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제9장 산업 혁명
http://cafe.daum.net/lawmania2003/gn37/10?docid=1Ll1o|gn37|10|20100916231400&q=1760%B3%E2%2B%B3%AA%B4%C2%20%BA%CF&srchid=CCB1Ll1o|gn37|10|20100916231400
1.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
(1) 산업 혁명이란 자본의 축척으로 생산이 종래의 가내 수공업이나 매뉴팩처에 의한 소규모 생산으로부터 공장제 기계 공업에 의한 대규모 생산으로 전환되고, 그에 따라서 사회 구조에 커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2) 산업 혁명이 서유럽에서 시작된 이유는 첫째, 산업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서유럽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지역이었다. 둘째, 서유럽의 농업은 다른 지역의 농업 기술과는 달랐다. 셋째, 에스파냐, 포르투칼, 영국, 프랑스처럼 왕이 절대적인 권한으로 다스리는 경우에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토를 늘리거나 무역의 특권을 얻기 위한 경쟁이 날로 심해졌다. 넷째, 인구 증가를 꼽을 수 있다.
● 영국 산업 혁명의 과정
18세기에 영국은 프랑스와 대결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당시 프랑스는 인구도 영국보다 많았으며, 국력도 영국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기술도 발달했으며 정부의 역할도 산업 혁명을 일으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도로, 다리, 운하 등의 건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노력은 오히려 영국보다 더 컸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통적인 농업 방식을 그대로 지켜왔으며, 생산 공장들은 일반 대중을 위한 물품보다 특수한 사람들이 쓰는 사치품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했다.
프랑스가 영국의 산업 혁명보다 뒤진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프랑스 국내의 관세 제도 때문이었다. 프랑스 내에서 여러 지역끼리 세금을 내게 함으로써 상업이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역마다 화폐도 다르고 계산법도 달라 세금을 내고 상업 활동을 하는 데 불편한 점이 많았다. 둘째로, 프랑스의 소농 중심의 농업에 있었다.
이에 비하여 영국은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로서 모든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석탄과 철광 등 지하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으므로 석탄을 캐내거나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둘째, 철광을 운반하기 위해 강을 이용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셋째, 새로운 경영 방식으로 인해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나온 농민들이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넷째,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개인 재산을 보호해 주어 산업화를 돕는 데 이바지하였다.
● 활발한 기술의 발전
(1) 오랫동안 모직물을 생산해 온 영국은 면직물 생산에서도 매우 빠르게 발전을 보였다. 면직물 생산은 산업 혁명기의 첨단 산업이었다. 발전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져 1760년과 1785년 사이에 생산량이 10배로 늘어났고, 1785년과 1825년 사이에는 다시 10배로 높아지는 등 눈부신 결과를 나타내었다.
(2) 1733년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얼마 전 존케이라는 사람에 의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옷감을 짜는 데 쓰는 나는 베틀북이었다. 존 케이는 모직물 제작에 쓰였던 기계를 응용하여 집안에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덕분에 직조공의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1786년에 ‘제니 방적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실을 만드는 북 여러 개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아크라이트는 1769년 실을 만들고 감고 옷감을 짜는 기계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방적기를 만들었다.
(3) 영국의 면직물 공업이 강인한 날실의 대량 생산에 성공하고, 인도산 캘리코에 대항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을 확립한 것은 아크라이터가 발명한 수력 방적기에 의해서였다. 또한 가늘고 질긴 날실․씨실을 생산하여 인도의 고급품 모슬린에 대항할 수 있는 제품을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럼프턴이 발명한 뮬 방적기에 의해서였다.
(4)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철의 품질은 상당히 발전되어 공장 등 모든 시설 설비에 나무 대신 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쇠를 녹이는 용광로의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석탄의 소비량도 크게 늘어났다. 이 무렵 석탄은 열차와 증기선의 중요한 연료로 쓰일 뿐만 아니라 철강과 더불어 산업혁명을 부채질하는 데 큰 몫을 했다.
(5) 교통 수단의 발달은 지방과 지방 사이에 서로 다른 관습을 허물었고 새로운 사회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6) 통신 분야의 발전 또한 교통 수단에 못지 않게 발전되었다. 영국은 1840년 우편 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누구든지 1페니짜리 우표만 붙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지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이 무렵 전보는 특히 기업가들이 크게 활용하였다. 1844년 미국 볼티모어와 워싱턴 사이에 최초로 오고 간 전보는 7년 후 영국 해협에 바다 밑으로 만든 해저 전선이 설치되었다.
