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세계관 비평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세계관 비평
문경규
자료출처:
http://www.sisim.or.kr/bbs/view.asp?index=world&page=5&no=26&curRef=26&curStep=0&curLevel=0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한 마디로 말해 문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20세기초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카이퍼는 문화의 성경적 근거로써 "일반은총"을 제시하고 있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이 죄의 세력을 제어하며 인간의 문화발전을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구원을 위한 기초를 예비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문화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문화적 낙관론"을 제시하였다.
카이퍼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체계화시킨 사람은 1922년부터 헤이그에 있는 카이퍼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하였던 도여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이다. 도여베르트는 기독교세계관을 창조, 타락, 구속의 구조로 체계화 시킨 장본인이다. 도여베르트는 성경적 세계관의 핵심이 "창조질서(Creation-Order)"에 있다고 말한다. 도여베르트는 태초에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 창조 안에 완전한 창조질서가 있었는데 → 죄로 인해 창조가 파괴되자 → 하나님이 일반은총을 베푸시어 창조질서가 무너지지 않게 보존하시므로 → 죄가 창조질서를 파괴하지 못하고 단지 "창조방향"을 왜곡하게 만들었으며 → 인간의 마음도 왜곡된 창조방향으로 가게 되었지만 →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창조질서와 방향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기독교세계관을 심화시킨 사람은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이다. 스킬더는 카이퍼가 문화의 근거로써 제시한 일반은총론을 부정하며 인간은 처음부터 문화명령(창1:26-28)에 의해 문화적 본능을 부여받았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이 문화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카이퍼가 주장하는 문화적 낙관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문화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만물이 새롭게 변화될 것이라는 "문화적 종말론"이라고 하였다.
월터스의 논문 "창조 타락 구속(The Creation Regained)"은 위와 같은 화란의 개혁주의세계관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단지 월터스는 위와 같은 관점들을 조정하고 편집하여 그 전체적인 내용들을 종합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월터스는 먼저 도여베르트가 제시한 창조, 타락, 구속, 성령의 인도(극치)라는 세계관의 뼈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도여베르트의 창조질서 혹은 창조의 법과 스킬더가 말한 문화명령을 세계관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카이퍼가 말한 문화적 낙관론을 세계관의 목표로 제시할 뿐이다.
월터스는 많은 부분에서 도여베르트의 논지를 그대로 따르며 단지 하나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도여베르트의 "창조질서"를 "문화명령"으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월터스는 말하기를 6일 간의 창조의 정점은 문화명령에 있으며 태초에 인간은 문화명령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고 확대하는 청지기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이 문화명령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문화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셨다고 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가 문화구속을 통해 문화명령을 새롭게 수행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월터스의 주장은 성경의 핵심이 문화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보다 문화가 더욱 중요하고 성경의 궁극적인 목표도 문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월터스에게는 창조의 목표가 문화요, 그리스도의 구원도 문화의 회복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 나라도 문화가 성취된 나라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월터스는 성경을 구속사로 보는 기존의 관점에다, 문화사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추가하려 한다. 예를 들어 월터스는 창세기의 족장들의 계보를 구속사의 계보로 보기보다 문화명령의 회복을 기다리기 위한 계보 즉 문화사적 계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을 그리스도 유일론의 시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문화명령의 성취라는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터스는 결국 구원조차도 문화명령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월터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보다도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명령이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성경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이같은 논리에 의해 월터스는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명령과 주님이 주신 대명령이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개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회가 지금까지 대명령에 치중해 왔지만 앞으로는 문화명령도 병행하여 성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월터스의 논리는 오히려 문화명령과 대명령의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월터스의 말대로라면 대명령은 구원의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으로써 문화적인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 명령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다. 대명령은 문화의 부분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영혼 구원에만 국한되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대명령은 영혼의 구원과 문화의 영역을 모두 포괄하는 명령이다. 대명령은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에는 영혼의 구원과 문화의 구속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자는 필연적으로 영혼의 구원과 아울러 땅의 문화와 삶을 완성하는 자이다.
