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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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혼란스런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을 꺼냈던 것이 지난 일주일 내내 그의 저작들만 다시 읽게 되었다. 나는 논리학이 수학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것은 수학문제를 풀 때처럼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논리적 사고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은 넓은 의미에서 칸트의 문제의식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부르조아적 타락과 과학주의의 폐해로부터 삶이란 것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것. 칸트는 그 과제를 사고능력의 검토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논리를 검토함으로써 달성하고자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엄밀한 논리적 원자론에서 사회적 맥락주의 혹은 화용론으로 나아가는 그의 사고궤적을 추적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는 조금은 허탈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 자신은 철학의 임무를 명제들의 논리적 명료화로 규정했지만, 화용론적으로 접근한다면, 결국 모든 것이 용법의 맥락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철학이란, 러셀이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처럼 < 철학은 기껏해야 사전 편찬자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는 것일 테고, 최악의 경우 가치없는 탁자 앞에서의 유희거리가 될것이다.(bertrand russell,My philosophical Development,161)>라고 해도 크게 반박하기 어려울 듯 하다. 그의 사후 영미 분석철학이 하는 일들이 고작 문법선생 같은 일에 머물거나 논리학의 미로에 빠져있는 것도 그런 문제와 크게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이나 사고가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과학주의에 비판적이었고 과학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것처럼, 나 자신도 논리학이 아니라, 그가 궁극적으로 보호하려 했던 삶과 예술에 더 큰 관심이 있다. 내가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칸트가 물자체의 세계와 현상계로 이원화 한 것처럼, 그 역시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의 세계와 말할 수 없는 가치계의 세계로 이원화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어떤 괴리가 생긴다. 마치 데카르트가 인간을 영혼과 시계처럼 작동하는 기계인 신체로 이원화시킨 것처럼, 인간은 한편으로는 과학적 대상인 사실이자 동시에 가치 - 행위들로 이루어지는, 때문에 침묵해야 하는 세계인 구체적인 삶으로 분열되어버린다. 그는 윤리학적인 명제, 미학적인 명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리학을 위해 과학에 한계를 긋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정작 윤리학이나 미학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윤리학인데도! 윤리나 예술의 언어에 관한 한, 그는 그저 사전 편찬자처럼, 이런저런 맥락에서 이런저런 윤리적 명제들이 사용된다고 하는데 그쳐야 한다는 것처럼(다시 러셀의 불평을 떠올리게 된다).언어사회학자들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논리적으로는 일관성이 있다.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침묵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침묵한 것은 아니다. <문화와 가치>라는 텍스트를 읽으면 당혹스러워진다. 그 책은 다른 저작들과는 달리 침묵의 영역에 대한 진술들로 가득차 있다. 그렇다고 그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이후에 <실천이성 비판>과 <판단력 비판>을 썼던 것처럼,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명제를 제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무수한 가치판단 명제들을 잠언이나 경구 형태로 툭툭 던져놓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 인간적으로 됩시다.(79쪽, MS 119 71:1937.10.4>
도대체 '인간적으로 된다' 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왜 인간적으로 되어야 하는가? '인간적' 이라는 형용사가 지시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물론 그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다. 이밖에도 책 속에는 위대한/ 왜소한, 고귀한/ 천박한, 아름다운/추한, 가치있는/ 무가치한, 깊은/ 표면적인, 등의 가치판단 형용사들이 남발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문화와 가치>라는 책은, 그의 후반 20년 동안에 틈틈히 기록한 사유 일기인 그 책은 사적인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삶의 방식의 변화>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윤리학적인 입장에 관한 한, 그는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의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책의 행간을 꼼꼼히 분석해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윤리학은 일종의 < 결단주의>에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설사 누군가 명제를 제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진술일 뿐이다. 가치- 행위들로 이루어지는 실제 삶에서 할 수있는 것은 그저 열정을 갖고 어떤 <믿음>에 삶을 기투하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열정적인 투쟁의 장이다.