● 산업 사회의 영향과 변화
(1) 18세기 중엽 이래 영국의 농업은 농기구의 개량, 우량 품종의 개발 등 합리적인 경영으로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주로 곡식과 돈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채소와 우유 등 유제품들이 생산되어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이 활발하여졌다.
(2) 농업과 직물 공업은 쇠를 만드는 제철 공장이나 배가 정박하는 부두의 항만 건설, 또는 도로 건설에 비하면 그 자본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액수였다. 처음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가족끼리 또는 집안끼리 자본을 모아 가족 단위로 작은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생산 규모가 커지고 중공업이나 화학 공업, 전기 공업 등이 공업화의 핵심 부분이 되면서 큰 자본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주식회사였다.
(3) 산업의 발전은 사회 구조에도 커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농촌에 살던 많은 사람이 농사짓던 일을 그만 두고 도시의 공장을 찾아 떠나갔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많았다.
(4)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늘어나고 도시의 크기와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1800년 이전에 도시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곳은 유럽 전체에서 모두 45개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인의 도시 거주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1) 사회구성원도 전통적인 귀족과 지주, 농민의 구성이 아니라 중산 시민층과 노동 계층,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뚜렷이 구분되었다. 중산층 또는 부르주아는 평민 출신으로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들이다. 산업화와 각국의 혁명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정치 권력과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다. 노동 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에는 수공업자, 공장 노동자, 하인, 사무직 등이 모두 포함된다.
(2) 19세기 전반기까지 노동계층은 주로 전통 수공업자들이었다. 수공업자들은 건축, 인쇄, 재단, 식품, 가구, 금은 세공 등 일상에서 필요한 모든 생활 필수품을 만들었다. 그들의 기술은 오랫동안의 훈련으로 습득된 것이므로 이들은 ‘길드’를 통하여 경재 사회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3) 공장 노동자들은 수공업자와 달랐다. 이들은 농촌에서 밀려나 도시로 온 사람들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가족을 농촌에 두고 혼자 나와 일하였다. 벌이를 위해 하루에 15시간씩이나 기계처럼 일해야 가까스로 먹고 지낼 수 있었다. 공장노동자들은 점차 자신들의 인권이나 그 밖의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해 나갈 목적으로 노동자 조직을 만드는 데 눈을 뜨게 되었다. 그들은 이 조직을 통해 서로 힘을 합치며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싸움도 망설하지 않았다.
● 어린이 보호법의 제정
자유방임을 열렬하게 고집하는 자본가들은 정부의 개입이 사태의 순간적인 치유법은 마련할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경제 즉, 시장경제의 숨통을 죄어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정부나 자선기관의 구호로써 생계를 여유있게 꾸려갈 수 있다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여 생활을 하겠느냐고 이들은 반문하였다. 그러나 인도주의자들은 적어도 정치적 권리가 없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장시간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이므로 이들의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1802년과 1819년 어린이 보호법이 제정되었으나 이 법들은 감독권과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었으므로 형식만 갖추었지 실제 내용은 없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강력한 관료조직을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던 점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인 기반 위에서 문제해결을 시도한 인도주의자들은 정부간섭의 확대를 희망한 것도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어린이 노동보호법을 반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이 집안 생계유지의 적지 않은 몫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간섭이 자기들의 수입을 빼앗고 생존의 기회를 박탈하려는 야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공장주들 또한 감독법은 당치도 않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나 1842년에 이르면 어린이와 부녀자의 광산노동이 금지되고 보호법의 위반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고, 이와 같은 보호법은 광산업 이외의 다른 산업분야로도 계속 확대 적용되었다.
어린이 보호법의 다른 측면은 '의무교육제'의 도입으로 보완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의무였으므로 어린이들은 10시간 이상의 노동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 의무교육은 고용주들이 값싼 어린 임금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하게 만든 소극적인 성격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의무교육을 통하여 읽고 쓰고 셈하기의 기본적 문자해득 능력을 배웠는데 이러한 의무교육은 노동의 질을 높였고 그래서 공장의 생산성을 증대시킨 긍정정적인 면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
● 산업혁명이 남긴 것
(1) 산업혁명을 통하여 농업, 산업, 노동, 기술 등 사회 전체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 산업혁명을 통하여 노동자들에게도 종전보다 많은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주어졌다. 이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조직적인 세력화를 통하여 얻어낸 것들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여 노동자 계층이 지배권을 쥐게 된 것은 아니었다.
(3) 산업화의 물결은 또 과거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종교적 또는 혈통에 의해 묶여 있던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4)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 가거나,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건너가 생활하게도 만들었다.