문화명령과 대명령은 서로 병행하거나 균형을 이루는 명령이 될 수 없다. 먼저 문화명령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창1:28)"는 것으로써 그 영역이 "땅"에 국한된 명령임을 알아야 한다. 문화명령은 땅의 주인인 아담에게 속한 명령으로써 그것은 성취해야 할 임무라기 보다는 땅에 속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선언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반면에 대명령의 영역은 땅과 하늘을 포함하는 것으로써 문화명령보다 상위적인 의미의 명령에 해당한다. 대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제로 하여 주어진 명령이다. 당연히 대명령은 땅의 모든 것을 완성하고 하늘의 것을 예비할 수 있게 만드는 명령이다. 그런데도 월터스가 대명령과 문화명령이 서로 조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명령의 영역을 하늘의 것으로 제한시켜 또 다른 이원론을 조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최근에 출판된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내용과 1992년에 처음 번역된 책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책에는 초판에 있던 내용들 예를 들어 창세기의 계보를 문화사의 계보로 보는 관점, 문화명령을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보는 관점, 문화명령과 대명령이 서로 일치하고 조화하는 것이라는 관점, 성경을 그리스도 유일론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 등등이 빠져 있다. 아마 재판되는 과정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편집하거나 삭제한 듯 싶다. 그렇더라도 현재의 기독교세계관이 문화명령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완성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현재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제시하는 문화관대로라면 문화완성이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셈이며 문화사역자들은 문화완성을 위해 사역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현재의 기독교세계관이 문화완성을 위한 자기 완결구조를 가짐을 뜻한다.
필자는 문화명령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우리가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 천국에 들이기 위해 문화사역을 하는가?"라는 회의를 가졌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문화명령은 대명령 안에서 폐해지고 완성되는 것이었다. 아담과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지고 완성되듯이 문화명령도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지고 완성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문화명령과 대명령을 애써 조화시키려고 하는 월터스의 논리는 대명령 안에서 문화의 부분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문경규
자료출처:
http://www.sisim.or.kr/bbs/view.asp?index=world&page=5&no=26&curRef=26&curStep=0&curLevel=0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한 마디로 말해 문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20세기초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카이퍼는 문화의 성경적 근거로써 "일반은총"을 제시하고 있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이 죄의 세력을 제어하며 인간의 문화발전을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구원을 위한 기초를 예비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문화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문화적 낙관론"을 제시하였다.
카이퍼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체계화시킨 사람은 1922년부터 헤이그에 있는 카이퍼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하였던 도여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이다. 도여베르트는 기독교세계관을 창조, 타락, 구속의 구조로 체계화 시킨 장본인이다. 도여베르트는 성경적 세계관의 핵심이 "창조질서(Creation-Order)"에 있다고 말한다. 도여베르트는 태초에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 창조 안에 완전한 창조질서가 있었는데 → 죄로 인해 창조가 파괴되자 → 하나님이 일반은총을 베푸시어 창조질서가 무너지지 않게 보존하시므로 → 죄가 창조질서를 파괴하지 못하고 단지 "창조방향"을 왜곡하게 만들었으며 → 인간의 마음도 왜곡된 창조방향으로 가게 되었지만 →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창조질서와 방향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기독교세계관을 심화시킨 사람은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이다. 스킬더는 카이퍼가 문화의 근거로써 제시한 일반은총론을 부정하며 인간은 처음부터 문화명령(창1:26-28)에 의해 문화적 본능을 부여받았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이 문화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카이퍼가 주장하는 문화적 낙관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문화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만물이 새롭게 변화될 것이라는 "문화적 종말론"이라고 하였다.
월터스의 논문 "창조 타락 구속(The Creation Regained)"은 위와 같은 화란의 개혁주의세계관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단지 월터스는 위와 같은 관점들을 조정하고 편집하여 그 전체적인 내용들을 종합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월터스는 먼저 도여베르트가 제시한 창조, 타락, 구속, 성령의 인도(극치)라는 세계관의 뼈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도여베르트의 창조질서 혹은 창조의 법과 스킬더가 말한 문화명령을 세계관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카이퍼가 말한 문화적 낙관론을 세계관의 목표로 제시할 뿐이다.
