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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과 도구주의

실재론과 도구주의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hanamander/110103231515
 
실재론과 유명론의 역사적 맥락
 
실재론은 철학의 역사에서 여태까지 여러 번 중요한 논쟁적 주제로 등장하였고, 등장할 때마다 그 내용과 맥락을 크게 달리해 왔다. 서양 중세 철학에서는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하느냐를 놓고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다.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 실재론이고, 보편자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리 머릿속의 관념에 불과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들이라는 입장이 유명론이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보편자인 이데아 또는 형상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에 실재한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인 형상이 실제 사물(개별자)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어쨌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로서의 형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실재론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대한 14세기의 오컴과 같은 유명론자들은, 보편자는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있는 것일 뿐이며 오로지 개별자들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간의 논쟁은 당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와 직결되어 있었으며, 이후 근대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실재론을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이 벌어진다. 주의할 점은, 이때 '실재론'의 의미는 위에서 소개한 중세 철학 논쟁에서의 실재론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당시 실재론의 비판자였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과학 철학자 마흐는 실험 물리학자로서 이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이미 받아들이고 있던 원자, 분자, 전자, 열역학 법칙 등을 수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 과학자들이 '전자'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여러 현상들이 관측된다고 해서 섣불리 우리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전자'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색깔, 소리, 시공간, 물질 등이 모두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일 뿐, 인식 주체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생각을 부정하였다.
 
당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열역학 제2법칙이나 원자론 등 충분히 잘 확립된 이론은 참(true)으로  간주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본 반면, 마흐는 이 이론들이 아직 참인지 여부가 불확실한데 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마흐의 이러한 일관된 회의주의와 비판 의식은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상대성 이론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작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실재론 대 도구주의
 
결국 마흐는 과학 이론에서 다루는 개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실재론)에 반대하였고, 이러한 의미에서 유명론 또는 도구주의 또는 실용주의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론의 성격과 지위를 놓고 벌어지는 실재론과 도구주의 사이의 대립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이론의 목적은 세계가 실제로 어떠한가를 기술(記述)하는 것이며, 우리의 연구 대상은 인식 주체와 독립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다. 이를 탐구하여 참된(진실한, true) 기술을 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다. 반면 도구주의에 따르면, 이론적 내용은 실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며, 이론 및 이론에서 다루고 있는 개념들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즉 이론은 그것이 정확한 설명과 예측을 제공해 주는 유용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참된 실제 모습을 보여 준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실재론자에게는 참·거짓 여부(대상과의 일치 여부)가 중요하지만 도구주의자에게는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가 중요한 것이다.
 
처음 과학을 배울 때에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실재론자가 되는 것 같다. 과학 이론이 이토록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 주고 기술에 응용되어 놀라운 성과를 보여 준 것을 고려하면, 과학 이론이 단순히 편리한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믿기 쉽다. 그러나 학습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전기장(electric field)이나 자속(magnetic flux), 자기력선(line of magnetic force) 등의 개념을 생각해 보자. 이 개념들은 물리학 가운데 전자기학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에 동원된 장(場), 속(束), 선(線) 등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힘' 개념을 생각해 보자. 힘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힘은 항상 가속 운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관측되는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주전원은 실재하는가
 
뒤엠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마흐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과학 철학자이다. 그는 천문학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고대 이래로 서양의 천문학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연구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 이론에는 '대심(對心, equant)', '주전원(周轉圓, epicycle)' 같은 기묘해 보이는 요소들이 도입되어 있었다.
 
'대심'이란 무엇이며 왜 도입되었을까? 서양 사람들은 오랫동안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왜 이러한 운동이 지속되는지 설명할 필요 없는 자연스런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원운동을 통해 천체의 운행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실제 천체의 궤도는 타원형이기 때문에, 그들의 계산 결과에는 늘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이심(離心, eccentric) 체계가 도입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행성들의 공전 운동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지구에서 약산 떨어진 지점이며(그림에서 지구 옆에 있는 + 표시), 이 중심점으로부터 지구와 대칭되는 지점에 있는 것이 대심이다. 그리고 행성들은 원운동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등속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심을 기준으로 등속 운동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지구에서 관측하면 행성들의 운동은 부등속 운동으로 보일 것이다.(실제 행성들은 타원 궤도를 부등속 운동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부등속 운동과 타원 궤도)
 