2. 19세기 유럽 각국의 성장
● 대영 제국
(1)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도 전통이 일부 남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다. 유럽 전체의 나라가 산업화를 겪으면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서 일반 대중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19세기 영국은 가장 모범을 보인 앞선 국가였다. 사회의 안정과 함께 산업화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영국은 선진 국가로 성장하였다. 프랑스와의 오랜 기간 걸친 식민지 쟁탈전 그리고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혁명적 이상과의 투쟁 속에서도 영국은 착실하게 나라의 힘을 키워나갔다. 19세기 중엽 이후 영국이 산업화로 들어간지 100여년이 지난 뒤 영국은 산업화의 성과를 노동자 계급에게도 나눠 줄 수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2) 개혁의 새바람 :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영국 인구 거의 대부분은 선거 등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 하원의 대표적인 정치 단체는 휘그당과 토리당이었다. 전자는 시민의 정치 및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왕의 독재 정치를 막고 신성한 의회 제도를 지키려고 했고 국민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키는 것을 제일 목표로 내세운 정당인 반면, 후자는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인간은 신분에 따라 그 차이를 들 수 밖에 없다고 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18세기 말에는 휘그당이나 토리당 모두 강력한 급진 개혁파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산업화의 발전만을 믿거나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1819년 맨체스터 시의 근교 ‘성 피터의 들’이란 곳에서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급진 개혁파들이 모였을 때 군대는 이들에게 잔인하게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비극을 ‘피털루 학살’이라 부른다.
1830년대에서 1840년대에 걸쳐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은 영국 노동자의 참정권 확대운동으로서 자본가 계층에게만 투표권이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보통 선거권을 포함한 요구사항을 제시하여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 요구 사항의 대부분이 실현되었다.
이에 1833년 대영 제국 내에서 노예 노동이 폐지되고, 부녀자와 어린이의 노동조건이 개선되었으며, 1835년 도시의 자치권이 대폭 허용되어 도시 생활개선이 이루어졌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이후, 토리당은 보수당으로,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다시 결성되었다. 보수당의 당수 디즈레일리의 자유당의 당수 글래드스턴은 정치적 경쟁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해가며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정치문제를 잘 해결해 나갔다.
● 프랑스의 산업 혁명
(1) 루이 나폴레옹 : 프랑스 국민들의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영광을 세계역사의 대륙에 심어놓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이 군대를 일으켜 정권을 쥔 사실이 불법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정당한가를 국민에게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긴의 행동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는 확신으로, 대통령 제도를 없애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2) 나폴레옹 3세는 자유를 억업하고 독재 정치를 하신 대신, 안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고, 밖으로는 국민적 영광의 달성에 주력하였다.
1) 내정 : 군대와 경찰력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농민과 상공 계급을 보호하고, 토목 사업을 일으켜 노동자에게 일터를 마련하여 주기도 하였으나, 그의 경제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2) 외정 : 대외 발전으로 신망을 얻고자 하였다. 크림 전쟁에 개입하여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고, 사르데냐를 지원하여 이탈리아 통일을 도왔으며,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중국 문제에 개입하였고, 인도차이나에 출병하여 베트남과 코친차이나를 프랑스령으로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원정에 실패하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퇴위하였으며, 제2 제정도 붕괴하였다(1870).
(3) 제3공화정의 성립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적군에 포로가 되어 항복하자, 파리 시민들은 제정 폐지와 공화제 수립을 선언하고, 국민 방위군을 조직하여 프로이센 군과 맞섰으나 폐배하였고(1871.1), 온건 공화파인 티에르를 수반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프로이센과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파리의 민중은 굴욕적인 강화 조약에 반대하고 블랑키 등 사회주의자의 지도로 폭동을 일으켜, 파리 코뭔을 결성하고 정부에 반항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원조를 받은 임시 정부군에 의하여 두 달만에 붕괴하였다. 파리 코뭔이 붕괴한 후, 프랑스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이 계속되어 정국이 불안정하였으나, 1875년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고 제3공화정을 출범시켰다.
● 독일 제국
(1) 독일 제국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건설된 제국이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이 받들어 섬기는 종주국이며, 프로이센의 국왕이 황제가 되는 독일제국을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절대적으로 따랐다. ‘제2제국’ 또는 ‘비스마르크 제국’으로 불리는 1871년 독일 제국의 헌법은 자유주의적 성격을 갖지 못하였다. 독일 제국의 또 다른 특성의 하나는 공무원 제도와 군대의 조직이었다. 즉 공무원들은 근본적으로 성실과 정직한 자세를 지닌 훌륭한 직업인들이었으나 관리로서 국민들 위에서 다스리려는 경향이 있었다. 군대의 경우는 관리들보다 더 비민주적인 데가 많았다.