<당신이 투쟁한다면, 당신은 투쟁하는 것이다. 당신이 희망한다면, 당신은 희망하는 것이다. 사람은 투쟁하고, 희망하며, 심지어 과학적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믿을 수 있다. (131쪽, ms 134 133:1947.4.10 )>
<요컨대, 훌륭한 가르침이 사람을 반드시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 가르침을 마치 의사의 처방처럼 따를 수 있다 -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무엇인가에 의해 사로잡히고, 방향 전환 해야 한다. - (즉, 나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한다)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면, 우리들은 그 방향 전환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지혜는 열정이 없다. 이에 반해서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믿음은 열정이다.(MS 132 167: 1946.10.11)>
이런 식으로, 삶의 문제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은 지적 허무주의자 같이 느껴진다. 그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혹을 느꼈고, 어쩌면 키에르케고르처럼, 열정적으로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많은 부분을 기독교에 관해 할애하고 있는데, 당황스럽게도 스스로 예수의 부활신앙에 매혹을 느낀다고 적고 있다. (나는 절로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에 심취한똑똑한 과학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창조과학 운운 하는...지식과 삶의 분열.)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삶이 가치 있고 좋은 삶인지 말하지 않는다. 아무런 제안이 없다. 미학과 예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던 것처럼, 두뇌의 이성과 심정의 이성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듯 하다. 삶은 믿음과 열정의 영역이니 지적으로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태도. 엄밀한 논리학자인 그는, 가치 영역에 관해서는, 역사철학은 슈펭글러의 사고로, 윤리학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사고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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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트겐슈타인을 다시 읽으며, 무엇보다도 메타 지식학의 차원에서 정신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신(종교)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메타 철학 비판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반복을 본다. 즉, 고대 그리스를 생각하면, 호메로스적인 신들의 세계에서 자연철학으로, 자연철학에서 결국 프로타고라스 같은 해체주의 철학, 즉 소피스트 철학으로 나아가면서 궁극적으로 종교와 형이상학이 해체되고, 남는 것은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명제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 라는 사회적 맥락주의로, 철학적 상대주의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근대사를 돌아보면 중세 신학에서 데카르트와 영국 경험론 이래의 비판적 반성철학이 일어나고, 그것이 니체에 의해 가치론적으로 재평가되고, 현대로 들어오면 결국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데리다류의 해체주의, 현대판 소피스트 철학으로 마감되어 버리는 것. 반성과 비판이란, 결국 과거에 순진하게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철저하게 분석하고 해부한다는 것인 바, 이러한 해부학적 열정은 슈펭글러 식으로 표현한다면, 창조적인 문화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생명이 죽어버린 문명의 시대에 조응하는 정신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이래의 현대 세계를 암흑기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슈펭글러의 목소리로 진술한 다음 문장은 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되돌려 질 수 있다;
< 문화가 없는 시대에는 힘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개별자의 힘은 대립된 힘들과 마찰 저항들에 의해서 소모된다.; 그 힘은 거쳐 지나온 길의 길이에서가 아니라, 아마도 단지 마찰 저항의 극복에서 그가 산출하는 열기 속에서나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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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삶의 방식의 변화를 원했지만, 어떤 변화가 바람직한지는 밝힌 바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고,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과제에 몰두했을 뿐이다. 어쩌면 삶이나 문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쓸데 없는 수다를 떠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직접 <실행> 할 수 있을 뿐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정당할 수도 있다. 삶이든 예술이든, 직접 온몸을 던져 실행함으로써 창조력을 보여주면 그만이지,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비평가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가 언어를 창조했듯이. 이후는 그저 수다스런 수사학에 불과한 것인지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남겨놓은 과제 - 삶의 방식의 변화라는 윤리학적인 질문 - 는 과연 어떻게 해결 가능한가? 아니면 해소되어버려야 하는가? 어떤 사유가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구원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삶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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