인간의 육체성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평가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현실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과 능력은 타락 전이나 후에나, 구원받은 상태에서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타락하여 부패한 상태의 인간보다 타락하기 전 순결한 상태의 인간이 더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뒷받침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었다고 보는 한 편, 타락 후에도 인간의 이성, 지성적인 활동은 여전히 그 기능을 유지한다고 봄으로써 인간의 문화활동에 대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과 은총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은총은 자연을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원관은 앞에 말한 인간관을 전제로 할 때 분명해 진다. 인간은 타락 전이나 후에나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개신 교회에서 사죄란 자연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온전한 상태로 복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신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으로,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 부여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타락한 상태에서의 회복일 뿐 아니라, 피조된 원래 상태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면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그는 피조된 모든 것은 자신의 본성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원칙과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거슬러서 억지로 인간을 의롭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전제로 그 문제를 논의한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설득한다. 우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준비 작업을 하신다. 병든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새로운 자질(habit)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하신다. 준비가 갖추어진 인간에게 자질의 은사를 주입시켜 그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존재가 되게 하신다. 즉 의롭게 하신다. 그 다음 하나님은 사랑의 활동을 통하여 은혜의 최종 목표인 하나님을 기뻐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신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원관을 살펴볼 때, 그에게는 인간의 노력으로 은혜가 얻어진다는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인간 안에서 공적을 쌓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적(merit)을 쌓게 되고, 그 공적을 따라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행위나 공적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비판할 수는 있으나, 인간이 공적을 쌓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고 가르친 것처럼 비판할 수는 없다. 그의 생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구원은 공로를 쌓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그 공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되고 작용함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사랑과 희열로 넘치는 기이한 하나님은 은혜의 원천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위한 은혜로 가득한 분이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게 하고, 인간이 은혜의 증가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공적을 쌓을 수 있게 하신다.
------------------------------------ 인용 자료 끝 ------------------------------------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