(2) 1873년의 5월의 법에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항목들이 있었다. 교회는 국가로부터 감독을 받으며, 모든 성직자를 국가가 감독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카톨릭 교도들의 결혼 문제도 국가에서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다.
(3) 라살의 독일 노동자 연맹이라는 조직은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다향력을후 1875년 라살을 지도자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사회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널리 확산되고 큰 힘을 갖게 되자 비스마르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을 위해 두 가지 새로운 정책을 쓰게 되었다. 하나는 노동자들이 위험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서는 사회주의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들은 검옥에 가두거나 멀리 해외로 쫓아내는 등 강력한 정책을 썼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법적인 혜택을 마련하였다. 예컨대, 일터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일자리를 구해 주고, 늙은 후의 생활보장,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등 갖가지 혜택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5) 경제 정책과 식민정책
1) 비스마르크는 1873년 이후 세계적으로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자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호 관세 정책을 실시하였다. 보호관세 정책으로 즉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땅을 많이 가진 대지주의 중공업 기업가였다. 또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을 세운 이후, 식민지가 국가 경제적인 입장으로 따져 볼 때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보았다. 1880년대에 이르러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서 국가 경제는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해양에서의 지배권을 누가 갖느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비록 당장 경제적 이익은 없지만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 지역에서 식민지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2) 젊은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독일 제국의 대외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882년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삼국동맹을 맺었다. 1894년부터 1907년에 걸쳐 영국·러시아·프랑스는 삼국 협상으로 협력하였다.
●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통일을 하게 되자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큰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종교 문제는 이탈리아를 발전시키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카톨릭을 믿는 이탈리아에서 교육, 결혼, 장례 등 교회와 관계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은 여전히 교회가 맡았다. 정치 분야에서도 10년만에 선거법을 고쳐 참정권을 크게 늘렸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되어 있고, 국왕이 임명하는 관리들이 정부를 구성하였다.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생각을 가진 지식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치적 현실에 분노하였다. 정부는 이와 같은 국내의 경제, 정치, 사회 분야의 어지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외 식민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 러시아
(1) 니콜라이 1세는 1825년 즉위하던 해에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겪고 보수적 반동 정치를 강화하였다. 그 후 국내의 불만을 돌리고자 남진을 획책, 투르크 영내의 크리스트교도 보호를 구실로 크림 전쟁(1854-56)을 일으켰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2) 크림 전쟁에서의 참폐로 러시아의 낙후성을 깨달은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 해방을 단행하여, 농민에게 자유로운 신분과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고, 1864년에는 지방 의회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은 지주 본위로서, 고액의 보상금을 내야 하는 농민들에게 실질적 혜택이 별로 없었다.
(3) 당시의 농민·노동자는 지식 수준이 낮아서, 사회 개혁의 뜻을 가진 지식인은 농민의 계몽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브 나로드‘라는 표어를 내걸고 농촌으로 들어갔다. 이들을 나로드니키라고 하는데, 그들의 운동은 농민의 지식 수준이 낮아 실패하였다. 지식인들은 개혁 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농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자, 절망한 나머지 허무주의·무정부주의로 흘러 폭력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도 그들에게 암살되었다(1881).
(4) 크림 전쟁 후 발칸 방면의 슬라브 계 민족들은 범 슬라브주의로 단결하여 투르크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였으며, 러시아는 이를 이용하여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투르크가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 인을 학살하자,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는 투르크에 승리한 후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어, 투르크로 하여금 슬라브 계인 세르비아·몬테니그로·루마니아의 독립과 불가리아의 자치를 인정케 하였다, 러시아의 남하 계획은 일단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베를린 회의로 좌절되고 말았다.
● 19세기 사회와 문화
19세기는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이 발달해, 각종 기술과 사고에 혁신이 일어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학과 예술이 발달하였다. 19세기 유럽은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증기선, 기차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전화와 전신의 발달로 다른 세계와의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신문, 극장, 박물관 등의 시설이 늘어나 시민들의 문화 수준이 높아졌다. 19세기의 산업 혁명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초한 것이도 한다. 페러데이는 발전기의 원리를 발명하고, 뢴트겐은 X선, 퀴리 부부는 라듐을 발견해 실생활에 응용하기 시작하였다. 생물학에서는 멘델이 유전법칙을 밝혔으며,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은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회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중요시하였다. 낭만주의는 규격과 형식에 치우친 고전주의와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계몽 사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문예 사조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합해져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을 지녔다. 철학에서는 피히테와 헤겔, 문학에서는 바이런과 위고, 미술에서는 들라크루아, 음악에서는 슈베르트와 쇼팽이 유명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과학의 발달에 영향을 받아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나타났다. 또한 미술에서는 자연주의에 이어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한 인상파가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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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
(1) 산업 혁명이란 자본의 축척으로 생산이 종래의 가내 수공업이나 매뉴팩처에 의한 소규모 생산으로부터 공장제 기계 공업에 의한 대규모 생산으로 전환되고, 그에 따라서 사회 구조에 커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2) 산업 혁명이 서유럽에서 시작된 이유는 첫째, 산업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서유럽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지역이었다. 둘째, 서유럽의 농업은 다른 지역의 농업 기술과는 달랐다. 셋째, 에스파냐, 포르투칼, 영국, 프랑스처럼 왕이 절대적인 권한으로 다스리는 경우에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토를 늘리거나 무역의 특권을 얻기 위한 경쟁이 날로 심해졌다. 넷째, 인구 증가를 꼽을 수 있다.