또한 천체들이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는 단순한 이론으로는 행성의 역행 운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엄밀히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것은 행성이 아니라 균륜(均輪, deferent)에 위치한 우주 공간의 한 점이며, 이 점을 중심으로 삼는 작은 원인 주전원 위에 행성이 위치해 있다고 보았다. 즉 행성들은 공간의 한 점(그림의 ×표시)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이 점은 다시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행성은 사이클로이드와 유사한 운동을 하게 되고, 자연히 역행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주전원의 주기를 잘 조절하면 행성들의 실제 궤도(타원)와 비슷한 궤도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뒤엠에 따르면, 당시 천문학자들은 주전원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림만 보면 당시 천문학자들은 주전원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겼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주전원을 실제로 존재한느 것이라기보다는 행성 관측 데이터를 끼워 맞추기 위한 계산 도구쯤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관측 데이터와 들어맞지 않을 때에는 이를 뜯어고쳐 새로운 주전원을 만드는 일 정도는 예사로 할 수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서양 사람들은 지구를 여러 겹의 천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행성이나 태양, 달, 항성 등의 천체들이 각각의 천구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전원을 도입하면 천구를 물리적 실체로서 인정하기가 어려워지는데도 별다른 고민 없이 천구에 대한 믿음과 주전원 체계를 양립시켰던 것 또한 당시 천문학자들의 도구주의적 성향을 잘 보여 준다는 것이다.
 
대심이나 주전원과 같은 기묘한 요소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태양 중심설을 제창한 코페르니쿠스도 타원 없이 원만으로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계속 대심과 주전원을 온존시켰고, 그에게도 대심이나 주전원은 유용한 계산 도구라는 측면이 강했다. 대심과 주전원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면밀한 계산 끝에 과감하게 '타원'을 도입한 케플러에 이르러서이다.
 
요컨대 뒤엠의 주장은, 서양 천문학 이론의 역사는 '현상을 구제하기 위한 도구'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확장해 보면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론이란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그만이고, 과학자들은 이론에 그 이상의 '과도한'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구주의의 유혹
 
도구주의가 특히 득세하게 되는 것은 양자 이론과 더불어서이다. 물리 교과 과정에서 다루는 '빛의 이중성'을 생각해 보자. 빛이 파동인가, 입자인가 하는 것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다. 파동 현상을 관측하기 위한 장치를 이용하면 빛은 파동 현상으로서 관측되며, 빛을 입자로서 관측하기 위한 장치를 이용하면 빛은 입자로 관측된다. 이를 '상보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간섭 무늬나 편광 등은 파동설로만 해석되며, 광전 효과나 컴프턴 효과와 같은 현상은 입자설로만 해석된다. 그렇다면 파동설 또는 입자설과 같은 '이론'이 대상에 대한 '참된' 기술이라고 볼 수 있는가? 혹시 이 이론들은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고, 대상의 실제 참된 모습은 이러한 이론으로 포착되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상보성의 원리라는 것이 무척 싱거우면서도 기묘한 타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론'에 대하여 보여 주는 이 같은 태도를 과거의 천문학자들의 예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천문학자들이 이론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했듯이, 현대 물리학자들도 이론을 일종의 편리한 도구로 간주한 셈이다. 그들은 '빛이 실제로 파동인가, 입자인가?'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원했다기보다, 입자 이론이든 파동 이론이든 간에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을 원했던 것이다. 만약 이론이 실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편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들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탐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의외로 종종 과학자들은 '현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만족한다. 간편하게도(!) 더 이상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공백으로 남겨 둔 채 말이다. 물론 모든 과학자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자들 가운데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거나 진화 이론은 화석 기록 따위를 설명하는 간편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과학자들은 주전원이나 입자 이론, 파동 이론의 경우에서처럼 이론을 실재의 반영이라기보다 간편한 도구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인다. 과학은 이렇게 다면적이다.
 
이러한 '도구주의의 유혹'은 서양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유용한 경우가 있었다.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세종 때 개발된 역법인 칠정산을 보면 외편에서는 원의 중심각을 서구식으로 360°로 설정하지만, 내편에서는 원의 중심각을 1태양년의 날짜 수로 보는 전통에 따라 365.2425°로 설정한다. 내편과 외편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활용되었고, 학자들은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체계를 무리 없이 동시에 활용하였다. 과학자들은 세계의 '참된' 모습을 밝혀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놀랄 만큼 유연한 실용주의자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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