월터스는 많은 부분에서 도여베르트의 논지를 그대로 따르며 단지 하나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도여베르트의 "창조질서"를 "문화명령"으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월터스는 말하기를 6일 간의 창조의 정점은 문화명령에 있으며 태초에 인간은 문화명령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고 확대하는 청지기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이 문화명령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문화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셨다고 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가 문화구속을 통해 문화명령을 새롭게 수행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월터스의 주장은 성경의 핵심이 문화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보다 문화가 더욱 중요하고 성경의 궁극적인 목표도 문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월터스에게는 창조의 목표가 문화요, 그리스도의 구원도 문화의 회복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 나라도 문화가 성취된 나라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월터스는 성경을 구속사로 보는 기존의 관점에다, 문화사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추가하려 한다. 예를 들어 월터스는 창세기의 족장들의 계보를 구속사의 계보로 보기보다 문화명령의 회복을 기다리기 위한 계보 즉 문화사적 계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을 그리스도 유일론의 시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문화명령의 성취라는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터스는 결국 구원조차도 문화명령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월터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보다도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명령이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성경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이같은 논리에 의해 월터스는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명령과 주님이 주신 대명령이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개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회가 지금까지 대명령에 치중해 왔지만 앞으로는 문화명령도 병행하여 성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월터스의 논리는 오히려 문화명령과 대명령의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월터스의 말대로라면 대명령은 구원의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으로써 문화적인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 명령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다. 대명령은 문화의 부분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영혼 구원에만 국한되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대명령은 영혼의 구원과 문화의 영역을 모두 포괄하는 명령이다. 대명령은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에는 영혼의 구원과 문화의 구속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자는 필연적으로 영혼의 구원과 아울러 땅의 문화와 삶을 완성하는 자이다.
문화명령과 대명령은 서로 병행하거나 균형을 이루는 명령이 될 수 없다. 먼저 문화명령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창1:28)"는 것으로써 그 영역이 "땅"에 국한된 명령임을 알아야 한다. 문화명령은 땅의 주인인 아담에게 속한 명령으로써 그것은 성취해야 할 임무라기 보다는 땅에 속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선언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반면에 대명령의 영역은 땅과 하늘을 포함하는 것으로써 문화명령보다 상위적인 의미의 명령에 해당한다. 대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제로 하여 주어진 명령이다. 당연히 대명령은 땅의 모든 것을 완성하고 하늘의 것을 예비할 수 있게 만드는 명령이다. 그런데도 월터스가 대명령과 문화명령이 서로 조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명령의 영역을 하늘의 것으로 제한시켜 또 다른 이원론을 조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최근에 출판된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내용과 1992년에 처음 번역된 책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책에는 초판에 있던 내용들 예를 들어 창세기의 계보를 문화사의 계보로 보는 관점, 문화명령을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보는 관점, 문화명령과 대명령이 서로 일치하고 조화하는 것이라는 관점, 성경을 그리스도 유일론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 등등이 빠져 있다. 아마 재판되는 과정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편집하거나 삭제한 듯 싶다. 그렇더라도 현재의 기독교세계관이 문화명령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완성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현재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제시하는 문화관대로라면 문화완성이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셈이며 문화사역자들은 문화완성을 위해 사역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현재의 기독교세계관이 문화완성을 위한 자기 완결구조를 가짐을 뜻한다.
필자는 문화명령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우리가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 천국에 들이기 위해 문화사역을 하는가?"라는 회의를 가졌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문화명령은 대명령 안에서 폐해지고 완성되는 것이었다. 아담과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지고 완성되듯이 문화명령도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지고 완성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문화명령과 대명령을 애써 조화시키려고 하는 월터스의 논리는 대명령 안에서 문화의 부분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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