● 영국 산업 혁명의 과정
18세기에 영국은 프랑스와 대결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당시 프랑스는 인구도 영국보다 많았으며, 국력도 영국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기술도 발달했으며 정부의 역할도 산업 혁명을 일으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도로, 다리, 운하 등의 건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노력은 오히려 영국보다 더 컸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통적인 농업 방식을 그대로 지켜왔으며, 생산 공장들은 일반 대중을 위한 물품보다 특수한 사람들이 쓰는 사치품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했다.
프랑스가 영국의 산업 혁명보다 뒤진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프랑스 국내의 관세 제도 때문이었다. 프랑스 내에서 여러 지역끼리 세금을 내게 함으로써 상업이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역마다 화폐도 다르고 계산법도 달라 세금을 내고 상업 활동을 하는 데 불편한 점이 많았다. 둘째로, 프랑스의 소농 중심의 농업에 있었다.
이에 비하여 영국은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로서 모든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석탄과 철광 등 지하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으므로 석탄을 캐내거나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둘째, 철광을 운반하기 위해 강을 이용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셋째, 새로운 경영 방식으로 인해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나온 농민들이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넷째,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개인 재산을 보호해 주어 산업화를 돕는 데 이바지하였다.
● 활발한 기술의 발전
(1) 오랫동안 모직물을 생산해 온 영국은 면직물 생산에서도 매우 빠르게 발전을 보였다. 면직물 생산은 산업 혁명기의 첨단 산업이었다. 발전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져 1760년과 1785년 사이에 생산량이 10배로 늘어났고, 1785년과 1825년 사이에는 다시 10배로 높아지는 등 눈부신 결과를 나타내었다.
(2) 1733년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얼마 전 존케이라는 사람에 의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옷감을 짜는 데 쓰는 나는 베틀북이었다. 존 케이는 모직물 제작에 쓰였던 기계를 응용하여 집안에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덕분에 직조공의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1786년에 ‘제니 방적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실을 만드는 북 여러 개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아크라이트는 1769년 실을 만들고 감고 옷감을 짜는 기계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방적기를 만들었다.
(3) 영국의 면직물 공업이 강인한 날실의 대량 생산에 성공하고, 인도산 캘리코에 대항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을 확립한 것은 아크라이터가 발명한 수력 방적기에 의해서였다. 또한 가늘고 질긴 날실․씨실을 생산하여 인도의 고급품 모슬린에 대항할 수 있는 제품을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럼프턴이 발명한 뮬 방적기에 의해서였다.
(4)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철의 품질은 상당히 발전되어 공장 등 모든 시설 설비에 나무 대신 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쇠를 녹이는 용광로의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석탄의 소비량도 크게 늘어났다. 이 무렵 석탄은 열차와 증기선의 중요한 연료로 쓰일 뿐만 아니라 철강과 더불어 산업혁명을 부채질하는 데 큰 몫을 했다.
(5) 교통 수단의 발달은 지방과 지방 사이에 서로 다른 관습을 허물었고 새로운 사회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6) 통신 분야의 발전 또한 교통 수단에 못지 않게 발전되었다. 영국은 1840년 우편 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누구든지 1페니짜리 우표만 붙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지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이 무렵 전보는 특히 기업가들이 크게 활용하였다. 1844년 미국 볼티모어와 워싱턴 사이에 최초로 오고 간 전보는 7년 후 영국 해협에 바다 밑으로 만든 해저 전선이 설치되었다.
● 산업 사회의 영향과 변화
(1) 18세기 중엽 이래 영국의 농업은 농기구의 개량, 우량 품종의 개발 등 합리적인 경영으로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주로 곡식과 돈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채소와 우유 등 유제품들이 생산되어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이 활발하여졌다.
(2) 농업과 직물 공업은 쇠를 만드는 제철 공장이나 배가 정박하는 부두의 항만 건설, 또는 도로 건설에 비하면 그 자본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액수였다. 처음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가족끼리 또는 집안끼리 자본을 모아 가족 단위로 작은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생산 규모가 커지고 중공업이나 화학 공업, 전기 공업 등이 공업화의 핵심 부분이 되면서 큰 자본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주식회사였다.
(3) 산업의 발전은 사회 구조에도 커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농촌에 살던 많은 사람이 농사짓던 일을 그만 두고 도시의 공장을 찾아 떠나갔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많았다.
(4)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늘어나고 도시의 크기와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1800년 이전에 도시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곳은 유럽 전체에서 모두 45개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인의 도시 거주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1) 사회구성원도 전통적인 귀족과 지주, 농민의 구성이 아니라 중산 시민층과 노동 계층,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뚜렷이 구분되었다. 중산층 또는 부르주아는 평민 출신으로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들이다. 산업화와 각국의 혁명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정치 권력과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다. 노동 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에는 수공업자, 공장 노동자, 하인, 사무직 등이 모두 포함된다.
(2) 19세기 전반기까지 노동계층은 주로 전통 수공업자들이었다. 수공업자들은 건축, 인쇄, 재단, 식품, 가구, 금은 세공 등 일상에서 필요한 모든 생활 필수품을 만들었다. 그들의 기술은 오랫동안의 훈련으로 습득된 것이므로 이들은 ‘길드’를 통하여 경재 사회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3) 공장 노동자들은 수공업자와 달랐다. 이들은 농촌에서 밀려나 도시로 온 사람들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가족을 농촌에 두고 혼자 나와 일하였다. 벌이를 위해 하루에 15시간씩이나 기계처럼 일해야 가까스로 먹고 지낼 수 있었다. 공장노동자들은 점차 자신들의 인권이나 그 밖의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해 나갈 목적으로 노동자 조직을 만드는 데 눈을 뜨게 되었다. 그들은 이 조직을 통해 서로 힘을 합치며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싸움도 망설하지 않았다.
● 어린이 보호법의 제정
자유방임을 열렬하게 고집하는 자본가들은 정부의 개입이 사태의 순간적인 치유법은 마련할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경제 즉, 시장경제의 숨통을 죄어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정부나 자선기관의 구호로써 생계를 여유있게 꾸려갈 수 있다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여 생활을 하겠느냐고 이들은 반문하였다. 그러나 인도주의자들은 적어도 정치적 권리가 없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장시간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이므로 이들의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1802년과 1819년 어린이 보호법이 제정되었으나 이 법들은 감독권과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었으므로 형식만 갖추었지 실제 내용은 없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강력한 관료조직을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던 점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인 기반 위에서 문제해결을 시도한 인도주의자들은 정부간섭의 확대를 희망한 것도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어린이 노동보호법을 반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이 집안 생계유지의 적지 않은 몫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간섭이 자기들의 수입을 빼앗고 생존의 기회를 박탈하려는 야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공장주들 또한 감독법은 당치도 않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나 1842년에 이르면 어린이와 부녀자의 광산노동이 금지되고 보호법의 위반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고, 이와 같은 보호법은 광산업 이외의 다른 산업분야로도 계속 확대 적용되었다.
어린이 보호법의 다른 측면은 '의무교육제'의 도입으로 보완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의무였으므로 어린이들은 10시간 이상의 노동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 의무교육은 고용주들이 값싼 어린 임금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하게 만든 소극적인 성격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의무교육을 통하여 읽고 쓰고 셈하기의 기본적 문자해득 능력을 배웠는데 이러한 의무교육은 노동의 질을 높였고 그래서 공장의 생산성을 증대시킨 긍정정적인 면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
● 산업혁명이 남긴 것
(1) 산업혁명을 통하여 농업, 산업, 노동, 기술 등 사회 전체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 산업혁명을 통하여 노동자들에게도 종전보다 많은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주어졌다. 이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조직적인 세력화를 통하여 얻어낸 것들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여 노동자 계층이 지배권을 쥐게 된 것은 아니었다.
(3) 산업화의 물결은 또 과거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종교적 또는 혈통에 의해 묶여 있던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4)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 가거나,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건너가 생활하게도 만들었다.
2. 19세기 유럽 각국의 성장
● 대영 제국
(1)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도 전통이 일부 남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다. 유럽 전체의 나라가 산업화를 겪으면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서 일반 대중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19세기 영국은 가장 모범을 보인 앞선 국가였다. 사회의 안정과 함께 산업화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영국은 선진 국가로 성장하였다. 프랑스와의 오랜 기간 걸친 식민지 쟁탈전 그리고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혁명적 이상과의 투쟁 속에서도 영국은 착실하게 나라의 힘을 키워나갔다. 19세기 중엽 이후 영국이 산업화로 들어간지 100여년이 지난 뒤 영국은 산업화의 성과를 노동자 계급에게도 나눠 줄 수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2) 개혁의 새바람 :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영국 인구 거의 대부분은 선거 등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 하원의 대표적인 정치 단체는 휘그당과 토리당이었다. 전자는 시민의 정치 및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왕의 독재 정치를 막고 신성한 의회 제도를 지키려고 했고 국민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키는 것을 제일 목표로 내세운 정당인 반면, 후자는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인간은 신분에 따라 그 차이를 들 수 밖에 없다고 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18세기 말에는 휘그당이나 토리당 모두 강력한 급진 개혁파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산업화의 발전만을 믿거나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1819년 맨체스터 시의 근교 ‘성 피터의 들’이란 곳에서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급진 개혁파들이 모였을 때 군대는 이들에게 잔인하게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비극을 ‘피털루 학살’이라 부른다.
1830년대에서 1840년대에 걸쳐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은 영국 노동자의 참정권 확대운동으로서 자본가 계층에게만 투표권이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보통 선거권을 포함한 요구사항을 제시하여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 요구 사항의 대부분이 실현되었다.
이에 1833년 대영 제국 내에서 노예 노동이 폐지되고, 부녀자와 어린이의 노동조건이 개선되었으며, 1835년 도시의 자치권이 대폭 허용되어 도시 생활개선이 이루어졌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이후, 토리당은 보수당으로,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다시 결성되었다. 보수당의 당수 디즈레일리의 자유당의 당수 글래드스턴은 정치적 경쟁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해가며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정치문제를 잘 해결해 나갔다.
● 프랑스의 산업 혁명
(1) 루이 나폴레옹 : 프랑스 국민들의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영광을 세계역사의 대륙에 심어놓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이 군대를 일으켜 정권을 쥔 사실이 불법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정당한가를 국민에게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긴의 행동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는 확신으로, 대통령 제도를 없애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2) 나폴레옹 3세는 자유를 억업하고 독재 정치를 하신 대신, 안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고, 밖으로는 국민적 영광의 달성에 주력하였다.
1) 내정 : 군대와 경찰력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농민과 상공 계급을 보호하고, 토목 사업을 일으켜 노동자에게 일터를 마련하여 주기도 하였으나, 그의 경제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2) 외정 : 대외 발전으로 신망을 얻고자 하였다. 크림 전쟁에 개입하여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고, 사르데냐를 지원하여 이탈리아 통일을 도왔으며,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중국 문제에 개입하였고, 인도차이나에 출병하여 베트남과 코친차이나를 프랑스령으로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원정에 실패하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퇴위하였으며, 제2 제정도 붕괴하였다(1870).
(3) 제3공화정의 성립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적군에 포로가 되어 항복하자, 파리 시민들은 제정 폐지와 공화제 수립을 선언하고, 국민 방위군을 조직하여 프로이센 군과 맞섰으나 폐배하였고(1871.1), 온건 공화파인 티에르를 수반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프로이센과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파리의 민중은 굴욕적인 강화 조약에 반대하고 블랑키 등 사회주의자의 지도로 폭동을 일으켜, 파리 코뭔을 결성하고 정부에 반항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원조를 받은 임시 정부군에 의하여 두 달만에 붕괴하였다. 파리 코뭔이 붕괴한 후, 프랑스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이 계속되어 정국이 불안정하였으나, 1875년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고 제3공화정을 출범시켰다.
● 독일 제국
(1) 독일 제국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건설된 제국이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이 받들어 섬기는 종주국이며, 프로이센의 국왕이 황제가 되는 독일제국을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절대적으로 따랐다. ‘제2제국’ 또는 ‘비스마르크 제국’으로 불리는 1871년 독일 제국의 헌법은 자유주의적 성격을 갖지 못하였다. 독일 제국의 또 다른 특성의 하나는 공무원 제도와 군대의 조직이었다. 즉 공무원들은 근본적으로 성실과 정직한 자세를 지닌 훌륭한 직업인들이었으나 관리로서 국민들 위에서 다스리려는 경향이 있었다. 군대의 경우는 관리들보다 더 비민주적인 데가 많았다.
(2) 1873년의 5월의 법에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항목들이 있었다. 교회는 국가로부터 감독을 받으며, 모든 성직자를 국가가 감독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카톨릭 교도들의 결혼 문제도 국가에서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다.
(3) 라살의 독일 노동자 연맹이라는 조직은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다향력을후 1875년 라살을 지도자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사회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널리 확산되고 큰 힘을 갖게 되자 비스마르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을 위해 두 가지 새로운 정책을 쓰게 되었다. 하나는 노동자들이 위험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서는 사회주의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들은 검옥에 가두거나 멀리 해외로 쫓아내는 등 강력한 정책을 썼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법적인 혜택을 마련하였다. 예컨대, 일터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일자리를 구해 주고, 늙은 후의 생활보장,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등 갖가지 혜택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5) 경제 정책과 식민정책
1) 비스마르크는 1873년 이후 세계적으로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자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호 관세 정책을 실시하였다. 보호관세 정책으로 즉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땅을 많이 가진 대지주의 중공업 기업가였다. 또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을 세운 이후, 식민지가 국가 경제적인 입장으로 따져 볼 때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보았다. 1880년대에 이르러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서 국가 경제는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해양에서의 지배권을 누가 갖느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비록 당장 경제적 이익은 없지만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 지역에서 식민지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2) 젊은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독일 제국의 대외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882년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삼국동맹을 맺었다. 1894년부터 1907년에 걸쳐 영국·러시아·프랑스는 삼국 협상으로 협력하였다.
●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통일을 하게 되자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큰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종교 문제는 이탈리아를 발전시키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카톨릭을 믿는 이탈리아에서 교육, 결혼, 장례 등 교회와 관계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은 여전히 교회가 맡았다. 정치 분야에서도 10년만에 선거법을 고쳐 참정권을 크게 늘렸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되어 있고, 국왕이 임명하는 관리들이 정부를 구성하였다.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생각을 가진 지식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치적 현실에 분노하였다. 정부는 이와 같은 국내의 경제, 정치, 사회 분야의 어지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외 식민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 러시아
(1) 니콜라이 1세는 1825년 즉위하던 해에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겪고 보수적 반동 정치를 강화하였다. 그 후 국내의 불만을 돌리고자 남진을 획책, 투르크 영내의 크리스트교도 보호를 구실로 크림 전쟁(1854-56)을 일으켰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2) 크림 전쟁에서의 참폐로 러시아의 낙후성을 깨달은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 해방을 단행하여, 농민에게 자유로운 신분과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고, 1864년에는 지방 의회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은 지주 본위로서, 고액의 보상금을 내야 하는 농민들에게 실질적 혜택이 별로 없었다.
(3) 당시의 농민·노동자는 지식 수준이 낮아서, 사회 개혁의 뜻을 가진 지식인은 농민의 계몽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브 나로드‘라는 표어를 내걸고 농촌으로 들어갔다. 이들을 나로드니키라고 하는데, 그들의 운동은 농민의 지식 수준이 낮아 실패하였다. 지식인들은 개혁 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농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자, 절망한 나머지 허무주의·무정부주의로 흘러 폭력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도 그들에게 암살되었다(1881).
(4) 크림 전쟁 후 발칸 방면의 슬라브 계 민족들은 범 슬라브주의로 단결하여 투르크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였으며, 러시아는 이를 이용하여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투르크가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 인을 학살하자,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는 투르크에 승리한 후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어, 투르크로 하여금 슬라브 계인 세르비아·몬테니그로·루마니아의 독립과 불가리아의 자치를 인정케 하였다, 러시아의 남하 계획은 일단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베를린 회의로 좌절되고 말았다.
● 19세기 사회와 문화
19세기는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이 발달해, 각종 기술과 사고에 혁신이 일어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학과 예술이 발달하였다. 19세기 유럽은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증기선, 기차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전화와 전신의 발달로 다른 세계와의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신문, 극장, 박물관 등의 시설이 늘어나 시민들의 문화 수준이 높아졌다. 19세기의 산업 혁명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초한 것이도 한다. 페러데이는 발전기의 원리를 발명하고, 뢴트겐은 X선, 퀴리 부부는 라듐을 발견해 실생활에 응용하기 시작하였다. 생물학에서는 멘델이 유전법칙을 밝혔으며,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은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회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중요시하였다. 낭만주의는 규격과 형식에 치우친 고전주의와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계몽 사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문예 사조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합해져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을 지녔다. 철학에서는 피히테와 헤겔, 문학에서는 바이런과 위고, 미술에서는 들라크루아, 음악에서는 슈베르트와 쇼팽이 유명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과학의 발달에 영향을 받아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나타났다. 또한 미술에서는 자연주의에 이어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한 인상파가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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